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라틴어: Lucius Marcius Censor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조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아버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아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손자)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49년 |
전임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 |
동기 | 마니우스 마닐리우스 |
후임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그누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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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마르키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플레브스 최초로 감찰관을 맡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리우스 켄소리누스의 후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근거해 기원전 152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149년 마니우스 마닐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로마 공화국과 고대 카르타고간의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원로원은 두 집정관에게 아프리카로 진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함대 지휘권을 맡았고, 그의 동료는 육군을 이끌었다. 유티카에 상륙한 두 집정관은 평화 협상을 하기 위해 찾아온 카르타고 사절단에게 모든 무기와 인질 300명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카르타고인들이 순순히 따르자, 두 집정관은 그들에게 바다에서 10마일 이상 떨어진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새 도시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는 자신들을 파멸시키려는 수작이라 여기고 단호히 거부하고, 방어 준비를 시작했다.
두 집정관은 카르타고인들이 모든 무기를 반납한 이상 별다른 저항을 못하리라 여기고 별다른 경계 없이 카르타고로 진군했다가 격파되었다. 이후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포위했지만, 이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패배한 데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결국 그는 카르타고를 정복하는 데 실패한 채 기원전 148년 여름 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원전 14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감찰관으로서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이후의 행적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아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는 이름만 전해지며, 손자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는 술라의 내전 당시에 마리우스파의 편을 들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대적했다가 전쟁에서 패한 뒤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