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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08년 |
사망 | 1365년 |
아버지 |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 |
어머니 | 브라반트의 마리 |
형제자매 | 사보이아의 마리아, 사보이아의 카타리네,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체 |
남편 | 안드로니코스 3세 |
자녀 |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요안니스 5세,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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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의 황후.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을 일으켰으며 그로 인해 로마 제국이 몰락하는데 결정타를 날려버린 인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2. 생애
1308년경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와 두번째 부인 브라반트의 마리 사이의 네 딸 중 셋째 딸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조반나(Giovanna)였다. 그녀는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한창이던 1325년 9월 안드로니코스 3세와 약혼하였다. 이후 테살로니키의 궁정에서 그리스어와 황실 예법 교육을 받았다. 1326년 10월 정식으로 결혼하였고, 이름을 안나(Άννα)로 개명하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1328년 5월 28일 남편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자신의 조부 안드로니코스 2세를 폐위하면서, 그녀는 동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후가 되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와의 사이에서 딸 마리아와 이리니, 아들 요안니스 5세와 미하일을 낳았다.1341년 6월 14일 안드로니코스 3세가 열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이에 안나가 아직 5살 밖에 안된 요안니스 5세의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무대신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찬탈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칸타쿠지노스는 일찍이 남편이 집권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국정 운영에도 많은 도움을 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토지와 재산을 보유한 대귀족이라서 영향력이 대단했고, 마음만 먹으면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칸타쿠지노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로부터 섭정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도 제위 승계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어린 황태자와 황후 주변에 경비병들을 배치해 사람들로부터 사실상의 섭정으로 인식되었고, 자신의 딸 엘레니 칸타쿠지니와 요안니스 5세를 결혼시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급기야 칸타쿠지노스의 부하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는 주군에게 제관을 받으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칸타쿠지노스가 거부하자, 아포카브코스는 오히려 그를 몰락시키려 했다. 아마도 제관을 받을 것을 권유한 사실을 요안니스가 발설할까봐 그를 사전에 제거하려 했던 듯하다. 요안니스 칼레카스 총대주교도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정적이었다. 총대주교는 칸타쿠지노스 덕분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칸타쿠지노스가 자신을 재치고 어린 황제의 섭정이 된 것이 아니꼬왔고 일전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원정을 떠날 때 자신을 두 차례나 섭정으로 임명한 바 있었으니 자신이 섭정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1][2]
그러던 1341년 7월 중순, 요안니스는 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 오스만 베이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자비를 들여 군대를 충원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났다. 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 불가리아의 이반 알렉산더르, 오스만 베이국의 오르한 1세와 두루 조약을 맺어 평화를 이룩한 후 9월에 수도로 귀환했다. 얼마 후, 아카이아 공국이 제국에게 귀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요안니스는 협상을 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9월 23일 트라키아로 떠났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트라키아로 떠난 순간, 그의 적들은 한데 뭉쳐 내무대신을 반역자로 규정지었다. 칸타쿠지노스 본인은 그들이 자신을 시기했기에 이런 배신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지만, 요안니스 5세와 섭정단 측의 입장에서 보면 칸타쿠지노스는 그냥 내버려두기엔 너무 위험한 권신이었다. 그 자신은 찬탈할 의사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지금까지 하는 행동을 보면 황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이렇듯 강대한 권력에 오른 권신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례는 부지기수였으므로, 이들이 위협을 느끼고 제거하기로 결정하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안나 황후가 포함된 칸타쿠지노스의 적들이 상황 파악을 잘못하고 일을 지나치게 크게 벌인 것이 문제였다. 기왕 제거하기로 결정했으면 칸타쿠지노스가 군대를 이끌고 있지 않은 시기를 노렸어야 했지만, 그들은 칸타쿠지노스가 자비로 모은 병사들을 이끌고 트라키아로 갔을 때 숙청을 단행했다. 더구나 군중을 선동해 요안니스의 저택을 약탈 및 방화하고 시골 영지를 몰수한 데다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전체를 연금해버리는 등 지나친 어그로를 끌었다.[3] 섭정단이 어머니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버리자 칸타쿠지노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1341년 10월 26일에 황제를 자칭하면서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안나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과 연합한 칸타쿠지노스에 맞서기 위해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구원을 청했고,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에게도 지원을 호소했다. 심지어 그녀는 1343년 8월에 금화 3만 두카트를 빌리는 조건으로 베네치아 측에 동로마 제관의 보석들을 저당잡히는 일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노력이 헛되게도 아비뇽, 제노바, 베네치아 어디에서도 구원군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세르비아가 칸타쿠지노스의 뒤통수를 치고 섭정단 편에 붙기도 했지만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인들을 끌어오는 것으로 응수했고 결국 7년에 걸친 내전 끝에, 칸타쿠지노스는 1347년 2월 2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이튿날 아침, 그는 병력을 블라케르나이 궁전 앞에 집결시키고, 황후의 알현을 요청했다. 그러나 의심암귀에 사로잡혀버린 안나 황후는 칸타쿠지노스가 자신과 네 명의 아이를 죽이려 한다고 믿고 그를 한사코 궁전에 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요안니스의 일부 추종자들이 인내심을 잃고 궁전을 습격하자, 경비병들은 황후의 명을 어기고 궁전의 문을 열었다. 닷새 뒤인 2월 8일, 양측 간의 합의가 이뤄졌다. 향후 10년 동안 두 황제는 공동으로 제국을 지배하기로 했고 칸타쿠지노스가 선임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두 황제는 동등한 지위를 가지기로 했다.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는 추방되었지만 다른 정치범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각자의 재산은 내전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4]
신임 총대주교에 발탁된 이시도루스 부카리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이리하여 칸타쿠지노스는 1347년 5월 21일 블라케르나이의 성모 성당에서 두번째 대관식을 치르고 요안니스 6세로 등극했으며, 1주일 뒤 칸타쿠지노스의 막내딸 엘레니 칸타쿠지니와 요안니스 5세의 결혼식이 열렸다. 다만 두 황제가 써야 하는 보석 제관은 안나 황후 탓에 베네치아에게 저당잡혀 있어서 유리로 된 관을 써야 했다.
1351년, 안나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테살로니키로 가서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의 수녀가 되었고, 1365년에 거기서 사망했다.
[1] 이 주장들은 모두 칸타쿠지노스의 기록에서 나오는 말이며 그렇기에 신빙성이 의심된다. 칸타쿠지노스 입장에서 자신의 최대 정적들에게 좋은 말을 쓸리가 없으니까.[2] 후술되어있듯 현대에는 토지 귀족의 수장이라는 칸타쿠지노스의 신분 자체가 안나와 총대주교, 아포카브코스가 그를 의심 안하게 할 수 없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로마 제국 역사상 칸타쿠지노스급 권신이 반란을 안 일으킨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스틸리코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말그대로 예외일 뿐이었다.) 즉, 칸타쿠지노스 개인의 뜻과 상관없이 그가 있던 위치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이라 간주되었던 것이다.[3] 칸타쿠지노스의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사망한다.[4]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는 내전이 종결되기 전 이미 암살당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