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 |||
출생 | 기원전 519년 | ||
로마 왕국 로마 | |||
사망 | 기원전 430년 (향년 88~89세) | ||
로마 공화국 로마 |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460년 | |||
고대 로마 독재관 | |||
기원전 458년 | |||
고대 로마 독재관 | |||
기원전 439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부모 | 父: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母: 이름 미상 | |
배우자 | 라킬리아 | ||
자녀 | 3명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
[clearfix]
1. 개요
고대 로마의 집정관, 독재관.2. 생애
로마 왕국 시대 때 알바 롱가에서 로마로 이주한 퀸크티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루키우스 퀸크티우스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졌을 뿐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킨킨나투스는 곱슬머리(Cincinnatus)라는 의미가 담긴 라틴어 용어로, 그가 처음으로 이 코그노멘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라킬리아(Racilla)와 결혼하여 카이소 퀸크티우스,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포에누스 킨킨나투스를 낳았다.기원전 460년대 로마 정계는 파트리키의 권익을 준수하고 평민들의 권익 요구를 억누르려는 정파와 평민들의 권리를 쟁취하고 귀족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막으려는 정파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를 비롯한 퀸크티우스 일족은 확고한 귀족 정파로, 평민들의 대표인 호민관과 여러 차례 마찰을 벌였다. 그러던 기원전 461년 평민들이 호민관들을 내세워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성문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하자, 귀족들은 갱단을 고용해 이들을 구타했다. 이에 아피우스 헤르도니우스가 무법자 및 반군을 이끌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점거하고 원로원에 대적했다.
기원전 460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가 반란 진압에 착수했다가 도중에 전사했고, 킨킨나투스가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어 남은 임기를 채웠다. 이후 킨킨나투스의 장남 카이소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호민관을 구타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기원전 462년 집정관을 역임했던 루키우스 루크레티우스 트리키피티누스는 카이소의 타고난 재능과 군사적 공적이 뛰어나고 나이가 아직 어려 미숙한 점이 많은 점을 들어 너무 가혹하게 처분해서는 안 된다고 변호했고, 킨킨나투스도 아들의 과잉 행동에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전 호민관 마르쿠스 볼시우스 픽토르가 카이소가 자신의 형 루키우스 볼시우스를 폭행하는 바람에 루키우스가 죽어버렸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재판 분위기가 불리하게 흘러가자, 카이소는 에트루리아로 망명했다. 이후 킨킨나투스는 아들의 죄를 대신 책임지고 막대한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아들의 일로 신망을 잃어버린 킨킨나투스는 티베르 강 오른쪽 둑에 4에이커 가량의 농지를 구입한 뒤 그곳으로 내려가서 농사에 전념했다. 그러던 기원전 458년, 이탈리아 중부의 로마 동쪽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퀴족이 로마를 공격했다. 집정관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에스퀼리누스 아우구리누스(Lucius Minucius Esquilinus Augurinus)가 이들을 진압하러 출진했으나, 알반 언덕에 도착한 뒤 전투를 당장 벌이지 않고 시간을 지체했다가 그 사이에 아이퀴족이 언덕 주변으로 이동하여 성공적으로 포위해버렸다. 당시 다른 집정관인 가이우스 네우티우스 루틸루스는 아이퀴족이 탈환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 투스쿨룸에 보내졌기 때문에 아이퀴족에게 포위된 아군을 제때에 구조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원로원은 서둘러 독재관을 선출하기로 결의하고 킨킨나투스에게 사절을 보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킨킨나투스는 로마에서 온 대표단이 접근했을 때 자신의 밭을 갈고 있었다. 그는 사절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듣자마자 아내 라킬리아에게 오두막에서 자신의 토가를 빨리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후 로마 시로 달려간 그는 모든 가게에 문을 닫게 한 뒤 군인 연령의 모든 남성이 5일분의 배급을 제공받은 채 완전 무장하고 캄푸스 마르티우스 광장에 집결하도록 했다. 이후 루키우스 타르퀴티우스를 기병장관으로 삼아서 기병대를 지휘하게 한 뒤 집정관 아우구리누스를 구출하고자 출진해 알기두스 산 전투에서 아이퀴 족을 물리쳤다. 그 후 군대를 해산하고 농장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까지 걸린 기간은 불과 15일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439년, 원로원은 로마에 드리운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전직 집정관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에스퀼리누스 아우구리누스를 곡물 공급 담당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그는 평민 출신의 스푸리우스 마엘리우스가 도시 밖에서 많은 양의 밀을 사재기하는 바람에 식량난을 해결하지 못했다. 마엘리우스는 그렇게 사들인 밀을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에게만 싼 가격에 팔거나 심지어 무료로 나눠주면서 그들의 환심을 샀다. 이에 세간에서는 그가 조만간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전복하고 왕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원로원은 킨킨나투스를 독재관으로 선임하고 로마로 소환했고, 킨킨나투스는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아알라를 기병장관으로 지명한 후 스푸리우스 마엘리우스를 체포하라고 지시한 뒤 다른 귀족들과 함께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도시 주변의 여러 요새를 수비했다. 마엘리우스는 자신을 잡으려는 장교들을 피해 군중 속으로 도망쳤지만, 군중을 뚫고 쫓아온 아알라와 장교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킨킨나투스는 식량난 해결에 총력을 기울였고, 21일만에 문제가 해결되자 모든 직무에서 물러나 은퇴했다.
그 후, 기원전 430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2.1. 사후
킨킨나투스의 장남 카이소는 에트루리아로 망명한 뒤 로마로 복귀하려 시도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지에서 사망했다. 반면 차남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는 기원전 42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삼남 티투스 퀸크티우스 포에누스 킨킨나투스는 기원전 431년과 기원전 42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3. 여담
[오류] 독재관은 그럴만한 자리가 아니었고 킨킨나투스 역시도 그만한 위상은 아니었다. 독재관은 그 자체로 엄청난 위상을 가진 자리이긴 했지만 반대로 자신이 선임된 문제 외의 일을 건드릴 수 없었고 일단 재임중에는 막강했지만 재임 후에는 독재관으로서의 행보에 따른 공과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자리였다. 킨킨나투스 본인도 장남이 저지른 일 때문에 정치적으로 몰락한 상태였다. 오히려 그런 신세인데도 두 번이나 독재관을 지낸 것은 비록 정식으로 공직을 맡을 수는 없을 만큼 신망을 잃었지만(로마의 공직을 맡으려면 선거로 당선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독재관에 임명되고 또 독재관인 그를 따라줄 정도로는 아직 영향력이 남아있었기에 괜히 독재자가 되려고 했다가 '저 자는 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리 듣고 더 망하느니 그정도 영향력에 만족하고 살았다고 보면 된다. 아닌말로 본인이 두 번째 독재관이 된 이유도 쿠데타 음모를 진압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러고도 독재자가 되고 싶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첫번째 독재관 임기때는 67세, 두번째 독재관 임기때는 80세라 나이도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