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우스 디오 라틴어: Cassius Dio | |
전체이름 | 루키우스 카시우스 디오 ???? Lucius Cassius Dio ???? |
생몰년도 | ? ~ ? |
지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
국가 | 로마 제국 |
종교 | 로마 다신교 |
가족 | 디오 카시우스(조부 혹은 증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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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황제시대~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세베루스 왕조 시대 전체를 관통한 정치인이며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의 증손자[1]다. 업적은 전무하나, 직계조가 디오 카시우스라는 점, 그가 나이, 경력에 비해 너무 빨리 화려한 경력을 연달아 차지한 것 때문에, 동시대 로마 귀족들의 전형적인 예시로 유명하다.
2. 생애
전체 이름은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인 디오 카시우스에서 그 이름 대부분을 따왔다고 한다. 대략적인 전체 이름은 대개의 로마 귀족들처럼 본인의 위대한 조상 루키우스 카시우스 디오 코케이아누스 이름에 할머니 혹은 어머니의 노멘, 코그노멘을 섞은 것으로 추정된다.직계조 디오 카시우스가 보유해, 대대로 물려받은 팔라티누스 언덕 위의 저택 도무스 디오니스를 소유했던 부자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도무스 디오니스에서 살았는데, 이 저택은 이 당시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 최고 부촌인 팔라티누스 언덕에서도 대단한 저택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카시우스 디오가 어느 정도의 부자였는지는 대충 눈치가 갈 것이다.
이 저택 외에도 그는 디오 카시우스의 고향이며 사망지인 비티니아의 나카이아(아나톨리아 반도의 니케아)에 엄청난 크기의 개인 영지가 딸린 초호화 대저택을 가지고 있었고, 디오가 이탈리아에서 많이 머문 "이탈리아 안의 내 거처"로 유명한 카푸아 빌라,
디오가 율리아 마마이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조언에 따라 프라이토리아니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피생활을 한 이탈리아 캄파니아에 있던 최고 수준의 별장, 빌라도 소유했다.[2]
조부 혹은 증조부인 디오 카시우스가 세베루스 왕조 시절 내내 대정치가로 명성이 자자한 배경, 디오 카시우스의 아버지 디오 아프로니우스 때부터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원로원 의석을 세습한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 타고난 부자인 배경 등을 앞세워, 로마 귀족 중 큰 고생없이 명예로운 경력을 아주 어린 나이에 모두 올랐다. 이런 배경 때문에 카시우스 디오는 291년 아주 어린 나이임에도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임명됐다.[3]
너무 어린 나이에 집정관에 오른 까닭에 3년 뒤인, 294년 7월 1일이 돼서야 총독으로 파견됐다고 한다. 이때 그가 임지로 배정받은 곳은 로마 귀족들이 뇌물을 쓰고 온갖 인맥을 동원해도 쉽게 갈 수 없던 아프리카 속주 총독 자리였다. 아프리카 속주 총독직은 제비뽑기를 통해 뽑혔고, 경쟁이 치열해 대기기간이 있던 전례가 많았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경력 대비 경험과 능력이 일천한 그가 좋은 자리에 배정받아 편히 총독 경력을 쌓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 중이다.
294년 7월 1일부터 295년 7월 1일까지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있었는데, 어떤 사건, 사고 없이 카르타고에서 지내다가 로마로 돌아왔다. 이후, 다음해인 296년 2월 18일 로마 시장에 해당되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가 되어 297년까지 재직했다.
막센티우스가 로마와 이탈리아를 통치할 무렵, 가이우스 안니우스 아눌리누스를 포함한 12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각각 함께 각각 40,0000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액을 기부해 로마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 손자라는 추정도 있다.[2]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병사들에게 디오 카시우스는 매우 귀족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미움을 받아, 두번째 집정관에 입후보만 해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공공연하게 받았다. 그래서 228년 울피아누스 암살 직후, 디오를 본인의 229년 동료 집정관에 지명해 취임시킨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는 그에게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했고, 율리아 마마이아도 아들과 자신의 안위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중진 디오를 살리기 위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디오는 황제 모자에게 존중받고 조력자로 인정받음에도, 자신이 황제 모자에게 이용 당하면서 권력욕에 양심을 판 귀족으로 병사들에게 죽을 위기가 된 것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이에 그는 나이가 들면서 앓게 된 통풍과 관절염을 핑계로 캄파니아의 고급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황제 모자는 은둔 중인 디오를 로마로 오게 명령한 뒤, 생애 두 번째 집정관 취임 선서를 하게 했다. 따라서 디오를 노린 프라이토리아니의 암살 시도가 격화되는데, 이에 디오는 정계은퇴 후 곧바로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 비티니아 고향집으로 도망친다.[3] 그와 함께 취임한 집정관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측근 내지 그의 도움으로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이다. 카시우스 디오와 달리 그는 판노니아 야전 사령관을 오래 지냈고, 후일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일대기와 업적을 기린 책을 저술했는데 이게 문제가 되어 원로원에서 제명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