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라틴어: Gnaeus Cornelius Lentul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83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형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아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1년 |
전임 |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
동기 |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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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프리카 원정군 지휘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실패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고대 사료에서 전해지는 렌툴루스(Lentulus)라는 코그노멘을 가진 첫번째 인물은 기원전 327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였지만, 기원전 3세기부터 고위 행정관을 잇따라 맡은 렌툴루스 인사들과 이 인물간의 연관성은 불분명하다. 그의 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기원전 275년 집정관을 맡아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함께 피로스 1세와 전쟁을 벌였고,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기원전 237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199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있었다.기원전 216년, 그는 칸나이 전투에서 대대장으로서 참여했다. 폴리비오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패배가 명백해졌을 때 중상을 입은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돌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을 주면서 호소했다.
"지금 우리 로마인은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지휘관이 필요합니다. 로마로 어서 피하십시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가서 원로원에게 로마를 요새화하고, 승리한 적들이 올 때까지 방어를 단단히 하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파비우스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그대와의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고. 나를 살해당한 병사들과 최후를 맞도록 내버려 두시오. 부디 나를 집정관이 아닌 몸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아니면 전우를 고발하여 스스로의 결백을 다른 이를 유죄에 빠뜨리며 증명하게 하지 말아주시오."
기원전 212년 베네벤토에서 카르타고에 대항하여 해방노예군을 이끈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휘하 재무관을 맡았다. 그라쿠스가 도중에 카르타고군의 매복으로 살해당하자, 해방노예군은 모조리 달아났다. 그는 달아나지 않은 얼마 안 된 병력을 이끌고 한동안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카푸아 공방전을 단행한 두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카푸아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한니발 바르카와 대적하고 있을 때, 그가 이끄는 분견대가 멀리서 나타났다. 이에 양측 모두 그들이 적군을 도우러 왔다고 여기고 전투를 중단했다.
기원전 205년, 그는 형제 루키우스 또는 사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함께 조영관을 맡았다. 기원전 201년에는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카르타고 정부와 평화 협상이 끝나지 않았기에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종결지은 영광을 스키피오로부터 가로채기로 마음먹고 아프리카 방면 임페리움(지휘권)을 스키피오로부터 빼앗으려 했다. 반면 동료 집정관 파이투스는 스키피오를 능가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다.
민회는 스키피오가 아프리카 총사령관을 계속 맡게 하기로 결의했지만, 원로원은 스키피오가 지나치게 많은 명성을 얻으면 위험해진다고 여기고 그에게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항해한 뒤 전쟁이 지속되는 경우 아프리카로 가서 전쟁을 벌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가 함대를 조직하여 막 출발하려 할 때, 카르타고 사절단이 최종 협상을 위해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기원전 199년 나니아에 식민도시를 세우는 데 관여한 위원회 일원이었으며, 기원전 196년 그리스에 파견되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종결과 관련해 필리포스 5세와 협상한 사절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기원전 183년 사제 계급인 아우구르(Augur)를 맡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전에 두 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를 낳았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는 기원전 156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기원전 146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