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mponius Bassus 폼포니우스 바수스 | |
출생 | 175년(추정), 로마 제국 이탈리아 |
사망 | 221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신분 | 귀족 |
가족 |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테렌티아누스(아버지) 안니아 파우스티나(아내) 폼포니아 움미디아(딸) 폼포니우스 바수스(259년 집정관)(아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사위) |
경력 | 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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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엘라가발루스 황제에게 아내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빼앗기고, 반역죄로 처형됐다.2. 생애
전체 이름은 미상이다. 아버지는 서기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활동한 장군, 원로원 의원인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테렌티아누스이다.부친의 이름 중 테렌티아누스에서 드러나듯이, 본래 혈연적 본가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평민귀족인 테렌티우스 가문으로, 입양을 통해, 이탈리아의 오래된 플레브스 씨족 가문인 폼포니우스 가문에 편입된 일가의 후손이다. 따라서 로마 귀족 관습상 211년 집정관 폼포니우스 바수스의 이름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인 가이우스라는 추정과 함께, 통상적으로 입양 후 양자의 아들들의 관례처럼 입양 가문의 이름을 사용한 것에서 추정 중인 루키우스, 티투스 중 하나일 확률이 있다는 주장이 공존 중이다.
테렌티우스 가문, 폼포니우스 가문 모두 이탈리아의 오래된 노빌레스로,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공화정 시절부터 원로원에 이름을 올린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이었다. 더해 그의 집안은 당대의 권력가로 유명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테렌티아누스는 테렌티우스 가문 출신이나, 폼포니우스 가문의 피를 이어 받은 이탈리아 귀족이었다. 그는 94년 집정관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118년 집정관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그리고 118년 집정관의 동명이인 아들인 138/143년 집정관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바수스의 후손이었다. 이들은 모두 정규 집정관들이었는데, 바수스의 부친 테렌티아누스는 친족 관계가 불확실해도 여러 추론상 어머니가 폼포니우스 가문 출신일 확률이 높다는 평이 많다.
바수스의 부친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오랜 친구이자 협력자였다. 성년식 후 경력 초기부터 쿠르수스 호노룸을 밞아 나갔는데, 본국 이탈리아에서 재무관 및 조영관을 지냈고, 이탈리아의 지방도시 우르비노에서 관료 직책을 맡았다. 이어 185년경 법무관을 지내며 히스파니아 남쪽 지방인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에서 법적 업무를 맡기 위해 파견됐고, 1년 뒤인 186년 또는 그 다음해인 187년에는 리키아 에트 팜필리아 속주 총독에 올랐다. 이어 187년 ~ 189년에는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이 되었고, 190~192년경에는 로마군 병참과 재무를 책임지는 중책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다섯 황제의 해 기간 동안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보결 집정관에 지명됐다. 하지만 세베루스와는 아주 오랜 친구였고, 우정이 대단했다. 따라서 세베루스가 판노니아의 로마군을 이끌고, 로마 진군을 단행해 이탈리아를 무력으로 장악한 직후, 그가 가장 먼저 취한 것은 바수스의 아버지 테렌티아누스에게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자리를 주면서, 그에게 "황제의 친구" 중 가장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아미쿠스 세베리(세베루스의 친구)" 칭호를 내준 일이었다.
이런 배경처럼 바수스 역시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항상 최고만을 걸었다. 그는 테렌티아누스의 아들 중 장남이었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카라칼라, 게타 형제와도 사이가 완만했다. 더해 그는 젊은 나이에 원로원 의원이 된 이후, 쿠르수스 호노룸을 밞아 나갔다.
그는 211년 집정관에 올랐다. 175년생 또는 175 ~180년생 사이라는 점에서 211년 집정관 당시를 기준으로 많아야 36세였다. 이후 212년에서 217년 사이에는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또는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속주 중 한 곳에서 레가투스로 군복무를 하며 야전사령관을 지냈다. 이후, 미시아 지방의 로마 총독이 되어, 아나톨리아 반도 일대에서의 경력을 쌓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외손자이나, 능력 부족으로 외삼촌 콤모두스에게조차 무능력하고 욕심 많은 바보라고 조롱받으며 찍힌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는 초혼인데다 젊은 폼포니우스 바수스를 사위로 맞이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권력욕이 강했지만, 세베루스 황제에게 겨우 추천받아 집정관을 지냈던 프로쿨루스는 폼포니우스 가문에게 간곡히 청을 넣어, 바수스가 자신의 딸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해주면, 로마 최고 부촌들보다 곱절 이상이 비싼 피시디아의 옛 술라 영지를 공동명의로 해주겠다고 약조했다.
이 제안은 바수스가 프로쿨루스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안니아 파우스티나 소유의 피시디아 영지로 건너가 살아야 한다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폼포니우스 가문은 이에 동의했고, 바수스는 피시디아로 건너가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결혼 후, 옛 술라 영지 안의 호화 대저택에서 살았다. 약속대로 프로쿨루스는 바수스와 자신의 딸이 공동소유로 피시디아 대영지를 증명한 비문을 세웠는데, 이 비문은 현재에도 남아있다.
그는 이곳과 로마를 오고 가면서 원로원 의원 생활을 했는데, 정략혼임에도 부부 사이가 아주 좋았다. 부부는 딸 폼포니아 움미디아(219년생), 아들 폼포니우스 바수스(220년생)를 얻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당시 세베루스 왕조의 존속과 직결된 엘라가발루스 실정 회복이라는 현실 속에서 무참하게 파탄났다. 암군이자 폭군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의 모든 관습을 무참하게 짓밞고, 베스타 여사제 아퀼리아 세베라를 납치해 강제로 범하고 결혼을 한 뒤, 민심 이반 속에서 왕조 붕괴라는 현실에 직면했다. 이에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황제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피를 이은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엘라가발루스와 결혼시켜 이 난국을 이겨내고자 했다. 엘라가발루스 황제 역시 221년 6월 이전, 바수스의 아내 파우스티나의 외모와 몸매를 보고 매료된 터라,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제안을 승낙하고, 아퀼리아 세베라를 친정으로 보낸 뒤, 파우스티나와의 결혼을 공표했다.
이때 엘라가발루스는 그녀를 얻기 위해 경솔한 구실을 꾸며내, 폼포니우스 바수스를 반역죄로 처형하라고 원로원에게 명령하고, 바수스를 재판없이 죽였다. 이 사건은 바수스와 그의 아버지, 형제들이 모두 세베루스 왕조의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모두와 깊은 인연을 맺은 상징 등으로 인해, 가짜 안토니누스로 불리며 정통성상 큰 약점이 있는 엘라가발루스의 약점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급한 불을 껐다는 점에서 신경쓰지 않았다. 엘라가발루스는 이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파우스티나는 슬픔에 젖었는데, 엘라가발루스는 자신의 남자애인 히에로클레스 등과 함께 파우스티나에게 난잡한 행위를 강요하면서, 파우스티나가 바수스를 애도하는 것을 금지하고, 눈물을 보인다면 자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바수스의 죽음은 후일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 안티오키아누스가 이끈 프라이토리아니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옹립을 위해 엘라가발루스와 그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를 죽인 원인 중 하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