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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흐 앗 딘 유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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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Portrait_of_Saladin_%28before_A.D._1185%3B_short%29.jpg
살라딘으로 추정되는 초상화.
출생 1137년 / 1138년
아바스 왕조 이라크 티크리트
사망 1193년 3월 4일(55 / 56세)
아이유브 왕조 시리아 다마스쿠스
종교 이슬람(수니파)
재위 기간 1174년 ~ 1193년
매장지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모스크
가족 나짐 앗 딘 아이유브(부)
시트 카툰(모)
알 아딜(남동생)
이스마트 앗 딘 카툰(부인)
알 아프달 알리(장남)
알 아지즈 우스만(차남)
앗 자히르 가지(삼남)
외 4남
이름 중동명: 유수프 / 서양명: 살라딘
왕가 아이유브 왕조
1. 개요2. 이름3. 일대기
3.1. 이집트의 지배자3.2. 시리아 통일 전쟁3.3.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회복3.4. 3차 십자군과의 싸움3.5. 최후 및 사후
4. 군사적인 능력5. 행운6. 인품7. 현대의 평가8. 어록9. 가계10.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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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유브 왕조의 창건자이자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세력의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회복한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이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 이름

이름을 전부 쓰면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 이를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알 말리크 안 나시르), 승리의 아버지(아부 알 무자파르), 신앙을 품은 정의(살라흐 앗딘),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의 아들인 샤디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 즉, 유수프(يوسف)가 본명이다. 쿠란의 등장 인물인 유수프(요셉)와 아이유브(욥)가 이름에 들어있다.

살라흐 앗 딘(صلاح الدين)이라고 표기하는데 은 원래 정관사 이고, 알을 구성하는 알레프(ا)와 람(ل) 중에서 람은 뒤에 태양 문자라 불리는 특정 문자가 올 경우에 그 문자와 동일한 발음을 가진다. 즉, 딘의 ㄷ과 동일한 발음이 된다. 그리고 알레프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들어갈 경우에 보통 묵음이 된다. 따라서 받침처럼 발음되므로 살라흣딘이라고 읽힌다. 빠르게 발음하면 우리가 아는 표기인 살라딘과 가까워진다. 참고로,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살라흐 앗 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수드는 "살라흣 딘"에 가깝게 발음한다. 살라딘, 알라딘 (알라 앗 딘)처럼 -앗딘 형식의 이슬람권 이름이 대해서는 라카브 (칭호) 문서 참고.

3. 일대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ristofano_dell%27altissimo%2C_saladino%2C_ante_1568_-_Serie_Gioviana.jpg
살라딘의 초상화
살라흐 앗 딘은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에서[1] 쿠르드족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대부터 모술과 알레포의 영주인 이마드 앗 딘 장기(عماد الدین زنكي‎, Imad ad-din Zangi)와 그의 아들 누르 앗 딘(نور الدين, 일명 누레딘)을 섬겼다. 누르 앗 딘은 시리아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지하드의 기치 아래 무슬림들을 단합시켰고, 십자군과의 전쟁에서도 많은 승리를 거두며 성왕(聖王)으로 칭송받았다.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 아이유브는 지략으로,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는 뛰어난 용병술과 무용으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살라흐 앗 딘 역시 젊어서부터 누르 앗 딘의 측근이 되었다.

3.1. 이집트의 지배자

살라흐 앗 딘의 이름이 처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집트 정복 때였다.[2] 살라흐 앗 딘은 삼촌 시르쿠의 부관으로 이집트군과 십자군을 동시에 상대하며 4차례에 걸친 어려운 전쟁 끝에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총사령관인 시르쿠가 식사 중 폭식하다가 급사하면서(...) 권력의 공백이 생겼고, 이집트 관리들에 의해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새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집트 관리들이 살라흐 앗 딘을 지지한 것은 그가 순전히 삼촌의 빽으로 성공한 우유부단한 젊은이라고 판단해서였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살라흐 앗 딘은 대단히 민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이집트 전역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은 겉으로는 누르 앗 딘에게 충성을 바치는 한편 군대를 보내 수단요르단, 예멘 일대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한다. 이후 살라흐 앗 딘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이를 경계한 누르 앗 딘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가려고 했지만 60세가 넘은 고령이었던 탓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사망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오히려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의 아들의 보호자로 자청하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조금씩 지지기반을 다지다가 누르 앗 딘의 영토를 날름 집어삼켜 버렸다. 그러는 한편으로 서쪽의 북아프리카에도 군대를 보내 그의 시대에 아이유브 왕조는 동쪽으로는 시리아이라크 북부, 서쪽으로는 튀니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예루살렘 왕국은 살라딘이 이집트를 차지했을 때부터 살라딘을 경계해 동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이집트로 해군을 통해 원정대를 보냈지만 별 재미를 못보다가 폭풍우로 다 날려먹었다. 누르 앗 딘의 죽음 이후 시리아로 살라딘이 세력을 넓히자 십자군 계열 국가에서 기사를 파견해 견제하려다 살라딘이 생각보다 많은 군대를 가지고 온 것을 보고[3] 도망쳤다.

3.2. 시리아 통일 전쟁

한편 자지라 원정 중 살라딘은 십자군이 다마스쿠스 일대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냅둬라. 그들이 마을들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는 도시들을 취할 것이고, 우리가 돌아갈 때쯤이면 그들과 대적할 더 큰 힘을 얻은 채일 것이다.' 그리고 3일간 알레포를 포위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살라딘은 더 북상하여 장기 왕조의 심장부인 모술을 포위하였다. (1182년 11월 10일) 살라딘은 킨다 문, 동생 타즈 알 물크 (왕들의 왕관) 이마디야 문을 맡았다. 봉신인 히신 카이파의 누르 앗 딘은 '다리들의 문'을 맡았다. 하지만 한달간의 포위에도 별 성과가 나지 않자 살라딘은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3일간 행군, 모술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신자르를 포위하였다. 도시는 15일간 저항했으나 12월 30일 함락되었고 살라딘이 말릴 틈도 없이 튀르크 병사들은 저항의 대가로 약탈을 자행하였다. 겨우 신자르 총독과 그 장교들을 구출한 살라딘은 그들을 명예롭게 대해주며 모술로 보냈다.

1183년 5월 6일, 살라딘은 티그리스 강변의 견고한 성벽도시인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하였다. 시내에는 많은 보화와 무기, 그리고 백만권의 책이 있다고 알려진 도서관이 있었다. 살라딘의 재상 카디 알 파질은 자신이 택한 책들을 낙타 70여마리에 실었다고 한다. 한편 아직 모술, 알레포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한 영토 경영을 피한 살라딘은 디야르바크르를 자신의 충실한 봉신인 히신 카이파의 누르 앗 딘에게 주었다. 그리고 알레포의 장기 2세가 십자군과 동맹하고 아이유브령 시리아를 습격한다는 소식에 살라딘은 모술 대신 이번엔 알레포로 향하였다.

3.3.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회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Saladin_and_Guy.jpg
살라딘에게 항복하는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
이후 누르 앗 딘 세력의 잔당을 처리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프리카, 이집트, 아라비아, 예멘, 시리아,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 그 역시 누르 앗 딘의 정책을 이어받아 지하드의 기치를 계속 내걸었지만, 이집트에서 거병한 1174년부터 이라크 북부의 모술을 점령하는 1186년까지는 십자군과는 휴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다른 이슬람 반발 세력들을 흡수, 통합하는 시기로 삼았다.

하지만 르노 드 샤티용[4]의 무력 도발로 인해 휴전은 깨졌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기 드 뤼지냥 휘하의 십자군 주력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킴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켰다.[5] 그 여파로 3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3차 십자군에 불행히도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가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다. 하지만 십자군은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전략적인 안목 또한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6] 전투에서의 승리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3차 십자군은 해안 여러 도시들을 다시 점령했지만 안정적으로 확보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예루살렘 진격을 시도했을 때도 보급로 확보 문제와 내부 불화로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3.4. 3차 십자군과의 싸움

파일:리처드살라딘.jpg
중세 유럽에서 제작한 리처드와 살라딘의 대결 묘사 판넬

3차 십자군이 야파에서 살라흐 앗 딘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리처드의 동생 과 짜고 리처드의 프랑스 내 영토를 공격하여 리처드 1세도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더 이상의 원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부활절까지 돌아올 테니 그때 결판을 내자."라고 약속하였고 살라흐 앗 딘도 그에 응했다. 아쉽게도 살라흐 앗 딘은 약속일인 부활절 3주 전에 다마스쿠스에서 병사했고, 리처드도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유시에 맞아 죽었다.

이때 두 군주 간의 관계는 꽤 신사적인 편이었다. 물론 약간의 경쟁심도 있었겠지만... 리처드가 병에 걸렸을 때 살라흐 앗 딘은 자신의 의사에게 치료받을 것을 권유했으며, 약으로 쓰라고 시원하게 눈 속에 덮어놓은 과일을 리처드에게 보냈다. 리처드가 말을 잃었을 때 살라흐 앗 딘은 대신하라고 말 두 마리를 보냈다. 리처드 또한 살라딘을 고평가하면서 살라딘을 예우했으며, 사절단으로 찾아온 살라딘의 일족 사람들에게도 정중하게 대했고 살라딘의 조카였던 알 카밀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에게 자신의 누나 조안을 살라흐 앗 딘의 형제에게 결혼시킴으로서 이슬람과 가톨릭을 화해시키고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고 제안했다. 양측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양측의 공동 영지로 지정해 서로가 싸우지 말고 잘 살자는 의미였고, 살라딘은 이를 실제로 고려하였는데(!) "어떻게 회복한 예루살렘인데!!"라며 결사 반대한 참모들 때문에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애초에 살라딘은 성도 탈환이라는 기치 하에 일어난 지하드 덕에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자칫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건 기독교 세력도 마찬가지로 반대가 무척 컸고, 이슬람도 기독교도 혼인성사 문제 때문에 한쪽의 개종 문제가 생겨서 결국 취소되었다. 그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의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가급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한편, 살라딘과 리처드는 실제로 얼굴을 마주대고 만난 적은 없고[7]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땐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흐 앗 딘은 "기왕 뺏길 거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뺏기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 이때의 휴전 조건이 예루살렘 순례자를 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가톨릭 쪽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명분을 살렸다고 할 수 있고, 이슬람 쪽에서는 살라흐 앗 딘의 치세 이후로 순례자를 박해한 적이 없으므로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대로 원만하면서도 별 내용 없는 타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3.5. 최후 및 사후

살라딘은 사자심왕 리처드와 협정을 맺은 후, 리처드와 약속했던 부활절 3주 전에 몸 상태가 악화되어 병상에 누웠는데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살아 생전 굉장히 검소했던 탓에 국왕이었음에도 그의 장례식 때는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일가친척의 지원을 받아 장례를 치렀다. 다마스쿠스를 방문한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8]가 살라흐 앗 딘의 무덤이 초라한 목제 관인 것을 보고 대리석으로 된 고급 관을 기증했으나 여전히 그의 시신은 목제 관에 안치된 상태이다.[9] 일세를 풍미했던 그의 유언"이제야 유수프가 그의 감옥에서 해방되는구나."였다.

한편, 스탠리 레인 풀(Stanley Lane Poole) (1854년 ~ 1931년)의《살라딘(Saladin: All-Powerful Sultan and the uniter of Islam, 1898)》에서는 위와는 다른 유언을 하고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전략) 화요일 저녁, 그 충실한 서기와 대법관은 성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술탄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술탄 옆에서는 신학자가 신앙 고백과 코란 구절을 반복해 읽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그분은 유일신이신 하느님이시며 (영계와 속계를 아시는) 자비와 동정의 신이시라"는 구절을 읽자 술탄도 "그 말이 맞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다"는 구절에 이르자 병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그의 영혼은 하느님께로 올라갔다. (후략)

2014년 9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살라흐 앗 딘의 요새를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에쉬가 쿠르드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라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반달리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살라딘 영묘.jpg
파일:saladin_tomb_283782.jpg
살라흐 앗 딘의 영묘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에 있다. 왼쪽의 하얀 대리석이 빌헬름 2세가 기증한 빈 관이고, 오른쪽 목제관이 진짜 관이다.

4. 군사적인 능력

자신의 능력과 카리스마만으로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이뤄낸 인물답게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굉장히 뛰어났다.

당시 십자군의 주요 도시들은 레반트 해안가를 따라 길쭉하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전선이 길게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 전적으로 살라흐 앗 딘이란 거인에게 의존했던 아이유브 왕조인지라 살라흐 앗 딘은 여러 개의 부대를 편성해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한 적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자신의 주력군을 이끌고 각 거점을 순차적으로 공격하는 식으로 이루어졌고, 자연히 길게 뻗은 전선을 오가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십자군이 다양한 소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 왕국만 신경 쓰지 못 하고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 많은 가톨릭 소국들에게 신경을 분산시켜야 했다. 더군다나 이때의 십자군은 협소한 영토에 병력난, 물자난에 시달렸던 12세기의 십자군들과 달리 꽤나 강성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은 가톨릭계 소국가들 뿐만 아니라, 장기 왕조의 여러 공국들에게도 늘상 신경써주어야 했다. 누르 앗 딘의 세력은 대부분 흡수했지만 모술에 중심을 둔 장기 왕조의 다른 왕자들은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력으로 어떤 때는 조약을 통해 기독교 소국들 및 이라크의 장기 왕조계 소국가들과의 관계를 조율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술적인 패배는 있을지언정 전략적으로 큰 실패를 경험한 적은 없다.

5. 행운

숙부이신 시르쿠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유수프, 짐을 꾸리거라. 우린 떠난다." 이 명을 받는 순간 나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줄 알았다. 나는 대답했다.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그들이 내게 이집트 왕국을 몽땅 바친다 해도 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집트 원정 전날 살라딘
나는 숙부님을 따라가기로 하였다. 숙부님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서 세상을 뜨셨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권력을 신께서 내 손에 넘겨주신 것이다.
살라딘의 회고
나는 알렉산드리에서의 고초를 완전히 잊지 못 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집트 원정 참여에 대해) 거절의 답변을 드렸다. 그러자 숙부께서 누르 앗 딘에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유수프는 나와 함께 가야 합니다!" 누르 앗 딘은 거듭 명하였다. 내가 처한 난처한 상황을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소용 없었다. 누르 앗 딘의 명령을 받들 수밖에 없던 나는 흡사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살라딘은 이상하리만큼 행운이 많이 따랐던 군주로 평가된다. 그 예시들을 나열해 본다.

6. 인품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1_154872_1299818121390403.jpg
살라딘이라고 추정되는 그림
가톨릭에서 보면 압도적인 적의 수괴였지만, 놀랍게도 당시 가톨릭 세계에도 호적수로써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관련 소설《Amulet》등을 보면 십자군의 누구보다도 신사적이고 기사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신곡에서도 살라흐 앗 딘을 지옥이 아닌 림보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10] 또 3차 십자군 이전까지는 적인 십자군 포로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기록자인 기욤 드 티레는 그의 관용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 관용에서 나오는 문제를 크게 묶어 까는 것을 잊지 않았고, 어떤 수도자의 기록에서는 적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마지막 재앙 중 한 명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그 시기에 나온 살라흐 앗 딘을 그린 기록을 본다면 푸른 피부를 가진 악마처럼 그리는 기록도 있다. 즉, 살라흐 앗 딘이 호의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건 엄연히 3차 십자군 전쟁 이후라는 것. 이에 대해서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승리를 과장하기 위해 일부러 상대를 과장한 면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의 누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을 공격하였으며 메카와 메디나까지 약탈하려고 시도했던 르노 드 샤티용은 예루살렘 탈환에 큰 영향을 준 전투인 하틴 전투가 끝난 후, 살라흐 앗 딘에게 직접 처형당했지만, 이 경우에는 르노가 그동안 끌어온 어그로가 많아 그렇게까지 비판받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은 거의 대부분 처형했는데, 이들은 침략자들의 앞잡이이자 존재 자체가 이슬람 세계에 위협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무장친위대나 소련의 정치장교, 영국의 코만도가 유독 가혹하게 처분받은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당시 유럽음유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가관인데 리처드 1세에게 호의적인 작품엔 살라딘은 흑마법사를 동원해 악령을 말로 만들어 리처드에게 선물로 주는 등의 꼼수를 부리다 도망가는 게 일이다.(...) 프랑스에게 적대적인 작품엔 2차 십자군 당시 프랑스 왕비가 게으름 부리는 프랑스 왕에게 실망하고 용맹한 살라딘에게 반해 청혼하려다 붙잡힌다.[11] 어떤 작품에서는 살라딘은 호기심에 포로로 잡힌 트리폴리 백작의 아들에게 기사 작위를 받으려 한다. 트리폴리 백작의 아들은 이교도에게 기사 작위를 줄 수 없다고 거부하지만, 포로 신세에 살라딘 자신에게 강요받아 기사 작위를 줬다고 하면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란 말에 살라딘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다. 목욕을 하고, 흰 옷을 입는 등 기사 작위식을 받는 동안 살라딘은 의식 하나 하나에 진심으로 감탄하여 기사 작위식을 끝낼 무렵엔 프랑크 의식을 가진 진정한 기사가 된다. 개중 압권인 것은 살라딘이 죽기 직전 스스로에게 프랑스어로 세례성사를 주어 기독교인으로서 죽고 예루살렘에 묻혔다는 것.

그러나 풀려난 포로들이 곱게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부분 다시 십자군에 합류해서 살라흐 앗 딘과 싸웠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가톨릭 측에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무슬림들 쪽에서는 무자비한 바이바르스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살라흐 앗 딘도 사람인지라 리처드 1세를 상대로 고전할 때에는 포로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죽였다.[12] 심지어 포로로 잡힌 십자군 기사들 중 여성이 있었는데도 같이 죽여버리라고 했을 정도. 그나마 갑옷을 벗기기 전엔 여성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살라흐 앗 딘의 네임밸류는 적이었던 유럽인들에게는 유명했을 뿐, 19세기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렇게까지 인기가 많은 영웅은 아니었던 듯하다. 유럽 열강이 이슬람 세계를 야금야금 정복하다보니 아랍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불었고 그 과정에서 과거의 영웅이 재발견된 것이다. 물론 유럽에서는 여전히 유명했지만...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던 영웅은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바이바르스였다. 소수민족쿠르드족 출신의 영웅 따위... 사실 같은 시기에 진정한 지하드를 이끄는 사람으로서의 위용은 살라딘의 선구자 격인 누르 앗 딘이 압도적으로 고평가 받았을 정도. 재미있는 점은, 정치적인 행보에서 살라흐 앗 딘과 누르 앗 딘은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자신의 군사 행동을 지하드임을 강조했고, 점령한 지역에 이슬람식 정치 및 교육 체계를 확고히 하는 데 힘을 썼다.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살라흐 앗 딘의 온정을 연약함으로 표현하고 저항하는 적군을 보내준 것을 겁을 먹은 것이라고 깠던 것이다. 이는 기존의 지배자였던 누르 앗 딘의 세력을 흡수한 살라흐 앗 딘을 왕위 찬탈자라고 간주하던, 누르 앗 딘 계열 역사가들의 감정이 이입된 경우다. 대표적인 인물이 모술의 이븐 알 아시르.
누르 앗 딘은 그 관대함이 살라흐 앗 딘에 맞먹는 정도였는데, 어느 정도냐면 아내가 1년에 겨우 20디나르 먹고선 살아갈 수 없다며 부부싸움을 벌인 기록이 있다. 누르 앗 딘은 3개의 가게를 갖고 있었지만 그 매상에서 나오는 수익이 1년에 겨우 20디나르였던 것이다. 아내가 투정하자 누르 앗 딘은 말했다. "그 외에 어떻게 돈을 벌어오란 말이오? 비록 나는 돈을 쓰는 것을 명령하는 입장이지만, 나는 단지 무슬림들의 보물 창고일 뿐이오. 난 그들을 배신할 수 없고, 아내의 투정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지고 싶진 않소."
이븐 알 아시르

살라흐 앗 딘은 또한 정과 눈물이 많은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는데 대표적인 일화로 프랑크족 여인의 아이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려가자 사연을 들은 살라흐 앗 딘이 노예시장기병들을 보내 아이를 찾아오게 한 것이다.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예루살렘 공성전 당시에는 이벨린의 발리앙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도록 허용해서 예루살렘 방어전을 지휘하게 했다. 사실 이건 방어전을 지휘하라고 들여보낸 것은 아니다. 발리앙은 어디까지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살라흐 앗 딘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마땅한 지휘관이 없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발리앙에게 살라흐 앗 딘과 맞서도록 설득했고, 발리앙은 이에 대해 사과 편지를 보내면서 다시 자기 가족들은 예루살렘에서 나가도록 통행을 허용해 달라고 했다. 약속을 깬 측의 뻔뻔스러운 부탁이었지만 살라흐 앗 딘은 발리앙의 아내가 타고 갈 말을 보내주는 것으로 답했다.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에도 예루살렘의 가톨릭교인들을 약간의 몸값만으로 도피할 수 있게 허가해주었고, 그것도 병자나 노인, 아이 등은 무료로 보내줬다. 몸값이 부족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몸값을 내어주기도 했다고. 게다가 계속되는 예루살렘 왕국의 무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무료로 보내주었고, 가는 길에 노잣돈까지 쥐어주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대주교는 막대한 재산을 싹싹 긁어서 떠나는데[13], 그놈에게까지 낮은 몸값을 받고 호위병을 붙여줘야 하느냐?!"는 등 무슬림들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쯤 후에 아크레를 점령한 바이바르스는 반대로 이 도시에 살던 십자군이나 가톨릭교인들을 다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버리면서 살라흐 앗 딘의 관대함이 결국 나중에 무슬림들의 피를 흘리게 한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 중 특히 짐은 관대하다. 급의 포스를 풍기는 예는 다음과 같다.
살라흐 앗 딘은 격무에 지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한 노예(맘루크)가 와서 서류를 내밀고 서명을 요구했다. 살라흐 앗 딘은 "나는 너무 지쳤다, 나중에 다시 와라"라고 말했지만, 맘루크는 물러서지 않고 "지금 서명해야 합니다!" 하며 서류를 살라흐 앗 딘의 코 앞까지 밀고 흔들며 재촉했다. 살라흐 앗 딘은 궁여지책으로 "잉크가 없어서 서명할 수가 없잖아." 라고 말했고, 맘루크는 "저기, 잉크병 있잖아요" 하고 응수했다. 살라흐 앗 딘은 마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아!! 잉크병이 저기 있었구만..."이라며 손수 잉크병을 들고 와 서명을 했다.
바하 알 딘, 살라흐 앗 딘의 비서.[14]
다만 여기에서의 맘루크를 말 그대로의 노예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맘루크가 원래 노예 계급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신분이 미천하고 정통성이 부족하여 반란을 통해 권력을 잡지 못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친위대로 각광을 받아왔다.[15] 군주의 친위대 역할을 수행해야 하니 이들은 철저하게 군사훈련을 받았고, 전쟁이 거듭되는 사이 군인 노예로 큰 군사적 힘을 지니게 되어 일종의 특권계층으로 발전하며 인도이집트에선 아예 왕권을 잡을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맘루크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개 노예로 보는 것은 오류. 굳이 맘루크가 아니더라도 전근대 군주의 직속 노예는 말만 노예지 사실상 집사, 수행원, 호위무사에 더욱 가까웠기 때문에 어느 국가에서나 절대로 미천한 지위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신하가 군주를 저렇게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살라흐 앗 딘 치하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또 그의 관용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겨울날, 어떤 사람이 온실에서 기른 장미꽃 한 바구니[16]를 살라흐 앗 딘에게 바치자 감동한 살라흐 앗 딘이 2백 브장(Bezant)[17]을 그 사람에게 하사하겠다며 왕실 재정관에게 명하여 즉시 어음을 끊게 했는데, 실수로 2백 브장이 아닌 3백 브장으로 기재하였고 실수를 알아차린 재정관이 즉시 잘못 기재한 어음을 파기하고 다시 지급하려 하자, "아니, 그럴 것 없다. 4백 브장 짜리로 다시 끊으라. 그대의 펜이 나보다 더 후해서야 되겠느냐."라면서 오히려 가격을 올려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7. 현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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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의 살라딘 동상 (1997년작)
대인(大人)이라고 알려져 있던 덕에 과거 유럽에서도 평이 좋은 편이었다. 살라흐 앗 딘은 이라크 북부의 소수민족 쿠르드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르빌에는 살라흐 앗 딘 대학도 있다. 일례로 이라크와 시리아의 전 독재자였던 사담 후세인하페즈 알 아사드[18]는 자기 자신에게 살라흐 앗 딘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를 즐겨했다.[19] 시리아 다마스쿠스에는 살라흐 앗 딘의 동상이 서 있는 살라흐 앗 딘 광장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슬람에서 무함마드, 알리, 바이바르스와 함께 항상 거론되는 최고의 영웅이며, 이런 그의 상징성 덕분에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뒤 시리아를 점령한 프랑스군의 앙리 구로[20] 장군은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자마자 먼저 그의 무덤에 찾아가 기독교의 승리를 선언한 일이 있다.
Réveille-toi, Saladin. nous sommes de retour. Ma présence ici consacre la victoire de la croix sur le croissant.
보라, 살라흐 앗 딘이여. 우리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여기 나의 존재가 초승달(이슬람)에 대한 십자가(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살라흐 앗 딘은 중세 이래로 유럽에서 기사도 정신을 지닌 영웅으로 찬사받아 왔지만, 정작 이슬람권에서는 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이슬람 교도들은 본래 관대한 성격의 살라흐 앗 딘 보다도 무자비하면서도 막강했던 바이바르스를 십자군 전쟁의 영웅으로 꼽곤 했다. 살라흐 앗 딘이 다시 이슬람 역사 속의 영웅으로 재조명을 받게 된 현상은 비교적 근현대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이집트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이슬람학자인 압둘 라흐만 하산 아잠(Abdul Rahman Azzam) (1893년 ~ 1976년)은 한편 그의 2009년《살라흐 앗 딘 평전》에서 "기존 문화 비평계와 역사학계는 왜 이슬람, 아랍권 내에서 살라흐 앗 딘이 신화적인 입지까지 올라갔는지 상당히 기본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멀리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고 주장했다. 상술한대로 사실 적에게 배푼 관용은 적대적 입장에서 싸웠던 기독교 세계와 서구의 후예들에게 더 와 닿는 이야기지 무슬림들 본인들에게 그렇게까지 와 닿지 않는 반면, 군사적으로도 리처드 1세 뿐만 아니라 전임자인 누르 앗 딘이나 후임인 바이바르스에 비해 딱히 압도적이라 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다른 십자군 전쟁기의 이슬람권 지도자들을 재치고 살라흐 앗 딘이 후대, 특히 19 ~ 20세기에 와서 그렇게 추앙 받았는가 하니 바로 아바스 왕조의 분열 이후 정치적으로 산산조각나 시아파, 튀르크인, 십자군들에게 농락 당하던 이집트-시리아 일대를 재통합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현대 이집트-팔레스타인-시리아 일대는 다마스쿠스가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을 시절부터 통일 이슬람 제국의 핵심 국력의 원천이 된 땅들이었다. 이슬람의 발상지는 아라비아 반도지만 이곳은 기원전에 이미 사막화된 척박한 땅이라서 통일 이슬람 제국의 기반이 되기에는 생산력이 너무나 부족했고, 따라서 이슬람 극초기 정통 칼리파 시대 이후에는 더이상 이슬람 세계의 중심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반면 이집트-시리아-메소포타미아 일대는 인류 역사의 태동기부터 발달된 문명을 구가해 온 풍요롭고 번영하는 지역이었기에 이 지역이 우마이야 왕조 ~ 아바스 왕조에 이르는 기간 동안 통일 이슬람 제국의 세력 기반이 되었던 것. 이 때문에 정통 칼리파 시대의 교단적 성격을 탈피하여 세속 국가의 기틀을 다진 우마이야 왕조가 시리아의 중심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아 번영한 것이다.[21] 즉, 아랍-이슬람 문화권을 기준으로 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페르시아에 가까운 변방이라 볼 수 있고, 시리아 + 이집트가 바로 아랍-이슬람 제국을 지탱하는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어, 범아랍주의를 주장하는 아랍 연맹, 또는 아랍 통일국가 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기대받고 있는 국가가 바로 시리아와 이집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시리아-이집트-팔레스타인-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정치적 통합을 다시금 이뤄낸 것이 큰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

아바스 제국의 분열과 십자군의 침공 이전 이슬람 제국의 약화 또한 이슬람 수니파에 있어 이단이라 할 수 있는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먹고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아바스 왕조를 노리면서 저 지방들의 연결이 끊어졌던 점이 컸다. 살라흐 앗 딘, 그리고 그 전임자인 장기 왕조가 부상한 시대는 십자군의 침공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해안지역 일대가 전부 이교도에 넘어가면서 이 아랍 이슬람 제국들의 심장부의 분단이 영구화될 가능성이 커 보였던 시절이었다. 이런 와중 돌풍처럼 나타난 살라흐 앗 딘은 시아파를 척결하여 이집트를 수니파 정통으로 되돌려 놓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워 장기 왕조의 위업을 계승하여 십자군 왕국들의 척추를 부러뜨리고, 저 지역들의 정치적 통합을 복구하면서 훗날 몽골의 침략이란 거대한 돌풍에도 불구하고 맘루크 왕조, 그리고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는 보편 이슬람 제국의 명맥이 이어질 기반을 마련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이슬람, 아랍권 세계 내의 지정학적 보편성이 산산조각나고, 20세기 아랍 민족주의가 뜨고 지는 것에 열광하다 실망하며, 결국 아랍 세계가 지속 된 내부 불화와 분단으로 인해 갈수록 오히려 더 서구에게 더 무시받고, 종속적으로 떨어져가는 현실을 겪은 현대 아랍 민중과 지식인들에게 있어 이런 살라흐 앗 딘이 남긴 지정학적 통합이란 역사적 유산은 그 다른 어떤 요소보다 더 강렬한 신화적 매력이라는게 아잠 박사의 주장이다.

군사적으로는 저평가되는 면이 있는데, 사실 살라딘의 진면모는 전술적 능력보다는 부하들을 끌어모으고 유리한 결과를 끌어모으는 외교력과 정치력, 전략적 능력에 있었다.

8. 어록

한 번 흘린 피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관용과 애정으로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라.[22]
찬미받으시고 지고하신 알라께 바라오니 저들(프랑크인들)의 노기(怒氣)를 잠재우고 저들의 거주 지역을 파괴하는 데 무슬림들의 열의가 움직이게 하소서.
바다가 저들을 지원하는데 대지가 저들을 차단하지 않는 한, 국토는 저들로 인해 계속 시련을 겪을 것이며, 마음은 늘 저들의 질병으로 인해 병들어 있을 것이다. 무슬림들의 열의, 종교 신앙을 지닌 자들의 긍지, 굳은 믿음을 지닌 자들의 명예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다신교도들의 상호 협력에, 그리고 무슬림들의 안이함에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무슬림들 중에는 부르는 자에게 응답하는 이가 없고, 굽은 것을 곧게 잡으려는 이가 없다. 프랑크인들을 보라. 저들이 어느 지역까지 당도했는지, 어떻게 군대를 모집했는지, 어떤 목표를 추구했는지, 어떻게 지원군을 보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세금을 거두어 지출했는지, 어떻게 재화를 모아 저들 간에 골고루 분배했는지를. 저들의 나라와 섬들에서는 왕과 고관대작들이 지원군을 보내는 데 서로 경쟁하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는 일에 서로 겨루고 있다. 저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는 데 목숨을 바쳐 희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저들은 자신들의 불운한 동족 사람들에게 온갖 종류의 무기들과 전사(戰士)들을 제공했다.
저들은 오로지 신앙에 대한 열정과 신념에 대한 자부심에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고 자신의 재산을 바쳤다. 프랑크인들 중 어느 누구라도, 만일 (그들이 차지한 시리아) 해안 지역이 (무슬림들에 의해) 점령되어 자신들의 명예가 실추되기라도 하면 자기 나라가 수중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자기 나라에 마수(魔手)가 닿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약해지고 용기를 잃었고, 방심하며 게을러졌고, 당황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명예심을 상실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일 이슬람이 속도를 늦추면, 또는 불빛이 꺼지거나 창끝이 빗나가면, 이슬람 영토의 동서에서 그리고 먼 지역이나 가까운 지역을 막론하고 알라의 종교를 위해 자긍심을 지닌 자나 거짓에 맞서 진리를 도우려 나서는 자는 없게 될 것이다.
이제 무기력한 상태를 떨쳐버릴, 그리고 먼 곳에 있는 자든 가까이 있는 자든 신앙의 열정을 지닌 자들을 불러 모을 때가 되었다. 알라를 찬미함으로써 우리는 알라의 도움을 간구한다. 우리는 알라께 헌신하고, 알라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비밀을 알려주셨으니, 다신교도들은 알라의 허락하에 멸망할 것이고 무슬림들은 안전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김능우, 박용진 편역《기독교인이 본 십자군, 무슬림이 본 십자군》[23]

9. 가계

살라흐의 조 • 부모와 친척
살라흐의 형제[25]
살라흐의 부인과 자식들 및 그의 후손들

10. 대중문화에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지옥편에서는 제1옥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등 다른 비기독교인 위인들과 함께 있었다. 홀로 외로이 서있어서 아웃사이더 같아 보인다. 다만 신곡에서의 제1옥이 림보이고 살라딘이 있는 곳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자들이 있다는 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대우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선량한 비가톨릭"이다. 그 외에도 그의 기사도적인 면 때문인지 서구의 십자군 기사문학 등에도 종종 그 이름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왕비였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염문설도 나오지만 루이 7세의 왕비 자격으로 그녀가 참여했던 2차 십자군은 1147년 ~ 1148년에 있었고 당시 20대 중반의 엘레오노르와 달리 살라흐 앗 딘은 겨우 열 살의 소년에 불과했으니 그냥 기사문학 특유의 뻥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근대 서구에서 바라보는 살라딘의 이미지가 가장 함축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월터 스콧의 소설《탈리스만》이다. 이교도임에도 정정당당한 기사이며, 신비롭기까지 한 인물로 그려진다. 악역인 레오폴드 대공과 비교되어 더더욱.

조반니 보카치오의 저작인《데카메론》에서도 살라딘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나온다. 십자군 전쟁 이전 적국인 유럽을 정탐하다가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본 한 기사에게 후하게 대접을 받았는데, 이후 그 기사가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자 그를 알아보곤 그때 받았던 호의를 갚기 위해 더더욱 융숭하게 대접해 주고 휘하 마법사의 마술로(...) 고국으로 보내주기까지 한다.

독일의 극작가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년 1월 22일 ~ 1781년 2월 15일)이 1779년에 쓴 희곡《현자 나탄》[31][32]에선 나탄에게 종교의 진리에 대해 묻는 역으로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선 어째 찌질하게 나온다(...). 나탄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중에 어느 종교가 참된 종교인가?"를 물어 본 것. 이에 대해 나탄은 반지 설화[33]를 인용하며 어떤 종교든지 간에 공평하고 편견 없는 사랑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준다.

불스원의 차량용 에어컨 살균제(훈증캔)의 브랜드이기도 하다.

김종훈의《헤븐 투 헬》에서 <지옥편>에 등장할 예정이다. 살라딘의 이미지로 봐선 주인공의 책사로 활약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Fate/strange Fake에서 본인의 숙적이 등장함에 따라 자주 언급된다. 하산 사바흐가 되지 못한 소녀도 그를 일족의 영웅으로 잘 알고 있다. 십자군 정쟁 당시 사도 27조가 난입해서 양 진영에게 막대한 피해를 남겼는데, 이를 보다 참지 못한 리처드와 살라딘 그리고 당대 산의 노인이 함께 사도 1명을 토벌했다고 한다. 본작에서 리처드 1세가 신대의 영웅 못지 않은 강력함을 가진 것을 보아 적어도 그에 대처할 수 있는 대영웅인 모양.

10.1. 게임

10.1.1. 징기즈 칸 시리즈

파일:attachment/살라흐 앗 딘/살라딘.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징기즈 칸 시리즈에서 라이벌격인 리처드 1세가 세계정복 시나리오에서 플레이 가능이었는데 비해 별로 운이 없었다.* 원조비사에서 일판에서는 유저 시나리오로 시리아의(16번땅) 아이유브 왕조의 군주이자 능력치는 정치B, 전투B, 지도A, 매력A의 먼치킨 능력치를 가진 플레이 군주로 등장했지만 한국에 정발되며 살라흐 앗 딘은 플레이 불가가 되고 고려가 플레이 가능이 돼버렸다.* 하지만 징기스칸 4에선... 굇수. 부하가 다소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전체적인 능력치는 지역 내 최강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정치 83, 전투 91, 지모 84에 전투 특기도 돌격, 연사, 화공, 공성 등 필요한 건 다 있다. 살라흐 앗 딘 한 명과 카이로 등의 도시의 능력 때문에 몽골과 함께 가장 쉬운 국가이다. 결점은 수명으로 시작할 때부터 52세이다. 수도 카이로가 의학 수치와 학술 수치가 높아서 카이로에 있는 한은 사실보다 조금 오래 살지만, 친정을 나가 카이로를 벗어나면 수명 때문에 죽어버리는 불상사도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운용하기 조금 애매하다. 어차피 자식들도 다 있지만 자식들은 별 볼일 없고 아우 알 아딜이 능력치가 우수하고 수명도 길어서 살라흐 앗 딘이 죽으면 대개 알 아딜에게 계승시키는 경우가 많다. 취향에 따라서는 살라흐 앗 딘의 능력치와 카이로의 도시 수치를 이용해서 우수한 가공아들을 만들 수도 있다. 인공지능은 어차피 십자군도 안 오겠다 바로 콘스탄티노플로 돌진하거나, 감히 아바스 칼리프에 도전하는 게 대다수지만 의외로 둘 다 쉽게 뚫리지는 않는다.

10.1.2. 스트롱홀드 : 크루세이더

AI 군주로 등장한다.

10.1.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

10.1.4. 창세기전 3

살라딘이란 이름으로 오마주되었다. 십자군 전쟁 역시 크림슨 크루세이드[34]로 나와서 화끈하게 한판 붙는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위장에 불가하고 진짜 정체를 생각하면 이 사람의 오마주다.

10.1.5. 인피니티

생전 살라흐 앗 딘의 인격과 행동을 토대로 재구축한 존재가 등장한다.

10.1.6. 문명 시리즈

문명 4, 문명 6에서 아라비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정식 발매 이전에 엎어져서 나오지 못하고 더미 데이터로만 남아 있지만 문명 2에서 아라비아의 지도자로 나올 예정이었다. 종교와 과학을 모두 취하는 전형적인 명군의 이미지이다. 문명 6의 살라딘은 문명 6/등장 문명/아라비아 참조.

10.1.7. 로스트사가

용병 살라딘의 모티브가 되었다.

10.1.8. 크루세이더 킹즈 2

아이유브의 군주로 등장한다. 외교력은 높은 편이지만 무력과 개인 전투력이 실제 명성에 비해 많이 낮다.

10.1.9.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Crusades 캠페인의 이집트 지도군주로 등장한다. 군주 스킬로 믿음의 지당함이라는 패주하지 않은 아군의 사기를 최대로 고정시키는 스킬을 가지고 있어 전투시 버티기에 상당히 용이하다.

10.1.10. 도미네이션즈

유니버시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도미네이션즈/유니버시티/술탄 살라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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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영화

10.2.1. 사자왕 리차드와 십자군들(1954)

원제는 King Richard and the Crusaders. 렉스 해리슨에 의해 묘사되었다. 지혜로운 평화주의자로 그려진다. 신분을 숨긴 채 배신자들의 독화살에 당한 리처드 1세를 치료해준다. 리처드 1세의 충신이 리처드 1세의 불신을 받아 억울하게 기독교 숙영지에서 쫓겨나자 자신의 이슬람 숙영지에 데려와 극진히 대접하기도 한다. 결국 평화 협상에 방해가 되는 리처드 1세의 배신자들을 직접 처리한다. 화평을 위해 기독교 여성과 이슬람 지도자의 결혼을 제안하기도 한다.

10.2.2. 아라비안 어드벤처(1979)

영국의 명배우 크리스토퍼 리가 살라흐 앗 딘 역을 맡았다.

10.2.3. 킹덤 오브 헤븐(2005)

파일:saladin KoH.jpg
킹덤 오브 헤븐(2005년작) - 살라흐 앗 딘 역: 가산 마수드[35]
작중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특히 죽은 사라센 군인들을 묻을 때 슬픔을 참지 못하는 장면이나 예루살렘 탈환 후, 보두앵 4세의 무덤을 밟지 않도록 옆으로 피해서 걷고 방 안에 떨어져 있던 십자가를 탁자 위에 다시 똑바로 세워주는 장면은 유럽 세계에 관대하고 자비로운 군주로 알려진 그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케렉 성 앞에서 철수한 것을 따지는 젊은 이슬람 성직자에게 "물론 승패는 신께서 결정지어 주시오. 하지만 준비와, 병사의 숫자, 전염병의 유무, 그리고 식수확보 여부도 승패를 결정해 주지"라고 대답할 정도로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가치에 대한 발리앙(올랜도 블룸)의 질문에 "아무것도 아냐.(Nothing.)"라고 답하고 걸어가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하지만 모든 것이기도 하지.(Everything.)"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명장면. 발리앙의 질문은 기독교도, 이슬람교도에게 있어 예루살렘의 가치를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아내를 잃은 허무함을 달래는 한편 신을 찾고자 이곳으로 온 발리앙의 고뇌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명대사.

또한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이 개발살난 이후, 케락의 영주 르노 드 샤티용참수당하는 장면이 있다. 원래부터 무슬림에게 강경한 인물이었고, 살라흐 앗 딘과 맺은 조약을 여러 차례 깨고, 심지어 살라흐 앗 딘의 누이를 죽인 죄가 있으며, 또한 영화에서는 안 나왔지만 르노 드 샤티용은 메카메디나약탈하려다 이를 알고 달려온 살라흐 앗 딘의 군대에 아슬아슬하게 저지당한 일도 있다. 살라흐 앗 딘은 이때를 포함해서 두 번에 걸쳐서 르노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했었다. 이전에도 무슬림들을 조약을 어겨 가면서 공격해서 예루살렘의 왕이 엄중히 경고할 정도였다. 이 때 마침내 맹세대로 응징을 한 셈이다. 그런데 영화상에도 표현되었지만, 단칼에 죽인 것은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에서 살라흐 앗 딘이 부하가 내민 검을 잡아드는가 싶거니 자기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뽑아서 목을 반쯤 벤 후 호위병들이 끌고 나가서 처형했다. 다만 감독판에서는 그 뒤에 호위병들이 끌고 나가 잡아서 고정시키고, 살라딘이 부하가 내민 검을 들고 가서 이미 반쯤 죽어가던 르노를 직접 참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36] 참고로 참수한 후 살라흐 앗 딘이 이야기를 건네는 인물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기 드 뤼지냥이다. 살라흐 앗 딘이 기에게 물을 주자 기가 다시 르노 드 샤티용에게 그 물을 건네는데, 르노는 "나는 그저 물로 알고 마실 뿐이오.(I drink water for what it is.)"라고 되뇌이곤 후룩 마셔버리며, 살라딘은 진노한 표정으로 "그 잔은 너한테 준 게 아니다."라고 하고 르노는 조용히 "그렇죠. 나도 아오."라고 한 뒤 살라딘의 칼을 받는다.[37] 르노가 처형되자 기는 자기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공포에 떨었지만 살라흐 앗 딘은 그를 살려주고 얼마 후 풀어준다.[38] 이 에피소드도 영화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10.3. 드라마

튀르키예의 감독인 세다트 인지(Sedat İnci)가 제작하고 튀르키예 방송사 TRT에서 2023년 11월부터 방영하는 드라마 살라딘: 예루살렘의 정복자(Kudüs Fatihi Selahaddin Eyyubi[39], Saladin: The Conqueror of Jerusalem[40])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유튜브에 에피소드 1이 올라와 있다.#

[1] 전 이라크의 독재자였던 사담 후세인의 출생지도 티크리트라서 한때 후세인 정권 시절에 지역 홍보용으로 많이 써먹었다.[2] 그나마도 알렉산드리아의 지휘관이 아니었으면 아예 이름도 안 나왔을 것이다.[3] 초기에는 살라딘이 700여 명의 기병만 데리고 급히 왔었다.[4] Renaud de Châtillon. 불어식으로 르노 드 샤티용이고, 샤티용의 레이날드 혹은 레지날드(Reginald)라고도 한다.[5] 사실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의 잔당들을 이간질시키기 위해서 기 드 뤼지냥을 석방했으며 내분이 일어났다. 또한 영국의 리차드1세와 프랑스의 필립2세가 공동 지휘관인 3차 십자군이 도착했는데, 리차드는 기를 지지하고 필립은 콘라드를 지지해서 내분은 계속되었다. 3차 십자군이 성지 회복에 실패하자 리차드는 자신이 단독으로 점령했던 키프로스 섬을 기에게 양도했고, 그 후손들이 키프로스를 계속 통치하면서 '예루살렘과 키프로스의 왕'이라는 직함만 유지했으며 후일 기의 후손들이 통치하던 키프로스는 베네치아가 멸망시킨다.[6] 당시 십자군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리처드 1세는 전략적으로도 상당히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으나, 다른 십자군 소속의 지휘관들은 그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리처드 1세는 십자군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도 어차피 고립된 상태에서는 이를 애써 회복한들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우선 퇴각하여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려 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에 참여한 많은 지휘관과 기사, 병사들은 그런 리처드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다.[7] 리처드가 싸우는 장면을 살라딘이 후방에서 관람하는 정도였다. 그 무식한 용력을 보면서 경악하며 악마라 부른 건 덤(...) 사실 만일 직접 전장에서 만났다면 그건 군대가 궤멸되다 못해 완전히 끝장났다는 뜻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쟁에서 궤멸당해도 군대를 보전했던 살라딘의 입장상 직접 만날 일이 없었다. 거기다 아미르들도 수십 명씩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해대는 리처드의 앞에 나타나는 건 나를 죽이라는 소리나 똑같은 소리기 때문에 나갈 리가 없다.[8] 자칭 무슬림아랍인의 보호자.[9] 물론 외국의 황제가 기증한 관인만큼 살라딘의 시신 옆에 놔두는 것으로 예우를 했다.[10] 신곡에서 림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처럼 (기독교의) 하느님을 알지 못 한 위대한 인물들이 지내는 곳이다.[11] 근데 실제로는 2차 십자군 당시 살라딘은 고작 10살 짜리였기에 종교고 자시고 청혼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엘레오노르도 그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12] 리처드가 이슬람 군의 전열을 마구 뭉개버리자, 이를 보던 살라흐 앗 딘이 어이가 없어 "저 녀석이 사탄 아님?"이라는 농담을 던진 슬픈 일화가 있다(...)[13] 다만 이는 대주교 본인의 사리사욕을 챙긴 게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로서 성물을 함부로 방치하거나 버리거나 할 수 없었기에 (가톨릭 교회에서 성물은 말 그대로 '신성한' 것이기에 그 가치는 물질로 환산할 수 없으며, 당연히 이를 버리거나 팔거나 몸값 삼아 맞바꾸는 등의 행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가지고 간 것이다. 헤라클리오스 도베르뉴 대주교 본인은 발리앙과 함께 포로들의 몸값 마련을 위해 친히 발 벗고 동분서주했고, 몸값이 다 모일 때까지 인질이 되겠다고 자청까지 했을 정도의 대인배였다.[14] 이 일화를 기록한 비서조차도 왕이 직접 잉크병 가져오는 것을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15] 대부분 이슬람교로 개종시킨 중앙아시아인이나 슬라브인으로 구성되었고, 아예 기독교도 출신 기사들을 근위병으로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16] 방을 장식해줬다고도 한다.[17] 당시에 통용되던 비잔티움 은화.[18]시리아 대통령인 바샤르 알 아사드의 아버지다.[19] 그러면서 이 둘은 살라흐 앗 딘의 출신 민족인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 / 학살하거나 홀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물론 이들의 처우는 사담과 하페즈가 사망하고 정권을 잃고 몰락한 이후에 와서야 그나마 개선되었다.[20] 종심방어전술을 창안한 그 구로가 맞다.[21] 물론 우마이야 왕조 이후 나타난 아바스 왕조 시대에는 수도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그다드로 옮겨가기는 했는데, 이는 아바스 왕조 자체의 성립 당시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차별받던) 페르시아인들을 중요한 지지기반 중 하나로 삼고 있었기에 페르시아 지역으로부터 가까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긴 것에 가깝다. 현대의 경우 메소포타미아-특히 이라크의 정체성이 페르시아적 정체성을 이은 이란의 정체성과 많이 분리되었지만,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핵심 영토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체성은 페르시아적 정체성에 비교적 가까웠다. 게다가 이라크와 이란이 전쟁까지 벌인 현대에 와서도 이라크 인구 중 수니파의 비율은 고작 20%에 지나지 않으며, 시아파의 비율이 무려 60%에 달한다. 즉, 현대 기준으로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정체성은 아랍 문화권의 주류인 수니파 이슬람과 꽤 명확히 구별되고 있는 것. 그래서 사담 후세인 사후 들어선 현재의 이라크 정부 (정 • 부통령을 제외한) 핵심 인사는 시아파다.[22] 아들에게 한 충고[23] 3차 십자군 소집에 대응하면서 각지에 보낸 서신[풀네임] 알말릭 알아프달 나짐 앗딘 아이유브 이븐 사디 이븐 마르완[25] 여자 남매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태어난 순이 확실하지 않아 누가 장남인지 알 수 없다.[풀네임1] 이마드 앗딘 알말릭 앗살리흐 이스마일 이븐 사이프 앗딘 아흐마드[풀네임2] 알아프달 알리 이븐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풀네임3] 알말리크 알 아이즈 우스만 이븐 살라흐 앗 딘 유수프[풀네임4] 알말리크 앗 자히르 가지 이븐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풀네임5] 알말리크 알나시르 살라흐 알 딘 유스프 이븐 알 이즈 이븐 알자히르 이븐 살라흐 알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스히지[31] 계몽주의자였던 레싱은 볼펜뷔텔 도서관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신론 철학자였던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의 유고를 발간하려다 1778년 8월 함부르크의 수석 목사 괴체로부터 비난을 듣고 그와 격렬한 토론을 벌였고 결국 검열 면제권을 박탈당하는 사실상의 ‘집필 금지’ 선고를 당한다. 이때 괴체 목사와 벌인 논쟁에서 괴체 목사로부터 “당신은 어떤 종교를 진정한 종교로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겸해서 이 작품을 쓴 것. 당연히 교회의 심기를 거슬러 레싱이 죽을 때까지 현자 나탄은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32] 여담으로 라이마루스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계시나 기적들을 엉터리라고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이자 신앙 체계인 예수의 부활 및 승천 교리에 대해 “예수 사후에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날조한 거짓말”이라고 대놓고 부정해 버렸다. 이러한 주장을 담은 글은 라이마루스 사후에 그의 유고로 발견되었고, 이 유고를 볼펜뷔텔 도서관에서 찾아낸 것이 고트홀트 레싱이었다.[33] 어느 부유한 상인인 아버지가 보물 반지를 하나 갖고 있었는데, 그 반지는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게 해 주는 힘이 있었다. 세 아들 가운데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아들에게 이 반지를 물려주려다 다른 두 아들이 실망할까 봐 걱정한 아버지는 솜씨 좋은 장인을 시켜 반지와 크기도 모양도 똑같이 생긴 반지 두 개를 더 만들어서 세 아들에게 각각 나눠주게 했고, 장인의 솜씨가 너무 뛰어난 덕분에 세 아들이 받은 세 개의 반지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 아버지가 원래 갖고 있던 보물 반지인지 끝내 구분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 여기서 뒷이야기가 더 있는데 세 아들은 자신이 가진 것이 진짜라며 서로 싸우다가 결국 재판관에게까지 찾아가는데 재판관의 판결 역시 간지. “듣자니 진짜 반지는 그걸 가진 사람이 모두로부터 사랑받게 하는 힘이 있다던데 너희 형제가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걸 보니 이제 그 반지는 자기가 가진 힘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 반지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면 먼저 너희가 가진 반지가 진짜라고 주장하는 너희부터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34] 피의 십자군[35] 살라흐 앗 딘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최근 대중문화에서 보여주는 살라흐 앗 딘의 이미지는 킹덤 오브 헤븐에서 가산 마수드가 연기한 살라흐 앗 딘이 기본 토대라고 해도 될 정도다.[36] 굳이 단검으로 목을 딴 뒤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잘 보여주는데, 이 과정은 일반적인 참수가 아니라 이슬람교에서 짐승을 도살하는 의식인 다비하와 비슷하다. 살라딘이 아예 르노를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을 정도로 혐오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37] 당시 관습으로 포로에게 물을 주는 것은 최소한 목숨은 보장해주겠다는 뜻이었고, 기가 르노에게 잔을 준 것은 "난 죽여도 괜찮으니 이자는 살려주시오"라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르노도 바보는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죽이고 살리고 하는 맥락은 제하고) 오직 목 축이려고 마시는 겁니다."하고 고하고 마신 것. 그리고 르노를 원수로 생각한 살라딘은 여기서 분노해 한번 더 "넌 기가 부탁해도 안 살려줄 거다."라고 확인사살을 한 것이다.[38] 여기서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 법이지. 자네는 위대한 선왕의 측근이지 않았나? 그 가르침을 본받았어야지?"라고 일갈하는 부분도 일품이다. "대체 뭘 배운 거냐? 그 훌륭한 선왕을 모셨으면서."라고도 번역되는데, "내가 여기서 너 안 죽이고 물 마시라고 준 게 뭐 니가 좋아서 그런 줄 아냐? 너도 어쨌든 한 나라의 국왕이니까 법도상 내가 놔 두는 것뿐이다. (네가 왕이 아니었으면 너도 르노 꼴 났을 테니까) 착각하지 마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39] 튀르키예어[40]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