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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삼촌 | 이메리오스 |
남편 | 레온 6세 |
자녀 | 콘스탄티노스 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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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레온 6세의 네번째 황후, 콘스탄티노스 7세의 어머니. 별명인 카르보노프시나는 '숯처럼 까만 눈'이란 뜻이다.2. 생애
레온 6세 시기 동로마 제국군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한 이메리오스(Ὶμέριος)의 조카이다. 901년 4월 12일 세번째 황후 에우도키아 베아나가 아들을 낳던 중 사망하고 아들마저 며칠만에 죽은 뒤, 레온 6세는 네 번째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네 번째 결혼은 지난 3차례의 결혼 때에 비할 수 없이 극심한 반발을 살 우려가 있었다. 정교회 교리에 따르면, 사혼은 간통보다 나쁜 일부다처의 죄이며, 사혼을 한 인간은 '인간이 아닌 금수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어 8년 동안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벌이 부과되었다. 그래서 레온은 일단 이메리오스 장군의 조카인 그녀를 정부로 삼고 기회를 노렸다.905년 9월, 조이가 아들을 마침내 낳자, 레온은 안토니오스 2세 카울리아스에게 이 아이를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총대주교는 장기간 고민한 끝에 조이를 황궁에서 내보내는 대신 태어난 아들에게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906년 1월 6일, 아기 황태자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고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는 법적으로 '사생아' 취급이었기 때문에 이대로는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레온은 어떻게든 조이를 정식 황후로 삼아야 했다. 이에 레온은 황궁 내의 조그만 예배당에서 평범한 교구 사제를 앞에 두고 조이와 함께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린 후 이 사실을 공표하고 조이를 황후로 선포했다. 그러자 황제의 전횡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요구를 잘 따라주던 안토니오스 총대주교가 사망하는 바람에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레온은 어떻게든 특면장을 얻어내 사혼을 인정받으려 했지만, 새 총대주교 니콜라오스는 당대 최고 학자인 케사리아의 주교 아레타스의 맹공을 받고 있어서 황제를 도울 여건이 되지 못했다. 이에 레온은 906년 가을에 프사마티아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인 에우타미오스와 일종의 밀약을 맺었다. 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할 테니 특면장을 발급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레온은 교황 세르지오 3세에게 사혼 문제에 관한 질문서를 보내 동방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길 희망하던 교황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레온은 907년 2월 니콜라오스가 반역자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와 비밀 연락을 주고받은 혐의가 있다며 긴급 체포해 총대주교직에서 해임하고, 에우타미오스를 새 총대주교로 삼았다. 에우타미오스는 총대주교에 오른 뒤 황제가 그토록 고대하던 특면장을 부여했다. 마침내 후계자 생산에 성공한 레온은 이제 18개월이 된 아기 콘스탄티노스에게 포르피로게니투스, 적장자 황태자라는 어엿한 신분을 부여했다. 그러나 912년 5월 11일 레온 6세가 사망한 뒤 동생 알렉산드로스 2세가 새 황제로 등극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조이를 궁전에서 쫓아낸 뒤 조카이자 공동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를 거세하려 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총대주교에 복귀한 니콜라오스 조차 결사 반대해서 이를 감행하지 못했다.
913년 6월 6일 알렉산드로스 2세가 사망했고, 콘스탄티노스가 비로소 단독 황제가 되었다. 이때 나이가 겨우 7살이었기에, 본래라면 어머니 조이가 섭정을 맡아야 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는 섭정단에 끼지 못했다. 그녀는 강력히 항의했지만, 섭정단의 대표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그녀를 체포해 삭발한 후 페트리움의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에 추방해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도 안나 수녀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바꿔 부르게 했다. 그렇게 황태후로서의 실권을 박탈당하고 수녀원에 갇혀 지내던 그녀는 914년 2월 다른 섭정들이 니콜라오스의 전횡에 분개하여 정변을 일으킨 덕분에 수도원에서 나올 수 있었으며, 옛 친구와 조언자들을 국정에 참여시키게 하여 실권을 확보했다. 니콜라오스는 정치 문제에 절대로 뛰어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 총대주교직을 유지했다.
우여곡절 끝에 섭정을 맡게 된 조이 황태후는 먼저 아쇼트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즉위시키고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하여 아르메니아로 원정 가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듬해 봄, 아쇼트는 제국군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페르시아의 아미르 유수프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렸고, 아르메니아의 서부 전체와 동부 대부분이 아쇼트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후로도 4년간 더 전쟁이 벌어졌지만, 대체로 아쇼트가 아르메니아에서 우세를 확보했고 조이는 첫번째 원정을 승리로 장식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또한 제국군은 타르소스에서 쳐들어온 사라센군을 격파했고 남이탈리아의 랑고바르디아 테마에서 사라센군을 궤멸시켰다.
915년 9월, 시메온은 니콜라오스 총대주교가 실각하고 조이 황태후가 섭정을 맡게 되었으며 자기 딸과 콘스탄티노스 황제를 결혼시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대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해 손쉽게 현지 총독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조이 황태후가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이렇게 빨리 맞대응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시메온은 황급히 철수했다. 이후 시메온은 2년 동안 테살리아와 이피로스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수시로 공략했다.
그러다가 917년에 시메온의 군대가 트라키아로 돌아가자, 조이 황태후는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크리미아 케르손의 군사 총독 요안니스 보가스는 황태후의 밀명을 받들어 한때 시메온의 동맹 세력이었던 페체네그족을 매수하여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침공하게 했다. 동로마 함대는 페체네그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수송해줄 것이며, 그동안 제국 육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진군할 것이다. 그러면 대규모 협공에 걸려든 시메온은 강화를 제의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사단이 일어났다. 함대 지휘관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요안니스 보가스와 만나자마자 서로 자신의 권한이 우월하다며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더니 로마노스가 군대 수송을 거부해버렸다! 이로 인해 페체네그족은 자신들을 수송할 제국 함대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대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육군은 수도를 떠나 흑해 연안을 따라 행군했다. 이들은 불가리아로 진입했다가 8월 20일 새벽에 앙키알로스 항구의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시메온은 이들을 기습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날 제국군은 거의 전멸했고 레온 포카스를 비롯한 소수의 병사들만이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재앙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지자,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를 공식 심문에 회부하여 실명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중재에 나서 준 덕분에, 로마노스는 간신히 처벌을 면제받았다. 그해 겨울, 시메온이 군대를 이끌고 동부 트라키아를 유린하고 콘스탄티노플 성벽까지 밀어닥치자, 조이 황태후는 다시 레온 포카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카사시르타이의 서쪽 외곽에서 또다시 시메온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넘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한편, 조이 황태후는 2차례의 참패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후견인을 모색했다. 그녀는 레온 포카스를 황궁으로 불려들어 조언자로 삼았지만 황제의 가정교사 테오도로스는 레온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로마노스는 어린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황태후는 그에게 함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로마노스는 황태후가 보낸 시종장을 체포했다. 이에 황태후가 해명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돌맹이 세례를 맞고 쫓겨났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황태후는 부콜레온에서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그녀는 아들이 "어머니의 섭정을 끝내고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옛 섭정단원인 마기스테르 스테파노스에게 공동 섭정을 맡기겠다"고 연설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튿날 아침 한 무리의 병사들이 조이 황태후를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으로 호송하러 찾아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병사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그 덕분에 그녀는 권력만 잃은 채 황궁의 규방에 머물 수 있었다.
920년 여름, 로마노스는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의 협조하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결혼에 관한 최종적으로 수정된 교회법이 포함된 '토무스 우니오니스(Tomus Unionis)'가 발표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재혼은 완전히 합법적이고 삼혼도 나이 40살 미만의 아이 없는 홀아비의 경우 회개하는 조건 하에 허락되지만 사혼은 어떤 상황에서도 금지되며 사혼을 한 사람은 그 배우자와 영구히 결별할 때까지 파문에 처하는 형벌을 받는다. 이 법은 소급 적용되지 않았지만 레온 6세의 삼혼과 사혼은 훨씬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고 콘스탄티노스의 위상은 훼손되었다. 한달 후, 조이는 로마노스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삭발당하고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로마노스를 초청했던 테오도로스도 동생 시메온과 함께 체포되어 아나톨리아 북서부로 유배되었다. 이후 조이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