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2대 황제 카리누스 CARIN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Marcus Aurelius Carinus |
출생 | 미상 |
로마 제국 | |
사망 | 285년 7월 |
로마 제국 모에시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83년 봄 ~ 285년 7월 (2년) | |
전임자 | 카루스 |
후임자 | 디오클레티아누스 |
부모 | 아버지 : 카루스 |
배우자 | 마그니아 우르비카 |
자녀 | 마크루스 아우렐리우스 니그리니아누스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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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리누스는 군인 황제 시대의 로마 제국의 42대 황제이다. 정식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Marcus Aurelius Carinus. ?~ 285)이며 카루스의 아들로서 형제는 누메리아누스이다. 재위 기간은 283년부터 285년.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
아버지는 프로부스 황제의 근위대장이자 프로부스 사망후 후임황제인 카루스. 태어난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가 즉위 전까지 원로원 의원인데다 근위대장 신분인 점을 볼 때 카리누스 역시 아버지 카루스처럼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아버지가 판노니아 남부의 시르미움 근처에서 배수로 공사 중, 폭동이 일어나 황제로 선포되고 난 이후에 즉위하면서 282년 카이사르에 임명되었다. 이때 형제인 누메리아누스(Numerianus)도 함께 카이사르의 직위를 받았다. 카루스는 이탈리아와 갈리아 지방의 국방을 장남인 카리누스에게 맡겼고, 카리누스는 라인 주둔 군대로 파견되었다.
283년 여름인 8월, 아버지가 베일에 싸인 사건으로 죽자[1], 카리누스는 로마 서부지역의 황제가, 그의 형제 누메리아누스는 동부지역의 황제가 되었다.
2.2. 누메리아누스 암살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로마 제국 서방지역인 게르마니아에 머물고 있던 카리누스는 서방 황제가 된 뒤, 라인 지방에서 콰이족과 전투를 벌인 후 승리했다. 이후 로마로 돌아와 그전 해(283)에 아버지 카루스가 페르시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해 경기를 벌였다(284. 9).284년 11월, 동생이자 공동 황제였던 누메리아누스가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가던 길에서 암살된 채 발견되었다. 그는 주둔지 도착 이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를 찾으러 간 병사들에 의해 가마 안 침상 위에서 칼에 찔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이때 유일하게 황제와 알현을 위해 가마 안으로 출입이 가능했던 아페르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그는 황제를 죽인 범인으로 즉시 체포되었다.
정상적으로는 이 상황에서 형이자 공동 황제였던 카리누스가 이어야 했지만, 동방 주둔군과 장교들은 서방 황제로 있던 카리누스가 악습에 중독된 것이 널리 알려져서 전반적으로 멸시하는 분위기였기에 새로운 인물을 뽑기로 결정되게 된다. 군사 회의에서는 동방 주둔군 장교 중 한 명이자 누메리아누스의 호위 장교인 38살의 디오클레스(Diocles)가 새로운 황제로 지명되었다. 디오클레스는 이름을 디오클레티아누스로 바꿔 군대의 선포로 황제가 되었다. 새로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먼저 아페르에게 자결을 명해 문제를 수습했다.[2] 그리고 동방 주둔군과 새로운 황제는 동방에서 힘을 기르며 준비를 하기 보다는 새로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앞세워 서쪽으로 진격하게 된다.
2.3. 내전과 암살
서방에 머물며 이탈리아 방어임무를 맡고 있던 카리누스는 동방 주둔군이 카루스의 아들이자 누메리아누스의 형제인 자신이 있음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된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지난 1년간 군사적인 부분에서는 인정을 받았으나 크게 인망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285년 봄, 베로나 근방에서는 황제를 참칭한 베네치아의 총독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비누스 율리아누스로 골머리를 앓았다. 카리누스는 즉시 자신을 황제라고 선포한 아우렐리우스 율리아누스를 격퇴했다.
그 직후, 카리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끄는 군대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정벌 길에 나선다. 두 군대는 마르구스 강 계곡에 위치한 모이시아에서 충돌했다. 거기에서 벌어진 전투[3]에서 전력이 한 수 위였던 카리누스는 여러 인사들의[4] 디오클레티아누스로의 전향에도 불구하고 초반에 선전했지만, 이때 어떤 부하가 갑자기 황제 카리누스를 칼로 찔렀다. 이 사람은 자신이 아내가 카리누스에게 유혹을 당했고 이에 분노해 있는 상황이었다. 부하에게 왼쪽 가슴을 칼로 찔린 카리누스는 심장이 관통당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살해자는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로서, 일반 중하급 장교는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관구 총독직(Praetorian Prefect)[5]과 그해의 집정관직을 겸직하고 있었던 중요인사였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포상으로 그 두 직을 유임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한다.[6]
카리누스의 군대는 지도자이자 황제를 잃었기에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자기들의 황제로 받아들였다. 카리누스는 기록말살형을 당해 그의 아내 마그니아 우르비카(Magnia Urbica)와 함께 비문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3. 성격과 사생활 및 평가
카리누스는 로마 제국의 최악의 황제 중 한 명이라고 불리고 있고, 기록말살형을 당한 로마 제국의 공인된 폭군답게 여러 부분에서 그 평이 최악이다. 일단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평을 받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상의 기록에서 카리누스는 인간말종 수준의 폭군이었고, 사생활은 네로, 콤모두스에 버금가는 사치와 변태스러움을 두루 갖춘 암군 그 자체였다.먼저 카리누스는 부드러웠지만 잔인했고, 쾌락에 탐닉했지만 품위가 없었다. 허영심은 대단했지만 대중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아홉 명의 아내와 연달아 결혼했다가 이혼했는데, 그 여자들은 대부분 임신한 상태였다. 게다가 수많은 유부녀들과 불륜을 저질러 명예를 더럽혔다. 또한 아버지가 자신을 보좌하라고 배치한 친구들과 고문관을 추방하거나 사형시키고 가수, 춤꾼, 매춘부 등이 황궁에 넘쳐났다. 또한 그는 한 비서에게는 황제의 서명을 대신하게 했고 자신은 연극, 서커스, 반원형 극장 등 각종 오락과 행사를 후원했다.
이러한 그의 행실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세 때 왜곡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동생인 누메리아누스가 암살된 뒤 병사들이 그를 제쳐두고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추대한 것을 봤을 때, 확실히 악습에 중독되고 인망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당장 카리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이겨가던 와중 세르비아의 모라바 강에서 아내를 능욕당한 부하 손에 심장이 관통해 죽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 여기에 더해 카리누스는 반대파들에게는 죽일 놈 소리를 들었던 이전의 로마 황제들(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카라칼라 등)과 달리, 아버지 카루스가 즉위하기 전부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동료 원로원 의원들에게 인망도 없어 즉위 직후부터 욕을 먹었다고 한 말도 일관된 의견인 터라 쉴드의 여지가 없다는 평이다. 즉, 설령 왜곡되어 최악의 폭군이자 암군으로 욕먹고 있다고 해도, 일말의 쉴드조차 못 받을 정도로 진짜 행실에 문제 있던 황제는 분명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왜곡한 게 맞는다면 카리누스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록을 바꾸기라도 했을텐데, 그러지도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사실 카리누스는 콘스탄티누스 입장에선 부친과 자신, 나아가 자신의 아들들의 권위와 정통성을 위해 카리누스의 악평을 바꿀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당장 카루스와 누메리아누스 사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옹립되었을 때 카리누스에 반기를 든 여러 장군 중 한명이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였고 대제로서는 카리누스의 왜곡을 막아보겠다는 것은 원로원과 디오클레티아누스 쪽까지 제대로 한방 먹이는 악수인 터에 바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담으로 정교회의 성 코즈마스와 성 다미아노스 성인전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두 성인은 유명한 이교도 의학자에게 가서 의술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을 치료했는데, 그러자 수많은 이교도들이 그들을 모함하기 시작했고, 카리누스 황제에게 이들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카리누스는 두 성인들을 소환해 심문했는데, 이때 하느님의 기적이 일어나 카리누스의 온몸이 마비되는 일이 일어났고, 이에 회개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다. 한편 이 두 성인들은 계속해서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리스도교를 전했는데 이에 시기심을 품은 두 성인의 선생인 이교도 의학자는 약초가 자라나는 계절에 함께 약초를 수확하자고 꼬드겨 자신만이 아는 산속 깊숙히 데려갔고, 둘을 돌로 쳐 죽였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이 두 성인의 유해를 수습했는데, 이들의 유해를 보거나 만진 사람들에게도 계속해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 오늘날에도 기념되고 있다고... 다만, 카리누스의 세례유무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기록말살까지 당한 양반이니 기록이 있을 리가...
[1] 사료들에 의하면 그가 머물던 막사에 번개가 떨어져 그곳에 머물던 카루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친위대장이자 사돈인 아리우스 아페르(Arius Aper)의 손에 의해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 혹은 직접 누메리아누스 황제 암살범인 그를 직접 칼로 죽였다고 한다.[3] 영어 위키백과: Battle of the Margus[4] 달마티아 속주 장관이었던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이때 전향했고, 결과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외에도 원로원에서도 카리누스를 싫어했다고 한다.[5] 일반적인 속주(트라키아, 모이시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등)의 상급 행정단위였다. 즉 일반 총독들의 위에 있어, 총독들의 총독이었다.[6] 연산군이 몰락한 가장 큰 이유도 신하의 아내를 마구 건드리는 엄청난 짓을 했고, 피해 여성의 남편들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느니 차라리 왕이고 뭐고 싸우다 죽겠다며 죽을 각오로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화를 자초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