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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C00><colcolor=#fff> 세르비아 2대 차르 {{{#fff {{{+1 스테판 우로시 5세}}} }}} {{{#fff Стефан Урош V}}} | |
별명 | 약한 왕(Нејаки) |
출생 | 1336년 |
세르비아 왕국 | |
사망 | 1371년 12월 4일 (향년 35세) |
세르비아 제국 스코페 | |
재위 |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국왕 |
1346년 ~ 1355년 | |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차르 | |
1346년 ~ 1371년 | |
아버지 |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
어머니 | 불가리아의 옐레나 |
형제 | 테오도라 우로시 |
배우자 | 왈라키아의 안카 (1360년 결혼) |
가문 | 네마니치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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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2. 생애
1336년경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과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의 여동생 엘레나 사이에서 출생했다. 1346년 4월 16일 부활절에 부친이 스코페에서 차르로 즉위했을 때, 그는 10살의 나이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왕"에 선임되었다. 1351년부터 네만지치 주의 일부 지역을 할당받아 통치를 행사했다. 1355년 12월 20일 부친 두샨이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숨을 거둔 뒤,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랐다.당시 18살이었던 그는 "강인한 왕"이라는 평판을 받으며 만인의 존경과 두려움을 샀던 부친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외모가 훤칠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좋은 군인이 아니었고, 현명한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아버지가 애써 일궈낸 제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었다. 한편 일찍이 두샨에 의해 각지의 데스포티스로 세워졌던 신하들은 유약한 차르의 등극을 틈타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 시메온 우로시가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스테판 우로시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자신을 세르비아와 로마의 황제로 칭했다. 그러나 1356년 봄 이전의 이피로스 데스포티스였던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스테판 두샨의 지휘관이었던 프렐류프 총독이 사망한 후 무정부 상태가 된 테살리아를 공략한 뒤 여세를 몰아 이피로스로 진격하여 시메온 우로시를 축출하고 이피로스의 데스포티스에 복귀했다.
시메온 우로시는 이피로스 북부의 카스토리아로 밀려난 뒤, 아예 스테판 우로시 5세를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차르를 자칭하고 제타로 북상하면서, 귀족들에게 호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귀족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옳고, 그의 어머니가 미하일 8세의 손녀 마리아 팔레올로기나이니 '반 그리스인'이라고 여겨서 거의 호응하지 않았다. 시메온 우로시는 1358년 제타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차르가 되는 걸 포기했다. 1359년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알바니아군을 상대로 아이톨리아의 아켈로오스 전투를 치르다 전사하자, 그는 재빨리 테살리아로 진격하여 그곳의 귀족들로부터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이피로스로 진격해 알바니아군의 침략에 직면한 몇몇 도시로부터 데스포티스로 인정받았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이 일련의 상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손을 떼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1356년, 트라키아에서 할거하며 동로마 황제를 칭하고 있던 마테오스가 5,000명의 투르크 용병대를 고용하여 세르비아가 장악하고 있던 세레스로 쳐들어갔다. 당시 그곳엔 우로시 5세의 어머니 엘레나가 있었다. 우로시는 모후를 지키기로 하고, 드라마 총독 보이나 휘하의 세르비아군을 파견했다. 1357년 투르크군은 패배하였고, 마테오스는 체포되었다. 세르비아는 마테오스에게 거액의 몸값을 붙였고,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5세가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갔다. 하지만 이외에는 이렇다할 활동을 하지 않았고, 우로시의 모후이며 당시 수녀 신분이었던 엘레나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세르비아 북서부에서는 헝가리의 침공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던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의 권세가 강해졌다. 그는 1359년경 드리나 강과 아드리아 해 사이 일대를 점유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삼아 정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는 동생 우글레샤 므르냐브체비치와 함께 엘레나 황후의 총애를 토대로 프릴레프를 중심으로 마케도니아 서부와 스코페, 프리즈렌 등을 통치했고, 제타 일대는 발시치 가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고 스테판 두샨의 궁중 의전을 담당하는 관리였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고향인 노보 브르도로 돌아간 뒤 보이슬라프 보이노비치와 협력하며 노보 브로도와 프리슈티냐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외에도 스테판 두샨 시절 데스포티스로 임명되었던 요반 아센, 요반 올리베르, 스테판 우로시 5세에 의해 데스포티스로 임명된 데얀 드라가슈 등은 겉으로는 차르에게 충성했지만 실제로는 독립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세르비아 각지의 데스포티스들이 제각기 세력을 구축하고 떨어져나가는 상황이었지만, 스테판 우로시 5세는 이들을 저지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365년,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를 공동 통치자로 세우고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1369년에는 부카신의 장남 마르코 왕자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수도 라스, 마케도니아 서부, 스코페, 프리즈렌 등지에서나 통할 뿐이었고, 다른 지역의 통치자들은 중앙 정부의 어떠한 간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 베이국의 침략이 임박했다. 1362년, 오스만의 베이 무라트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에디르네로 개명하여 서방 영토의 수도로 삼은 뒤, 발칸 반도로의 영역 확대를 계속 추진했다.
우로시 5세와 부카신의 공동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마르보 오르빈에 따르면 1369년 라스 주판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광산이 풍부한 코소보로 확장하려는 부카신에게 반감을 품고 연합군을 결성한 뒤 우로시 5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맞서 싸웠다. 므르냐체비치 가문과 연합군의 결정적인 충돌은 코소보에서 벌어졌다. 라자르는 전투가 시작될 무렵에 이미 철수했고,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우로시 5세는 여러 궁정 영주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우로시 5세는 정계에서 사실상 사라졌고, 부카신은 독립된 통치자로 군림했다. 라구사 공화국은 우로시 5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이름으로 공물을 바쳤지만, 1370년 4월 우로시 5세를 배제하고 부카신에게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을 확인받았다.
이후 니콜라 알토마노비치가 헝가리 왕국의 지원에 힘입어 세력을 재건하자, 부카신은 발사치, 라구사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그를 도모하려 했다. 1371년 6월, 부카신은 아들 마르코와 함께 슈코더르로 진군해, 니콜라의 영토에 속한 니식치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던 1371년 투르크군이 주라지 발시치를 물리치고 트라키아와 로도피 산맥 일대까지 공략하자, 부카신과 우글레샤는 위협을 느끼고 군대를 소집하여 로도피 산맥에서 투르크군을 몰아내기로 했다. 그러나 1371년 9월 26일에 벌어진 마리차강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고, 부카신과 우글레샤 형제 모두 전사했다. 부카신의 아들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는 뒤이어 세르비아 왕이 되었지만, 투르크군에게 맞설 병력이 없었기에 그들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많은 영토를 헌납했다.
1371년 12월 4일, 스테판 우로시 5세는 마리차 강 전투 패전 2달여 만에 사망했다. 향년 35세. 세르비아 영주들은 명목상으로나마 스테판 우로시 5세를 군주로 인정했지만, 그가 사망하고 난 뒤 후계자를 자처한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스테판 두샨이 세웠던 세르비아 제국은 25년만에 무너졌고, 기존의 세르비아 왕국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르비아 전역은 여러 공국으로 완전히 분열되어, 공작들간의 패권 경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