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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71년 신성동맹(또는 기독교 동맹)과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 인근 레판토에서 맞붙은 전투[1]로 떠오르던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저지한 전투로 유럽에서는 상당한 위상을 자랑하는 전투다. 프레베자 해전 이후 지중해의 패권을 쥐고 있던 오스만 제국에게 서유럽 세력 (신성동맹)이 일격을 날렸다고 평가되며, 실제로 전투 이후엔 이탈리아와 스페인 해역 (일명 합스부르크 해안)에 대한 오스만 해군의 습격이 많이 줄어들었다.다만 오스만 조정에서는 타버린 수염은 다시 자란다며 별일 아니라고 취급하였다. 그리고 서유럽 세력도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마찬가지였고 신성동맹은 와해되었으며 베네치아는 오스만과 다시 평화 조약을 맺었다. 한편, 이 전투에서 대활약하여 명성을 얻은 스페인 해군은 아르마다 인벤시블레(Armada Invencible[2]), 즉 '무적함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2. 배경
레판토 해전의 발단은 베네치아 공화국, 합스부르크 제국과 평화 조약을 유지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1570년 6월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였던 키프로스를 침공한 것이었다.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합병된 키프로스는 이슬람 세력권인 아나톨리아와 레반트, 이집트에 둘러싸인 채 동지중해 한복판에 홀로 떠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섬이었다. 동지중해 전체의 무역로에 대한 통제, 본국의 지원 없이도 자급자족이 가능케 하는 비옥한 농토와 이를 기반으로 재배되는 설탕과 목화 등 여러 이점들 때문에 키프로스는 크레타와 더불어 당시 베네치아의 중요한 해외 영토였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이점은 그만큼 이슬람 세력에서 눈독 들이고 공격할 확률도 크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평시에 자급자족이 된다는 것이지 일단 침공이 시작되면 베네치아로부터의 지원이 필수적인 상황이니...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평화적으로 키프로스를 지키려고 하였다. 키프로스를 차지한 이후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왕국의 보호국이던 맘루크 왕조에 매년 8천 두카트의 공납금을 바쳐 키프로스의 안전을 보장받았고, 오스만이 맘루크를 멸망시킨 1517년 이후에는 공납금을 바치는 대상을 오스만으로 바꿔 키프로스의 안전을 지속적으로 보장받았다.[3] 매년 공납금을 받아먹으며 키프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긴 하지만 오스만은 베네치아가 영원히 키프로스를 지배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그저 레반트 지역의 패자 자리에 만족하던 맘루크와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로마 황제라는 직함을 내세우고 전 지중해 세계의 제패를 노리던 오스만 제국은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며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는데, 동지중해 전체를 거의 제패하고 서지중해와 아드리아 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자기네 안마당에 우두커니 떠 있는 적성 세력의 전초기지가 눈엣가시처럼 걸렸을 것은 뻔하다. 더군다나 키프로스에 근거지를 둔 기독교도 사략선들이 한창 무슬림 상인들과 메카 순례자들을 노려 오스만의 심기를 돋우고 있었다.
1568년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왕국을 두고 수십 년 동안 줄기차게 싸우던 합스부르크 제국과 화평 조약을 맺은 후 곧바로 칼끝을 키프로스로 돌렸다. 대제 쉴레이만 1세의 뒤를 이은 셀림 2세는 1566년 즉위 전부터 "짐의 첫 번째 목표는 키프로스"라고 선언하며 키프로스 정복을 천명한 상황이었다. 야사에는 중증의 술 덕후(...)였던 셀림이 키프로스산 와인을 미친 듯이 좋아해서 그 원산지를 차지하기 위해(...) 침공을 단행했다고 하는데, 실제 원인은 셀림의 친구였던 포르투갈 왕국 출신 유대인 주앙 미케스(João Miques)가 셀림더러 키프로스를 침공하도록 사주한 것이었다. 주앙은 셀림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셀림의 칙명으로 낙소스 공작에
1567년 베네치아와의 평화조약을 새로이 갱신하긴 했지만 당시 누구도 오래갈 거라 믿지 않았고, 그야말로 양쪽 다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휴전에 불과했을 뿐이다. 주화파였던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반대파들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전쟁 여론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들은 "키프로스는 예전에는 이슬람의 영토였으나[5] 지금은 이교도들이 점거하고 있으니 다시 수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게다가 키프로스는 베네치아가 접수하기 훨씬 이전부터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영혼까지 털린 이후 기 드 뤼지냥이 차지하여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까지 해적질을 걸었던 상징적인 의미도 컸다. 그렇게 주전파의 의견이 채택되면서 오스만의 키프로스 침공이 결정되었다.
파마구스타 성벽에 새겨진 베네치아 사자
이전에도 오스만은 쿨타임 찰 때마다 키프로스에 해군을 파견하여 깔짝대긴 했으나 이번 원정의 목적은 키프로스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규모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인구 약 16만 명의 키프로스에는 1만 명 전후의 베네치아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8만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왔던 까닭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오스만 군은 상륙하자마자 키프로스 전역을 유린했다. 맨 처음 상륙한 리마솔을 시작으로 파포스, 키레니아와 수도 니코시아까지 순식간에 함락당했고 9월에 들어서면 베네치아는 파마구스타를 제외한 키프로스 전역을 상실했다.[6] 다행히 파마구스타는 잘 요새화된 지역이었고, 요새와 바로 연결된 항구가 있었서 보급이 용이했던 까닭에 오스만 제국군은 이듬해 4월까지 포위를 한 상태에서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느닷없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는 교황에게 열심히 로비를 하고, 교황 성 비오 5세(재위 1566~1572)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가 신성동맹의 소집을 결정하고 1570년 9월에 180척 가량의 신성동맹 연합함대가 구성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그 영향으로 제노바 용병 출신으로 스페인에 의해 연합함대의 사령관에 임명된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가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나 그냥 돌아갈래"라면서 시칠리아로 뱃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없이 해산(…)되었다. 이 양반은 레판토 해전에서도 별로 한 것이 없어서 전쟁 후 전리품을 나눠가질 때 동맹군 지휘관들에게 고의적인 사보타주 의혹에 휩싸여 심하게 까였는데, 교전을 하지 않으려고 지시한 고용주인 펠리페 2세의 의향을 철저히 따랐다고 볼 수도 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동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대 같은 건 별 관심도 없는 문제였고, 극단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를 모두 장악한다고 해도 스페인이 아쉬울 일은 거의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건 정말 극단적인 견해다. 당시는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로, 스페인의 형제국[7]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이 위협받고, 오스만의 지원을 받는 바르바리 해적이 스페인 남부와 이탈리아 해안을 휩쓸고 있었으니, 오스만이 분명 가장 위험한 적수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의 자금줄이 더 이상 지중해 무역이 아닌, 신대륙에서 오는 황금과 네델란드, 벨기에 지역의 모직물 무역으로 옮겨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펠리페 2세가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요청 때문이었는데, 수십 척으로 해전을 벌이는 것은 아무리 잘 나가던 스페인에도 국력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일이었으니,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레판토 해전 이후 스페인은 파산 선언을 할 정도였으니 뭐. 게다가 1560년, 제르바 섬 해전에서 바르바리 해적들에 패하면서 함선 60척을 날려먹은 이후, 펠리페는 함대 손실에 대해 극단적으로 방어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1564년 몰타 섬 공방전에서 스페인 육군은 오스만 군을 물리치기에 충분한 구원병력을 모았읍에도, '해전을 벌이는 건 용납못한다'는 펠리페의 명령 때문에 지원을 못가 몰타섬을 잃을 뻔했다. 반면, 지중해 교역이 국가의 생명줄이었던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을 막는 것에 국운이 달려 있어 필사적인 입장이었다.
때문에 펠리페 2세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체면치레로 함대를 적당히 보내는 시늉만 하고 싶어했던 것이고, 안드레아 도리아는 이 지시에 충실히 따른 것 뿐으로 당시 스페인의 정황으로 보았을때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레판토 해전 이전에도 프레베자 해전에서 안드레아 도리아[8]는 함대를 출격만 시켰다 바로 돌아온 일이 있다.
이에 실망한 베네치아는 일단 12척의 갤리선을 동원하여 파마구스타에 일시적인 보급을 하고, 다시 로비 작업에 착수한다. 이번에는 펠리페 2세도 마음을 돌려 적극적인 참여를 결정하고 1571년 5월 다시 신성동맹 연합함대 결성이 선포된다. 그리고 애초에 신성함대를 해산시킨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대신 자신의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8월 말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스만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출항하였다.
사실 스페인 입장에서도 동지중해의 패권 문제가 비교적 국익에 부차적이였다 해도, 당장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이 스페인 왕실의 영지였거나 제후국이었고, 무엇보다 마그레브 지방에 기반하여 스페인 동부를 털어대던 바르바리 해적들의 물주가 바로 오스만 제국이였기 때문에 마냥 방관할 수도 없었다.
2.1. 파마구스타의 함락
현대 파마구스타의 전경.[9]
한편 오스만군은 작년 9월부터 8만 병력으로 파마구스타 포위를 시작한 이래 그 규모는 20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5월부터 본격적인 공성을 시작해 마침내 8월 1일 파마구스타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항복 조약 직후 양측에 분쟁이 발생했다. 당초 오스만군 사령관이었던 라라 무스타파 파샤가 애초에 키프로스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베네치아 군대는 크레타 섬에 보내주기로한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본인이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단 베네치아와 오스만 측 역사가들 모두가, 양측의 의견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서 불일치 한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하나는 포위전 당시 베네치아 측이 무슬림 순례객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으며, 항복 조약이 맺어지면 이들을 오스만 측에 인도하기로 했는데 인도하지 않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향후 무슬림 순례객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베네치아 측에서 인질을 제공할 것을 오스만 측이 요청했는데, 베네치아 측이 단칼에 거절한 점이다. 다만 왜 무슬림 인질들을 인도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이 엇갈린다. 오스만 측에서는 '베네치아 인들이 인질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베네치아 측 기록은 이들이 '도망갔다' 혹은 '행방을 모른다' 등으로 갈린다. 하지만 파마구스타는 장기간 오스만군에 포위되어 있었고, 오스만의 인질들이 범죄자나 정치적 망명자가 아닌 일반 무슬림 순례자들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들이 오스만군 진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오스만군에 아무것도 넘겨주기 싫었던 파마구스타 수비군 대장, 마칸토니오 브라가딘이 항복 직전에 전쟁물자와 함께 인질을 제거했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어쨌든 무스타파 파샤는 "너희들은 어차피 항복할 것이면서도 쓸데없이 저항해서 그 결과 수만명이 죽었는데, 이제와서 돌려주기로 한 우리 인질은 안돌려주면서, 너희쪽 인질을 못내놓겠다니 협정위반이다."라고 분노한 반면, 브라가딘은 "무슬림 인질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우리쪽에서 인질을 내놓는다는 항목은 협정에 없는 내용 아니냐?"라고 따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오스만군이 도시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베네치아 군대는 험한 꼴을 보게 되었다. 우선 브라가딘의 귀와 코를 베서 끌고 다니다가 살가죽을 벗겨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사령관은 살가죽이 벗겨진 상태에서도 얼마간 살아 있었다 하며, 가죽이 벗겨진 채로 흙바닥에 끌려다니다가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에 수차례 담가지기를 반복해서 당했다고도 한다. 그 밖에 마칸토니오의 부관들은 모조리 참수하여 허수아비와 함께 코스탄티니예에 전리품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전해들은 베네치아 군대는 너나할 것 없이 분노에 사로잡혔고, 스페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병사들까지도 경악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오스만 측 입장에선'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를 한 셈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수(惡手)였던 셈. 하지만 한편으로는 포로학살을 저지른 베네치아 측의 내로남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돈 후안을 사령관으로 하는 신성동맹 함대가 접근을 하고 오스만 해군이 요격을 위해 나서면서 양측은 레판토 부근에서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
2.2. 신성동맹 함대의 규모[10]
- 참전 지휘관이 많기에 대표적인 지휘관만 기록했다.
- 총사령관 :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중앙 갤리선 62척)
- 지휘관 : 마칸토니오 콜론나(교황령 함대의 총지휘관, 돈 후안을 보좌),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베네치아 함대의 총지휘관, 역시 돈 후안 보좌)[11],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우익 갤리선 53척), 알바로 데 바산(예비 선단 갤리선 30척),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좌익 갤리선 57척)
- 총병력 : 갤리선 206척, 베네치아 갈레아스 6척 (선원 40,000명 ; 전투원 30,000명)
- 참여국가
2.3. 오스만 함대의 규모
- 총사령관 :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13]
- 지휘관 : 울루츠 알리(오치알리), 슐루크 메흐메트 파샤(마호메트 시로코)[14], 투르구트 레이스[15], 페르테브 파샤, 카라 호자, 하산 레이스, 메흐메트 베이[16]
- 총병력 : 갤리선 220척, 갤리엇[17] 60척, 푸스타[18] 64척 (선원 50,000명 ; 전투원 27,000명)
3. 전개
10월 4일 오스만군의 정찰대가 기독교 함대의 규모를 140척이라고 잘못 보고하는 바람에 알리 파샤는 쪽수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믿고 기독교 함대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였으며, 이 기회에 눈엣가시였던 베네치아가 점유한 섬들도 점령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그리고 10월 7일 양쪽 함대가 맞닥뜨린다.[19] 기독교 함대 중앙부대의 갈레아스 2척이 포격을 시작하고, 곧이어 좌익부대의 갈레아스 2척도 포격을 하면서 오스만 함대를 공격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오스만 함대의 우익부대를 지휘하던 슐루크는 자신이 직접 부대 절반을 이끌고 기독교 함대와 정면으로 맞서고, 나머지 부대는 다시 둘로 나눠 우회를 시킨 후에 포위를 하려고 하였다. 이에 맞서던 기독교 함대 좌익부대 사령관 바르바리고는 그 즉시 틈을 막아 저지하려 하였으나 7척이 무사히 뚫고 나오는 바람에 4척의 갤리선을 잃고 바르바리고의 기함이 습격당해 심한 부상[20]을 당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돌진했던 갈레아스들이 피하기 위해 갈라진 오스만 함대의 틈바구에 섞여서 마구 깽판을 부리고, 시의적절하게 구원출동한 갤리선들이 발목잡힌 오스만 해군을 포위하여 암초지역으로 밀어붙이면서 전세가 회복되었다.
한편 중앙부대 역시 갈레아스 진격으로 오스만 해군은 갈라져서 일단 피한 다음 기독교 함대를 공격하였다. 반면, 돈 후안은 오스만 해군의 원거리 사격에 응하지 않고 접근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오스만 함대가 접근하자 일제사격을 가한 후에 접근전에 돌입하였다.[21][22] 중앙부대의 전투가 달아오르자 예비병력을 이끌고 있던 알바로 데 바산은 돈 후안의 기함을 지원하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투입하여 충각 전술로 오스만 갤리선을 박살내버리고, 추가 갤리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알리 파샤 주변의 오스만 군을 수세에 몰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남은 예비병력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몰타 기사단 함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역시 오스만 함대의 예비병력을 이끌고 있던 투르구트 레이스 역시 알리 파샤의 기함을 지원하기 위해 즉시 예비병력을 파견하였다.
반면, 기독교 함대의 우익부대는 울루치 알리가 좌측을 공격하려 해서 이를 막으려고 우현으로 향하는 바람에 기독교 함대 본대와도 떨어지게 되었으며 전투도 늦게 돌입하였다. 울루치 알리는 갤리엇이 지닌 속도의 우위를 앞세워 기독교 함대의 우측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를 보고 베네치아 갤리선 16척이 사령관 안드레아 도리아의 명령없이 멋대로 돌진하는 바람에 포위당하였으며, 뒤늦게 갈레아스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고 오히려 화약고에 불이 붙어서 폭발한 갤리선(오스만 군에게 배를 나포당하게 되자 선장이 아예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했다고...)으로 인해 기독교군의 함선이 막대한 피해를 보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옆의 오스만 함선들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연쇄 폭발을 일으켜 오스만에게도 적잖은 피해를 안겨줬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오스만의 우익부대는 전면적인 패주 상황에 놓여있었다. 상황을 깨닫고 잽싸게 도주한 갤리선들도 있었지만, 포위망에 갇힌 갤리선들은 숫적우위를 앞세운 기독교 함대의 공격에 줄줄히 침몰되었으며, 결국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부상당한 슐루크가 기독교 함대에 포로로 잡혔다.[23]
비슷한 시기 오스만의 중앙부대도 서서히 몰리고 있었다. 특히, 총사령관 알리 파샤의 기함과 그 주변의 갤리선들이 기독교 함대에 완전히 포위되어 간신히 저항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24] 지원을 위해 출동한 병력도 기함에 접근하지 못한채 족족 저지당하고 있었다. 돈 후안은 알리 파샤의 기함을 발견하여 공격하였고, 3번의 시도 끝에 배에 올라타서 전투를 벌여 알리 파샤와 싸워 그를 죽이고 참수하여 알리 파샤의 목을 높이 내걸자, 오스만 함대의 중앙부대도 사기를 잃고 서서히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비슷한 시기 우익함대의 안드레아 도리아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고립된 함대 구출을 위해 접근하였다. 하지만 울루치 알리는 휘하의 30척을 거느리고 기독교 함대 중앙부대를 공격하여 우군을 지원하려 하였다.
하지만 알리 파샤의 전사소식을 듣자 곧 이를 포기하고 근처에 있던 몰타 기사단 함대를 공격하였다. 갑작스런 공격에 몰타 기사단 함대는 순식간에 패배하여 기함이 점령당하고, 기사단장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으나 다행히 알바로 데 바잔이 몰타 기사단 기함이 나포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즉시 구원병력을 보낸 덕분에 울루치 알리는 노획물만 챙기고 달아나버렸다. 이후, 전선에 남아서 저항하던 나머지 오스만 함대도 기독교 함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주하였고, 기독교 함대도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면서 해전은 끝을 맺었다.
4. 결과
기독교 함대는 갤리선 40척 가량이 격침 또는 파손되었으며, 7,500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 부상했다.오스만 함대는 170척의 갤리선과 60척의 갤리엇이 격침 또는 파손[25]되었으며, 3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여기에 3,500명 가량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총사령관인 알리 파샤가 전투 중 전사한 후에 참수당하여 충격이 컸다.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이유는 화력과 기술에 있었다. 우선, 당시 기독교 함대는 오스만 함대보다 더 많은 대포를 싣고 있었고, 병사들도 모두 총기류로 무장하고 있었던 까닭에 화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게다가 베네치아의 신병기 갈레아스가 함열에 뛰어들어 오스만의 포진을 초장부터 박살내주는 바람에 초반부터 대열이 붕괴되어 기독교 함대에 각개격파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오스만군은 총기가 부족해 총기로 무장한 병사가 많지 않아 활로 무장해야 했다. 물론, 총기가 부족하고 활로 무장했다 해서 오스만군이 화력에서 열세였다는 뜻은 아니다. 이 당시 총은 연사력이 떨어지는 화승총이다보니 오히려 연사력은 활이 더 뛰어났다. 그러다보니 오스만군도 화승총으로 무장한 기독교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기독교군 역시 화승총뿐만 아니라 쇠뇌도 같이 써서 화승총의 부족한 연사력을 보완했다. 다만 오스만군이 보유한 대포가 기독교 군대보다 더 적었던 까닭에 전체적으로 열세에 몰렸던 것. 오스만이 무려 대포 750문을 동원했는데 유럽은 두배가 넘는 1800문을 동원했다(...)
오스만 노잡이 노예
여기에 베네치아 함선에 타고 있던 노잡이들은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자유 시민이었고, 도시국가인 관계로 항상 인구 부족이 고민이었던 베네치아는 이들에게도 무기를 지급했다. 즉 전투가 시작되면 그 즉시 무기를 빼들고 싸울 수 있는 전투원이었던 것. 스페인도 사형수나 수감수들에게 죄를 사해준다는 조건으로 노를 젓게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반면에 오스만 제국 갤리선의 노잡이는 기독교도 노예들 위주[26]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함대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자 당연히 노잡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27], 오스만군은 기독교 함대와 교전을 하면서 동시에 노예들의 반란도 진압해야 했으므로 정상적으로 전투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1만 5천명 가량의 기독교도 노예 노잡이들이 전투 후에 전원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스만 제국은 어쨌든 키프로스를 점령하였으며, 풍부한 물자를 바탕으로 함대를 재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 명성을 날리던 인재들을 너무 많이 상실한 까닭에 실질적인 해군력은 과거에 비하면 떨어졌다. 반면 베네치아는 비록 키프로스를 상실하였지만, 오스만 제국과 협상하여 크레타 섬과 나머지 섬 지역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나머지 참여한 기독교 국가들은 전투에서 건진 전리품들을 적당히 나눠가짐으로써 이익을 챙겼는데, 물질적으로 가장 이익을 많이 챙긴 곳은 베네치아였고,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싸움의 주축은 베네치아에게 맡기면서도 동방의 이교도와 북방의 이단에 맞선 지중해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란 이데올로기적 명분은 톡톡하게 챙긴 스페인 측이 덕을 가장 많이 봤다.[28]
5. 의의
오스만-이슬람과의 충돌에서 기독교 군대가 거둔 결정적인 승리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론되는 해전이지만, 의외로 그 세계사적 파급효과는 미미했다. 세계사적 영향력은 고사하고 이슬람 세계나 기독교 세계, 지중해 세계 모두에 별다른 여파가 없다고 보아도 좋은데, 해전 자체는 베네치아와 스페인 연합군이 승리하였으나 베네치아는 키프로스를 되찾을 능력이 없었고 도리어 오스만의 강력한 육군에 달마티아 해안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더군다나 해군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한 키프로스나 크레타와 달리 달마티아는 오스만과 직접 국경을 맞닿아 있으니.이후 베네치아는 스페인과 불협화음을 겪자 오스만과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빠지면서 사실상 전쟁은 오스만의 승리로 끝났다. 강화조약 결과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지방을 건사하는 조건으로 오스만에게 정식으로 키프로스를 할양했고 배상금 명목으로 30만 두캇을 지불했다.
스페인 또한 결과가 좋지 못했는데, 1574년 튀니스를 함락당하면서 북아프리카의 거점을 상실해버렸기 때문. 스페인 입장에서 레판토는 사실 이데올로기적 명분은 엄청나도 지정학적으로는 영 동떨어지고 이권도 별로 안 걸린 동지중해 그리스 앞바다에서 벌어진 충돌이었던 반면, 튀니스는 당장 지중해를 동서로 양분하는 위치에 있으며, 당시 스페인 왕실이 다스리던 땅으로 스페인과 지중해 세계 전반의 곡창지대였던 시칠리아에 바로 사략선단을 파견하여 그 일대 해상 무역과 연안 농업을 마비시킬만한 지정학적 요충지였으며, 그 이전에 하프스 왕조의 수도로서 나름 개발도 된 도시였다. 그 결과 해전 전보다 오히려 기독교 동맹은 세력이 줄어들어 버렸다.
실제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자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황제를 대신하여 제국을 운영해 나갔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베네치아 대사 마르칸토니오 바르바로에게 "키프로스는 팔과 같고, 우리네 패전은 수염과 같다. 당신네들은 팔을 뽑혔으니 다시 자랄 리 없지만, 우리의 수염은 다시 풍성하게 자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 경우에는 보여주기 식의 허세가 약간 섞였다고 봐야 하지만 말이다.[29]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레판토 해전 패배 직후 튀니지를 탈환하였고, 해군의 규모 자체는 수복하여 체면치레를 했다. 레판토 해전의 의미는 이후 오스만에 암군들이 넘쳐나게 되면서 후대에 덧칠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전투에서 한번 졌다고 대제국의 쇠퇴가 결정될 리 없음에도, 기독교 세계의 선전으로 마치 레판토 해전 패전 이후 오스만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며, 오스만 제국의 진정한 쇠퇴는 레판토 패전 후 무려 110년이나 지난 제2차 빈 공방전(1683)의 실패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폴란드-리투아니아-베네치아 공화국-루스 차르국이 뭉친 '신성동맹'
레판토 해전의 승리가 이토록 과대평가되는 이유는 그전까지 기독교 세력, 더 정확히는 서유럽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그럴 듯한 승리를 거둔 역사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 이후 400여 년 간, 즉 현재까지 대반격을 가하여 위세를 회복한 그 시초로 레판토 해전을 꼽게 된 것이다. 1503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에 동지중해의 패권을 뺏긴 뒤 레판토 해전 후에 다시 기독교 세계가 제해권을 차지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레판토 해전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았을 뿐이지 제해권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레판토 해전의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레판토 이전, 1560년대까지 기독교 세계의 해군은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당시 승천하는 기세였던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 패권을 넘어 과거 로마제국 처럼 지중해 전체를 자신들의 호수로 만들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했는데, 이걸 막아내는 계기가 된 것이 레판토 해전임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 규모 역시 함대를 금방 복구했다고는 하는데 선박의 얘기라면 사실이지만 '인적 자원'으로 따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당연한 얘기지만 배는 뽑고 싶은대로 뽑아낼 수 있어도 베테랑 해군은 뽑고 싶은대로 뽑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해군의 대다수가 전사한 상황에서 해군을 재건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사업이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혁명인데,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해군을 엿먹일 정도로 성장했던 프랑스해군이 혁명 이후 과도한 피바람으로 장교들이 대거 숙청 당하거나 망명을 해버렸기 때문에, 다시는 영국에 제해권 다툼을 걸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프랑스 역시 오스만과 마찬가지로 혁명 이후 재건된 함대 규모 자체는 영국에 크게 꿀리지 않았고 건함 기술력은 오히려 앞서기까지 했지만,[31] 숙련된 장교단과 선원이 재건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과 해전만 붙으면 붙는 족족 프랑스가 깨졌고, 이후 청년학파의 득세까지 겹치며 결국 영국과의 건함경쟁에 프랑스는 완전히 탈락하고[32] 독일 2제국으로 바톤이 넘어가게 된다. 오스만 역시 그동안은 줄기차게 함대를 동원해 지중해 전체를 오스만의 내해로 만든다는 목표를 밀어붙이다가 레판토 해전의 패배 이후로는 그러한 시도 자체를 포기하고 바르바리 해적들을 뒤에서 후원하며 유럽의 지중해 무역과 항구도시에 타격을 입히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선회했다.
만약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했다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레판토 해전 이전까지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해군을 미친듯이 바르며 그야말로 무적, 무패의 위세를 자랑했던 오스만 해군이 레판토에서 격파되어, 반오스만 동맹군이 사기적으로 크게 고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33] 그리고 중세 이후 유례없는 대해전이었던 레판토 해전의 타격으로[34]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려는 방향에서 선회, 동지중해와 레반트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정도에서 만족했고 서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비록 그 이후 점차 유럽세계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에서 북해로 옮겨가기는 했지만, 지중해의 역사에서 레판토 해전의 의의를 그저 과소평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키프로스의 상실과 해적의 증가, 신항로에서의 본격적인 향신료 유입으로 인해 이탈리아 공화국 중 가장 마지막까지 세력을 유지하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쇠퇴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상술한 것과 같이 오스만 제국의 확장 역시 정체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국과 스페인과 같은 서유럽 열강들이 지중해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6. 그 외 이야기
- 기독교 측은 당시에 유명한 해군 지휘관인 마르코안토니오 콜론나, 아스카니오 델라 코르나, 마르코 퀘리니, 마뤼탱 로메가스 등이 참전하였는데, 콜론나의 기함에 탑승한 로메가스를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 각자의 배를 지휘했다.
- 이슬람 측은 벡타시 무스타파, 델리 첼레비, 하지 아가, 코스 알리, 피알리 오스만, 카라 레이스 등 여러 명이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 이 전투에는 돈키호테의 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참전했는데, 마르케사 호에 승선해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으면서도 보병 부대를 지휘했으며, 하사관인 마르틴 무뇨스도 시칠리아의 함선인 산조반니호에 탑승해 참전했지만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았다. 다만 세르반테스의 경우, 왼팔에 총탄을 맞아 불수가 되는 바람에 '레판토의 외팔이(El Manco de Lepanto)'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스페인으로 귀국 도중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알제리에서 5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다. 이 외에, 돈세야 호의 페데리코 베누스타는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려 폭발하는 바람에 팔이 불구가 되면서 왼팔을 잘라 의수를 단 채로 전역하게 되었으며, 구호기사단의 기사인 로메가스는 몰타 섬의 갤리선들이 아닌 콜론나의 기함에서 승선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당시 구호기사단의 부단장인 피에트로 주스티아니는 화살을 다섯 발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 영국 국왕인 헨리 8세의 서자일 가능성이 있는 해적이자 용병인 토머스 스투켈리가 에스파냐 함선 3척을 지휘하였으며, 파마구스타 공방전에서 사망한 베네치아 사령관인 마르칸토니오 브라가딘의 일가인 안토니오 브라가딘, 암브로조 브라가딘 등이 선두에 서서 갈리아스선 2척을 지휘했다.
- 아내 살해 혐의로 12년간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한 피렌체의 음악가인 아우렐리오 셰티가 참전했으며, 총사령관 돈 후안의 기함에 애인을 따라 나선 마리아 라 바일라도라라는 여성이 남장을 하고 화승총병으로 참전했다.
- 알리 파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스만 해군의 깃발이 노획되어 베네치아의 해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20세기에야 튀르키예의 요구를 받아들여 종교 간 화해의 상징으로 반환되었다. 흰 천에 금실로 쿠란의 경구를 자수한 군기라고 하는데, 현재 이스탄불 해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추정되나, 패한 전투의 깃발이라 그런지 공개하고 있지 않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를 두고 "그 깃발 멋있었는데 쓸데없는 짓을 해서 다시 못 보게 되었다"고 본인의 저서에서 불만을 표한 바 있다. 시오노는 어지간히 보고 싶었는지 이스탄불까지 가서 수소문했지만, 본인도 다시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해전의 승전일인 매년 10월 7일을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당시 교황 성 비오 5세가 신성동맹의 승리를 기원하며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기 때문이며,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성모 마리아의 도움 덕분이라고 믿는다.
- 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 해군은 이 전과 같은 정면 팽창보다 북아프리카의 신하국들을 이용한 해적질에 더 무게를 두게 되고, 2세기에 걸쳐 지중해를 뒤흔든 이 바르바리 해적들은 지중해 무역 자체를 불가능에 가깝게 만들어 버려, 결국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스페인의 경제적 몰락에 큰 일조를 한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자금줄 또한 지중해 무역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레판토 전투 이후 창궐한 이 해적들 때문에 전투의 참전 세력 대부분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는 걸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그 후 바르바리 해적은 신생국 미국의 선박을 마구 약탈하다가 분노한 미 해군과 해병대에게 1805년 1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패배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35] 이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배함으로서 북아프리카 해적은 다시는 부활할 수 없었다.
- 레판토 해전으로부터 45년 후인 1616년 7월 14일,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키프로스 섬 인근인 켈리도니아 곶에서 스페인 해군과 오스만 해군이 사흘 간에 걸친 전투를 벌였다. 이 켈리도니아 곶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은 갤리선 55척과 군인 12,000명이라는 많은 병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약 7분의 1 밖에 안 되는 갈레온 5척과 1,600명의 병력을 가진 스페인 해군에게 33척의 갤리선이 격침 또는 손상당하고 3,200명의 군인들이 사망하는 치욕적인 참패를 겪었다. 레판토 해전에서 당한 경험 많은 고참병과 노련한 선원들의 손실이 이 때까지도 미처 회복되지 못했던 것이다#. 숙련된 선원과 장교들이 살아남아야 후배들에게 그 경험을 전수하고 가르치는데, 레판토에서 대거 몰살당해 후진양성의 맥이 뚝 끊겨버리니 그걸 다시 이어붙이기가 힘든 것이다. 이는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의 제해권 경쟁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
7. 미디어믹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가 있다. 해당 항목으로.
8. 관련 문서
[1] 오늘날 지명은 나브파크토스(Ναύπακτος)라고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 군이 대판 맞붙었던 장소였다. 다만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에서 레판토(Lepanto)라고 불렀고, 그게 해전의 이름이 된 것.[2] 영어로 '무적의', '꺾을 수 없는'의 뜻을 지닌 'Invincible'과 뜻이 통한다.[3] 프레베자 해전 등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수십 차례의 전쟁을 벌일 때에도 이것만은 철저하게 지켜졌다.[4] 오스만이 키프로스를 합병한 이후 주앙 본인은 유대인이 다스리는 키프로스의 부왕이 될 계획이었다. 국기랑 문장까지 만들어놨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5] 7세기 중반 이슬람의 팽창 당시 동로마 제국 영토였던 키프로스를 잠시 점령한 사실을 가리킨다. 688년 키프로스는 동로마와 이슬람, 양 세력의 공동통치령으로 둔다고 합의하였으나 300년 후인 965년 동로마의 장군 니키타스 할쿠체스가 키프로스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다.[6] 이는 병사의 수적 차이도 차이였지만, 키프로스의 주민들이 베네치아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던 탓도 크다. 식민지인 키프로스 주민들을 베네치아 본토 주민들과 똑같이 대하기는커녕 노예처럼 부려먹어서, 오스만 군대를 해방자로 환영하거나 적어도 가만히 추이를 지켜보는 자들이 많았다.[7] 당시에는 펠리페 2세의 사촌이자 매제 막시밀리안 2세가 황제였다. 다만 펠리페 2세와 막시밀리안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승계 문제로 서로 다툰데다가 종교 차이로 인해 사이가 최악이긴 했다. 펠리페 2세는 골수 가톨릭이었던 반면 개신교회에 호의적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는 겉으로는 가톨릭을 믿으면서도 신성 로마 제국의 루터파나 보헤미아 왕국의 후스파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유지했다.[8] 위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의 5촌 할아버지. 이쪽이 더 유명한 인물.[9] 키프로스 섬이 분단된 현재 현재 파마구스타는 북키프로스 관할이다. 튀르키예어로는 가지마우사(Gazimağusa)라고 불린다.[10] 이하 함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특히 오스만 제국 함대의 총 규모나 좌익, 중앙, 우익 함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편차가 조금 있는 편.[11] 드라마틱하게도, 이 사람의 친척 조카가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후였던 누르바누 술탄이라는 야사가 있다. 하지만 현재는 부정되는 설이다.[12] 당시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펠리페 2세와 외사촌 사이였던데다가 스페인의 도움을 빌려 프랑스에게 빼앗긴 공국을 되찾은지라 없는 살림에도 함대를 파견해 지원했다.[13] 이슬람권에서는 기도 시보원이 하루 다섯 번의 예배 시작 전에 성원 첨탑에 올라가 아잔을 외치며 기도 시간을 알린다. 이러한 기도 시보원들을 '무아딘(مؤذن, 터키어식으로는 뮈에진·Müezzin)'이라 부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무아딘(뮈에진) 출신이었는데 술탄의 하렘 후궁 중 하나가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하여 권세를 얻게 된 인물이었다. 물론 무능한 인물은 절대 아니라서 오스만과 베네치아 간의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을만큼 군 경험이 풍부한 장군이었다. 다만 그의 군 경험은 모두 육전인터라 해전을 지휘하기는 이때 처음이었다. 하지만 당시 25세에 불과했던 신성동맹 함대 총사령관 돈 후안도 육전 경험은 조금 있었지만 해군을 지휘하기는 처음이었다. 따라서 총사령관끼리의 '밸런스' 는 대충 맞는 상황이었다.[14] 이하 괄호는 유럽에서 부르던 명칭들. 유럽인들에게는 튀르크어나 아랍어 발음이 영 어려웠던 관계로 들리는 대로 대충 표기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살라흐 앗 딘도 '살라딘' 으로 표기되었던 걸 생각하면 꽤나 유서깊은 관행인 듯.[15] 투르구트라고 하면 오스만 제국 역사상 유명한 해군 지휘관이지만, 1565년에 몰타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다만 레판토에도 이름만 같은 투르구트가 있었는데, 그 투르구트의 아들이다.[16] 하산 레이스와 메흐메트 베이는 바르바로스 하이레딘 파샤의 아들로 메흐메트는 네그로폰테 총독이 되었고 하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제 대총독이 되었지만 재능에 문제가 있었는지 자주 경질되고 다른 인물이 임명되었다. 레판토 당시의 알제 대총독은 울루치 알리.[17] 갤리선 중에서도 소형이고 고속운항이 가능한 선박.[18] 갤리엇과 비슷하지만 더 소형으로 전투용 함선이라기보다는 지원용이다.[19] 이 때 기독교측 총사령관 돈 후안은 당시 궁정 연회에서 자주 추던 가야르라는 춤을 추면서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 시켰다고 한다.[20] 바바리고는 전투가 끝난 이후, 이 부상으로 인해 사망하였다.[21] 전투 초입에 신성동맹 함대의 총사령관 후안의 기함 레알을 향해 오스만군 총사령관 알리 파샤의 기함 술티나가 돌입을 감행, 술티나의 충각이 레알의 뱃머리에 부딪쳐 단단히 박혀 버렸고, 레판토 해전 최초의 본격적인 백병전이 레알과 술티나로부터 시작했다.[22] 전투 내내 중앙 쪽은 양측 기함간의 백병전을 중심으로 자잘한 다른 함선들이 모여들어 개판 싸움을 펼쳤다.이 시대의 HOT! PLACE 마지막에 알리 파샤의 목이 베어지면서 사실상 전투 종료.[23] 슐루크의 최후에 대해서는 사로잡히자마자 바로 처형당했다, 심한 부상으로 스스로 애원하여 처형당했다,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등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24] 초반엔 오스만 측이 이기고 있었으나 뒤에서 예비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기독교측 지휘관 돈 알바로 데 바잔이 조그만 배에다가 병사 200명을 실어 돈 후안의 기함에 승선시키고 나서부터 역전.[25] 그래도 일부 재생불능인 배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재활용됐다.[26] 해적질을 하면서 사로잡은 기독교도들이다. 다만 이건 여담이지만 노잡이로 부려먹으면서도 싹수가 보인다 싶으면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해적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는데, 당장 레판토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 지휘관 가운데 하나인 울루치 알리가 바로 이탈리아 출신의 노잡이 노예 출신이다.[27] 전투 직전에 총사령관인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는 전투에서 이기기만 하면 노잡이들을 모두 풀어주겠다고 선언했지만, 오스만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어 노잡이들이 신뢰하지 않아서 발생한 반란이라 봐도 좋다.[28] 베네치아는 애초에 국가적 차원에서 트렌티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가 스페인 중심의 하나의 지정학적 블록이 되는 걸 프랑스와 더불어 의심스럽게 보았고, 당장 오스만 제국 내 서방 가톨릭, 즉 프랑크인들 중 이민자 커뮤니티 중에서도 가장 컸고, 싸울땐 박터지게 싸우더라도 전쟁 끝나면 미워도 다시 오스만 제국과 무역과 외교를 해야했던 베네치아는 이러한 전투적 종교성에 기인한 자국 PR을 배격했다.[29] 참고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레판토 해전 패배의 책임론에 휘말리고 있었다. 특히 부재상에 해당하는 인물로 레판토 해전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해군 출신으로 부재상에 오른 최초의 인물일 정도로 오스만 해군의 거물이었던 피얄레 파샤는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 대하여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부터 소콜루 파샤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황제 셀림을 비판할 수는 없으니 재상이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 것. 이에 소콜루 파샤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함대를 재건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레판토에서의 패전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단시일 내에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했는데, 베네치아 대사와의 회담에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30] 다만 '진정한 쇠퇴' 라는 말이 나와서 덧붙이자면, '그럼 2차 빈 공방전 이전까지는 오스만이 짱먹었겠네?' 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잘못. 오스만 제국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였던 쉴레이만 1세 시대부터 이미 정체의 조짐이 보였다.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유럽의 환자' 티를 내기 시작하는 것은 역시 2차 빈 공방전부터이고, 쉴레이만 이래로의 쇠퇴와 레판토 해전은 하등 관련이 없으므로 레판토에서의 패배로 오스만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여전히 맞지 않는다.[31] 오늘날 우리가 전열함 하면 떠올리는 형태를 완성시킨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프랑스의 74문 전열함 테메레르이다.[32] 사실 청년학파 때문에 영국과의 건함경쟁에서 진게 아니라, 이미 영국과의 건함경쟁에서 패배한게 확실시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비대칭 전력으로 극복해보려고 청년학파가 등장한 것이다. 애초에 해군에만 몰빵하면 되는 섬나라 영국과 어디까지나 육군이 주력이어야 하는 프랑스는 태생적으로 프랑스가 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제조차도 영국이 더 크니...[33] 실제로 이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헝가리를 침공하며 오스만과 20년 가까이 질질 끈 Long War라는 전쟁에 돌입한다. 물론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지만 슬슬 유럽이 공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34] 그것이 실질적인 피해였든 정신적인 것이었든.[35] 단순히 해적 함대를 섬멸한게 아니라 다시는 해적질 못하게 알제, 튀니스 등의 해적 항구 등을 철저하게 박살내어 인프라를 아예 날려버렸다. 특히 이 항구의 민간인들도 미군에게 학살당했다. 이 1차 바르바리 전쟁은 미군 최초의 국외 원정이었으며, 스웨덴과 시칠리아 왕국이 미약하게나마 동맹으로 참전하여 전력을 보태었다. 미 해병대의 대표적 군가인 Marines' Hymn#의 트리폴리 운운한 가사가 이 전쟁을 의미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