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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0:04:36

요안니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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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124대 황제
요안니스 5세
Ιωάννης Ε΄
파일:Restored_mosaic_of_John_V_Palaiologos_(head).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Ἰωάννης Παλαιολόγος
출생 1332년 6월 18일
동로마 제국 디디모테이코
사망 1391년 2월 16일 (향년 58세)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차
1341년 6월 15일 ~ 1376년 8월 12일 (35년)
로마 황제 2차
1379년 7월 1일 ~ 1390년 4월 14일 (11년)
로마 황제 3차
1390년 9월 17일 ~ 1391년 2월 16일 (1년)
전임자 안드로니코스 3세
후임자 마누일 2세
부모 아버지 : 안드로니코스 3세
어머니 : 사보이아의 안나
종교 그리스도교(정교회)
1. 개요2. 생애3. 정세
3.1. 對 오스만3.2. 對 세르비아, 불가리아
4. 기타 창작물에서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제124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제5대 황제.

요안니스의 즉위는, 말기에 이른 동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신호와도 같았다. 그의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3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이기지는 못했어도 오스만 베이국의 침공에 적극적으로 응수하고 다른 지방에서도 영토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일부 확장하기까지 했다. 즉 안드로니코스 3세까지의 동로마 제국은 예전만은 못했어도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잦은 내전[1]흑사병의 유행, 이웃나라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융성, 오스만의 침입 등으로 그 희망마저 꺼져버린 때가 요안니스 5세의 치세였다.

2. 생애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이후 예순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그 생애는 참으로 파란만장했는데, 먼저 두 번이나 폐위당했다 복위하기를 반복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여러 번의 내전을 경험했다. 미하일 8세가 동로마 제국을 복원한 이래 제국 멸망 때까지 내전이 네 차례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무려 세 번이 요안니스의 치세에 일어났으며, 그러다 보니 역대 로마 제국의 황제들 가운데 두 번씩이나 폐위당했으면서도 그때마다 복위에 성공한 예는 요안니스 5세뿐이다.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3세가 세상을 떠난 후 9살의 나이에 즉위했다. 황태후 사보이아의 안나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요한 14세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1341년 내란을 일으켜[2] 1347년 요안니스 6세로 즉위하였다. 요안니스 5세는 요안니스 6세의 막내딸 엘레니 칸타쿠지니와 결혼한 후 숨죽이고 있다가 1354년 말 요안니스 6세를 폐위시키고 일단 복위했다.
복위에는 성공했지만 내전으로 제국의 국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세르비아는 이 내전을 틈타 동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던 발칸 반도 서부의 영토를 차지했다. 또한 오스만도 갈리폴리[3]를 점령함으로써 유럽으로 건너왔다. 요안니스 5세는 서유럽과의 동맹을 꾀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요안니스 5세는 장남 안드로니코스 4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안드로니코스 4세는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4], 아버지와 동생(훗날의 마누일 2세)를 투옥했다. 이에 오스만은 제국이 오스만의 속국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요안니스 5세의 두 번째 복위를 도왔다[5].
하지만 이번에는 안드로니코스 4세의 아들, 즉 요안니스 5세의 손자인 요안니스 7세가 반란을 일으켰지만[6], 마누일 2세와 오스만의 지원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오스만의 바예지드 1세는 이번에도 대가로 아나톨리아에 마지막으로 남은 동로마 영토였던 필라델피아(오늘날의 터키 알라셰히르) 할양 등을 요구했다[7]. 요안니스 5세는 1391년 사망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문 가운데 하나인 '황금 문'의 방비가 허술해진 것을 우려하여 성벽 밖에 있는 수도원 몇 채를 허물고 거기에서 나온 석재로 성문을 보강했는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바예지드로부터 '(보강한 부분을) 맞고 부술래? 그냥 부술래?'라는 편지를 받게 된다. 결국 요안니스는 황금 문의 방어시설을 다시 허물라고 지시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운의 황제였던 셈이다.

보면 알겠지만 요안니스 5세 덕분에 팔레올로고스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3. 정세

잦은 내전과 오스만의 침입,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융성 등 동로마 제국의 가장 큰 멸망 요인들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1. 對 오스만

요안니스 5세의 치세는 오스만 술탄국유럽 침공이 본격화한 때이기도 하다. 물론 오스만과 동로마 제국이 처음으로 충돌한 때는 요안니스의 할아버지 때인 안드로니코스 2세 때지만, 오스만이 유럽까지 건너온 것은 요안니스 5세 치세. 1354년에 갈리폴리(=칼리폴리스, 갤리볼루)[8]에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1341년부터 1347년까지 장장 7년동안 계속된 내전의 결과 심각한 수준으로 약해진 동로마 제국은 피해 복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이 점렁했고 이에 요안니스는 1369년에는 직접 로마로 달려가 교황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는 대가로 동방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해야 했으나 물론 교황의 지원 약속은 말뿐이었다.. 1371년에는 제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다른 나라의 봉신이 된다는 치욕을 맛보기도 했다. 물론, 그 상대는 오스만 베이국이였다.

3.2. 對 세르비아, 불가리아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제국의 북쪽 및 북서쪽 국경에 접한 이웃 나라들인 세르비아불가리아가 하나같이 잘 나가고 있다는 악재까지 겹쳐버렸다. 세르비아의 왕인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Stephen Uroš IV, 재위: 1331~1355)[9]는 동로마 제국의 내전을 이용하여 제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갉아먹더니 1346년에는 황제를 자칭하기에 이르렀다.[10]

그나마 스테판 우로슈 4세가 급사한 이후 세르비아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다. 급사하는 바람에 확장한 영토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지 못했고, 각지에 파견한 지방 귀족들의 세력이 강력해지는 것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런 데다, 후계자인 스테판 우로시 5세는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병약한 인물이었다. 결국 스테판 우로슈 5세의 치세에 세르비아 제국은 하나둘씩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1371년에 스테판 우로슈 5세가 후계자 없이 요절하면서 제국은 공중분해 되고, 세르비아 공국이 되었다.

불가리아 제2제국의 황제인 이반 알렉산더르(Ivan Alexander, 재위: 1331~1371)도 세르비아만큼 잘 나가지는 못했지만 역시 동로마 제국의 내전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이익을 많이 챙겨갔다. 영토 확장과는 별개겠지만, 이반 알렉산더르의 치세에 2차 불가리아 제국은 문화적인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도 이반 알렉산더르 치세 말부터 분열하려는 조짐을 보인데다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해내지 못했다. 실제로 불가리아 제국은 셋으로 나뉘어 내부 항쟁을 계속한 결과 1395년에 멸망하기에 이른다. 이반 알렉산더르가 죽고 겨우 24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오스만이 발칸 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이 이 틈을 기회로 이익을 챙길 수는 없었다.

4. 기타 창작물에서

능력치 특기 병과적성
(전)정치 47, 전투 61, 지모 53
(후)정치 52, 전투 66, 지모 58
문화, 등용, 기동, 화공 보C 궁C 기B 수C

능력치는 당연히 오스만의 무라트&바예지드 부자보다 나쁘지만, 왕족이라서 아들 마누일처럼 지휘 병력수 보정을 받기에 극초반 올인러시가 이벤트 성공 가능성이 있다.
크루세이더 킹즈와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모두 등장한다. 가장 늦은 북마크 연도가 1337년이라서 아직 5살이며 동로마 전용 정부인 제정의 후계자 선정 규칙 때문에[11] 장성하기 전에 부황이 먼저 죽으면 황제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1] 물론 안드로니코스 3세 본인이 할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 2세와 내전을 일으켜 황제가 된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안드로니코스 3세는 즉위 과정에서의 내전을 제하면 제국을 그럭저럭 훌륭하게 이끈 편이지만, 황제가 어지럽게 바뀌기를 반복한 요안니스 시대의 내전이 훨씬 큰 피해를 입혔다.[2] 원래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섭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군사적인 이유로 잠시 수도를 비운 틈에 세계 총대주교가 황태후에게 칸타쿠지노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쏘삭거렸고, 결국 칸타쿠지노스를 파직하고 황태후와 세계 총대주교가 섭정의 자리에 오른 것. 그리고 칸타쿠지노스는 목에 칼을 받지 않으려면 검을 들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3] 그리스어로는 칼리폴리스, 현재는 터키어로 갤리볼루라고 불리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보스포루스의 거점이었다면 갈리폴리는 마르마라 해의 입구이던 다르다넬스의 거점이었다.[4] 요안니스가 서유럽에 다녀오던 도중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불가리아에서 사로잡힌 일이 있었는데, 안드로니코스는 이때 요안니스 구출에 힘쓰기는커녕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러니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요안니스의 입에서 '공동황제(황태자)를 바꿔야겠다' 라는 말이 나온 것도 당연할 수 있다.[5]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은, 안드로니코스 4세도 반란을 일으키며 오스만에 도움을 요청했었다는 것. 즉 이 말은, 안드로니코스가 먼저 오스만 왕궁으로 달려와 '도와주십쇼' 라고 했고, 그 안드로니코스에게 쫓겨난 요안니스 5세도 오스만 왕궁의 문을 두드리며 '도와주세요' 했고, 다시 그에 의해 쫓겨난 안드로니코스도 오스만 왕궁으로 갔다. 이러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을 리가 없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당시 동로마의 운명은 이미 오스만의 손에 좌우되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6]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 안드로니코스 4세가 황위 계승자라고 하면 요안니스 7세도 언젠가는 황위를 물려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황위 계승자가 마누일 2세가 되면, 자동적으로 요안니스 7세도 황제 즉위 불가. 이 내란은 오스만의 개입으로 일단 해결되었는데, 마누일의 제위 계승은 일단 인정하되 아직까지 아들이 없는 그가 후계를 남기지 못할 경우 그 다음은 요안니스 7세로 한 것. 다만 그로부터 얼마 뒤 마누일은 아들을 낳았고, 요안니스와 협상을 벌여 평생동안 황족으로 정중히 대우하되 황위를 잇는 것은 포기하게 했다. 그리고 요안니스는 그를 받아들였지만, 당시 술탄이었던 바예지드 1세는 요안니스 7세를 총애하고 있었기에 '당장 마누일이라는 자를 잡아 죽이고 요안니스를 즉위시킬 것'을 '명령'했다(당시는 동로마가 오스만의 신하국이었으므로). 비록 바예지드는 곧바로 말을 바꾸어 요안니스 7세의 즉위를 요구했지만, 이로 인해 마누일은 오스만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게 된다.[7] 정확히 말하면, 알라셰히르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다른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오스만에게 하나둘씩 넘어가는 와중에도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스만 술탄국에 연공을 바치는 등 독립체나 다름없었는데, 이참에 필라델피아를 확실히 넘길 것을 요구했던 것.[8] 다르다넬스 해협의 유럽 쪽 땅이다.[9] '스테판 두샨(Stephen Dušan)' 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린다.[10] '세르비아의 황제' 였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그 타이틀은 무려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Ромеја, βασιλεὺ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Σερβίας καὶ Ῥωμανίας)'. 참고로 이와 동시에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Цар Срба и Грка)' 칭호도 사용하였다. 어쨌든 이는 곧 '시망 직전인 지금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실 대신 내가 로마 제국의 주인이 되겠다!'이라고 선언한 거와 같았다. 실제로 이후 스테판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연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려고까지 하지만, 베네치아의 거절로 인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11] 플레이어가 지정한 성년 황족>포르피로게니투스인 황족>사령관+작위 보유 황족>사령관+작위 보유 봉신>미성년 황족>미성년 봉신 순서로 우선순위가 정해지는데 1337년 시나리오에서는 팔레올로고스 혈족을 제외하면 황족은 아니나 테살로니키의 영주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