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틴어: Quintus Cassius Longin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히스파니아 속주 에브로강 어귀 |
지위 | 평민 귀족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버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형제 또는 사촌)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히스파니아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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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았으나, 폭정을 일삼다가 반란에 휘말렸고, 가까스로 피신했으나 해상사고로 사망했다.2. 생애
기원전 2세기에 로마 귀족으로 편입된 평민 집안인 카시우스 롱기누스 씨족 출신으로, 계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86년 코르도바에서 발견된 라틴어 비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였다. 키케로는 그를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형제라고 칭했다. 다만 키케로가 언급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인지, 기원전 73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인지는 불확실하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는 그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사촌이라고 주장했다.기원전 57년 화폐 주조관에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55년 이전에 로마 다신교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52년 재무관에 발탁되었고, 당시 단독 집정관을 맡고 있던 폼페이우스에 의해 히스파니아로 보내져 식량난에 시달리는 로마로 식량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키케로의 서신에 따르면, 기원전 51년 로마로 귀환한 그는 문제에 직면했다고 한다. 키케로는 당시 시리아에 있던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형제' 퀸투스가 위험에 처했으니 로마로 빨리 오라고 조언했다. 그해 12월,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루케우스가 퀸투스 카시우스에게 왜 그렇게 멋지게 행동했는지 알고 싶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히스파니아 지방에서 권력을 남용해서 고발될 위험에 처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재판에 회부된 적은 없다.
기원전 50년 12월 호민관을 맡은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옵티마테스파 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을 때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기원전 49년 1월 1일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가 보낸 편지를 낭독할 것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했다. 카이사르는 이 편지에서 폼페이우스와 자신이 군대를 동시에 해산하고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준다면 로마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원로원은 카이사르만 군대를 신속히 해산할 것을 요구하고, 불복종할 경우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이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하면서 거부권이 효력을 상실하자, 안토니우스와 함께 로마를 탈출하여 라벤나에 머물고 있던 카이사르와 합세했다.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이 발발한 뒤, 그는 별도의 부대를 이끌고 안코나를 점령했다. 4월 1일 카이사르가 로마에 입성했을 때, 안토니우스와 함께 행정관 대리로서 원로원을 소집했다. 이후 카이사르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갔고, 일레르다 전투에서 승리하여 히스파니아를 평정한 카이사르로부터 히스파니아 총독에 선임되어 2개 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나중에 그의 군대는 5개 군단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루시타니아인을 물리치고 임페라토르로 선포되었으며, 카이사르로부터 아프리카로 진군하여 그곳의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자 이를 위해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속주민들에게 가혹한 액수의 세금을 매겼고, 세금을 미납한 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해 원망을 샀다.
기원전 48년 코르도바에서 공모자들에게 공격당해 부상을 입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암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얼마 후 그의 지휘를 받던 소주민 보조병 부대와 제5 군단[1]의 4개 코호트가 티투스 토리우스의 영도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곧 재무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이세르니누스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추대했고, 그는 울리아에서 반란군에게 포위되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울리아로 진군하자, 반란군은 레피두스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를 새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삼기로 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권력을 내려놓고 말라가로 떠났다.
당시엔 지중해 날씨가 험한 겨울철이었지만, 육지로 갔다간 자신을 증오하는 속주민에게 살해당할까 두려워서 해상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배는 에브로 강 어귀에서 폭풍으로 인해 침몰했고, 그는 현장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