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 라틴어: Lucius Iunius Pullus | |
생몰년도 | 미상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조부) 가이우스 유니우스 풀루스(아버지)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49년 |
전임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
동기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후임 |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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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4세기 말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로마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 체제를 수립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루키우스, 가이우스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했다고 한다.기원전 249년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기 이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두 집정관은 릴리바이움 공방전의 임페리움을 수여받았다. 풀케르가 드레파나 항구에 정박한 카르타고 함대를 기습 공격하다가 드레파나 해전에서 참패하는 동안, 그는 이탈리아 동맹시들로부터 거둬들인 식량을 릴리바이움을 포위한 로마군에 보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드레파나 해전에서 풀케르의 함대를 궤멸시킨 아드헤르발은 70척의 퀸퀘레메를 이끌고 온 카르탈로에게 30척을 추가해준 뒤 릴리바이움을 포위한 로마군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카르탈로는 즉시 릴리바이움 해상으로 출격해 여러 로마 선박을 파괴한 뒤 소수의 전함들이 호위하는 800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로마 수송부대를 막아섰다. 로마 수송부대는 전함들이 최후까지 분전하다 전멸하는 동안 판티아스 항구로 피신한 뒤 카르탈로의 적 함대와 대치했다. 그러다가 풀케르의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가 이끄는 120척의 로마 전함들이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르탈로는 두 함대 사이의 어느 해안에 정박했다.
풀루스는 아군을 구하기 위해 판티아스로 이동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풀케르가 참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을 우려했던 듯하다. 판티아스에 주둔한 수송 함대 역시 풀루스와 합류하길 꺼렸다. 그러던 중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카르탈로는 즉시 동쪽으로 항해했다. 카르탈로가 떠나자 그제야 판티아스로 향한 풀루스는 수송 함대와 합세한 뒤 릴리바이움으로 이동했지만, 카마리나 인근에서 폭풍우를 만나 풀루스가 탄 기함을 포함한 2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이 파괴되고 말았다.[1]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새 점술을 소홀히 해 신들의 분노를 사서 이같은 참변을 입었고, 함대를 잃은 책임을 지고 자살했다고 한다. 반면 폴리비오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폭풍을 피해 릴리바이움을 포위한 아군과 합세한 뒤 시라쿠사에서 육로를 통해 군대를 위한 보급품을 가져오게 한 후 에릭스 시를 점령하고 아켈로스를 요새화했다고 한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그는 카르타고군에게 생포된 뒤 기원전 247년 포로 교환 협상을 통해 석방되었지만, 로마로 돌아온 뒤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고 한다. 이렇듯 고대 사료에서 여러 상반된 기록이 혼재하지만, 이 중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1]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함대 전체가 폭풍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선원과 화물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