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라틴어: Lucius Licinius Crass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40년 ~ 기원전 91년 9월 19일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조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버지) 무키아(아내) 리키니아 프리마(장녀) 리키니아 세쿤다(차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스키피오(양자)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95년 |
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동기 |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후임 |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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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함께 당대 최고의 로마 웅변가로 손꼽힌 인물로, 탁월한 웅변술과 법학 관련 지식을 발판삼아 정계에서 맹활약했다.2. 생애
로마 최고의 노빌레스 가문으로 손꼽히는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의 일원이다. 리키니우스 일족은 최초로 호민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364년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집정관을 역임한 이래 고위 행정직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조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6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이름만 전해질 뿐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97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그의 사촌이었다.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가 집정관이던 해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그는 기원전 140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그는 로마 최초의 수사학자로 일컬어지는 루키우스 카일리우스 안티파테르를 스승으로 삼았고, 그리스로 유학가서 그리스어를 익혀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변론술을 익혔으며, 퀸투스 엔니우스(Quintus Ennius)의 시와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연설문을 암송하면서 자신만의 웅변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또한 로마법을 적극적으로 연구해서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을 습득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큰 결실을 맺었고,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함께 당대 최고의 로마 연설가 2인 중 한 명으로 간주되었다. 키케로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법학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고, 제스처 등 비언어적 수단을 활용해 대중을 설득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반면에, 크라수스는 법률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었고 언어가 매우 정확하고 우아했으며, 논리는 언제나 명쾌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그가 민법, 정의, 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풍부한 예시를 선보이곤 했다면서, 자신은 크라수스가 안토니우스보다 낫다고 본다고 밝혔다. 키케로는 저서 <브루투스>에서 크라수스가 연설문을 너무 드물게 출판해 후대에 거의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만약 그가 생전에 지은 연설문을 좀더 많이 출간했다면 후대 웅변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119년, 크라수스는 지난해 집정관을 역임했던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를 고발했다. 그는 카르보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암살했다는 오래된 소문을 들춰냈고, 인기있는 호민관들이 연임하는 것을 합법화하려 했던 시도를 비난했다. 여기에 처음에는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지지하다가 나중에는 루키우스 오피미우스 쪽으로 전향해 그라쿠스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추악한 배신 행위라고 규탄했다. 카르보는 유죄 판결을 모면할 길이 없게 되자 자살했고, 크라수스는 전임 집정관을 날려버릴 정도로 탁월한 웅변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훗날 자신이 카르보를 공격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그가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적들에게 시달렸는데, 그중 하나는 카르보의 아들인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아르비나였다.
기원전 118년, 크라수스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에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를 따로 떼내어 조직하는 것을 옹호했다. 이 속주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고대 카르타고를 재건하여 로마 시민들을 정착시키려 했던 계획을 대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원로원은 이에 반대했다. 크라수스는 원로원에 출석해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를 신설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명쾌한 연설을 했고, 의원들은 이에 감명을 받고 속주 신설을 승인했다. 키케로는 이 연설이 "그의 나이대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성숙한 것이었다"고 칭찬했다. 기원전 114년 법정에서 베스타 여사제로서 남자와 성관계를 맺지 말아야 했는데 이를 어긴 혐의로 고발당한 리키니아를 변호했지만, 결국 그녀가 사형을 선고받는 것을 막지 못했다.
기원전 109년경 친구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함께 재무관을 맡아 아시아 속주에서 임무를 수행했고, 임기 만료 후 동방에 머물면서 여러 도시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기원전 107년 호민관을 역임했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공보에서 그가 호민관을 이 시기에 역임했다는 구절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가 호민관을 맡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106년,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법원이 에퀴테스가 아닌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법을 제시했다. 이 법안은 에퀴테스와 평민들에게 극도로 인기가 없었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해 법안이 통과하는 데 일조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기원전 111년 호민관을 역임하면서 수년간 원로원과 갈등을 벌였던 가이우스 멤미우스를 공격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멤미우스가 여자 친구 문제로 타르키나에서 라구스라는 남자와 싸우다가 팔꿈치를 물렸다"는 크라수스의 연설을 인용했다. 또한 크라수스는 민회가 개최되기 전 연설에서 "멤미우스는 자신에게 너무 위대해서 광장으로 내려가 머리를 숙여 파비우스 다리 아래를 지나간다"고 조롱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크라수스는 기원전 119년 카르보에게 그라쿠스를 배신한 자라고 몰아붙이며 '민중파'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이 무렵에는 옵티마테스 쪽으로 기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03년, 크라수스는 조영관으로서 친구 스카이볼라와 함께 대규모 서커스를 조직했다. 이때 로마 민중은 처음으로 사자를 목격했다고 한다. 기원전 100년에는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들을 척살하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95년, 크라수스는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스스로 로마 시민이라고 자처하며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이탈리아인에 대해 조사를 엄격하게 실시해서 시민권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을 도시에서 추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키케로는 크라수스가 가짜 시민이 민회에 참여해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다고 보고 이러한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밝혔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크라수스와 동료 집정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추종하는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려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파벌의 지시를 수행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한편, 그는 재무관을 맡았을 때 폭력 행위를 일삼아 "로마인의 위대함을 모욕"한 혐의로 고발당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를 변호했다. 이에 맞서 고발측 변호를 맡은 이는 아스콜리 시의 웅변가 티투스 베투키우스 바루스로, 키케로는 그를 "로마 밖에서 살았던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웅변가"라고 묘사했다. 로마 최고의 웅변가와 이탈리아 최고의 웅변가의 대결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다만 키케로는 크라수스가 이 재판에서 한 연설은 "칭찬할 만한 변호 연설이라 하기엔 너무 길고, 일반 사법문서라 하기에는 짧다"고 비평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후, 크라수스는 갈리아 총독[1]에 부임했다. 그는 임지에서 강도떼를 물리친 뒤 원로원으로부터 예외적으로 개선식을 거행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친구이자 집정관을 함께 맡았던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가 "이런 예외를 허용한다면 장차 국가의 안위에 화근이 될 지도 모른다"며 반대하자, 원로원은 결정을 철회했다. 기원전 92년 스카이볼라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인 푸블리우스 루타티우스 루푸스가 속주민들을 상대로 착취를 일삼았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루타티우스에게 변호를 맡겠다고 제안했지만, 투타티우스는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막대한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기원전 92년, 크라수스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은 라틴어로 웅변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은 수에토니우스의 저서 <문법과 수사학>에 일부 보존되었다.
'라틴 수사학'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과목을 시작한 사람들이 세운 학교에 젊은이들이 가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우리 조상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어떤 학교에 갈 것인지를 정했다. 조상의 관습과 성질에 반하여 만들어진 혁신은 잘못되고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학교를 유지하는 사람들과 학교를 다니는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것이 우리에게 반갑지 않다는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크라수스와 아헤노바르부스는 젊은이들이 라틴 학교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으며 그곳에서 받는 교육은 피상적이라며 금지령을 정당화했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정치적 이유가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당대 최고의 거물이었지만 기원전 90년대에는 몰락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아마도 라틴 교육 시스템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고, 크라수스 등은 제2의 마리우스가 등장하는 것을 막으려면 아예 라틴 교육 시스템을 봉쇄해야 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조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처음에는 한뜻으로 행동했던 두 감찰관은 곧 서로간의 성격 차이로 인해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아헤노바르부스는 우울하고 엄격한 성격인데 반해, 크라수스는 세련되고 다소 경박하며 남을 조롱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크라수스가 자기 집을 호화롭게 장식하면서 6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쏟아붓자, 아헤노바르부스는 그를 나약함과 낭비의 상징이라고 비난했다. 크라수스는 이에 대해 "그의 혀는 철로 만들어졌고, 심장이 납으로 만들어졌으니, 수염이 구리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놀랄 것이 없다"고 조롱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아헤노바르부스가 다시 "크라수스가 얼마 전에 죽은 곰치를 위해 애도하고 장례를 치렀다"고 주장하자, 크라수스는 "그는 세 아내를 묻고도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으니 체력이 정말로 없는 모양이다"라고 대꾸했다. 키케로는 포로 로마노에서 행해진 어떤 연설도 이 정도로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 평했다.
기원전 91년 호민관에 선출된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기사계급의 배심원 장악으로 벌어진 원로원 위신 하락 해결과 기사계급 견제 및 일반서민 구제 법안을 잇따라 발표했다. 여기에는 원로원이 위원회에 속해 주도권을 쥔, 농지법 개혁도 있었다. 당시 프린켑스 세나투스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친형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신참자이나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키케로 등이 드루수스를 지원했는데, 크라수스 역시 드루수스의 편에 섰다. 그 덕분에 드루수스가 입안한 법안들은 무난하게 통과되었다.
그러나 드루수스가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배하는 법안을 제시하자,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법무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드루수스의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드루수스의 개혁은 지난날 로마를 혼란에 빠뜨렸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것과 유사하다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심각한 분쟁이 벌어지던 중, 필리푸스는 원로원이 자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자 격분해 이렇게 소리쳤다.
"지금의 원로원으로는 공화국을 다스릴 수 없소! 보다 합리적인 원로원을 찾아야 하오!"
다음날, 드루수스는 자신을 비호해준 원로원 실권자들의 지원 아래 원로원을 소집해 필리푸스의 발언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필리푸스가 원로원의 권위에 도전하고, 공화정 체제에 의문을 표한 것은 현직 집정관으로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라수스는 드루수스의 주장에 동의하며, "이미 공화국에 많은 해를 끼친 사람이 원로원의 권한을 박탈하려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 말을 들은 필리푸스는 자제력을 잃고, 발언권을 먼저 요청하지 않은 채 크라수스에게 회의에 결석한 원로원 의원이 내곤 했던 보석금을 내라고 위협했다. 이에 크라수스는 "당신이 나를 원로원 의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당신을 왜 집정관으로 대해야 하오?"라고 대꾸한 뒤, 다음과 같이 연설하면서, 필리푸스를 탄핵했다.
"당신은 내 모든 재산의 권리를 담보 재산으로 취하고 로마 시민들 앞에서 그것을 내놓게 해서 나를 놀라게 할 생각이시오? 크라수스를 막고 싶다면 잘라야 할 것은 내 재산이 아니오. 내 혀를 잘라야 할 것이오! 그러나 그것이 잘라지더라도 내 숨결은 내 자유를 찬양하고 당신의 자주색 의복을 반박할 것이오!"
크라수스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원로원은 "로마인은 원로원이 언제나 변함없이 공화국의 안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라는 결의안을 반포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크라수스는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더니 고열로 쓰러졌다. 그로부터 6일 후인 기원전 91년 9월 19일, 그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얼마 후 드루수스는 암살당했고, 그가 제시했던 법안들은 필리푸스 등의 압력으로 폐기되었다. 이에 이탈리아인들이 대거 봉기하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친구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사촌이자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의 딸인 무키아와 결혼해 두 딸 리키니아 프리마와 리키니아 세쿤다를 낳았다. 장녀 리키니아 프리마는 기원전 93년 법무관을 역임하여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의 아내가 되었고, 차녀 리키니아 세쿤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들인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는 생전에 장녀 리키니아 프리다가 낳은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집안에 입양된 루키우스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스키피오'로 개명되었다. 이 인물은 키케로의 저서 <브루투스>에서 매우 재능있는 사람이었다고 언급되나 정작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거나 재능이 뛰어났음에도 정치에 연을 두지 않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1]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인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인지는 명확히 명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