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민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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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틴어: Concilium Plebis.영어: Plebeian Council.
로마 공화국의 4개 민회 중 한 형태. 플레브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결성되었다.
2. 상세
기원전 494년, 파트리키의 권력 독점으로 인해 자신들의 의사가 정치에 전혀 반영되지 않고, 빚을 갚지 못한 시민을 노예로 삼는 파트리키들의 전횡에 분노한 플레브스들이 루키우스 시시니우스 벨루투스의 인도하에 로마를 집단으로 떠나기로 결의하고, 아니오 강 뒤편에 있는 성산(聖山)[1]에 집결했다. 그들은 산 꼭대기에 요새를 세우고 도랑을 파, 로마와는 별도의 도시를 세우려 했다.이로 인해 로마가 망할 지경에 몰리자, 파트리키들은 이들과 협상하기로 했다. 집정관 메네니우스 라나투스 아그리파가 성산으로 가서 평민 대표들과 접견했다. 그는 로마를 신체에 비유하며, 평민과 귀족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죽는다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테니 로마로 귀환해달라고 호소했다. 평민들은 자신들이 지배층만큼 중요하다는 걸 암시하는 이 비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양측은 곧 합의에 이르렀다.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민관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고, 호민관에게 해를 입히는 자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또한 로마 시민은 빚을 갚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노예로 전락할 수 없었고, 채찍형을 가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전쟁터에 간 시민의 재산을 몰수하는 행위도 금지되었다.
이후 평민들은 매년 아벤티노 언덕에 호민관이 소집한 평민회에 참여했다. 호민관은 평민회를 소집한 뒤 자신이 고안한 정책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고 평민들의 의견을 들었고, 범죄자를 기소하기도 했다. 호민관이 평민회에 제안한 법안은 로가티오네스(Rogationes: 요청)로 일컬어졌고, 평민회가 통과한 법률은 플레비스키타(Plebiscita: 인가)로 일컬어졌다. 한편, 평민회는 집정관 또는 법무관이 발의한 레게스(Leges)를 검토 후 승인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매년 하반기에 호민관을 선출했다. 초기에는 2~5명의 호민관이 평민회에서 선출되었다가, 기원전 457년부터 매년 10명의 호민관을 선출하는 게 관례로 굳어졌다. 기존에 호민관을 보조하는 역할만 맡다가 로마시의 곡물과 물 공급을 감독하고 시민들에게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 등 각종 오락과 축제를 제공하는 임무도 맡게 된 조영관의 경우, 처음에는 평민회에서 선출되었지만, 기원전 367년 이후 파트리키로 구성된 수석 조영관(Curule aediles) 2명과 플레브스로 구성된 평민 조영관(Plebeian aediles) 2명이 로마 시민이 속한 35개 부족을 기반으로 조직된 부족 선거(comitia populi tributa)에서 선출되었다.
평민회에 참석한 플레브스들은 초창기에는 씨족별로 구성되는 쿠리아별로 조직되었다. 이로 인해 쿠리아의 최상단에 위치한 파트로누스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서 평민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자, 기원전 471년부터 부족별로 조직하기로 해 파트리키로부터의 독립을 꾀했다. 한편, 이 시기에 부족을 기반으로 조직된 트리부스회도 등장했다. 트리부스회는 귀족과 평민 모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참석자 대부분은 평민이었다. 그럼에도 트리부스회가 도입된 이유는 평민회에서 결정된 법안은 오직 평민에게만 적용되었기에 귀족들에게도 적용되는 법률을 제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리부스회에서 체결된 법안 조차도 원로원으로부터 번번이 기각되었기 일쑤였기 때문에, 플레브스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다.
기원전 287년, 빚에 시달리던 플레브스들이 국가가 빚을 일정부분 탕감하도록 하는 법안을 트리부스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채권자 계급에 속해 있던 원로원 의원들은 플레브스의 요구를 따르길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파업을 선언하고 야니쿨룸 언덕으로 이동했다. 때마침 루카니아인과의 전쟁이 발발해서 병력을 신속히 모집해야 했던 원로원은 사태 수습을 위해 호민관 출신의 퀸투스 호르텐시우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했다. 호르텐시우스는 평민들을 설득해 로마로 귀환하게 한 뒤 호르텐시우스 법을 공표했다. 이에 따르면, 평민회가 결정한 법안은 원로원이 거부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평민의 지위는 강화되었고, 장차 거대한 재산과 영향력을 구축하여 기존의 귀족과 맞먹는 위세를 떨치게 될 노빌레스가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 이래, 급진적인 호민관들은 원로원의 동의를 받지 않고도 평민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면 원로원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이용해 로마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기득권 세력은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해 급진 정책을 추진한 자들을 '로마의 적'으로 간주하여 모조리 처단했다.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독재관에 오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폐지하여 평민회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하지만 기원전 70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술라의 개혁을 폐지할 때 호르텐시우스법을 부활시켰다.
그 후 로마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지중해 세계의 절대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종신 호민관 특권을 손아귀에 넣은 것을 활용해 평민회를 절대적으로 통제하고 입법권과 사법권을 원로원에 넘겨버리면서, 평민회는 무력한 집회로 전락했다. 이후에도 종종 열리기는 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고안한 법안이 평민들에게 소개되고 만장일치로 승인되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고, 그나마도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티베리우스가 즉위 직후 폐지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 현재 이탈리아 로마 몬테 사크로(Monte Sac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