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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2 14:11:32

파스티 카피톨리니

파일:파스티 카피톨리니.jpg

1. 개요2. 발굴 과정3. 내용

1. 개요

Fasti Capitolini.

로마 공화국 시기인 기원전 5세기 초부터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까지 이어진 최고 행정관과 개선장군 목록. 본래 포로 로마노에 세워진 대리석 명판에 세워졌지만 서로마 제국 멸망 후 극심한 혼란 속에 파괴되었고, 현재는 로마 시내와 주변에 흩어진 50여 개 조각만 확인되었다. 로마 공화국의 역사 연구에 필수적인 고고학적 자료로 손꼽힌다.

2. 발굴 과정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을 위해 포로 로마노에 남아있는 석재 사용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폐허가 된 로마 시대 구조물을 해체하는 작업이 진행되던 1546년 8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자이자 학자인 오노프리오 판비니오(Onofrio Panvinio, 1530 ~ 1568)와 건축가 피로 리고리오(Pirro Ligorio, 1513 ~ 1583)는 철거 과정을 지켜보던 중 벽 기둥 사이에 행정관들의 이름이 적힌 비문 조각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여기에 지대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더 많은 조각을 찾아내기 위해 인부들에게 땅을 파내라고 지시했다.

8월 15일에서 9월 14일까지 이어진 발굴 과정에서 56개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바오로 3세의 손자이자 추기경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일 조바네(Alessandro Farnese il Giovane, 1520 ~ 1589)는 보고를 접하자 즉시 당대 최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불러서 캄피돌리오 언덕에 있는 팔라조 델 콘세르바토리(Palazzo dei Conservatori) 궁전에 옮겨진 유물들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유물들이 진품이며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소견을 밝혔다. 이에 교황은 이 유물을 엄중히 보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파일:늑대 홀에 전시된 파스티 카피톨리니.jpg

그 후 1817~1818년에 포로 로마노에서 발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2개의 추가 조각이 발견되었으며, 1872년과 1878년 사이에 포로 로마노에서 다시 발굴 작업이 진행될 때 역시 발견되었다. 마지막 조각은 1888년 티베르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오늘날 이 조각들은 키피톨리니 박물관에서 관리되고 있으며, 복사본이 박물관 내부의 늑대의 전당(Sala della Lupa)[1]에서 전시되고 있다.

3. 내용

1546년에 발견된 비문 조각들 중 30개 조각들은 기원전 483년부터 서기 13년까지 이어진 집정관들의 목록을 담고 있어서 '집정관 목록(Fasti consolari)'으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나머지 26개 조각은 기원전 753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 개선식을 거행한 장군들의 목록을 담고 있어서 '개선장군 목록(Fasti Triumpal)'으로 일컬어진다. 이중 개선장군 목록에서 거론되는 첫번째 인물은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다. 집정관 목록도 로물루스 대부터 시작했는지, 아니면 로마 왕국이 무너지고 로마 공화국이 수립된 후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비문 조각에는 각 연도에 선출된 집정관과 기존 집정관이 재임 도중 사임하거나 사망할 때 이를 대체한 보결 집정관들의 이름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임시직인 독재관기병장관도 포함되며, 기원전 444년에서 367년 사이에 집정관과 거의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로마군을 통솔한 집정 무관, 감찰관, 12표법을 제정한 10인 위원회의 일원인 데켐브리(decemviri)도 포함되었다. 학자들은 이 비문들은 서기 14년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각각의 높이가 수 피트에 달하는 4개의 큰 서판으로 세워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첫번째는 기원전 390년까지 이어지고, 두번째는 기원전 293년, 세번째는 기원전 154년, 네번째는 서기 14년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파스티에는 집정관의 조부와 아버지의 프라이노멘, 집정관이 재임 동안 사임, 병사 또는 살해되었음을 알려주는 글이 포함되었으며, 삼니움 전쟁, 피로스 전쟁, 포에니 전쟁 등 중요한 전쟁이 시작된 연도, 독재관을 선임한 이유, 집권했을 때 나이 등의 정보도 제공한다. 중간 중간에 세월이 흐르면서 마모되어 빠진 내용이 많고 브렌누스에 의해 로마 약탈이 벌어진 기원전 390년 이전의 집정관 목록의 정확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로마 역사 연구에 필수적인 고고학적 자료로서 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1]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레무스에게 젖을 먹인 암늑대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