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371년 9월 26일 랄라 샤힌 파샤와 에브레노스 베그가 지휘하는 오스만 베이국 군대와 부카신과 우글레샤 므르냐브체비치 형제가 이끄는 세르비아 제국 군대가 체르노멘 마을(현재의 그리스 오르메니오) 인근 마리차강에서 맞붙은 전투. 체르노멘 전투로도 불리는 이 전투는 '세르비아인의 파멸'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르비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2. 배경
서기 14세기 중엽, 세르비아 왕국은 스테판 두샨의 지도 하에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두샨은 동로마 제국이 팔레올로고스 내전을 벌일 때 적절하게 개입하여 세력을 키우는 발판으로 삼았고, 1343년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연안지역의 왕'을 칭하고 1346년 동로마 제국의 절반의 영토를 점령한뒤 '그리스(로마)인의 황제'를 칭하고 세르비아 제국을 선포해 위세를 떨쳤으며, 1354년 동로마 제국의 법전을 기본으로 삼고 세르비아의 관습법, 서유럽의 봉건제등을 혼합한 '두샨 법전'을 반포했다. 세르비아 제국은 이러한 두샨의 활약 덕분에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고히 했다.그러나 1355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준비를 하던 두샨이 갑작스런 열병으로 사망한 뒤, 세르비아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허약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신체가 허약하고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이에 두샨의 이복 동생이자 스테판 우로시 5세의 삼촌인 시메온 우로시가 반기를 들어 세르비아 남부의 에페이로스가 떨어져 나갔고, 나머지 영역도 여러 세르비아 귀족들이 갈라먹으면서 여러 개로 쪼개졌다.
발칸 반도의 패자였던 세르비아가 스테판 두샨의 사망 이후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을 무렵, 동방에서는 오스만 베이국이 무서운 기세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1362년 하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에디르네로 개명하여 반칸 반도에서의 수도로 삼은 뒤, 오스만 베이군은 계속해서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대했다. 당시 오스만의 베이 무라트 1세는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투르크족을 복속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무라트 1세의 스승이자 뛰어난 장군이었떤 랄라 샤힌 파샤는 발칸 반도에서의 원정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세르비아와 그리스인의 황제'를 칭하고 있던 세르비아 영주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와 동생 우글레샤는 오스만 베이국이 발칸 반도에서 세력 확장을 벌이는 것을 경계했다. 급기야 오스만군이 자신들의 친적인 주라지 발시치를 무찌르고 트라키아와 로도피 산맥 일대까지 공략하자, 그들은 위협을 느끼고 군대를 소집했다. 그들의 목표는 오스만군을 궤멸시키고 로도피 산맥에서 내쫓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371년 9월 오스만군과 세르비아군의 결전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세르비아군
- 지휘관: 부카신 므르냐브체비치, 우글레샤 므르냐브체비치 형제
- 병력: 7만명(오스만 측의 기록). 실제로는 2만 명으로 추정됨.
3.2. 오스만 베이군
- 지휘관: 랄라 샤힌 파샤(마리차강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음), 에브레노스 베그
- 병력: 800명(오스만 측의 기록). 실제로는 세르비아군의 절반 정도로 추정됨.
4. 전투 경과
1371년 여름, 부카신과 우글레샤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은 스카다르에 도착하여 라구사 공화국 해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우글레샤가 선봉대를 이끌고 남하하던 중, 오스만군 대다수가 유럽을 떠나 아나톨리아로 진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우글레샤는 곧바로 형 부카신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지금이 공세를 개시할 적기라며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부카신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우글레샤와 합류한 뒤 에디르네로 진격했다.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랄라 샤힌 파샤에게 고스란히 포착되었다. 그는 정찰병을 수시로 파견하여 적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반면 세르비아군은 월등한 병력에 자만한 나머지 정찰병을 보내지도 않았다. 랄라 샤힌은 적이 체르노멘 마을 인근 마리차강변에 주둔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측근인 에브레노스 베그에게 적진을 기습하라고 지시했다. 에브레노스 베그는 9월 26일 새벽, 세르비아군 진영을 기습했다.
당시 세르비아군은 다가올 승리에 들떠서 술잔치를 벌이느라 경계가 느슨했고, 많은 병사들이 술에 취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이때 오스만군이 난입하자, 그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살육당했다. 많은 세르비아 장병이 도주하다가 마리차강에 빠져 익사했고, 부카신과 우글레샤 형제도 전사했다. 이리하여 마리차강 전투는 오스만군의 압승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