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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클리오스 왕조 Ηράκλεια δυναστεία Domus Heracliana | ||
610년 ~ 695년, 705년 ~ 711년 | ||
성씨 | 이라클리오스 | |
창건자 | 이라클리오스 (610~641) | |
주요 황제 | 이라클리오스 콘스탄스 2세 콘스탄티노스 4세 유스티니아노스 2세 | |
로마 제국의 왕조 | ||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 20년간의 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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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세습왕조. 610년부터 695년, 705년부터 711년까지 90여 년간 제국을 통치했다. 이 왕조는 창시자인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전임인 포카스의 폭정을 끝장내고 사산 왕조의 침략으로 멸망의 위기에 몰린 나라를 구원했으나, 새로운 숙적인 이슬람의 침략에 고전했고, 막판엔 20년간의 혼란을 초래했다.영어 위키백과 로마 역대 황제 문서에서는 본격적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함으로써 동로마 제국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아된 시점인 이라클리오스 왕조부터의 로마 황제들을 후기 동방 황제(Later eastern emperors)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1]
2. 역사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의 개별 항목 참조
2.1. 이라클리오스(610~641)
아르메니아 혈통의 군인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동방 전선에서 활약했고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의해 아프리카 총독부 총독에 선임된 대 헤라클리우스였다. 602년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이래 폭정을 일삼고 사산 왕조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제국이 쇠약해지자, 608년 부친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고령인 부친을 대신하여 함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진군하여 2년간 세력을 규합한 뒤, 610년 10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해 원로원의 호응에 힘입어 포카스를 잡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통치 초기엔 연이은 실패를 맛보았다.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아드리아 해 서부와 에게 해 남부, 동부 지역까지 밀려들었다.(동로마-아바르 전쟁) 싱기두눔(베오그라드), 비미나키움(코스토라크), 나이수스(니시), 사르디카(소피아) 등 여러 도시가 함락되었고, 614년 살로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만 테살로니키만은 가까스로 구해낼 수 있었다.사산 왕조군 역시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613년 동로마군은 안티오키아에서 참패했고, 사산 왕조군은 여세를 몰아 아르메니아, 다마스쿠스, 타르수스에 이어 예루살렘을 공략한 뒤 수많은 성당을 파괴하고 성십자가와 성창 등을 크테시폰으로 가져갔다. 사산 왕조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칼케돈 외곽에 장기 주둔지를 건설하였고, 시리아 일대를 석권했다. 618년 이집트로 쳐들어간 그들은 니키타스의 결사적인 항전을 격퇴하여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호스로 2세는 기세등등하여 이라클리오스를 조롱하는 서신을 보냈고, 이라클리오스 역시 갈수록 악화되는 전황에 좌절하여 한때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보물을 실은 배가 풍랑으로 가라앉자, 마음을 바꿔 끝까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622년, 이라클리오스는 교회와 시민으로부터 많은 기부를 받고 아야 소피아의 금까지도 벗겨가며 군비를 충당해 군대를 재편했다. 그 후 그는 전설적인 활약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페르시아에 대한 반격을 위해 자신의 군대를 유럽에서 아시아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에게 많은 조공을 바침으로써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후 622년 봄 칼케돈에 주둔한 적을 회피하여 군대를 실은 함대를 이오니아 해안으로 이끌어 이소스 섬에 상륙했다. 그곳에서 고된 훈련을 실시한 뒤 가을에 북상하여 카파도키아 고원에서 샤흐르바라즈의 사산 왕조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시리아의 많은 영토를 회복했다. 623년 초, 이라클리오스는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샤흐르바라즈를 상대로 다시 한 번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바르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자, 그는 일단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간 뒤 공물을 늘리고 인질을 바침으로써 잠잠하게 하였다. 이후 재차 적의 추격을 회피해 타푸수스 산맥을 돌파하여 메소포티마아로 진격, 간자크에서 페르시아 궁전을 파괴하였고, 주변의 도시들에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후 크테시폰까지 진격하려 했지만, 샤흐르바라즈가 보급선을 차단하자 카스피 해의 서쪽 해안으로 철수했다. 624년 반 호수를 돌아서 아르사니아스 강을 따라 약 320km를 내려가 마티로폴리스와 아미다를 점령했다. 625년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다가, 아다나 북쪽에서 페르시아군과 맞붙었다. 처음에는 페르시아군이 동로마군의 선봉대를 섬멸하면서 그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자 이라클리오스가 직접 날아오는 화살을 무릅쓰고 말을 몰아 유프라테스강을 도하한 후 적군을 도륙했고, 이에 사기가 오른 장병들의 맹돌격으로 페르시아군이 무너졌다. 샤흐르바라즈는 이 광경을 보고 이라클리오스를 일전에 배신하고 사산 왕조군의 향도 노릇을 하던 그리스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 황제를 보라! 그는 화살과 창을 모루처럼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그리하여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뒤, 이라클리오스는 트레비존드로 후퇴했다. 626년, 호스로 2세는 아바르족과 힘을 합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했다. 이에 이라클리오스는 부대를 세 개로 나눠서 한 부대를 수도로 보내고, 동생 테오도로스에겐 페르시아 장군 샤힌이 지휘하는 5만 가량의 징집병과 상대하게 했다. 그리고 남은 한 부대를 직접 이끌고 아르메니아와 캅카스를 거쳐 페르시아로 쳐들어갔다. 테오도로스는 샤힌의 징집병들을 섬멸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군과 시민들도 아바르족의 맹공을 잘 막아냈으며, 동로마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를 섬멸하여 그들이 바다를 건너 수도에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아바르족은 거듭된 패전에 지쳐 돌아갔고, 사산 왕조군 역시 본토가 털리게 생기자 퇴각했다.(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26년 겨울, 이라클리오스는 딸 에피파니아를 투르크 족장 지벨에게 시집보내고 상당한 기병을 받아냈다. 627년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던 중, 호스로 2세가 샤흐르바라즈에게 당장 복귀하라고 명령하는 문서를 가지고 가던 적의 전령을 붙잡았다. 그는 "거기서 계속 머물고 있어라"는 명령서로 위조한 뒤 다른 전령을 샤흐르바라즈에게 보냈고, 샤흐르바라즈는 이를 믿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 후 약탈을 자행한 뒤, 니네베 시의 폐허 근처에서 페르시아군과 교전했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던 중, 라자테스가 이라클리오스에게 덤벼들었다. 이에 이라클리오스는 단칼에 라자테스의 목을 베었고, 해가 질 무렵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 이후 크테시폰으로 쳐들어가서 궁전을 약탈했다. 얼마 후 사산 왕조에서 궁중 쿠데타가 일어나 호스로 2세가 시해되었고, 뒤이어 등극한 샤한샤 카바드 2세는 화친을 요청했다. 이후의 협상 끝에, 이라클리오스는 모든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성십자가 등의 성유물도 돌려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628년 9월 14일 황제가 수도에 입성하여 개선식을 거행하였고, 성십자가는 아야 소피아 성당의 옥상에 올려졌다.
이렇듯 이라클리오스는 실로 전설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제국을 구원했다. 그러나 수년 후 아라비아 반도에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앞세운 이슬람의 폭풍에 직면했을 때,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목숨 걸고 싸운 여파로 병마에 시달리고 노쇠해져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지 못 했다. 그래서 부하들이 황제를 대신하여 아랍군과 맞섰으나,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634년 아랍군은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다마스쿠스를 공략했다. 제국군은 이에 보복하고자 636년 5월 이슬람 세력의 본거지로 진격했으나, 636년 8월 20일 야르무크 전투에서 전군이 궤멸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고, 뒤이어 638년 예루살렘 마저 상실했다.
황제는 어떻게든 아랍의 침략에 대항하려면 전 국민이 단합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오래도록 지속된 정통교회와 단성론의 대립을 종식하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세르기오스가 고안한 단의론을 정식 교리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단의론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서방 교회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말았고, 이라클리오스는 641년 2월 11일 실의에 빠진 채 숨을 거두었다.
2.2. 641년 네 황제의 해
이라클리오스가 고통 속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 후계자로는 첫 황후 파비아 에우도키아로부터 태어난 장남 콘스탄티노스 3세가 613년부터 공동 황제로서 공인받았다. 하지만 이라클리오스의 조카이자 두번째 황후였던 마르티나는 의붓아들인 그가 황위에 오른다면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 위험해지리라 여겼다. 그녀는 이라클리오스의 사생아 아탈라리코스와 조카 테오도로스와 함께 이라클로나스를 황제로 즉위시키는 음모를 꾸몄다. 마르티나는 남편을 압박했고, 이미 기력을 상실한 데다 폐병에 시달리는 콘스탄티노스를 걱정한 이라클리오스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이리하여 마르티나의 아들 이라클로나스는 638년 7월 콘스탄티노스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여기에 마르티나의 딸인 아우구스티나와 아나스타시아도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받았다.641년 2월 11일 이라클리오스가 사망할 때, 마르티나는 다 죽어가는 남편을 압박해서 콘스탄티노스와 이라클로나스와 함께 자신을 공동 통치자로 지정하는 유언장을 작성하게 했다. 그 후 피루스 총대주교와 원로원, 그리고 다른 고위 관리들을 원형 경기장에 불러서 공식 집회를 조직하고 유언장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군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부했다.
"당신은 황제의 어머니로서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들은 우리의 황제이자 주인입니다. 여인이시여! 당신은 야만인이나 다른 외국 사절들을 궁궐에서 맞이하고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로마 제국이 그런 고비를 맞이하는 걸 막아주시길 바랍니다."
마르티나는 결국 황궁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콘스탄티노스 3세가 병에 걸렸다. 그는 칼케돈 궁전으로 가서 요양하였으나, 즉위한 지 석 달이 지난 641년 5월 25일에 사망했다. 그가 오래도록 앓았던 폐병이 악화되었거나 결핵에 걸린 게 사망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민중은 마르티나가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마르티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피로스가 공범으로 지목되었다.
아무튼 콘스탄티노스 3세가 사망하면서, 15세의 이라클로나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고, 마르티나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마르티나는 콘스탄티노스 3세의 지지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막대한 기부금을 지불하였고, 회계관 필라그리우스를 포함해 대중에게 미움받던 관원들이 처벌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콘스탄티노스의 측근들을 모조리 유배보냈고, 인기 없는 단의론을 교회의 정식 교회로 지정했다. 성직자, 청색당, 녹색당, 원로원, 군대 등 모든 계층은 이에 분노하였고, 동부 총사령관인 아르메니아계 장군 발렌티노스 아르샤쿠니는 마르티나 타도를 외치며 군대를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마르티나는 수도 수비를 강화하였지만, 발렌티노스는 칼케돈까지 진격하여 압박하였다. 여기에 콘스탄티노스의 아들들을 황제로 세우라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결국 마르티나는 민중을 달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3세의 아들 콘스탄스 2세와 또다른 아들 다비드 티베리오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 이어졌고, 641년 9월 28일 성난 시민들이 아야 소피아에 침입하여 피로스 총대주교를 공격했다. 피루스는 다음날인 9월 29일 총대주교를 사임하고 카르타고로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던 군대마저 봉기하여 황궁을 삽시간에 장악했고, 원로원의 명령에 의해 마르티나와 이라클로나스가 체포되었다. 마르티나는 혀가 잘렸고, 이라클로나스와 다비드 티베리오스는 코가 베어졌다. 또다른 아들 마르티노스는 거세되었다. 그 후 마르티나와 자식들은 로도스 섬으로 유배되었고, 다시는 섬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2.3. 콘스탄스 2세(641~668)
콘스탄스 2세는 즉위 직후 찬탈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던 발렌티노스 아르샤쿠니를 처단했다. 하지만 그 역시 아랍군의 연이은 침략에 고전했다. 642년 이집트와 레반트를 상실하였고, 647년 아프리카 총독부의 군대가 아랍군에게 참패했다. 아랍군은 뒤이어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여 654년 로도스 섬을 공략하고, 657년 키프로스 섬도 공격했다. 콘스탄스 2세는 함대를 인솔하여 맞붙었지만, 마스트 해전에서 참패하고, 포로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해 다른 남자와 옷을 교환한 뒤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이렇듯 아랍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했지만, 제국에겐 다행히도 1차 피트나가 발발하면서 아랍이 더 이상 침략을 이어가지 않은 덕분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콘스탄스 2세는 제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정통교회와 단성론, 단의론의 논쟁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걸 지극지극하게 여겼고, 648년 초 <전범(Typos)>을 발표하여 일체의 논쟁을 중지하고, 앞으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고 밝혔다. 주교나 사제라면 즉각 해임하고, 수도사라면 파문할 것이며, 군인이나 관리라면 지위나 직함을 박탈하며, 원로원 의원이라면 재산을 몰수하고, 민간인이라면 매질을 하고 유배를 보내겠다고 했다. 교황 마르티노 1세가 이에 반발하자, 라벤나 총독을 시켜 체포하게 한 뒤 크림 반도의 케르손으로 유배보냈다.
660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로 궁정을 이전한 뒤 남이탈리아 공략을 시도했지만, 663년 카푸아 백작의 군대의 습격으로 패배했다. 이에 카푸아를 재차 공격했지만, 살레르노 인근의 포리노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그해 말 로마를 방문하여 판테온을 비롯한 옛 건축물들의 장식이나 청동을 떼내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고, 666년 교황의 라벤나 대주교에 대한 간섭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후 사르데냐, 칼라브리아 등지를 순행하며 연공을 강요했다.
664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 게나디오스 2세가 공물을 증액하라는 콘스탄스 2세의 칙사를 쫓아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665년 엘레우테리오스가 콘스탄스 2세를 위해 역적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민병대를 일으켜 게나디오스를 축출하고 총독을 자칭했다. 게나디오스는 다마스쿠스로 달아난 뒤 무아위야 1세에게 자신이 총독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했다. 무아위야 1세는 즉시 우크바에게 아프리카 원정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게나디오스는 이들을 따라가다가 665년 말 알렉산드리아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우크바는 그대로 아프리카 속주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시칠리아에서 달려온 동로마 장군 니키포로스를 격파한 뒤 이집트로 회군했다. 668년 9월 15일 시라쿠사 궁정 욕실에서 목욕하던 중 시종장이 휘두른 바구니에 맞아죽었다.
2.4. 콘스탄티노스 4세(668~685)
668년 16살의 나이로 부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669년 아버지를 죽이는 데 일조하고 반란을 일으킨 미지지오스를 토벌하였고, 이슬람 세력의 침략에 결사적으로 항전한 끝에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칼리프 무아이야는 679년 콘스탄티노스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그동안 점령했던 에게 해의 섬들을 반환하고 황제에게 매년 노예 50명, 말 50마리, 금 3천 파운드의 공물을 보내기로 했다. 황제는 뒤이어 681년 9월 16일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성론과 단의론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양성론만을 따르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서 오래도록 지속된 교리 분쟁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불가르족의 칸 아스파루흐에게 참패하여 불가르 왕국의 탄생을 인정해야 했다. 685년 9월 14일 이질로 사망했다.2.5. 유스티니아노스 2세(685~695, 705~711)
아버지처럼 16살에 제위에 오른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초기엔 우마이야 왕조를 상대로 지속적인 공세를 벌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688년에서 689년 사이에 슬라브족에 대한 원정을 성공해 25만에 달하는 슬라브인들을 붙잡아서 소아시아로 보내, 옵시키온 테마를 강화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농경지를 개간하고 인구를 증가시킬 뿐더러, 더 많은 민병대를 동원해 아랍의 침략을 막아낼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다. 691년 아랍과의 전쟁을 재개하여 더 많은 걸 얻으려 했지만, 약 2만 명의 슬라브족 병사들이 아랍군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하고 아르메니아를 상실했다. 황제는 이에 분노하여 비티니아의 슬라브인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다.유스티니아노스는 아버지의 노력으로 잠잠해진 종교적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691년 퀴니섹스툼 공의회를 소집해 제5차와 제6차 세계공의회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다뤘다. 이 공의회에서 총 102개의 교회법 조항을 마련한 뒤, 교황 세르지오 1세에게 이걸 보내며 당장 승인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은 기혼자의 사제 서품 허용과 사순절 토요일마다 금식하는 것 등 몇 가지 조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라벤나 총독에게 교황을 잡아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라고 명령했지만, 로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 사이, 세바스토폴리스 전투 참패 후 감옥에 갇혔던 레온티오스 장군이 석방 후 헬라스 테마로 부임하러 가던 중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청색당의 호응에 힘입어 수도에 입성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체포된 후 쇠사슬에 묶인 채 군중으로부터 비난과 욕설을 들으며 원형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목숨만은 건졌지만 코가 잘린 후 크림 반도의 케르손으로 유배되었다.
702년 또는 703년 초, 자신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려는 케르손 당국을 피해 하자르에 귀순했다. 이후 하자르족의 칸 이부지르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부지르가 제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신을 넘기려 하자, 다시 불가리아 왕국으로 피신한 뒤 테르벨의 지원을 받아 705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그 후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오스 3세를 붙잡아 참수하고, 테르벨을 부제로 공식 임명했다. 한편 하자르족의 칸 이부지르는 테오도라와 아들 티베리오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고, 테오도라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출신 황후가 되었다.
709년 봄, 유스티니아노스는 테오도로스를 라벤나로 보내 고관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게 하였고, 병사들이 라벤나를 무자비하게 약탈하게 했다. 라벤나 시민들은 당연히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라벤나 총독부는 수년간 마비되었다. 711년 초,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케르손 공격에 나서 함락하였고, 케르손 시 지도자 7명을 화형에 처했으며, 수많은 시민을 강물에 내던졌고, 하자르족 총독과 시장 조일로스를 포함한 30명 가량은 가족과 함께 사슬에 묶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또한 엘리아스가 케르손 총독에 임명되었고 많은 동로마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했다. 그런데 황제가 원정군을 귀환시키던 중 흑해에서 폭풍이 닥쳐 함대가 뒤집히며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얼마 후, 하자르족이 케르손으로 쳐들어와서 동로마군이 도시 방어에 나섰지만, 엘리아스 총독과 제국군 수비대가 하자르족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하자르족 총독과 시장 조일로스를 석방하고, 300명의 호위대를 붙여 케르손으로 돌려보냈다. 아울러 로고테테스 책임자인 시리아의 요르고스를 보내 이번 사건에 대한 사과를 이부지르 카간에게 전하게 하는 한편, 엘리아스 총독과 바르다네스를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학살을 경험한 케르손 시민들은 이미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게 돌아선 상태였다. 그들은 요르고스를 처형했고,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여기에 크리미아의 여러 도시들이 가세해 공식적으로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불신임하며 바르다네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르다네스는 필리피코스로 이름을 고치고 황제를 자칭했다.
마우루스의 진압군이 이들을 토벌하고자 진격했지만, 하자르족 대병력이 도착하자 항복했다. 반란군은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가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체포했고, 엘리아스가 직접 나서서 그를 처단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유일한 아들 티베리오스 역시 붙잡혀 처형되면서, 이라클리오스 왕조는 이라클리오스의 4대손인 유스티니아노스 2세 대에서 종말을 맞이했다.
3. 역대 황제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1대 | 이라클리오스 | 610년 10월 5일 ~ 641년 2월 11일 |
2대 | 콘스탄티노스 3세 | 641년 2월 11일 ~ 641년 5월 25일 |
2대 | 이라클로나스 | 641년 2월 11일 ~ 641년 9월 |
3대 | 콘스탄스 2세 | 641년 9월 ~ 668년 9월 15일 |
4대 | 콘스탄티노스 4세 | 668년 9월 15일 ~ 685년 9월 |
5대 | 유스티니아노스 2세 | 685년 9월 ~ 695년, 705년 8월 21일 ~ 711년 11월 21일 |
[1] 이 왕조부터를 로마의 라틴 문화가 그리스 문화로 변화한 시기로 본다. 나무위키에서는 이후 황제들을 그리스어 독음으로 기술하지만 학자와 교수에 따라서는 라틴어식으로 읽기도 하니 참고. 이라클리오스 왕조를 헤라클리우스 왕조라고 부르는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