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라틴어: Gaius Hostilius Manc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조부)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아버지)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형제)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7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 |
동기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 |
후임 | 루키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섹스투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호스틸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기원전 217년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휘하에서 동맹군 기병 분견대를 이끌고 한니발 바르카에 맞서 싸우다 캄파니아 지방에서 전사했다. 아버지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기원전 17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기원전 151년 조영관, 기원전 149년 비티니아 사절단의 일원을 맡았다.그는 기원전 150년에서 147년 사이에 법무관을 맡았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 자격으로 테살리아의 두 도시들의 분쟁을 논의하기 위해 원로원을 소집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당시 그가 법무관으로서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착수하고 있는 집정관들을 대신해 로마의 행정을 이끌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후 10년간 별다른 행적이 없다가 기원전 137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제비뽑기를 통해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로 부임해 누만티아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별도로 군대 모집을 하지 않고 전임 총독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의 군대를 그대로 이끌기로 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가 희생제를 지내고 있을 때 새들이 새장 밖으로 날아갔고, 헤라클레아 항구에서 배를 탔을 때 "만키누스, 머물러라" 라는 음성을 들었다. 이후 그가 타고 있던 배에서 거대한 뱀이 발견되었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그는 제노바까지 육로로 이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정을 이어가 임지에 도착한 뒤 라이나스로부터 임페리움을 인계받았고, 즉시 누만티아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누만티아에는 4천 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그는 이들을 상대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플루타르코스는 20,000명을 동원했다고 밝혔고,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30,000명을 동원했다고 했으며, 아피아노스는 40,000명을 동원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만키누스는 누만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만키누스의 군대는 누만티아인들의 지속적인 매복 공격과 야간 습격으로 인해 지칠대로 지쳤고, 누만티아인들의 얼굴과 목소리조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렸다고 한다. 여기에 칸타브리아인과 바케오스인들이 누만티아인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로마군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졌다. 만키누스는 야간에 철수하기로 했지만, 사전에 눈치챈 누만티아인들의 지속적인 습격으로 큰 손실을 입었고, 기원전 153년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가 건설했던 요새에 군대를 피신시켰다.
이후 누만티아인들이 요새를 포위하면서 식량 공급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절반의 병력을 상실한 로마군은 이들의 공세를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이에 만키누스는 군대 전체가 궤멸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누만티아인들과 협상하기로 마음먹고, 당시 재무관으로서 종군하고 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게 누만티아인들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 그라쿠스는 아버지 대 그라쿠스가 누만티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걸 잘 활용해 그들과 협상한 끝에 로마군이 온전히 빠져나오게 하는 대가로 누만티아의 독립을 보장하고, 공물을 바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 협약은 만키누스, 그라쿠스 및 트리부누스 밀리툼들의 맹세를 거쳐 확정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원로원은 즉시 만키누스의 임페리움을 박탈하고 그와 장교들 전원을 로마로 소환해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누만티아 사절단과 함께 로마에 도착한 만키누스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군대를 구하려면 이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으며, 이 조약은 로마에 어떤 손실도 수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기원전 140년 누만티아와의 전쟁을 이끌었던 퀸투스 폼페이우스가 막대한 손실을 입은 뒤 누만티아와 멋대로 맺은 협약으로 인해 전투가 불가능해졌다며, 자신의 패배는 폼페이우스의 협약을 위반한 것에 대한 신의 진노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등 강경파는 야만족을 상대로 굴욕적인 협약을 맺은 만키누스를 용납할 수 없다며, 협약을 무효로 처리하고 그를 누만티아인들에 넘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고 협약을 무효로 처리했으며, 만키누스를 누만티아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다만 그라쿠스 등 다른 장교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후 만키누스는 기원전 136년 집정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필루스와 함께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로 이송된 뒤, 양손을 등 뒤로 묶인 후 알몸인 채 누만티아 성문 앞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누만티아인은 로마의 배신을 한 사람에게만 물을 수 없다며 만키누스를 되돌려보냈다.
로마로 돌아온 만키누스는 원로원에 복귀하려 했지만, 호민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는 만키누스가 누만티아인들에게 굴복했기에 로마 시민권이 박탈되었다며 반대했다.
"이것은 예로부터 행해진 일이다.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동족에 의해 노예로 팔리거나 신성한 사절의 손에 넘겨진 자는 돌아올 때 이전의 권리를 다시 가질 수 없다."
이에 관해 로마의 저명한 법률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만키누스를 로마 시민으로 인정하되 원로원 의원 직위를 박탈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모종의 시기에 법무관을 맡으면서 원로원에 복귀할 수 있었는데,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누만티아에 묶여서 보내졌을때 모습으로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를 고귀하고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군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다고 평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지만 로마군 지휘관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많은 고대 학자들은 만키누스가 맺은 협약을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했으며, 만키누스의 무능과 비겁함을 규탄했다. 한편,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본인이 직접 주도해서 맺은 평화 협약이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비롯한 로마 귀족들의 주도로 파기되고 재판까지 회부되었으며 상관인 만키누스가 누만티아인들에게 인도된 것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었으며, 이때부터 로마의 정치체계가 불완전하다고 여기고 개혁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으리라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