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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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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라틴어 quinque imperatores boni
영어 five good emperors
그리스어 Οι πέντε καλοί Αυτοκράτορες
한자 五賢帝

1. 개요2. 평가
2.1. 호평2.2. 혹평
2.2.1. 내부적 모순과 문제들2.2.2. 외부 문제와 정세 변화 대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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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끈 5명의 명한 황를 지칭하는 후대의 표현. 최초의 사용은 1531년,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로마사 논고》에서 리비우스의 기록을 논평하며 "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다섯 황제의 경우처럼 양자로 승계한 황제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여기에서 우리들이 배울 수 있다"면서 한데 묶어 부른 것이 시초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에드워드 기번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로마사 연구자들이 먼저 사용한 것이 대중 사가들에게도 전해져 로마 제국의 국력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단연 로마의 최전성기라 일컬어 설명하기 좋아 금새 대중적인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오현제로 묶인 이들 중 트라야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현제로 묶여 극찬 받는 그대로 그 평가가 대단히 훌륭했고, 호불호가 없는 명군으로 추앙받아 대제 칭호만 받지 못했을 뿐,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1][2]

오현제로 묶인 다섯 황제의 황가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중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은 안토니누스 가문은 가문의 명성과 권위는 1세기 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상으로 대단했다. 어느 정도였는지, 동시대 사람인 헤로디아누스는 마지막 황제인 콤모두스까지도, "태어날 때부터 고귀함과 고결함을 가졌고, 보랏빛 천을 운명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극찬 받았음을 밝혔다. 이는 헤로디아누스 주장이 아닌 이후 로마 제국의 상황에서도 비슷해, 콤모두스 암살 후 벌어진 193년 다섯 황제의 해를 정리하고 등장한 세베루스 왕조는 이 명성을 이용하고자 스스로 오현제의 성씨 중 하나인 안토니누스를 정통성의 칭호로 취하는 모습까지 연출했다. 하여 오현제라는 표현이 인위적 표현라고 한들,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에 걸맞은 황제들을 배출해온 명성과 존경심은 팍스 로마나의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오현제로 묶인 계보는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진다.

오현제 이후 로마는 황제 난립기 후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안정과 평화를 보내다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말의 외세의 침입과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즉위로 시작된 소위 3세기의 위기라고 불리는 혼란기를 거친다. 그리고 이런 혼란은 계속되는 내란과 외침에 따른 혼란 등이 49년간 이어지며 제국의 국력은 서서히 기울어간다.

구글 트렌드에서의 세계적 관심도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장 높고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가 다음이며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네르바가 가장 낮다. 네르바야 재임기간이 짧고 안토니누스는 가장 길지만 조용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사적으로 괴짜였으면서 실용적인 치적을 남긴 것, 트라야누스는 전통적으로 인기가 높았고 영토 확장과 건축 활동, 마르쿠스는 명상록을 저술하고 어려운 시대를 감당한 철학자라는 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유튜브 조회수도 마르쿠스는 수백만 단위에 이른 것이 조금 있고 수십만 단위도 몇 주나 한 달 만에 달성한 데 비해 나머지 네 명은 1~3년 만에 수십만에 진입한 영상들 정도이다.

2. 평가

2.1. 호평

만약 누군가에게 역사상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를 골라보라고 한다면, 그는 망설임없이 도미티아누스의 죽음부터 콤모두스의 등극 사이의 시기를 고를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는 어떻게 좋은 정부가 탄생하는지를 알 수 있다. 티투스를 제외하면 혈연 관계의 세습을 통해 제위에 오른 황제들이 모두 암군이었던 반면, 네르바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양자 관계로 제위에 오른 황제들은 모두 명군이었다. 그리고 양자 대신 혈연 관계에 의한 세습이 다시 시작되자마자, 로마의 붕괴는 재개되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티투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들을 보호해 줄 친위대군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그들의 올바른 삶, 백성들에 대한 사랑, 원로원의 지지를 바탕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모든 것이 너무나도 조용하고 완벽해서, 도저히 쓸 게 없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기에 대한 한 영국인 역사학자의 절규.
결론부터 요약하자면, 명실상부한 로마제국 역대 최고의 전성기이자 외적, 내적으로 모두 최고의 발전을 이뤄낸 시기로 후대 로마인들과 20세기 이전 서양인들에게 무결점의 전성기로 찬사받았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본인 스스로의 통치는 물론, 후임자에 대한 조치 및 배려도 충실한 모범적인 권력 승계 및 발전 시기였다. 이런 모범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각 황제들의 공통 사항을 들 수가 있다.

그리고 1명 정도의 예외를 제외한 공통점도 많다.

단, 계승과정을 살펴보면 매끄럽지만은 않은데,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한 것은 근위대에 의해 유폐당해 강제로 정해진 것이라는 주장이 학계의 대세이며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양자로 후계자가 되었다는 근거가 자신의 주장 이외에는 전무해 트라야누스의 중신 4명을 죽인 후에야 제위를 굳힐 수 있었다. 이후의 계승은 상대적으로 평화롭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1순위 후계자가 아닌 대타였고, 이 사람의 장모 언니는 하드리아누스의 아내 비비아 사비나 황후였다! 다시 말하면, 하드리아누스의 병세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인척이었던 것. 여기에 더해 하드리아누스 생전에 일찌감치 차차기 황제로 내정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처조카였고, 이 당시 기준으로 트라야누스 일가의 몇 없는 남자혈육이었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처조카를 입양하면서, 막내딸과 결혼시키면서 장인-사위 관계까지 맺어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오현제의 양자 계승은 로마 귀족들이 남자혈육은 없고 딸만 있거나, 아예 자녀가 없을 시 누나 혹은 여동생 혈육을 입양해 가문과 지위를 물려주는 방법이었다는 이야기다. 예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이나 이후의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처럼 제위를 이어 나갔고, 콘스탄티누스 왕조테오도시우스 왕조 역시 남자 직계가 끊기자 이런 전례에 따라 공주 혹은 황제의 여자형제들의 자녀에게 제위를 주면서 가문까지 물려줬다. 따라서 로마 귀족 사회의 전통과 관습상 이들의 제위 계승은 사실상 혈연 계승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공화정 시대의 대명문가 스키피오 가문이나 피소 가문 역시 사용한 익숙한 방법이었다. 당장 대중들에게 가장 익숙한 카이사르[6]아우구스투스[7]만 보더라도, 어떤 양자결연인지 눈치챌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양자결연을 통한 원만한 계승과는 꽤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로, 이들이 갑자기 만들어낸 전통도 아니었다.

2.2. 혹평

2.2.1. 내부적 모순과 문제들

세상에 완벽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시피, 3세기 로마 제국의 위기와 쇠퇴의 원인은 다름 아닌 오현제 시기부터 누적되거나 생겨난 문제가 해결되거나 적절히 조치되지 못하고 쌓인 것이 컸다. 물론 오현제 시기와 3세기의 위기 사이의 70여 년간, 노예 공급이 감소하던 사회 구조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군대 개편과 방어선 재구축 등을 바탕으로 3세기의 위기 당시 게르만족에게 급속도로 털리는 상황은 유능한 황제였다면 최소화시킬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같이 군사적 재능과 행정가적 능력, 법률가적 지식까지 두루 갖춘 로마 황제가 매번 나올 리 만무했고, 설령 그런 황제들이 나오더라도 오현제 치하 아래에서 수십년 간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4세기에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혹은 그 다음 시대의 발렌티니아누스 1세 같은 명군조차도 벅찬 문제였다. 더욱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제위를 물려받은 콤모두스가 나라를 말 그대로 방치했고, 콤모두스 암살 후 혼란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말끔히 정리했어도 로마 제국의 프린키파투스는 기본적으로 늘 내부적 문제가 많은 국제였다.

오현제 치하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받고 있는 부분은 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경제적 취약성이 고질화를 넘어 중병화되기 시작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전통적 관점 하에서 트라야누스를 평가하는 이들에게는 의외일 수도 있는데, 1940년대 이후 고고학 발달과 로마 유적, 유물, 비문 발견과 해석 나아가 사회과학분야 전문학문들의 역사연구 연계 확산 하에서 트라야누스의 치세는 도금된 영광이나 다름없을 정도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실질적인 오현제 시대로 불린, 트라야누스의 치세가 시작될 당시, 로마 제국은 1세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투스 ~ 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까지 취한 서유럽과 이탈리아 일대 경제력 향상 및 황무지 개발, 가이우스 ~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연이은 이탈리아 및 로마 일대의 항구 개발과 농경지 확보, 도시 공업 발전 등에 힘입어 경제적 취약성을 극복하는 듯 했다. 이는 네로 치하에서 화폐 가치 절하, 베스파시아누스 아래에서 진행된 속주 경영을 통해 얻은 세수 확보 및 관리를 통해 국가 재정이 속주 경제 및 속주세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진행되면서, 황제가 대규모 전쟁을 계획해 연이어 전쟁비용을 끌어올리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 국고 건전성을 유지하면서 위기상황시 들 비용까지 차곡차곡 쌓을 기반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드넓은 제국의 크기와 유지비는 갈수록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가 전문화되고, 병사들의 전투력 유지에 필요한 비용은 늘어나는 현실에서, 필요한 고정지출 종류까지 자연히 늘어나면서 안정된 내정은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진지하게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트라야누스와 로마 제국 수뇌부들은 도미티아누스 암살 전 다키아와의 문제로 마냥 내부문제만 신경쓰기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었다. 즉, 트라야누스 입장에선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고, 상황상 서기 1세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처럼 국가재정을 꾸린다는 것은 그의 첫 대외정복전 당시에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 트라야누스는 현상 유지적 속주 경영 및 원로원을 배려한 속주세 징수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는 원로원에게 찬사를 받아 겉으로는 문제로 지적받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트라야누스의 방법은 당대 황제와 원로원 입장만 생각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황제와 파견된 속주 총독들, 현지 유력자들이 친인척이거나 당사자이기도 한 원로원 입장에서 큰 문제거리도 없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방법은 로마가 전통적으로 국가 재정 및 세수체계를 꾸려 국가를 돌린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현제 중 후임 하드리아누스의 적극적 개입 혹은 전대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그리고 후대의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의 프린키파투스 국제의 황제들의 세금징수와 관리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지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트라야누스처럼 할 수 있어도, 굳이 세금징수업자들의 손을 더 많이 빌리지 않고, 또 원로원 입장을 일정부분만 신경쓰는 척하면서 세금징수와 대상선정을 한 게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즉, 트라야누스의 방법은 좋게 말하면 원로원 배려와 속주행정을 전례에 따른 합리적 운영, 현상유지를 취했을 뿐 장기적으론 그 짐을 후임 황제들에게 고스란히 청구된 문제가 있었다.

더욱이 도미티아누스 시대 후반부터 중앙정부의 노력에도 국가 재정이 속주경제에 의존하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국정 파트너인 원로원은 나날이 위상이 하락하고, 인재풀로서의 기능 역시 기사계급이나 전문 관료, 직업군인들에 비해 질적 하락이 진행 중이었다. 즉 내부적으로 로마는 이 부분에서도 고민거리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현제 중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늘 이런 부분 해결에 골머리를 싸맸고, 후대의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은 트라야누스와 같은 원로원 배려보다는 적극적 명령과 속주 경제 의존성 완화를 위한 법 정비 등 다른 방법을 시행하며 내치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트라야누스는 전임 도미티아누스나 후임 황제들과 달리 현실적 이유 외에도 연이은 정복전쟁을 통한 전쟁 특수 및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도 무작정 쓰지 않은 세수 확보에 이상할 만큼 집중했다. 여기에는 트라야누스가 고대부터 19세기까지의 평가, 대중들의 이미지와 달리 최고의 황제라는 타이틀과 무색하게도 이런 내치와 국고 관리에서 평균수준의 행정가였고 그가 외치에 집중한 점도 컸다. 하지만 이런 그의 통치방법은 젊은 시절 하드리아누스로 대표되는 이들조차 우려섞인 반대가 파르티아 원정부터 나온 이유가 됐다.

또 로마 제국은 간접세가 보편적이지 않고 세금 구조가 오늘날처럼 복잡하지 않았는데, 이런 단점 외에도 서방과 동방 사이의 경제격차가 여전한 벌어져 있었고 취약했다. 로마 제국의 속주 행정 및 세수 확보가 프린키파투스 시대[8]까지 황제와 속주 총독 / 황제와 속주 내 유력자 간의 상호소통과 서한 교환에 기반한 방식을 사용하면서, 파견된 세금징수원과 세금징수대행업자들의 협조를 통해 집행됐지만, 이 부분에서의 고민 거리도 역대 황제들에게 큰 숙제였다. 그래서 황제가 "정부의 조세징수액이 높아지면 그러한 공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한계"를 방치하면, 지방세수 체제에 기반한 로마 재정은 속주재정에 더 의존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위험성이 높아졌는데 오현제 중 트라야누스 시대동안 로마 제국은 계속된 정복전쟁 외에도 황제가 기부금을 시혜하고 대규모 건축물을 만들며 국고 지출을 늘려 나갔다. 여기에 더해 트라야누스 외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전의 두 황제와 트라야누스는 세금 감면, 연체 세금 면제 등을 베풀어 내란이나 기타 비상 사태에 대처할 자금을 비축할 여력이 없는 숙제를 남겨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장 이전까지 거의 방치된 문제라고 지적받고 있다.

이런 악조건 외에도 황제들의 고민거리를 안겨준 내부 문제는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부터 서방 경제의 멱살을 잡고 끌고 있던 이탈리아와 남갈리아 일대 경제가 정체를 넘어 제 살 파먹기식으로 하락세를 탔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 로마사 학자들이 세베루스 왕조와 3세기의 위기를 연구하면서, 이 시대와 오현제 시대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인데, 오현제 시대를 거치면서 이탈리아 수공업, 상업, 농업 유통망은 약속이라도 한듯 다키아 전쟁 특수가 끝나기 무섭게 내부 경쟁으로 협력이 아닌 상호경쟁 구도로 변화했다고 한다. 물론 이 부분은 갈리아 경제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지만, 이는 로마 시민권자가 가장 많은 이탈리아 내 조세 부담에 따른 피로도를 자연스레 늘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행히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오랫동안 로마, 이탈리아, 갈리아 일대 행정 전문가라서 이를 인지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달리 경제적 위기에 닥친 이 일대의 경제규모 축소와 경제 악화를 막고 도시 경제 유지를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서방 경제와 이탈리아 경제 규모를 유지했다. 또 그는 이탈리아와 갈리아 내 블록경제 외에도 두 지역의 유통망 확대에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 방법 중 많이 사용한 황제의 시혜 정책은 평시에나 꾸준히 할 수 있는 임시방편일 뿐이었고, 유통망 확보는 로마 세력 편입 전부터 부유한 지중해 동부 일대와의 경쟁에서 지중해 서부 일대 경제가 계속 밀리는 상황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즉위와 함께 내부, 외부 문제들이 봇물 터지며 위기가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오현제들의 국고를 통한 경기 부양 방법은 위기 발생 혹은 다른 지역에서 자연재해[9] 등으로 위기가 닥칠 시 국고 피로도가 증가할 위험변수도 있어 이는 제국의 경제적 취약성 개선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단점이 명확했다. 이 외에도 오현제 치하에서 로마 내 각 지역의 경제 편차를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원로원 내 재산 규모 역시 이탈리아 출신과 남갈리아 출신들이 빠른 속도로 감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특정 지역[10] 내 신참자 비율이 늘게 됐다. 그리고 이는 지중해 동부와 옛 카르타고 일대를 통한 국가의 국고 의존도가 높은 현실을 더 가속화시켜 급기야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원로원 내 유력자들이 잘 사는 지역 출신들로 꾸려지는 상황까지 가속화시켰다. 다행히 이 숙제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손보기 시작해 급한 불은 끄게 되는데, 그럼에도 원로원 내 부와 권력은 여전히 아프리카 속주와 그리스 및 소아시아, 시리아 출신들 몫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더욱이 대부분의 개선책들은 미완의 성공 내지 미봉책으로 불만 끈 채 콤모두스 치하에서 중지됐는데, 이는 페르디낙스 치하에서 페르디낙스가 콤모두스 시대의 악폐를 없애겠다는 명분 아래 면세, 콤모두스 시대 협력자 처단 등을 벌이며 상황이 악화되고 곡물 수습이나 조세 징수 등에서 혼란에 치닫게 만들었다. 따라서 혼란을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모든 경쟁자들을 누른 이후, 이 부분에 상당히 노력했다고 해도 이런 속주경제 의존도 심화와 특정지역 경제 우월 현상은 후기 로마제국과 서로마 제국 모두에게 온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중병이 됐다.[11] 그래서 학자들은 이에 관해 4세기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손보기 전까지 사실상 방치된 오현제의 숙제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2.2.2. 외부 문제와 정세 변화 대처의 한계

이렇게 오현제 치하에서 고민거리가 늘고 황제들이 노력하는 가운데 또 다른 위기요소로 급부상한 것은 대외 정세 변화였다. 외부적으로 봤을 때 제일 큰 문제는 외부의 적, 특히 게르만족이 엄청나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뉴브강 이북의 다키아 왕국멸망시키며 게르만족 중 다뉴브 강 일대에서 로마를 가장 크게 위협할 세력을 제거했다고 해도, 로마 제국의 라인강 ~ 다뉴브강까지의 국경선은 2,400km나 됐다. 더욱이 로마인들이 야만족 취급을 한 게르만족은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시절과 달리 1세기 이래 로마 제국과의 분쟁과 상호 교류 등으로 갈수록 무기체제가 다양화되고, 세력이 커져가는 상황이었다. 전술만 놓고 보더라도 로마와의 충돌과 로마의 영향 등으로 게르만족들의 전술들은 예전처럼 무식하게 피지컬만 믿고 덤벼드는 방식에서 탈피 중이었다. 더욱이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은 다키아 왕국이 게르만 족 자체가 한곳에 전부 모인 것도 아니고 여러 세력 중 왕국 규모로 성장한 세력라는 점에서 게르만족의 성장을 막는 예방 전쟁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고, 다키아 왕국은 그들 중 하나였다. 또 다키아 왕국은 게르만족 전체를 뒤흔들 영향력까지 보기 힘들기 때문에 로마가 온전히 다키아 전쟁 하나만으로 서부 방어선을 평온하게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트라야누스 치하의 두 전쟁은 로마가 전쟁특수로 막대한 전리품을 얻고, 히스파니아 내 은광, 금광 고갈로 인한 고민을 줄여줬다. 하지만 이런 업적이 있다고 해도, 후임 하드리아누스 아래에서 예전처럼 게르만족과 충돌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게르만족들이 강해지는 것을 온전히 막을 수 없게 했다. 로마 입장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예처럼 매일 같이 두들겨 패면서, 게르만족들을 때려 잡는 것은 여러 상황상 불가능했고 설령 그렇게 할 경우 자연스레 로마시민권자와 속주민들의 세금 부담은 늘어나 인적, 물적 소모와 재정 피로도까지 높아지는 문제가 있었다[12]. 이는 오현제들이 막시미누스처럼 닥치고 전쟁만 할 수 없는 진짜 이유였고, 로마에겐 큰 딜레마였다. 그래서 이 시간 동안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표현에 따르면 '먼 게르만 족'과 '가까운 게르만족'들을 불문하고) 서로 전쟁과 통합을 거듭하며 강병을 육성함과 동시에 세력을 키워나갔고 이런 세력이 한 둘이 아닌 상황이 된다. 그래서 로마가 상대해야 할 게르만족들의 규모와 수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벅찰 수 밖에 없었다.

외부의 게르만족들은 내적으로는 강병을 기름과 동시에 세력이 커졌고 외적으로는 로마에게 효과적으로 맞서는 법을 고려하면서 전술을 발전시켜 로마 제국 방어선의 허점들을 공략하는 식으로 로마 제국을 밀어붙였다. 로마는 결국 변하지 않은 수비 방식으로는 게르만족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고 차라리 하나로 뭉쳐 국경 밖에서 그들과 교전을 펼치는 식으로 소모전양상으로 흘러가게 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렇게 전선을 늘리면서 직접 다뉴브 강 전선까지 향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하고 만다. 이전 오현제들 대부분이 로마 제국 내에서 타계한 것과 달리 국외에서 죽었으며 이후로 재임한 황제들은 이전까지에 비해 단순한 자연사나 병사만이 아닌, 전사, 암살, 의문사 당하는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은 다른 시기도 아닌, 오현제 통치시기의 최후의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때 터지면서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나게 된다.

다만 그렇다고 오현제로 묶여 언급된, 다섯 황제가 이런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방치했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들이 로마의 내실을 다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고질적인 경제적 취약성 극복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던 슈퍼맨들이 아니었다.[13] 즉, 이들은 일을 아예 안 한 게 아니라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북방 게르만 족이 뭉치면 위협적일 수 있다."라는 작은 가능성까지 일일이 살펴볼 정도의 여력이 안 되었던 것이라 뭐라 따지긴 힘들다. 굳이 따지면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당시 개혁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말그대로 너무 조용히 흘러갔던 치세를 비판했으면 비판해야 한다는 건데, 이 역시 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반만 맞는 이야기가 되므로 마냥 책임전가를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즉위 직후부터 자신과 두 아들의 외부 일정을 최소화하면서 고정지출을 줄이고,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 같은 막대한 자금을 통한 공공건물 건립을 최소화해 로마 제국의 국고 문제 해결과 경제적 취약성 극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괜히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사망 당시 국고에 티베리우스가 남긴 막대한 잉여금 이상의 돈을 남겨준게 아니다. 하지만 위기를 예견해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국고지출을 최소화했다고 해도, 또 후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물려받은 잉여금을 아끼고 아껴도 누적된 국고 문제와 고정비용 증가 등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사용할 돈도 모자를 정도로 부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시작된 위기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는 이탈리아가 침공받자, 궁전의 보석, 보물, 골동품 등 돈이 될 만한 금은보화를 죄다 경매로 팔아치워야만 했고, 이 비용도 모자라 국가예산까지 쪼개며 원로원에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또 원로원 내 재정, 경제 전문 관료들이 멀쩡한 시절 콤모두스에게 마르코만니 전쟁 중단을 건의하고, 공동황제 짬밥으로 상황을 알던 콤모두스 역시 매부와 여러 장군들의 반대에도 급히 전쟁을 중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 현실적 이유로, 폼페이아누스 같은 전쟁지속파 장군들 역시 현실상 포기를 수락했고 콤모두스가 전쟁을 중지시키고 내려온 부분은 이 결정 당시 찬반이 갈려도 긍정적 평가가 나온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이후 콤모두스가 1년도 안 되어 누나의 어처구니 없는 암살시도로 흑화되는 일이 터지고, 나라가 방치된다. 따라서 콤모두스 치하 이후 로마는 오현제 시대동안의 위험요소들이 진짜 문제로 고착화되며 진짜 위기로 치닫게 된다.

[1] 트라야누스 황제가 당대에 받은 이칭인 '지고의 황제(최고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받은 대제의 칭호인 '마그누스'가 아니다.[2] 네르바 황제는 제위 등극 후 재위 기간도 짧고, 근대 이후 밝혀졌듯이 프라이토리아니로마군의 친위 쿠데타 후 트라야누스를 사실상 옹립한 세력에게 강제 연금됐다가 뇌졸중으로 죽은 황제라서, 명군이나 호불호 없는 황제라고 할 수 없다. 하드리아누스원로원과 사이가 나빴고, 개인 성격 역시 입체적이고 호불호가 분명해, 현군이더라도, 당대에는 티베리우스와 비교될 만큼 호불호가 분명한 황제로 평가됐다. 따라서 후임자인 양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즉위 연설에서 원로원에게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시키는 투표에서 동의해달라고 읍소했다.[3] 각 오현제가 전 황제의 양자로 들어와서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우렐리우스의 후임자가 문제의 콤모두스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정이 아니라, 아우렐리우스로선 정당한 계승자격이 있는 친자인 콤모두스를 배제하고 다른 양자를 들여서 계승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4] 이 부분이 오현제 시대의 핵심이다. 트라야누스의 오촌조카 겸 트라야누스 누나의 손녀사위가 하드리아누스, 트라야누스 누나의 고손자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트라야누스 누나 손녀의 사위가 안토니누스 피우스였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처조카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기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내 소 파우스티나와는 고종사촌남매였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고모부였다.[5] 후임자 콤모두스[6] 외종조부[7] 카이사르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8] 아우구스투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9] 지진, 해일[10] 북아프리카소아시아 일대[11] 오현제 시대의 폐단으로 언급 중인 원로원 내 동서간 격차 심화 부분이 조금씩 줄어든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제거하고 원로원을 개편한 이후부터였다. 이때 세베루스는 자신과 동향인 아프리카 속주와 아내 쪽 인사들이 많은 지중해 동부 편을 많이 기용했음에도 꾸준히 이탈리아와 서유럽 속주 출신 인재들의 경제력을 키워주고 그들의 의견을 대신 해결하는 노력을 벌였다. 그렇지만 이 역시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치세 후반부터였다.[12] 막시미누스의 몰락은 이 사람이 함량미달에 정통성이 없는 부분이 컸다. 하지만 이 황제가 모든 계층의 로마인들에게 비난받고 욕먹은 이유는, 황제가 계속 게르만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시작된 인적, 물적 소모와 이로 인한 재정적 피로감, 그리고 전쟁 자금 충당을 위한 세금 징수와 강탈이 큰 몫을 차지했다.[13] 애초에 네르바는 재위기간이 짧아 뭐라 따지기도 힘들었고 트라야누스는 당장 직면한 위협인 다키아를 멸망시키고 군사적 확장과 토목, 복지사업을 진행시키는 데 전념하는 게 한계였으며 하드리아누스는 급진적인 성장을 추구하던 트라야누스의 방향과 반대로 제국을 순행하며 향후의 위협에 대비해 착실히 내실을 다졌고 타지에서 사망한 장본인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되자마자 파르티아 문제, 안토니누스의 역병, 마르코만니 전쟁들에 대처하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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