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파 포스투무스 라틴어: Agrippa Postumus | |
이름 | 마르쿠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1]" Marcus Agrippa "Postumus"[2][3] |
마르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Marcus Julius Caesar Agrippa Postumus[4] | |
아그리파 율리우스 카이사르 Agrippa Julius Caesar[5] |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Julius Caesar Agrippa Postumus[6]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출생 | 기원전 12년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서기 14년 8월 (향년 25세) |
로마 제국 토스카나 제도 피아노사 섬(Pianosa Island)) | |
아버지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친부) 아우구스투스(양부, 외조부) 티베리우스(계부, 외삼촌, 입양형제) |
어머니 | 대(大) 율리아 |
형제 |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소(小) 율리아, 티베리우스(입양형제, 외삼촌),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붓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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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이다.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양자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 대(大) 율리아(Julia the Elder)와 로마 제국의 장군, 정치가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사이에서 막내아이이자 유복자로 태어났다. 두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태어날 당시부터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 입적돼 친양자로 낙점됐다. 반면, 이 사람은 친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간의 약속에 따라 입양되지 않기로 정해진 탓에 정식 입양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형이 요절한 이후, 친혈육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한 외할아버지의 생각에 따라 약속은 파기됐고, 서기 4년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의 장남 티베리우스와 함께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러 공문서와 기록들에서 나오는 표현, 즉 "ferocia(잔인함, 야만성; 짐승 같은 본성)" 문제와 과대망상 증세 때문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이었음에도,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된 직후에도 후계구도에서 밀렸다.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 자처했고, 외조부와 가족들에게 폭언, 협박을 가하는 문제가 군입대를 앞둘 시기부터는 심각해졌다. 낚시 외의 모든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 제왕교육조차 받지 못했고, 결국 3년 뒤인 서기 7년 아우구스투스의 요청과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제도의 작은 섬 피아노사로 추방됐다. 이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파양되면서 완전히 제위계승권이 박탈되고 모든 상속권도 빼앗겼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해인 서기 14년 일찌감치 숙청이 결정되고,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가 단독황제가 된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아우구스투스 휘하 친위대 병사들에게 추방된 섬에서 처형됐다.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통 남자 황족인 만큼,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모든 황족들과 혈통적, 법적으로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이어진 다섯 명의 황제 뿐만 아니라 이 왕조의 아우구스타들과 제위계승자(황태자)들까지 모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이어진다.
형으로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있고 누나로는 대(大) 아그리피나(율리아 아그리피나), 소(小) 율리아가 있다. 입양형제로는 어머니 율리아의 남편이기도 했던 티베리우스가 있으며, 큰 누나 아그리피나의 남편인 게르마니쿠스의 처남이 된다. 따라서 3대 황제 칼리굴라와 네로의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는 그의 외조카가 된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기원전 1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2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동갑내기 친구, 오른팔인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그의 세번째 아내 대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 중 막내였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 아그리파가 급사한 지 3개월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얻게 된 이름 뒤의 추가성씨로 포스투무스(사후의 아이)를 사용했다. 다만, 대개의 로마 가정 관습과 달리, 그의 개인이름 마르쿠스는 어머니 대 율리아가 지어줬고 인지 역시 어머니가 직접 했다고 한다.두 형과 달리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입양되지 않았다. 이는 애당초 아우구스투스의 결정과 아그리파, 율리아 결혼 전 약속 때문인데, 이런 배경으로 그는 아그리파 가문의 후계자로 결정됐다.
어머니 율리아가 아우구스투스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 티베리우스와 포스투무스 출생 직후 재혼한 까닭에, 어머니의 의붓남매이며 이복누이의 전남편인 티베리우스의 의붓아들이 됐다. 티베리우스는 포스투무스를 날 때부터 키웠는데, 그는 포스투무스의 두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도 아버지이자 삼촌으로 역할을 다했다. 이런 배경은 그가 후일 통제 불능 상황에서 그나마 계부 티베리우스의 명에 꼼짝 못하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이 결혼은 율리아의 난잡한 사생활 문제로 완전히 파탄났고, 계부 티베리우스는 로도스 섬으로 가출했다. 이어 기원전 2년 외조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를 직접 간통죄로 고소해 처벌하는 일이 터진다. 따라서 포스투무스는 자연스레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함께 외조부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자라게 된다.
어머니 율리아가 추방된 이 해, 포스투무스는 처음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그의 친형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2년 8월 1일 주최한 마르스 신전 봉헌 행사에 참가했는데, 포스투무스는 형 가이우스와 함께 트로이 경기를 이끌고,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역대 규모로 열린 검투사 경기와 맹수 사냥, 모의 해전을 성공리에 이끌었다고 디오 카시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2.2. 양자 입적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는 살아생전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자녀 중 두 아들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의 입양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약속은 기원전 9년 대 드루수스가 양자 정식 입적에 앞선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을 앞두고 낙마사고로 요절하고, 이어 서기 2년 루키우스 카이사르, 서기 4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연이어 요절한 일 때문에 무효화된다.아우구스투스가 자신과 18살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한 친구이자 본인 스스로 유일한 진짜 친구로 찬사한 아그리파와의 약속을 어긴 배경은 정치적 이유, 개인적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직위와 명예를 혈육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고, 포스투무스를 입양하지 않는다면 애매한 정통성 문제로 벌어질 골육상쟁을 직감했다. 포스투무스의 둘째누이 대 아그리피나가 일찌감치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이자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인 게르마니쿠스와 결혼할 예정이며, 게르마니쿠스가 나이만 어릴 뿐 모든 조건에 부합한 차기황제라는 배경은 포스투무스가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어야 공고해질 운명이었다.
포스투무스의 매형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2년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하기 직전부터 이미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구도에 편입된 상태였다. 그는 정상적인 계획이었다면, 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요절하지 않을 경우, 동생 클라우디우스 1세와 함께 자연스럽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정식 일원이 될 상황이었고, 여자형제 리빌라가 일찌감치 포스투무스의 큰형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약혼해, 이중으로 아우구스투스와 가족관계를 맺을 예정이었다. 더해 게르마니쿠스는 아버지 요절과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수절 속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보호자가 되어 키우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어, 루키우스 카이사르 요절 뒤부터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무슨 일이 닥칠 경우,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대체자라는 확실한 정치적, 개인적 기반도 닦아 놓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성년식을 아직 치르지 않은 10대 중반의 소년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고령에 접어든 아우구스투스의 몸상태를 떠올리면, 시간은 촉박했다.
그 결과, 아우구스투스는 서기 2년 리비아의 친아들이자 자신이 6살때부터 친아들처럼 키운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공식 입양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입양된 티베리우스에게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있고, 소 드루수스가 자동적으로 율리우스 가문의 정식 일원이 됨에도 굳이 티베리우스의 법적 장남으로 입양됐다. 이는 곧 아우구스투스가 급사해도, 티베리우스의 법적 장남이며 티베리우스의 친조카인 게르마니쿠스가 다음 황제가 됨을 뜻했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친혈육 포스투무스도 함께 입양했다. 포스투무스는 티베리우스의 형제로 입양이 선포됐고,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우선적인 제왕교육이 진행될 예정임이 공표됐다. 이와 함께,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 중 막내 혈육인 클라우디우스 역시 집안 교통 정리 속에서 무주공산이 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이끌 새로운 가주로 낙점됐다. 이 당시,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종가격 지파로 위세가 대단했던 풀케르 가문이 포스투무스의 어머니 율리아가 숙청될 때, 간통을 했을 것이라고 아우구스투스와 측근들에게 어거지로 모함받아 가문의 몰락 귀족으로 추락하고, 네로 가문이 대귀족 일족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전(全) 클리엔테스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포스투무스의 친척동생 클라우디우스는 이때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에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로 개명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의견을 배려해주는 척 하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아우구스투스 가문을 원로원에게 공인받을 때, 클라우디우스 가문으로 현실적인 이유로 가게 된 클라우디우스마저도 카이사르 성씨를 자동으로 쓸 수 있는 기반을 모두 마련해줬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해 제위계승 순위가 크게 밀린 클라우디우스에게도 자신이 직접 가정교사가 되어 제왕교육을 비공식적으로 시키면서, 그가 장차 포스투무스와 게르마니쿠스가 나란히 황제가 될 때, 이들을 보좌할 황족으로 단련시켰다.
즉, 포스투무스 입양은 친혈육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어한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 사후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와 함께 로마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 낙점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3. 추방
양자입적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세 사람에게 제왕교육을 시작했고, 2살 차이의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가 각각 군사교육과 정치교육을 게르마니아와 로마에서 나눠 시작했다[7].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 포스투무스와 두 혈육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 형제에게 나란히 죽은 가이우스, 루키우스가 갖고 있던 특권과 명예가 보장되도록 조치를 취했다. 또 포스투무스에게는 19살이 되면 자동으로 그의 죽은 친형들이 가진 모든 권리를 보장받도록 해줬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계획은 포스투무스의 "ferocia(잔인함, 야만성)" 문제 때문에 미뤄지더니 결국 추방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끝나고 만다.포스투무스는 어린 시절부터 덩치가 크고 힘이 굉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고집이 세고, 폭력적인데다 학습 능력까지 지나치게 떨어졌다. 이는 그보다 어리지만 일찍부터 신체적 장애 문제로 군복무를 할 수 없게 된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훗날의 클라우디우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고민을 안겨줬다고 한다[8].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가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 그가 가진 선천적 능력을 잘 다듬길 바라며 함께 여행도 다니고 수영, 책읽기 등 취미활동도 즐겼는데, 이런 그의 계속된 노력에도 포스투무스의 행동거지와 잔인성은 날이 갈 수록 심해졌다. 이때 포스투무스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등으로 적대적 논쟁을 벌이는가하면, 스스로를 신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자처하는 과대망상 증세까지 보였다.
반면, 같은 시기의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황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클라우디우스는 10대 중반부터 다리에 힘이 붙으면서, 소아마비로 얻은 후천적 장애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9] 그는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웅변과 발성법을 지도한 훈련으로 말을 할때 더듬는 습관도 거의 고쳤고, 식사 자리에서 제국의 보고를 함께 듣고 이를 요약해 정리한 훈련에서는 비범한 모습을 보여줬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역사가 리비우스에게 클라우디우스에게 역사 교육을 부탁한 뒤, 클라우디우스가 리비우스와 리비우스 제자들 앞에서 보여준 태도와 실력 역시 황실의 자랑거리가 됐다. 이 무렵 열린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대형행사에서 소년 클라우디우스는 뛰어난 연설 솜씨로 아우구스투스를 기쁘게 했다. 따라서 이 행사에 참석한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기쁜 나머지, 서신을 통해 “손자가 나에게 너무 큰 기쁨을 줬다”며 감격스러운 감정을 드러냈고, 클라우디우스의 개인 비서로 자신의 직속 백인대장 수브리우스 플라부스[10]를 임명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어 그를 자신의 집무실에 끼고 살면서, 제국의 모든 보고를 함께 듣고 논하게 했고,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에게 "앞으로 자신과 상의할 내용이 있다면, 내 손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서신을 보내라."고 명해, 제국과 황실 행정 전체를 살피게 했다. 이어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에게는 특별히 본인이 옥타비아누스로 불린 시절의 공화정 말기 이야기까지 연구하도록 명했다.[11] 이렇게 되자 손자를 수치로 여긴 리비아, 아들에게 엄한 안토니아의 태도는 개선됐고, 이런 변화는 아우구스투스의 자랑이 됐고, 아우구스투스의 가정 교육법은 귀족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포스투무스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런 단점들로 인해 양자 입적 직후로 예정된 성년식은 19살이 될 때까지 늦춰지게 됐고, 어떤 후계교육도 제대로 시작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포스투무스는 낚시 외에는 모든 학문에 관심도 없는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만하고 무례한 언행을 내뱉고, 행동은 잔인하고 포악해져 광기 수준으로 통제 불능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궁 안은 포스투무스의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 황족들까지 노력하게 된다.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는 포스투무스를 제어했다. 특히, 티베리우스는 포스투무스를 확실히 제어했고,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꼼짝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당시 티베리우스는 로마를 비우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정식 후계자가 되어 공동 황제 자격으로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일리리쿰로 알려진 속주로 파견되었다. 설상가상 포스투무스의 둘째 누이 남편인 게르마니쿠스마저 재무관 취임 후 군복무와 후계자 수업을 위해, 일리리아 대반란에 파견됐다.
수에토니우스 등에 따르면 이 문제는 포스투무스가 티베리우스 곁에서 군복무를 위해 준비가 될 무렵 더 심해지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황궁 안의 관리, 황실 노예, 근위대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로마에 남은 남성 황족들과 그의 누이들까지 더 이상 포스투무스를 제어하기 힘들게 됐다고 한다.
그 결과, 포스투무스는 황궁 안에서 가장 숨기고 싶어한 비밀이 됐고, 그럴수록 이를 둘러싼 황실 내부의 격론은 심해졌다. 늘 그의 돌발적인 행동을 막는 것은 일상이 됐다. 아우구스투스 휘하 경비대가 매일 포스투무스 주변을 호위하면서 포스투무스의 난폭한 행동을 제지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가 뚜렷했다. 포스투무스의 맏누이 소 율리아가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와 대립한 일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됐다. 설상가상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가 경비대의 호위 속에서도 측근 앞에서 포스투무스에게 모욕을 당했다. 포스투무스는 이때 아우구스투스 부부에게 자신이 신이라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에게 그들 목을 졸라 죽이겠다고 괴성을 지르면서, 아우구스투스를 맹비난했다. 또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외에도 티베리우스를 모욕하는 발언을 퍼부었는데, 이때 아우구스투스 부부와 티베리우스에게는 역린이었던, 죽은 대 드루수스 요절 등을 입에 담으면서, 자신 역시 군에 들어가면 외삼촌처럼 암살될 것이라고 헛소리를 하면서, 반항을 넘어 미치광이처럼 굴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가족, 측근들과 포스투무스 문제를 상의 후, 포스투무스를 폼페이 근처의 휴양도시 수렌툼으로 내려 보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가 포스투무스를 추방하지 않은 이유는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가 포스투무스에게 기회를 주자고 하고, 주변에서도 요양이 필요해보인다고 진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스투무스는 자신이 로마에서 쫒겨난 것에 큰 불만을 품었다. 그는 로마에 살 때부터 잔인하고, 무례하고, 폭력적이었는데, 수렌툼 별장에 온 뒤부터는 더 거칠게 행동했다. 그는 주변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됐고, 수렌툼 별장 생활은 프라이토리아니가 관리하고 있더라도 전혀 통제되지 못했다. 포스투무스는 수렌툼에 방문한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쉬지 않고, 폭언을 하다가, 말싸움을 벌였고, 아우구스투스 부부와 황실 어른 전체를 싸잡아 조롱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 사건은 아우구스투스의 위신을 크게 추락시켰다. 이 일에 관하여, 동시대 원로원 의원으로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노빌레스 출신 역사가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아그리파는 끝내 할아버지이기도 한 아버지의 애정을 버렸고, 이제는 광기 수준으로 그 행동이 통제불능이 됐다."
며 안타까움을 표했다.서기 7년,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한 번 가족, 측근들을 불러 모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문제를 상의했다. 회의 후,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에게 민법상 재산상속권을 해석 여지에 따라 보유하게 해주되, 다른 모든 상속권을 박탈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포스투무스 처벌 문제를 직접 상정하면서, 원로원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그는 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 그리고 국가 수장으로서 포스투무스를 영구 추방하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혈육을 이탈리아와 코르시카 사이의 험준한 바위섬 플라나시아{오늘날의 피아노사 섬(Pianosa Island)으로 유배보냈다. 동시에 그는 포스투무스와 양자관계, 모든 특권을 파양했고, 후계자 티베리우스와의 모든 관계까지 완전히 파기시켰다. 따라서 포스투무스의 모든 유산상속권은 영구 박탈됐는데,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조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12]를 대비해 섬에 초소를 짓고 24시간 감시를 지시했다.
2.4. 처형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를 영구추방시킨 뒤, 호사가들의 주장과 달리, 단 한번도 자신의 친혈육에게 연락조차 취하지 않았고, 그를 복권시켜주지도 않았다.율리우스 가문의 피를 이은 혈육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이렇게 비정했던 이유에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 컸다. 이 중 직접적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위기감을 준 일은 루키우스 아우다시우스와 아시니우스 에피카두스가 기획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부자(父子) 암살미수 및 대 율리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모자(母子) 복권 계획'이었다. 아우다시우스, 에피카두스는 일리리아 대반란 진압 속에서 율리아와 포스투무스를 구출해, 이들을 앞세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부자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시도는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 도처에 깔아 놓은 정보망 덕에 무위에 그쳤다. 이어 반(反) 아우구스투스, 반 프린키파투스 성향의 호사가들이 7년 황량한 섬으로 유배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곧 복권될 전망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이는 곧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면 최초의 부자 상속으로 프린켑스 세나투스, 종신 호민관 특권, 로마군 최고 사령관, 폰티펙스 막시무스, 임페리움 등을 쥐게 될 티베리우스가 태생적으로 가진 정치적 약점이 가문의 멸문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질 아킬레스 건이 될 부분이라는 점에서, 아우구스투스와 그 측근들을 위기로 내몰았다.
더해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 주변이 복권을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컨트롤 할 수 없던 황족이었다. 그나마 그를 통제할 수 있던 가족은 계부이며 외삼촌인 티베리우스 정도였고, 포스투무스가 과대망상 속에서 적대적인 논쟁을 하지 않던 대상은 매형 게르마니쿠스와 매형의 동생으로 혈연상 친척인 클라우디우스일 뿐이었다. 설상가상 포스투무스는 추방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는 추방 전부터 포악하고 잔인했으며 고집 센 사람이었고, 힘이 황소도 때려 잡을 정도로 장사였다.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적대적인 논쟁을 펼치고, 자신의 법적 어머니인 의붓외할머니 리비아 면전에 대고 욕설과 협박을 퍼붓고, 여러 원로원 의원에게 거칠고, 스스로를 신으로 자처하면서 과대망상 증세까지 보이더니 잔인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서기 7년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황량한 섬으로 유배된 상태였는데, 이런 가운데에서도 포스투무스는 적당한 때에 복귀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 분위기조차 걷어찰 정도로 개선이 없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루키우스 아우다시우스, 아시니우스 에피카두스 반역을 겪고, 위기를 넘긴 뒤, 여러 측근들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이후 자신의 혈육 포스투무스를 살려두는 것이 상당히 위험하다고 깨달았다. 포스투무스와 대 율리아를 앞세워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를 제거하려고 한 실제 반란 시도 직전, 외손녀 소 율리아와 그녀의 남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모종의 사건으로 숙청된 상황 등은 그에 앞서 추방됐던 포스투무스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 티베리우스가 가진 불안정된 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죽기 전 티베리우스에게 포스투무스를 처형하라고 조언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가 이를 따를 생각이 있다고 한들, 이것은 정치적 부담이 상당히 크고, 취약한 정통성에 더 큰 타격만 입히는 상황인 터라, 아우구스투스가 은밀히 손을 쓰지 않는 이상 매우 어려운 조치였다.
14년 봄부터 아우구스투스는 건강이 악화되자, 후계자이자 아들 티베리우스를 전선에서 로마로 소환할 준비를 주변에 지시한다. 그러면서 그는 뒤로는 본인 직속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들에게 처형 집행을 준비시키고 명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상당히 치밀하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을 준비했다. 먼저 날 때부터 손수 키워온 터라 포스투무스에게 냉정한들 애정을 보인 티베리우스가 방해하지 못하게끔, 티베리우스를 일리리툼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니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로 로마로 소환되기 전, 일리리쿰으로 향했던 터라, 이 사실을 전혀 몰랐고, 티베리우스의 친아들로 제왕교육을 받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자신과 동고동락해온 경쟁자이자 친구 포스투무스 미래를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아우구스투스의 명을 받은 처형단이 비밀리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유배된 섬으로 향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급히 로마로 소환된 직후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양부 아우구스투스에게 포스투무스 문제를 들었을 때에도, 그는 아직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이 이미 시작됨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임종 전 측근들과 티베리우스에게 딸 율리아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고, 자신이 이미 포스투무스를 포기했음을 여러 번에 걸쳐 밝혔다. 이때 그는 율리아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해 외동딸을 낳은 것을 후회까지 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한때 아내였던 율리아를 동정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장례식이 진행될 무렵, 세간에 후일 티베리우스는 그가 양부의 조언에 따라 백인대장 등을 보내 포스투무스를 죽였다고 알려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이 완료됐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추방된 섬에서 엄격한 보안 하에 구금되어 있다가, 연락 한 번 없던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처형단에게 맨손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교살됐다. 그는 덩치가 크고, 힘이 장사였기 때문에, 이때 아우구스투스가 명을 내려 보낸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사들은 겨우 이 명령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후, 포스투무스 사형과 죽음 사실이 처형을 집행한 아우구스투스 휘하 프라이토리아니는 갓 장례를 마치고 취임식을 갖기 전의 티베리우스에게 보고됐다. 이를 보고한 사람은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백인대장 중 아우구스투스의 직접 명령만 하달받아 담당한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13]였다.
이때 이 소식을 보고받은 티베리우스는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티베리우스는 이를 독대 형태로 보고받을 때, 평소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임에도 동요하다가 격분했다.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을 아들 소 드루수스의 낭독 아래 원로원 앞에서 들으면서, 그는 자존심이 크게 상해 있었고, 충격이 컸었기 때문에, 이 보고를 듣자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아득해진 나머지, 그들에게 욕을 하거나 따지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이 보고를 크리스푸스에게 들을 때, 크리스푸스로부터 이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공동황제였을 때 양부가 비밀리에 이미 명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14]의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보고를 들은 직후, 티베리우스는 이 문제를 곧바로 원로원에 제기해, 아우구스투스 측근들에게 따지기로 했다. 원로원은 급히 긴급 소집되었다.
긴급 소집 직후, 티베리우스는 모두의 앞에서 자신이 들은 것을 솔직히 공개했다. 하지만 원로원 반응은 혼동 속에서도 대체로 시큰둥하거나, 침묵 속에서 비평을 자제한 모습으로 흐르다가 티베리우스를 의심하는 것 같은 분위기로 진행됐다.
아우구스투스가 명을 내렸던 부분이었고, 아우구스투스 사후 누군가 만약 포스투무스를 제거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포스투무스는 상속권이 박탈당하지 않았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어, 아우구스투스의 조치는 곧 티베리우스를 징검다리 삼아 게르마니쿠스에게 제위를 가게 할 승계 구도에 치명타로 갈 염려가 컸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명예를 중요시했고, 이를 덮어둘 경우 자신에게 닥칠 정치적 위험이 크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원로원에 밝히면서, 자신이 한때 아들이었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죽이지 않았다고 억울함을 이렇게 호소했다.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전 로마로 소환되었을 때, 여러분도 알고 계시듯이 일리리쿰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이 명령이 명확히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로 내려진 것을 증명한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원로원 대다수는 이 성명에 이은 증거물 공개에도 티베리우스가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기 전에 살해됐고, 그가 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티베리우스가 이 사건의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로마인과 오늘날 로마사 연구자 여론도 같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우스 가문원을 죽이라고 조언한 것을 믿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라는 태생적인 지위가 티베리우스와 리비아에게 큰 위험이 된 건 분명했기에 아마 티베리우스 또는 리비아 아니면 둘 다의 의도에 의해서 살해되었을 걸로 추정하고 있다. 로마인의 생각을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타키투스의 <연대기> 속 기록과 이를 그대로 참조해 적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도 같다.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 측근인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수도 로마를 떠나면서 포스투무스가 있는 플라나시아로 은밀히 찾아갔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가 악녀로 주장된 근거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이 이야기에 따르면 리비아는 아들 티베리우스의 경쟁자 복귀를 막기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따곤 했던 무화과나무 열매들에 독약을 발라 아우구스투스를 독살하고 포스투무스 석방을 추진한 막시무스까지 제거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별로 신빙성도 없다고 오늘날 로빈 레인 폭스 등 로마사 권위자들은 일관되게 부정한다.
분명한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명을 내렸고, 티베리우스를 이를 막지 않았다고 타협책으로 사건을 보더라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이 아우구스투스라는 원수정의 설계자가 죽은 후 첫 즉위라는 불안정성에서 이루어진 불가피한 조치라고 생각되었다는 진실이다.
3. 사건의 여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 사건은 타키투스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암울한 티베리우스 시대의 서막이 됐다. 그는 이를 이렇게 평했다."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은 신임 프린켑스가 저지른 첫번째 범죄(Primum Facinus novi Principatus)였다."
타키투스, <연대기>
타키투스, <연대기>
타키투스가 이렇게 평한 이유는 그가 티베리우스를 진짜 미워하고 싫어한 개인적 감정도 있지만, 포스투무스가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가문에서 추방되고 모든 특권이 박탈되었어도, 로마법상으로는 엄연히 유족으로 상속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배경도 한몫했다. 즉, 포스투무스는 추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민법적으로 상속권을 박탈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상속 재산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배경은 아우구스투스가 생전 유언장에 포스투무스를 비롯해, 친딸 율리아의 상속권을 박탈해 상속을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까지 유언장 조작을 했다는 뒷말이 오고가게 했다. 이때 유언장 조작의 배후로 의심받은 인사는 티베리우스의 친구,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사위인 황족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였고, 티베리우스 정적들은 이를 빌미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의심해 이는 티베리우스 치세 초기부터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형제 반역사건 등 굵직한 반역재판과 처형이 연달아 터진 분수령이 됐다.
더군다나, 포스투무스가 처형된 뒤, 티베리우스가 정면돌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자신보다 오래 살지 못하도록 명령한 사람이 아우구스투스라는 성명을 발표한 일도 문제가 됐다. 왜냐하면 이 발표가 나온 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사이의 불화가 호사가들을 통해 나오면서,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내가 로마인에게 저 굼뜬 주둥이를 가진 아들에게 제위를 넘기다니. 불쌍한 로마인들이여." 같은 온갖 뜬소문이 판을 치고, 이 과정 속에서 근위대장 세야누스가 공안 정국을 꾸려, 이 문제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단명이 초래됐기 때문.
이런 정치적 여파처럼 황실 안에서도 이 사건은 티베리우스 시대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은 유가족 중 포스투무스의 어머니 대 율리아에게 사건이 가장 먼저 전달됐는데, 이때 아버지와 전남편에게 아들이 교살됐다는 소식에, 대 율리아는 홧병으로 건강이 악화됐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와 전남편을 저주하다가 죽었다. 당시 티베리우스의 발표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포스투무스의 둘째누나 대 아그리피나 역시 후일 남편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한 직후부터 동생을 죽인 티베리우스가 남편까지 독살했다며 이를 갈고, 벤데타를 다짐했다.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 역시도 후일 아버지가 간신인 근위대장 세야누스를 지나치게 신임하자 들이박으면서 이 사건을 떠올려 아버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경계하는 이중적 태도를 은밀히 취했다. 그리고 이는 이후 세야누스, 네로가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아우구스투스 핏줄을 자주 살해하게 되는 선례를 만들어내었기에 결과적으로 왕조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왕조사 관점이 아닌 티베리우스 치세를 볼 때도 사건은 그림자가 짙었다. 14년 8월에 벌어진 이 결정과 일련의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냉소적이고 거만한 위선자' 이미지 탓에 원로원 내 귀족들에게 대놓고 미움을 받던 티베리우스의 이미지[15]를 "친족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프린켑스"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이때 티베리우스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신이 친족을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파렴치한이 아니라고 수없이 강조했다. 그렇지만 원로원 안팎에서는 당시 아우구스투스가 서거 전에 함께 여행했던, 원로원 의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저택에서 급사한 일과 엮여, 티베리우스가 포스투무스를 죽이면서 입막음을 하고자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죽였을 것이라는 괴담까지 퍼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후대의 타키투스가 <연대기>에 아우구스투스가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여행을 떠났을 때 포스투무스를 몰래 만났고, 기원후 14년 여름에 파비우스가 죽은 것은 직간접적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신뢰를 저버린 것에 분노한 결과라고 전하면서, 티베리우스가 현대까지도 이 사건의 흑막 내지 진범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사건에 기름을 부은 것은 로마시대의 역사가들이나 일부 현대 연구자들의 추정이다. 다만, 티베리우스 입장이 아닌 제3자 입장에서 보면 티베리우스는 진짜 이 처형을 몰랐다. 따라서 고대 사가 중 일부와 일부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를 종종 의심 중이다. 그렇지만 리비아가 주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 항상 그녀가 무화과에 독을 발라 남편을 죽였다는 주장이 세트로 언급되고 있고,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 생전과 사후 모두 아우구스투스 직속 프라이토리아니 경호대를 통제하고 명하지 못한 점은 분명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숙청과 처형으로 최대 수혜자가 된 리비아, 티베리우스 모자가 이 사건을 명했다고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많다는 평이다.
4. 평가 및 여담
포스투무스는 추방되기 전부터 잔인하고 난폭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았지만, 외조부 사망 직후 살해된 까닭에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자신의 대표적인 책 <연대기>에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은 신임 프린켑스가 저지른 첫번째 범죄(Primum Facinus novi Principatus)였다."고 이 사건을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평가처럼 당시 원로원은 역시 티베리우스를 "친족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프린켑스"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그가 살해된 직후, 아우구스투스 생전의 걱정대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노예였던 클레멘스는 주인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해 티베리우스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콤모두스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클레멘스의 반란은 포스투무스 사후 2년이 지난 뒤 일어났고 클레멘스가 포스투무스를 사칭해 일으킨 반란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멀쩡한 정상인으로 나오며, 잔혹하기는 커녕 정의감 강한 성격으로 주인공 클라우디우스를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유이하게 도와주는 형으로 나온다. 하지만 자기 친아들 티베리우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경쟁자를 모조리 말살하는 악녀 리비아 드루실라의 흉계에 빠져 정신병자라는 누명을 쓰고 유폐되었다가 살해되는 것으로 나온다.
반면, 영국의 1968년 사극 <더 시저>에서는 실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해, 데릭 존 뉴어크가 맡은 포스투무스가 제위 계승자인 티베리우스의 걸림돌이며 장애라는 점을 우려한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사형 명령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1] 포스투무스(Postumus)는 '사후의 아이'라는 의미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즉, 유복자로 태어난 경우, 붙여진 별칭이자 이름.[2] 출생 당시 이름[3] 포스투무스는 출생 직후 뒤에 추가한 이름[4]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양자 입적 된 이후 개명한 이름 중 정식이름.[5] 양자 입적 후 사용된 또 다른 이름. 통상적으로 많이 사용된 휘이다.[6] 양자 입적 후 사용된 또 다른 이름. 로마식 이름 표기에 의해 사용되기도 함.[7]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를 따라 게르마니아 전쟁이 벌어진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 일대로 이동해 야전총사령관 티베리우스 전속부관 겸 사령관이 됐다. 동시에 소 드루수스는 로마에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사무실을 개소하고, 황궁 안의 아우구스투스 집무실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지도 아래 행정을 배우고, 원로원 상임위원에 임명돼 아우구스투스 곁에서 모든 발언권을 보장받고 원로원을 상대하는 정치술을 배웠다고 한다.[8] 물론 두 왕자는 황실의 고민거리였음에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포스투무스는 몸은 멀쩡하지만 집안 골칫거리 또는 망나니였던 반면, 클라우디우스는 몸이 불편해 방치되듯 친할머니, 어머니, 누나에게 미움을 받아도 아우구스투스의 여러 편지 내용과 발언처럼 가끔 자신에게 엉뚱한 말을 해도, 정신은 훌륭하고 명석함과 치밀함은 먼치킨 아우구스투스조차 놀랄 정도였다.[9] 물론, 이 역시 지팡이에 의존하지 않고, 왼쪽 무릎이 흔들리면서, 천천히 걷는 정도였다.[10] 아우구스투스의 명을 수행한 백인대장, 대대장으로, 기원전 9년 요절한 대 드루수스 일가의 측근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형제의 뒷일을 모두 맡겼고, 클라우디우스의 역사학 스승으로 리비우스를 모시기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방문하기 전, 먼저 리비우스를 만나 그 뜻을 전한 일도 책임졌다.[11] 클라우디우스는 이때 키케로, 소 카토 등의 서신과 저서를 아우구스투스 개인 서재에서 탐닉하고,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화정 후기의 로마 내전, 정복 전쟁을 다룬 역사서를 출판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허락에도 그는 책을 쓰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에도 할머니 리비아, 어머니 안토니아가 이런 저술이 아우구스투스가 서거한 뒤에 꼬투리 잡힐 위험이 크며, 클라우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자 안토니우스의 외손자라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문제가 됨을 걱정해 만류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는 본인과 가문의 미래를 위해 실제 저술은 하지 못했다.[12] 포스투무스를 탈출시켜 반란에 이용하는 일 등[13] 동시대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의 조카이며 양자이다.[14] 아우구스투스[15] 티베리우스는 동생 드루수스와 마찬가지로 외모가 잘생기고 키가 상당히 컸으며 체격도 좋았는데, 젊은 시절부터 원로원에게 대놓고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성격 자체가 상당히 과묵하고, 아부를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 여기에다 상대와 대화를 주고 받을 때 천천히 말하면서 손 제스처를 많이 쓰고, 상대의 두 눈을 계속 응시해서 그게 싫다고 미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그를 유년기 때부터 친아들처럼 키운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생전 여러 번에 걸쳐 티베리우스를 변호하고, 아버지로서 티베리우스에 대한 오해를 거둬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이 키운 티베리우스의 이런 행동을 썩 마음에 들지 않아했는데, 재밌게도 두 사람은 성격이 많이 비슷해 전반적으로 차가운 얼음같을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차이가 있다면,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에는 정적들과 달리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진심으로 굉장히 따뜻한데다, 원로원의 각종 아부를 흔쾌히 받아줄 정도로 ‘연기’를 잘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