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라틴어: Tiberius Sempronius Longus | |
생몰년도 | ? ~ 기원전 210년 |
출생지 | 미상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조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8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
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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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평민 귀족이자 장군.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에게 참패했다.2. 생애
평민 집안인 셈프로니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조부와 아버지 모두 이름이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였다. 이 가문은 기원전 304년에 처음으로 집정관을 배출했으며, 이후에는 신분은 평민이지만 귀족과 거의 대등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노빌레스로 발돋움하였다. 현대 연구자들은 셈프로니우스 가문과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이 클리엔텔라 관계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가 기원전 218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공동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기원전 218년, 원로원은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린(사군툼 공방전) 한니발 바르카를 징벌하고자 카르타고에 선전포고했다. 두 사람은 제비뽑기를 통해 임무를 배정받았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는 시칠리아에서 군대를 편성한 뒤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카르타고를 치기로 했고, 스키피오는 마실리아를 경유하여 이베리아 반도로 진군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보병 16,000명과 기병 1,800명으로 편성된 2개 로마 군단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향하였고, 시칠리아에서 추가 병력을 징집해 아프리카에 상륙할 준비를 했다. 그는 시칠리아로 가는 길에 메사나 해협에서 대규모 해군을 편성한 시라쿠사 왕 히에론을 만났다. 히에론은 로마에 대한 충성을 보증하면서, 친 카르타고 감정이 강한 릴리바이움을 확고히 통제하라고 충고했다.
셈프로니우스는 충고에 따라 시라쿠사 함대를 편대에 실어서 릴리바이움으로 이동했지만, 도중에 카르타고 소함대가 이 도시에 접근하던 중 마르쿠스 에밀리우스 레피두스의 함대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후 몰타 섬으로 가서 그곳에 주둔한 카르타고 수비대 2천 명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팔았다. 뒤이어 에올리에 제도에 카르타고 함대가 숨어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그들을 찾아나섰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에서 알프스 산맥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원로원은 셈프로니우스에게 당장 북상하여 마실리아에서 복귀할 예정인 스키피오와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셈프로니우스는 전군을 배에 실어서 아드리아 해를 가로질러 북상한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한다. 반면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육로를 통해 40일 만에 도착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어느 쪽이든 셈프로니우스가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최대한 빨리 달려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218년 12월 플라켄티아에서 군대를 재집결한 뒤, 트레비아 강 왼쪽 제방에서 동료 집정관 스키피오와 연합했다. 이때 한니발은 이미 강 우편 제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스키피오는 타키누스 전투 때 기병전을 이끌다가 누미디아 기병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군대를 직접 이끌 수 없었고, 많은 켈트 부족이 한니발의 편에 들었지만 아직까지 로마를 따르는 켈트 족도 여럿 있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고 한다. 스키피오는 적 기병대가 강력하고 병사들이 멀리 행군하느라 지쳤으니 이번 겨울을 푹 쉬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켈트 족이 한니발을 오래 따를리 없으니, 시간을 끌수록 한니발은 불리해질 거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셈프로니우스는 집정관 임기가 끝나기 전에 승부를 내고 싶었기에 회전을 열망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이다가 각자 진영을 따로 편성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폴리비오스가 스키피오 가문을 드높이기 위해 일부러 스키피오의 동료 집정관이자 평민 출신인 그를 폄하하고 패배 원인을 그에게 몰아줬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트레비아 전투 때 그가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적과 교전한 것을 볼 때 중상을 입어서 전투가 불가능한 스키피오가 그에게 지휘권을 양도했으며, 회전을 벌이려는 그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사실 폴리비오스는 이후에도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칸나이 전투 등 로마가 대패한 전투를 서술할 때 "성급한 평민 출신 집정관들이 신중한 귀족 집정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니발과 싸우려다 일을 그르쳤다"는 식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이들 평민 집정관들이 귀족 집정관과 클리엔텔라 관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서술은 진실과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218년 12월 18일 새벽, 누미디아 기병대가 로마군 진영을 급습한 뒤 후퇴했다. 셈프로니우스는 즉시 전군을 이끌고 그들을 추격했다. 병사들은 아침 식사를 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지휘관을 따라야 했고, 트레비아 강을 건널 때는 얼음물에 완전히 젖어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반면에 카르타고군은 식사를 일찌감치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 참가한 로마군은 36,000명이었다고 한다. 반면 리비우스는 18,000명의 보병에 4,000명의 기병이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한편 한니발의 군대에는 중장 보병 20,000명, 기병 10,000명, 경무장 보병 8,000명이 있었다. 이후 벌어진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1만 명의 중장 보병만이 중앙 대열에 포진한 켈트족 보병대를 뚫고 플라켄티아로 행진했고, 나머지는 전멸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셈프로니우스는 로마에 돌아온 뒤 패배의 진실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로마인들은 처음엔 그의 말을 믿었지만 나중에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리비우스는 패배 소식이 즉시 로마에 전해졌고, 셈프로니우스는 로마에 돌아와서 패배를 시인한 뒤 집정관 선거를 주관한 뒤 플라켄티아의 겨울 숙영지에 주둔한 병사들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이 플라켄티아 인근에서 셈프로니우스와 다시 맞붙었고, 셈프로니우스는 전투가 끝난 뒤 루카로 퇴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또다른 기록에서 그가 여전히 플라켄티아에서 겨울을 보냈으며, 봄이 될 무렵에 신임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에게 넘겨줬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215년 루카니아의 그루멘툼에서 한니발의 부하 한노를 물리치고 브룬티움으로 몰아넣었으며, 그 공적으로 개선장군에게 주어지는 호칭인 '롱구스' 칭호를 받았다. 이후 데켐비르(decemvir) 직책을 맡아 제사를 주관하다가 기원전 210년 사망했다. 훗날 아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는 기원전 19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이때 동료 집정관은 셈프로니우스의 동료 스키피오의 아들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1]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에서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하면서 보결 집정관으로 발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