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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02:55:47

르노 드 샤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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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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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2차 십자군 전쟁 시절3. 예루살렘 왕국 시절4. 평가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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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enaud de Châtillon(1125 ~ 1187).

십자군기사. 십자군 전쟁사에서 나름 유명한 인물이지만 정작 그가 프랑스 왕국상파뉴 지방에서 온 인물이란 것을 제외하면 알려져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돈지(Donzy) 지역 영주의 둘째 아들이란 것과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얼마 전에 르노의 형이 지역의 영지를 물려받은 것 정도만 기록되어 있을 정도. 십자군을 일으킨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작은 증조할아버지다. 본인도 지역에서 약간의 영지를 상속받았던 것 같지만, 얼마안가 잃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재기를 위해 용병으로써 예루살렘 왕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2. 2차 십자군 전쟁 시절

1147년, 2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레반트 지역으로 건너왔지만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십자군 병력 대부분은 유럽으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르노는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안티오키아 공국콩스탕스 밑으로 들어가 계속 활동하였다. 한편 콩스탕스는 1149년 남편 푸아티에의 레몽을 잃은 후 1153년 르노를 새 남편으로 맞이하였다. 이 결혼으로 르노도 콩스탕스와 공동 안티오키아 공이 되었다. 다만 이 결혼은 비밀로 부쳐졌는데 이유는 르노의 신분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콩스탕스의 친족이자 종주권자인 예루살렘 왕국보두앵 3세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인 아모리 드 리모주가 이 사실을 알면 펄펄 날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이를 알게 되어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하자, 르노는 아모리 드 리모주를 납치해서 벌거벗기고 온 몸에 꿀을 바른 다음, 파리가 들끓는 장마당에 묶어놓고 총대주교가 결혼이 적법하다고 선언할 때까지 옆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행각을 벌였다. 아모리 드 리모주가 항복하자 르노는 결혼식을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거행했고 아모리 드 리모주에게서 많은 돈을 뜯어낸다.
파일:ReynaldofChatillon&PatriarchofAntioch.jpg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아모리 드 리모주를 고문하고 있는 르노 드 샤티용

이후 별다른 행적이 없던 르노는 1156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에게서 뜯은 돈을 군자금 삼아 돌연 동로마 제국이 약속한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쟁을 선언하였으며, 그 명목으로 키프로스를 공격하여 약탈하는 사건을 터뜨렸다.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즉각 반응하여, 제국군에 동원령을 내려 안티오키아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단일 세력으론 압도적이던 마누엘 치세의 동로마군을 안티오키아 따위가 상대하는 것부터가 무리였고, 키프로스 습격은 본인의 독단이었기 때문에 안티오키아 안팎 그 어디도 동조해줄 사람이 없었으며, 예루살렘 왕국 또한 보두앵 3세가 참전을 거부하면서 한순간에 멸망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야 사태를 파악한 르노는 맨발로 황제에게 찾아가 사죄하였고, 마누엘은 키프로스가 르노와 그 군대로 인해 입은 손실만큼의 배상금 지불과 안티오키아의 동방정교회로의 개종을 조건으로 르노를 용서해주었다.

이후 르노는 성전 기사단과 함께 시리아아르메니아 지역에 준동하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전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1160년 그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알레포로 끌려가 무려 17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 그가 사로잡히고 나서 아무도, 심지어 그의 아내인 콩스탕스조차 구명운동에 나서지 않았다.[1][2] 16년간 포로생활을 하다가 동로마 제국이 1176년 12만 디나르의 몸값을 지불해준 덕분에 석방될 수 있었는데[3] 이것이 계기인지는 몰라도 르노는 이슬람을 증오하기 시작하였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이슬람인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3. 예루살렘 왕국 시절

파일:케라크1.jpg
요르단 영주 시절 르노의 거점이던 케라크 성채

르노가 구금되어 있던 시절인 1163년 때 콩스탕스가 남편 잘못 만나 고생만 하다 사망한 탓에 르노는 안티오키아 공작직위를 잃었으며 석방된 지 얼마 안된 시점에 예루살렘 왕국의 신하인 울트레주르뎅(Oultrejordain)의 영주가 되었는데 이 역시 남편을 잃은 영주의 부인[4]과 재혼한 결과물이었다. 그 덕분에 케락과 몬트리올 성채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요새는 이집트다마스쿠스 사이의 교역로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더 나아가 홍해로도 진출할 수 있는 요지였다. 당연히 이슬람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던 르노는 이슬람 상단을 약탈하고 포로들을 잔혹하게 대하면서 악명을 날렸다. 이후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나병을 앓고 있던 보두앵 4세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을 대차게 바르고[5]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 사이의 휴전을 성사시켰다.

이를 계기로 잠시 조용해지나 싶었는데, 1181년 르노가 케락 성채를 지나가던 이슬람 상단을 공격하였다. 휴전조약을 어긴 것에 대하여 살라흐 앗 딘은 보두앵 4세에게 강력히 항의하였고, 보두앵 4세는 르노를 질책하는 행동을 보이긴 했으나 르노는 도무지 말을 듣질 않았다. 결국 1182년 전쟁이 재개되었고, 르노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채 아카바 항구에서 선단을 동원하여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메디나 근처까지 진출하여 해적질까지 했다. 이에 분노한 살라흐 앗 딘은 동생인 알 아딜을 시켜 르노의 선단을 궤멸시키고 아카바 항구를 점령해버린다. 그리고 즉시 병력을 이끌고 케락을 공격하였으나 트리폴리 백작 레몽의 적절한 지원에 케락 함락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다시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양측의 대립은 잠시 멎었다. 살라흐 앗 딘은 그를 고삐 풀린 개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다.

1186년 보두앵 4세가 죽고 그 후계자인 보두앵 5세가 곧바로 요절하자 예루살렘 왕국은 기 드 뤼지냥과 친왕파 트리폴리 백작 레몽과 이벨린의 발리앙이 중심이 되어 대립이 벌어졌는데, 르노는 기의 편을 들었고 기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르노의 힘 역시 막강해져 기가 마음대로 다룰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기가 즉위한 해 르노는 또다시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슬람 상단을 공격하였다. 르노가 이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자 살라흐 앗 딘은 극도로 분노하였다. 한편 기는 살라흐 앗 딘과 맞설 경우 자칫 잘못하다간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르노를 처벌하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으나, 르노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자 기도 처벌의지를 꺾고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 때 르노는 "뤼지냥은 예루살렘의 주인이지만 케락의 주인은 나다!"라며 오만하게 행동했다. 결국 인내심이 폭발한 살라흐 앗 딘은 “꾸란에 맹세코 저놈의 목을 직접 치겠다!”고 보복을 맹세하며 병력을 동원하였고, 르노도 이를 요격하기 위해 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은 몰살당했고, 기와 르노는 포로로 잡혔다. 살라흐 앗 딘은 협정을 어긴 르노를 "지키지도 않을 거짓된 약속을 몇 번이나 했소?"라고 강하게 질책하였고, 형식상 최후의 자비로 이슬람의 개종을 권했으나 거절당한 뒤, 기가 보는 눈 앞에서 직접 르노의 목을 베었다. 공격당한 뒤에도 목숨이 붙어 있던 르노는 호위병들에게 끌려 나가 참수됨으로써 생을 마쳤다.

4. 평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이 계속되던 당시에도 딱히 평이 좋지 않았다. 일단 순교자 대접은 해주지만 성격이고 행태고 좋게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후대에도 이런 평가는 변하지 않아서 그가 이슬람 상인들을 상대로 벌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이전처럼 당연히 까고 있고, 그의 참혹했던 최후조차도 무리할 정도로 평화조약을 위반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전쟁을 벌임으로써 자초한 인과응보였다고 평가하여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특히 전략적 안목이 거의 바닥에 가까웠는데, 잔인하게 구는 행태는 이슬람권에서도 붙잡은 십자군들 몸값 못 받으면 다 노예로 팔고, 성전 기사단원으로 밝혀지면 다 죽이고, 기껏해야 살라딘 정도나 여기서 예외였으니 실드라도 칠 수 있지만 바이바르스처럼 주변이 약화된 것도, 리처드 1세처럼 충분한 자체 군사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6] 이러고 놀았으니 안 죽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하틴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도 기도 왕위를 지키고 살라딘과의 협상을 유지하기 위해 결국은 그를 숙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역사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십자군 전쟁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토머스 매든 교수의 경우에는 자신의 저서에서 르노에 대하여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인물", "성격이 잔인하고 허풍이 심했고, 정치적인 음치"였다고 비판했다. 키프로스를 상대로 약탈을 일삼았을 당시, 같은 종교를 믿는 기독교도들을 상대로도 살인, 강간, 파괴를 자행했던 것을 보면 그가 단순히 무슬림에게만 잔인했던 것이 아니라, 인격 자체에 심한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4세기 국가 체제가 더 중요시된 뒤에는 기독교 세계에서 이런 일이 급증하지만, 르노 드 사티용은 적어도 기독교도 집단 내부에서는 최소한의 룰[7]이 지켜지던 12세기의 인물이다.

아무리 이교도인 이슬람과의 협정이라지만, 심각할 정도로 약속을 자주 어겨서 보두앵 4세조차 사과를 명령했을 정도였다. 거기다 단순히 이슬람 상인들의 상품을 빼앗는 수준의 약탈이었다면 어차피 자기들도 하는 짓이라 이슬람 쪽도 어느 정도는 참고 넘겼겠지만, 르노는 그들을 상대로 잔인한 학살극을 벌였다. 영주라는 자가 자신의 행위가 낳을 정치적 파장도 생각하지 않고 알량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날뛰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게다가 그 복수의 대상도 잘못 잡은 게 그를 학대한 건 살라딘이 아니라 다른 이슬람 영주였다.

그릇된 인품이나 행보와는 별개로, 사생활 면에서는 잘생긴 외모와 용감한 성격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미망인이 된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는 르노의 신분이 자신보다 한참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와 혼인을 강행하였고, 콩스탕스가 죽어서 영지를 잃은 후에도 울트레주르뎅 영주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영주가 되었던 것을 보면 나름 인기남이긴 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노가 이슬람군에게 사로잡혔을 당시에 콩스탕스가 몸값을 지불하지 않아 17년 동안이나 포로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을 보면 외모만 잘생겼을 뿐, 좋은 남편감은 되지 못한 듯 하다.[8]

하틴의 뿔 전투를 앞두고 레몽 3세가 "여태까지 내가 보아왔던 어떤 이슬람 군대도 지금 살라딘이 이끈 군대처럼 수가 많지도 강하지도 않으니, 이번 싸움은 물러나야 하오."라고 말하자, 르노는 "그들의 수가 많다고 하는데, 그게 뭐가 문제인가? 나무가 많다고 해서 불이 타오르지 못하는가?"라고 반박한 일화로 보건대 평소에도 무척이나 오만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5. 대중매체


[1] 시오노 나나미십자군 이야기에서 이 일화를 서술하면서, 그 깽판(...)을 다 쳐가며 억지로 결혼한 부인마저도 남편인 그를 구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답이 나온다고 깠다.[2] 사실 콩스탕스는 남편을 구명하기에는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였다. 르노가 포로가 되면서 안티오키아의 수뇌부 자리가 공석이 되어 보에몽 3세가 되는 첫 남편 사이에서 난 친아들 측과의 권력 투쟁에 동로마 제국의 마누일 1세가 끼어들면서 친딸이자 보에몽의 누이인 안티오크의 마리아를 마누일에게 급하게 시집 보내는 등 자리를 겨우 보전하느라 정신없는 상황이었고, 그마저도 동로마 제국이 보에몽 3세의 권력계승을 승인한 1163년에 아들에 의해 안티오크에서 추방되어 그 직후 세상을 떠났다.[3] 포로 생활 막바지에 르노와 콩스탕스 사이의 친딸인 안티오크의 아그네스가 마누일 1세의 주선 하에 헝가리의 왕비가 되어 르노의 가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격상된 것과 더불어, 거기에 더해 그 당시 르노를 관리하던 이슬람 측 권력자가 살라딘에게 권력을 통째로 빼앗긴 탓에 살라딘과 관계가 험악할 수준으로 나빴던 장기 왕조 누레딘의 후계자 측 인물이었다는 묘한 행운까지 겹쳤다. 그리고 르노를 풀어준 바로 직후 알레포의 장기 왕조 파 사이 권력투쟁이 벌어져 르노를 석방시켜준 권력자가 처형당하는 대혼란이 일어나고 결국 몇 년 후 알레포는 살라딘의 세력권에 편입된다. 르노는 거의 간발의 차이로 10년 먼저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셈.[4] 유일한 상속녀란 말도 있다.[5] 보두앵 4세와 함께 살라흐 앗 딘의 2만 6천 군대를 대파한 580명의 기사 돌격에 르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라흐 앗 딘도 포로로 잡힐 뻔 했을 정도로 대패했다.[6] 리처드의 영국군은 5만 명에 가까운데다 영국 본토에서 직접 육성해서 데리고 온 정예였으므로, 살라딘의 군대에 비해 질적으로도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 하틴 전투를 재연하려 들었던 살라딘이 영국군의 돌격에 오히려 패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7] 항복의사를 밝힌 사람은 죽이지 않고 민간인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등. 이슬람권과의 전쟁에서도 이 룰을 지키려 들던 십자군들도 있긴 있었다. 물론 흔하지는 않았지만.[8] 상술했던 것처럼 자기 앞가림도 겨우 하기에 급급했던 콩스탕스의 처지도 고려해봐야 한다. 남편이 포로로 잡힌 직 부터 아들과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고 거기에 동로마까지 끼어 남편은커녕 자기 안위마저 보전하기 어려웠으니.[9] 실제 역사에서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에 해당하는 인물. 티베리아스는 레몽의 아내인 에시바 부인의 영지였다.[10] 영화에서는 살라흐 앗 딘의 20만 군대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실제 역사상 살라흐 앗 딘의 군대는 최대 4만 명 밖에 안됐다.[11] 다만 벨리앙의 군대와 티베리아스의 기사단은 참전을 거부했다.[12] 당시 사막에서, 그것도 전쟁터에서 얼음은 엄청나게 귀한 물건이었다.[13] 작중에서 "나도 알아"란 대사를 많이 한다. 연출상 아랍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그냥 얼버무리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티베리아스나 시빌라 등 예루살렘 측 등장인물들도 간간이 아랍어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봐야 가마를 드는 사람(주로 아랍인)에게 명령할 때 쓰는 정도지만. 다만 역사상의 르노는 시리아에서 볼모 생활만 17년을 한지라 어느 정도 아랍어를 알아들었을 가능성이 높다.[14] 이 단검은 살라흐 앗 딘이 사냥한 '짐승'을 도축하거나 호신용으로 쓰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이 칼로 르노를 죽임으로써 살라흐 앗 딘이 르노를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보고 그에 걸맞은 비참한 죽음을 안겼다는 것을 암시한다.[15] 직후 살라딘은 참담해하는 기의 면전에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다. 당신들의 위대한 선왕에게 대체 무엇을 배웠냐'고 힐난하고 기도 아무 말 못한다. 살라딘이 얼음물을 준 건 "같은 왕이기에 죽이지는 않는다" 는 의미였지 좋아서 살려준 것이 아닌데, 기는 그것도 모르고 르노까지 살려달라고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