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헤라클리아누스 (Heraclianus) |
출생 | 미상 |
사망 | 413년 3월 7일 |
직위 | 마기스테르 밀리툼, 집정관 |
반란 대상 | 호노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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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반란자. 호노리우스의 최측근이었으나 413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2. 생애
초기 생애나 경력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호노리우스의 측근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408년 8월 22일 12년간 서로마를 이끌었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를 직접 처형했으며, 스틸리코의 몰락을 주도한 올림피우스에 의해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보내졌다. 409년 프리스쿠스 아탈루스가 알라리크에 의해 로마의 황제로 추대되자, 그는 이에 불복하여 로마로 향하던 곡물 공급을 차단했으며, 라벤나에 있는 호노리우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호노리우스는 이 덕분에 버틸 수 있었고, 곡물 공급이 끊겨서 기아의 기미가 감돌아 민심이 흉흉해지는 바람에 아탈루스의 입지는 악화되었다. 결국 알라리크는 아탈루스를 폐위한 뒤, 호노리우스와 재협상을 하였으나, 호노리우스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격분하여 로마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수많은 난민이 아프리카로 피신했는데, 성 제롬은 헤라클리아누스가 이들을 학대했다고 비난했다.
한편, 호노리우스는 헤라클리아누스에게 도나투스파를 단속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411년 카르타고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고, 공의회는 열띤 논쟁 끝에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엄격히 처벌하기로 결의했다. 호노리우스 궁정은 그의 활약에 만족하여 413년 집정관 직을 수여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아누스는 돌연 반란을 일으켰다. 호노리우스로부터 두터운 총애를 받던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헤라클리아누스가 찬탈을 꾀했다는 주장이 당대부터 강하게 제기되었지만, 호노리우스가 훗날 그를 규탄할 때 '찬탈자'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국가의 적'이라는 표현을 쓴 점, 화폐 주조소가 있는 카르타고를 다스리고 있었는데도 주화를 발행하지 않고 황제를 칭했다는 문헌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는 없는 점을 볼 때 찬탈을 꾀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헤라클리아누스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기에 반기를 들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라벤나 궁정에서는 스틸리코의 부관이었던 콘스탄티우스 3세의 위상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마기스테르 밀리툼에 취임하였고, 412년 아프리카 교구에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게다가 과거에 헤라클리아누스를 후원했던 올림피우스가 스틸리코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에 원한을 품었던 콘스탄티우스의 지시로 몰매를 맞아 죽었다. 헤라클리아누스는 스틸리코를 직접 처형했기 때문에 콘스탄티우스의 이러한 행동에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마침 413년 콘스탄티우스가 갈리아에 가 있었기에, 그로서는 비어있는 라벤나를 접수하고 콘스탄티우스를 쓰러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413년 초, 헤라클리아누스는 식량을 실은 수송선들에 병사들을 숨겨놓고 라벤나로 출진했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수송선이 3,700척에 달했다고 한다. 헤라클리아누스는 로마에 상륙한 뒤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라벤나로 행진했다. 그러나 도중에 진압군에게 참패당했고, 카르타고로 도망가다가 3월 7일 에데스 메모리에에서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