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라틴어: Quintus Servilius Caepio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9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조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아버지) 세르빌리아(누이) 리비아(아내) 세르빌리아(장녀) 소 세르빌리아(차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아들) |
참전 | 동맹시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법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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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법무관. 대표적인 강경 옵티마테스파 인사로,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빵 가격 인하 정책과 농지 개혁에 반대했고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배하는 정책에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동맹시 전쟁이 발발한 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전사했다.2. 생애
알바 롱가에서 유래한 여섯 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인 세르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기원전 253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집정관을 역임한 이래 카이피오 지파에서 많은 집정관들을 배출했다. 조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기원전 140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루시타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반면에 아버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기원전 106년 집정관을 맡아 킴브리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극을 초래했다. 누이 세르빌리아는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아내가 되었다.기원전 103년 아버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참패를 초래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정치 경력을 시작할 자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00년 재무관을 맡고 있던 카이피오는 로마 빈민들에게 분배되는 빵 가격을 대폭 인하하자는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주장에 대해 그렇게 했다간 국고가 텅 비어버린다며 반대했다. 원로원 역시 이에 동의를 표하며 이 법안을 표결에 부치는 것은 반국가 조치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한 호민관은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사투르니누스는 무시하고 민회에 법안을 상정했다. 카이피오와 지지자들이 투표함을 뒤집으며 저항했지만, 법안은 끝내 통과되었다.
기원전 100년 12월 10일 집정관 선거 직후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집정관 당선자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원로원은 사투르니누스를 암살의 배후로 규정하고 원로원 최종결의(Senatus Consultum Multatum)를 통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현직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이들을 토벌하여 국가를 구할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마리우스는 정치적 동맹자였던 사투르니누스와 계속 손을 잡아야 하는지, 원로원의 뜻에 따라 그를 잡아야 하는지를 놓고 고심한 끝에 원로원의 최종 권고에 순종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무장시킨 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공격했다. 이때 여러 귀족이 사투르니누스 일당 공격에 동참했는데, 그중엔 카이피오도 있었다.
포로 로마노에서 벌어진 시가전 끝에 사투르니누스 일당은 참패했고, 사투르니누스는 루키우스 에퀴티우스를 비롯한 측근들과 함께 마리우스에게 투항했다. 마리우스는 이들을 신전에 가둬두었다. 이때 원로원 지지자들은 신전으로 몰려가 신전 천장에서 돌과 기왓장을 떼네어 신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고, 결국 사투르니누스는 피살되었다. 그의 집은 파괴되었고, 추종자들은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 그렇게 사투르니누스를 죽음으로 내몬 마리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국가를 구한 영웅이란 찬사를 받았지만, 이후에는 민중의 외면을 받고 동맹시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은둔했다. 그렇게 마리우스가 은둔한 틈을 타, 카이피오는 여러 귀족들과 함께 지난날 마리우스와 사투르니누스의 압력을 받고 로도스로 망명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복귀를 추진한 끝에 기원전 98년에 성사시켰다.
기원전 95년, 카이피오는 재무관을 맡았을 때 폭력 행위를 일삼아 "로마인의 위대함을 모욕"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고발자는 아스콜리 시의 웅변가 티투스 베투키우스 바루스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를 "로마 밖에서 살았던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웅변가"라고 묘사했다. 그 해 집정관이며 당대 최고의 로마 웅변가 중 한 사람이었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이에 맞서 카이피오를 변호했다. 로마 최고의 웅변가와 이탈리아 최고의 웅변가의 대결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카이피오는 기원전 112년 집정관이며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몰락시키는 데 일조한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딸 리비아와 결혼했고, 리비아의 오빠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그의 여동생인 세르빌리아와 결혼했다. 그런만큼 그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관계는 처음에는 매우 가까웠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첨예한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두 사람은 경매에 올려진 금반지를 놓고 대립했고, 이로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벌어진 시기는 전해지지 않으나, 독일의 로마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저(Friedrich Münzer, 1868 ~ 1942)는 기원전 103년 아라우시오 전투의 패배를 초래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재산을 경매에 올렸던 일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후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세르빌리아와 이혼했다. 스트라본은 세르빌리아가 매우 방탕하여 남편에게 버림받고 인생을 망쳤다고 기술했으며, 학자들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세르빌리아가 기원전 97년 또는 96년에 이혼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92년, 카이피오는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후원자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폰토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뇌물을 받아먹었다고 비난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기원전 103년 그의 아버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재판 때 용기를 내어 카이피오를 변호했다가 머리에 돌을 맞아 큰 부상을 입을 정도로 세르빌리우스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도 이같은 비난을 가한 것을 볼 때, 그가 이때부터 드루수스에게 악감정을 품었고 그와 연계된 이들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스카우루스는 카이피오의 주장을 반박했고,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기원전 91년 법무관을 맡은 카이피오는 그 해에 호민관을 맡은 드루수스의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자는 정책에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제동을 걸었다. 필리푸스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드루수스에게 인격적 모독이 담긴 발언을 쏟아내자, 드루수스는 호민관을 비난한 필리푸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드루수스 측과 필리푸스 측 사이에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필리푸스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드루수스는 집정관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비난을 받자 이렇게 대꾸했다.
""뭐, 코피라고? 저건 고기 수프일 뿐일세!"
카이피오는 그런 드루수스를 맹렬히 비난했고,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인에게 분배할지의 여부를 놓고 열린 민회 투표 당일에 법안 통과를 몸으로 막으려 했다. 이에 드루수스는 모든 법안을 하나로 합쳐 통과시키면서, 처남 카이피오에게 "가족이라고 해도 법무관 자리에서 내쫓아버리겠다!"고 외쳤다. 이렇듯 두 사람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드루수스가 돌연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살해당했다. 카이피오는 드루수스 암살을 사주한 혐의로 필리푸스와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비록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내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암살을 사주한 게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 후 그는 드루수스의 누이인 리비아와 이혼했다.
기원전 91년 말, 드루수스가 살해당했고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는 법안이 폐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탈리아인들이 각지에서 봉기하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90년, 카이피오는 그 해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휘하 레가투스(Legatus)를 맡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루틸리우스가 마르시 족의 매복 공격으로 전사한 뒤, 루틸리우스의 군대는 총독 권한을 받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카이피오로 양분되었다. 그러던 중 마르시 족 지도자인 퀸투스 폼파이디우스 실로가 카이피오를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로마군에 항복하러 왔다며 총사령관이 사라진 마르시족 진영을 어서 점령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진심으로 귀순했음을 알리기 위해 2명의 젊은 아들[1]과 금과 은으로 도금된 둥근 접시를 선물로 줬다. 카이피오는 그 말을 믿고 마르시족의 진영으로 접근했지만, 실로가 도중에 빠져나와서 신호를 보내자 미리 매복하고 있던 마르시족이 습격했다. 결국 카이피오는 모든 장병과 함께 전사했다.
카이피오는 리비아와의 사이에서 제3차 노예 전쟁 때 대대장으로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군에 맞선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연인이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인 세르빌리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최측근이자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맹활약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아내였던 소 세르빌리아를 낳았다. 리비아는 카이피오와 이혼한 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결혼해서 소 카토와 포르키아를 낳았다.
[1] 실제로는 노예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