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Marcus Fulvius Flacc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21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조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버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들) 풀비아(딸)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25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동기 |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 |
후임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가이우스 섹스티우스 칼비누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동지로, 원로원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4차례 집정관(기원전 237년, 기원전 224년, 기원전 212년, 기원전 209년)을 역임했고, 기원전 231년 감찰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213년 기병장관, 기원전 210년 독재관을 맡아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는 기원전 179년에 집정관을 동시에 맡았다. 그러나 또다른 아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80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았다가 군법을 어긴 혐의로 인해 원로원에 의해 추방되었다. 19세기 독일의 고전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는 기원전 125년 집정관 마르쿠스는 아버지가 당한 가혹한 형벌 때문에 어릴 때부터 기득권층을 미워했다고 주장했다.기원전 133년, 당시 원로원 의원이었던 그는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게 "부자들이 무장한 노예와 친구들을 거느리고 당신을 공격하려 하니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같은 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가 이끄는 무뢰배들의 습격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기원전 가이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함께 농지 분배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29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스키피오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로마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은 스키피오와 갈등을 심하게 벌였던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 그리고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중 한 명이 스키피오 암살을 사주했을 거라 여겼지만, 공식적인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28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25년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그는 그라쿠스의 개혁 확대를 주장했으며, 특히 동맹시에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대다수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단호히 반대했고, 그를 로마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마실리아를 침략하는 리구리아인들에 맞서 마실리아를 구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이에 따라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가서 리구리아인들을 물리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기원전 123년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가 로마에 돌아왔을 때,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선임된 뒤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그라쿠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기원전 122년 스스로 호민관에 선임되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그라쿠스와 함께 아프리카로 가서 제3차 포에니 전쟁 후 폐허가 된 카르타고에 식민도시를 세우는 사업을 감독했다고 한다. 반면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라쿠스만 아프리카로 갔고, 그는 로마에 남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또다른 호민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그라쿠스가 이탈리아인들을 선동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한다는 비난을 퍼부었고, 플라쿠스는 그라쿠스를 옹호했지만 웅변술에서 밀렸다. 그라쿠스는 이 소식을 듣고 예정보다 일찍 로마로 귀환했다고 한다.
기원전 121년, 집정관에 선임된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원로원 최종 권고에 따라 그라쿠스 추종자들을 토벌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집에 보관되었던 무기를 지지자들에게 배포하고 아벤티노 언덕을 점령한 뒤 디아나 신전에 자리잡았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시가전을 벌이기를 원하지 않아 그에게 원로원과 협상하자고 설득했다. 플라쿠스는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 협상은 어불성설이라며 반대했지만, 그라쿠스가 뜻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막내 아들 퀸투스를 포로 로마노로 보내 오피미우스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오피미우스는 무조건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퀸투스가 돌아와서 이 소식을 알리자, 그는 이전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건을 담은 제안을 담아 퀸투스를 다시 보냈다. 오피미우스는 퀸투스를 체포하게 한 뒤 병사들을 이끌고 아벤티노 언덕으로 진격했다. 그는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끝내 패배했고, 버려진 목욕탕이나 누군가의 집에 숨어 있다가 장남 마르쿠스와 함께 발견되어 즉시 살해되었다. 오피미우스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플라쿠스의 수급을 베어서 가지고 온 자에게 그의 머리 무게와 같은 금을 수여하겠다고 선언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의 머리를 가지고 온 사람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보상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다른 그라쿠스 추종자들과 함께 테베레 강에 던져졌고, 그의 집은 철거되었으며, 그의 미망인은 남편을 애도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편 오피미우스에게 체포되었던 막내 아들 퀸투스는 처형되거나 강제로 자살했다.
그에게는 함께 죽은 두 아들 외에도 딸 풀비아가 있었다. 이 여인은 기원전 90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