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 라틴어: Manius Valerius Maximus Corvinus Messall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증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아버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메살라(아들)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63년 |
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동기 |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
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퀸투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증조부는 기원전 348년, 기원전 346년, 기원전 343년, 기원전 335년, 기원전 300년, 기원전 299년 등 총 6번 집정관에 오르며 로마가 이탈리아 전역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군림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이고, 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312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는 기원전 28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기원전 263년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인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르기 이전의 생애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크라수스와 함께 각각 2개 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이동해 지난해 집정관으로서 시칠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와 교대했다. 이후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령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67개의 도시가 귀순했다고 하고,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52개 도시가 귀순했다고 한다.
로마군이 여세를 이어가 시라쿠사로 진군하자, 그곳의 참주인 히에로 2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두 집정관에게 로마와 동맹을 맺을 의향이 있으니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로마 측은 장차 카르타고를 상대로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을 이어가려면 시라쿠사의 협조가 필요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시라쿠사가 지불해야 할 배상금 규모는 25달란트, 100달란트, 또는 200달란트로 기록마다 다르게 서술되었다. 나중에 로마에 곡물을 공급하는 대가로 배상금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한다. 또한 시라쿠사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고, 양자가 확보한 포로를 무상으로 교환하기로 했다.
그 후 로마로 귀환한 그는 카르타고인과 히에로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포로 로마노의 건물 중 하나인 큐리아 호스틸리아에 자신의 승리를 묘사한 그림판을 설치했고, 카타니아의 해시계를 세웠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 해시계는 잘못된 시각을 가리켰지만 거의 100년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또한 시칠리아의 도시 메사나를 본뜬 메살라(Messalla)를 자신의 아그노멘으로 삼았는데, 훗날 그의 후손들은 이 이름을 코그노멘으로 물려받았다.
기원전 252년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은 원로원 의원 16명을 추방했고, 400명의 에퀴테스들이 카르타고와의 전쟁 동안 시칠리아에서 군사 규율을 위반했다고 규탄하고 그들이 소유한 국가 소유 말을 몰수하고 에라리아로 추방했다. 또한 그들은 인구 조사를 실시해 297,797명의 로마 시민을 확인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메살라는 기원전 226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휘하 시칠리아 해군 지휘관으로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