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우스 유벤티우스 탈나 라틴어: Manius Iuventius Thalna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63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코르시카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티투스 유벤티우스 탈나(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63년 |
전임 |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동기 | 대 그라쿠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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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투스쿨룸에 거주했다가 로마로 이주한 플레브스 가문인 유벤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티투스 유벤티우스 탈나는 기원전 194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170년 호민관을 맡아 동료 호민관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와 함께 전년도 법무관 가이우스 루크레티우스 갈루스가 그리스 동맹국들을 상대로 권력을 남용해 막대한 뇌물을 긁어모았다고 비난했다. 갈루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100만 아스에 달하는 막대한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기원전 167년 법무관에 선임된 그는 군공을 세우길 갈망했다. 당시 로마와 로도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로도스인들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시기에 로마와 마케도니아 왕국간의 중재를 맡겠다고 제안했지만, 원로원은 그들의 동기를 불신하고 비밀리에 마케도니아 편에 섰을 거라 의심했다. 전쟁이 끝난 뒤 로도스 사절단 2명이 로마에 도착해 양국 관계를 원활하게 하려 노력했지만 원로원의 냉대를 받았다. 그는 이 때를 틈타 민회를 소집해 로도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호민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폼포니우스가 "로도스인들은 과거에 로마를 많이 도와줬다"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대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시민들이 로도스와의 전쟁에 대해 찬반 투표를 하기도 전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모스 마이오룸에 위배되며, 이로 인해 좋지 않은 선례가 생겼다고 비판했다. 이후 로도스인들이 막대한 자금을 원로원 의원들에게 바치며 평화를 이어가자고 호소하자, 원로원은 로도스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기원전 163년 대 그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코르시카로 파견되어 로마에 반기를 든 부족들을 토벌했다. 원로원은 이 소식을 듣고 그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감사 축제를 열기로 했다. 당시 코르시카에서 희생제를 치르고 있던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감사 축제를 열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전달받고 이를 읽다가 갑자기 제단에 쓰러져 사망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이에 대해 그가 기쁨을 과도하게 느낀 나머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죽자, 그때까지 로마에서 업무를 담당했던 동료 집정관 그라쿠스는 코르시카로 가서 사후 처리를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