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Battle of Manzikert(Battle of Malazgirt)현재 터키 동부 말라즈기르트에서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투. 17년의 시차를 두고 두 번의 전투가 있었으며, 2차 전투가 유명하다. 후자의 결과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 지역이 튀르크 무슬림의 수중에 떨어지며 정치,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대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2. 제1차 만지케르트 전투
후술하는 2차 전투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로, 로마-튀르크 전쟁의 일부이다.2.1. 배경
1048년의 카페트론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이 판정승하였으나,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 지방이 큰 피해를 입었고 유럽에서는 로마-페체네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양국은 포로교환 및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스크 수리 등 화해의 제스쳐를 취하며 평화조약에 이르는 듯 하였다.그러나 셀주크 제국이 파견한 사신이 거만한 태도로 공격적인 언사를 일삼자 평화는 요원한 일이 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다시 아르메니아 일대의 전쟁을 준비했다. 투으룰 술탄 역시 다시 전쟁을 결정하였고, 1054년에는 아예 친정하였다. 결국 1040년대 양 제국의 우발적인 충돌은 1050년대에 들어 전면전으로 격화하였다.
2.2. 전투
콘스탄티노스 9세의 전쟁 준비 덕에, 만지케르트시는 바실리오스 아포카피스(Basil Apokapes/Βασίλειος Ἀποκάπης)의 지휘 아래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후의 일은 튀르크 측과 동로마 측의 기록이 차이를 보인다.투으룰 술탄이 말라즈기르트를 약탈 한다음,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내부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침공을 중지하고 철수하였다.
튀르크 측 기록
튀르크 측 기록
튀르크군이 만치케르트시를 30여 일간 포위·공성하였으며 비틀리스에서 노획한 거대 공성무기[1]까지 동원하여 만지케르트 시의 성벽에 금이 가게 했으나, 한 병사가 몰래 접근하여 가연물질이 담긴 병을 던져 불태웠다. 이후 알칸이라는 셀주크 측 지휘관이 야간에 기습하였으나 아포카피스의 역습으로 이마저 실패하였고, 술탄은 철수하였다.
동로마 측 기록
동로마 측 기록
이듬해인 1055년에 있었던 투으룰의 바그다드 원정을 고려해서 종합해본다면 셀주크 군이 반 호수 북안의 통로로 진군하여 만지케르트를 포위하고 그 주변지역을 침략·약탈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만지케르트 공략에는 실패하였고 술탄은 신속한 철수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2.3. 영향
동로마 제국은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셀주크 군이 남기고 간 튀르크 유목민들을 쫓아내지는 못했다. 많게는 일개 부족이 만 명 단위인 튀르크 부족들은 동로마령 아르메니아 일대에 정착하여 노략질을 일삼았고, 이를 셀주크 제국의 공격으로 오해(?)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아르메니아의 동로마군은 군축까지 이어진 차에 60년대 셀주크 제국이 재침공하자 무너지고 만다.3. 제2차 만지케르트 전투
제2차 만지케르트 전투 영어: The Battle of Manzikert | ||
시기 | 서기 1071년 8월 26일 | |
장소 | 동로마 제국 아르메니아 지방 바스푸라카니아의 마나즈케르트(Մանազկերտ/Manazkert) 인근 (현 터키 무슈 주 말라즈기르트(Malazgirt) 인근) | |
원인 | 셀주크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협상 결렬.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 셀주크 제국 |
지휘관 | 로마노스 4세◎ 대(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테오도로스 알야티스 | 알프 아르슬란 아프신 베이 아르투크 베이 쿠탈므쉬오을루 쉴레이만[2] |
병력 | 총원: 40,000 ~ 70,000명[3] | 총원: 20,000 ~ 30,000명 |
피해 | 전사자: 8,000명 포로: 4,000명 탈주: 20,000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대패. 로마노스 4세를 사로잡은 셀주크 제국의 결정적인 승리 | |
영향 | 두카스 왕조의 몰락과 콤니노스 왕조의 개창 십자군 원정의 시작 아나톨리아의 튀르크화의 시작 |
3.1. 배경
알프 아르슬란의 원정
3.1.1. 기나긴 전쟁
로마와 튀르크의 전쟁은 콘스탄티노스 9세의 치세인 10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트란스옥시아나와 이란 지역을 모두 제패한 셀주크 제국은 공격의 방향을 아르메니아 - 현재의 터키 동부 - 지역으로 돌렸는데 당시 그 지역의 토후국을 공격하던 튀르크계 제후가 우연히 동로마 제국의 바스푸라칸 테마를 공격·약탈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튀르크인들은 부유한 동로마 제국령을 넘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진 강대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은 1048년에 셀주크 제국의 제후들이 2만여의 병력을 이끌고 침입하자 간단히 궤멸시켜버렸으며, 그해 9월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입하자 아르메니아 일대의 분견군을 중심으로 테마군과 동맹인 조지아 왕국의 병력을 규합해 카페트론 전투에서 튀르크군을 격퇴했다. 비록 주 전장이 된 아르메니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으나 후일의 재앙에 비하면 선전한 것이었다.이후 전쟁이 격화되고 셀주크 측이 재차 침공을 지속하여 1차 만치케르트 전투(1054)가 벌어졌으나 동로마인들은 튀르크인들을 끝내 격퇴해내었다. 동로마 제국의 방위력이 굳건함을 확인한 셀주크 제국은 관심을 이라크 방향으로 돌렸고, 동로마 제국의 관심은 카페트론 전투(1048)와 1차 만치케르트 전투(1054) 사이에 있었던 대(對) 페체네그 전쟁의 불완전한 결말로 인해 주로 서쪽으로 옮겨갔으므로 양 제국 간의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11세기 중반을 넘어서자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셀주크 제국이 이라크 지역의 부와이 왕조마저 쓰러트리고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반면, 동로마 제국은 테오도라 여제를 마지막으로 마케도니아 왕조의 지배가 종식되고 쿠데타가 성공하여 이사키오스 1세가 즉위하는 등 정치 혼란을 겪었다(1057). 이후 정권을 이양받아 두카스 왕조의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즉위하였으나(1059), 당대의 동로마 제국은 쿠데타의 여파로 동부일대의 방위력이 훼손 되어있었고 군사 귀족들도 민간으로부터 경계받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수십 년간 루스, 파티마, 노르만, 페체네그, 튀르크 등 사방의 적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면서 군비가 크게 확장되고 재정이 악화 되면서 국력 소모도 극심한 상황이었다.[4]
이에 동로마 제국은 국방비를 비롯한 세출을 줄이고[5] 줄어든 세입에 맞추어 재정재건을 위해 노력하며 비축금을 늘려갔다. 그러는 와중 외부의 위협은 심화되었다. 일단 노르만족의 공격으로 인해 남이탈리아가 함몰되었고, 일리리아 지역의 보호령들이 떨어져 나갔으며, 북변의 도나우 강 국경을 넘어서 유목민들이 공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약체화 된 상태로 아르메니아 일대를 방위하던 동방 테마의 군대들은 튀르크 유목민들의 약탈에 노출되어있던 차에 중앙의 지원까지 줄어들자 심각한 사기저하와 전투력 감소를 격게 되었다.
그러고 여기에 동로마 정부의 오판이 겹쳤다. 치세 초기 콘스탄티노스 10세는 군축에도 불구, 동부의 군대들이 튀르크인들을 격퇴해내는 것을 보고서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결과를 낳아서, 1064년에는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 지나가던[6]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군을 동로마 측이 공격하다가 반격받아 아르메니아의 중심도시인 아니(Անի)시가 함락되어 수만 명의 시민들이 학살되는 일이 일어났다.
아니는 옛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만큼 잘 갖춰진 성벽으로 보호받는 요새도시였고, 동로마령 대 아르메니아(Մեծ Հայք) 방위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무너지자 동로마 제국 동부국경에 큰 돌출부가 뚫리게 되었고, 해당 지역의 방위 책임자들도 도주하면서 방위에 공백이 발생하였다. 그 틈을 타고 튀르크 유목민들은 동로마령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지역으로 둑터진 물의 기세로 쏟아져 들어왔다.
셀주크 제국 측은 주변을 약탈하고 침범하는 튀르크 유목민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군사력 행사에 소극적인 상태로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0세마저 1065년 말부터 와병하게 되었다. 결국 상황은 악화되어 1067년에는 아나톨리아의 입구인 멜리티니 계곡의 유프라테스 방어선이 무너져 동(東) 아나톨리아가 노출, 동년 카파도키아의 대도시이자 하르시아논(Χαρσιανόν) 테마의 중심지인 케사리아(Καισάρεια)시가 함락되었다. 튀르크인들은 아나톨리아에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킬리키아와 제국령 시리아까지 종횡무진으로 침탈했고, 이 시기에 제국령 아르메니아는 사실상 튀르크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제국이 침략받던 1067년, 와병 중이던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죽었다. 연이은 국방위기에 민간관료층과 두카스 황실의 입지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특히 제국 동부의 중심도시인 케사리아의 함락은 제국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에 결국 반(反) 두카스 파와 재무장 파가 동로마 제국의 여론을 주도하게 되었다.
3.1.2. 동로마 측의 사정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죽고 아들인 미하일 7세가 황제였으나 아직 어린 십대였다. 때문에 모친인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가 통치를 맡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안나 달라시니[7] 등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이 찾아가 군재를 갖춘 군인과 재혼하여 제국이 처한 상황을 타개할 강력한 군사정권의 수립을 권했다. 에브도키아 역시 제국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했으므로 죽은 남편이 아들 미하일 7세의 제위를 지키기 위해 시켰던 재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마저 어기기로 했다. 재혼 대상 후보로 아나톨리아의 군사 귀족으로 유능한 장군인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와 로마노스 디오예니스 등의 명망있는 귀족들이 올랐다. 결국 원로원, 총대주교, 부제 요안니스 두카스 그리고 아들 미하일 7세까지 설득한 끝에 로마노스 디오예니스와 에브도키아의 재혼이 이루어져 로마노스 4세가 즉위하였다.(1068년)로마노스 4세가 즉위한 1068년, 튀르크 유목민들은 이미 동로마 제국령 아르메니아, 시리아, 동부 아나톨리아를 넘나들고 있었고 셀주크군도 동부 아나톨리아의 니오 케사리아(Νεοκαισάρεια) 일대를 침공하고 있었다. 수세기 동안 제국을 지탱하던 테마 제도는 형해화 되어 최전선을 제외한 테마군은 사실상 2~3선급의 전력으로 약해진 상태였다. 적 또한 과거 테마군이 상대했던 적이 아닌 약탈과 기동력을 장기로하는 유목민들이었으며, 이들을 상대로 버텨왔던 동부국경의 테마군과 분견군은 와해 된 상태에 놓여있었다. 결국 두카스 가문을 필두로 민간관료층이 필사적으로 줄였던 군비는 다시 확장되기 시작하였고, 동로마 제국으로 외국의 용병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3.1.2.1. 로마노스 4세
1068년, 군인 출신답게 황제는 바로 원정을 계획했다. 중앙군이 소집되고 노르만, 루스, 튀르크 등 이민족 용병이 대거 가담하여 원정군이 꾸려졌다. 아나톨리아를 횡단한 동로마군은 튀르크군을 추격한 끝에 유프라테스 상류 인근에서 섬멸하였고,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킬리키아를 지나 시리아의 알레포 토후국까지 공격하였다. 한계점도 있었지만 튀르크 유목민들을 쫓아내고 유프라테스 방어선을 수복하는 원정의 목적을 마친 황제는 일단 수도로 귀환하였다.1069년에도 원정은 이어졌다. 아나톨리콘 테마의 중심지인 이코니온까지 튀르크군이 침공하자 다시 동방원정을 떠난 황제는 이번엔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의 경계인 유프라테스 방어선을 넘었다. 일전을 거듭한 끝에 만치케르트, 클리앗 등의 요새가 위치한 반 호수(Lake Van) 인근까지 수복한 황제는 수비군을 배치하고 수도로 귀환하였으나, 황제가 자리를 비우자 튀르크인들에 의해 곧 수비군은 무너져버렸다.
1070년, 재위 3년차에 접어든 로마노스 4세는 1년 여간 수도에 머물면서 다음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위태롭게 버티던 바리(Bari)의 남이탈리아 총독부에 지원을 보내도 보고 동부에 마누일 콤니노스[8]를 지휘관으로 하는 분견군을 원정시켜 보기도 하였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이전의 원정들도 결과적으로 별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상황에, 비상사태에 전권을 몰아쥔 황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강압적인 데다 무거운 세금을 거두는 군인 출신 황제에 대한 불만은 점점 높아져 갔다. 이에 황제는 초조함 때문인지 점점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결국 효과적인 처방으로서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갈망하며 대원정을 준비했다.
결국 만지케르트 대전 직전인 4월 15일 바리가 함락되며 로마의 고향에서 로마는 영원히 지배권을 상실하게 된다.
3.2. 셀주크 측의 사정
실상 셀주크 제국 측은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긴 하였어도 멸망시킬 의도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셀주크 제국은 셀주크 가문원들이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듭하면서 튀르크계 씨족, 이란과 이라크의 토착세력, 이슬람 학자들 위에 올라탄 형태였고, 그 권위는 동로마 황제나 칼리프 같은 타국의 군주들에 비해 약한 편이었다. 실제로 알프 아르슬란은 휘하의 장군이 포로로 잡힌 마누일 콤니노스를 풀어주거나 동로마 황제와 동맹을 맺는 것도 통제하지 못했고, 로마노스 4세를 경계하면서도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9]3.3. 준비
로마노스는 주력 테마병에 프랑크, 노르만, 불가르, 바랑기안 가드, 조지아군, 아르메니아 군으로 이루어진 혼성부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전진했다. 전진하는 과정에서 일부 용병들이 통제를 벗어나 약탈을 하면서 저항을 받아 조금씩 병력이 소모되었고 로마노스는 자신의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전진시키기로 했다. 요세프 타르하니오티스는 정규군, 바랑인 친위대, 프랑크와 페체네그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클리아트로 진군했고, 로마노스는 나머지 병력[10]을 이끌고 만지케르트로 진군하였다.진군을 시작하던 때에 7만에 가깝던 병력은 많이 줄었고 그나마도 둘로 나뉘어 각 군은 2만 이하의 병력이 되었다. 그리고 알레포에서 대기하던 아르슬란의 3만 기병은 로마노스의 위치를 정찰한 뒤 분리된 로마노스의 본대를 덮쳤다.[11]
3.4. 전투
만지케르트 성채 (말라즈기르트 칼레시)
아르슬란은 8월 23일, 교전에 앞서 흰옷을 입고 나와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선두에 서겠다며 연설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로마노스의 본대는 분리된 타르하니이오티스가 철군했다는 것을 모른 채 만치케르트를 향해 진격해 갔다. 로마노스는 만지케르트는 손쉽게 손에 넣었으나 셀주크인들은 로마노스를 향해 접근해왔다.
만치케르트는 남쪽에 호수가 있는 평야지대로 기병의 운용에 적합했다. 셀주크 군은 동로마 군의 군량 조달 부대를 포착해 이를 격파하면서 개가를 올렸다.
8월 25일, 로마노스는 셀주크 측에게서 평화협상을 제안받았으나 소아시아 전체를 가로질러 오는 동안 소모된 전비나 피해를 봤을 때 여기서는 군사행동 외에 해결책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결의한다. 또한 미하일 아탈리아티스에 따르면, 로마노스는 알프 아르슬란의 군대 중 상당수가 만지케르트에 도착하지 않았던 것으로 오인하여 튀르크인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전투 진행도
8월 26일, 로마노스는 포진을 완료하고 셀주크 군을 향해 전진했다. 좌익을 테마병이 맡고 우익을 아르메니아 기병, 테마병 혼성 군이 맡았으며 중앙에는 로마노스의 본진과 근위병, 중앙 테마병이 배치되었고 후방의 예비병은 두카스가 지휘하는 노르만과 게르만 병이 맡았다. 그런데 두카스가 로마노스 황제의 정적이라 그에게 중요한 병력을 맡겨도 될지가 의문이었는데 이게 적중해 버렸다.
동로마 군은 셀주크 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으나 셀주크 군은 전통적인 스웜 전술로 제국군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중앙은 그러면서 서서히 후진하는데 양익은 전진해서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중앙군은 스웜 전술의 피해를 버티며 전진해 비어있는 아르슬란 본진까지 진출했지만 양익은 셀주크 궁기병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고 거의 궤주하고 있었다.
일몰이 다가오자 로마노스는 후퇴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황제를 보호해야 할 후방의 두카스 군이 그냥 후퇴해 버리면서 중앙군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셀주크는 지금껏 아껴온 중기병을 집중 투입해 동로마군을 유린했다.
동로마군은 '아르메니아의 배신으로 황제가 죽었다'는 함성에 넘어가 우익이 궤멸되었고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좌익도 무너졌다. 로마노스 황제의 친위대는 셀주크 군에게 포위되어 결국 황제가 포로가 되었다.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는 아르슬란에게 포로로 끌려갔는데 아르슬란은 처음에는 그 너덜너덜한 먼지투성이 남자가 황제인지를 믿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명한 대화가 오고간다.
알프 아르슬란: 그대가 나를 포로로 잡았다면 어떻게 하겠소?
로마노스: 아마 그대를 죽이거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겠지.
알프 아르슬란: 나는 그보다 더 심한 짓을 할 생각이오. 그대를 풀어주지.
로마노스: 아마 그대를 죽이거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겠지.
알프 아르슬란: 나는 그보다 더 심한 짓을 할 생각이오. 그대를 풀어주지.
아르슬란은 그를 1주일간 억류해두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제시했으며 몸값으로 금화 1천만을 요구했지만 아무튼 로마노스를 풀어주었다.
3.5. 결과
로마노스는 귀환 후에 두카스와의 정쟁과 내전에서 패했다. 이 전투로 동로마는 셀주크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이는 다시 십자군으로 이어졌다.장기적인 관점에서 만지케르트 전투는 동로마 제국의 파국을 알리는 끝의 시작이었지만 의외로 그 전투 하나로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의 파워 밸런스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다만 황제와 두카스의 내전은 셀주크에게 아나톨리아를 내주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게 가장 결정적인 재앙이 되었다.
3.6. 영향
만지케르트 전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양대 사건으로 중시되어 왔다.특히 안나 콤니니가 이 사건을 언급한 것이 유명하다.
제국의 운명은 썰물처럼 무너져 내렸다. 동방에서 제국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고 튀르크는 영역을 확대했다. 흑해와 에게해, 지중해와 킬리키아에서 이집트까지 튀르크는 제국의 지배권을 얻어내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전멸했다는 부대가 몇달 뒤에 다른 곳에서 활약하는 게 보이는 걸 보면 동로마군이 입은 실질적인 피해는 의외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는 분석이 더 많다. 그러나 실질적인 피해는 얼마 안되어도, 황제가 적군에게 사로잡혔다는 것 자체가 당시 동로마군의 규율이 개판이였다는 것을 암시하며, 로마노스 4세가 사로잡혀서 미하일 7세가 즉위해 아나톨리아를 셀주크에게 떠먹여줬으니...
또한 동로마군은 지난 세기의 강화된 전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강력한 군대가 아니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동로마 제국은 그 뒤로도 계속되는 내전으로 약화되었고, 양면전쟁 상태를 피하기 위해 불렀던 십자군은 잠시나마 이익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제국을 붕괴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3.7. 여담
2018년 터키의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은 2023, 2053, 2071년 발전 과제를 제시하였다. 각각 공화국 수립 100주년, 이스탄불 정복 600주년, 만지케르트 전투 1000주년을 기리는 것이라 한다. 이듬해인 2019년 이스탄불에 세워진 차믈라자 모스크의 첨탑 역시 만지케르트 전투를 기리기 위해 107.1m 높이로 지어졌다.앙상블 스튜디오에서 개발하고 마이크로소프트 게임 스튜디오에서 유통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컨커러의 "역사적 전투" 캠페인에서 1071년에 치러진 제2차 만치케르트 전투가 묘사되어있다. 이 때는 화약이 발명되기 전이라 연금술을 연구하더라도 화약을 사용하는 유닛을 생산할 수 없고[12] 주민이 없는 대신[13] 항복한 진영에서 자원을 공물로 바치므로 그 자원을 이용하여 병력을 양성하면 된다.
4. 말라즈기르트 전투(1915년)
말라즈기르트 전투 (Malazgirt Muharebesi) | ||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시기 | ||
1915년 7월 10일 ~ 7월 26일 | ||
장소 | ||
오스만제국 말라즈기르트(만지케르트) 부근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러시아 제국| ]]|
지휘관 | [[틀:깃발| | ]][[틀:깃발| ]][[니콜라이 유데니치|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 압뒬케림 파샤
병력 | 22,000명 | 40,000명 |
피해 | 10,000명 | 6,000명 |
결과 | ||
오스만 제국의 승리 |
튀르키예어: Malazgirt Muharebesi
러시아어: Битва при Манцикерте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러시아 제국군이 말라즈기르트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무리하게 서쪽으로 진격하여 러시아군의 3배에 달하는 압뒬케림 파샤의 오스만 제국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1] 발리스타였다는 설도 있다[2] 훗날 셀주크 제국에서 독립하여 룸 술탄국을 세운다.[3] 다만 후술하듯 요세프 타르하니오티스가 이끄는 군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실제 교전에 참여한 군사는 20,000명으로 추산된다[4] 재정악화의 조짐은 이미 콘스탄티노스 9세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었다. 정부의 비축금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기축금화의 순도 역시 1040년대까지 금 9할을 유지하다가 50년대들어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5] 전근대 국가의 특징상 군비의 비중이 높은 건 일반적이지만, 동로마 제국은 이미 1025년 즈음부터 전체 예산의 7할을 국방에 때려박았다(...).[6] 이러한 국경통과 문제로 인한 전쟁이 이미 1048년경에도 일어났음을 생각해보면, 동로마령 아르메니아가 대단한 요충지이고 국방소요가 다대한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헌데 그런 지역을 더 강해진 적으로부터 약화된 국방력으로 지키려 했으니...[7] 알렉시오스 1세의 모친이다.[8] 알렉시오스 1세의 큰형이다.[9] 실제로는 셀주크군과 제후들의 군대 말고도 수만 단위의 튀르크 유목민들이 동로마 제국령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통제되지 않는 공격은 셀주크 제국 측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는게 통설이지만, 동로마 제국 측은 셀주크군 몇몇을 제외하곤 거의 구별하지 못했고 이는 양국 군주 간의 협상 결렬을 낳았다. 실제 기록상으로도 셀주크 정규군과 튀르크 유목민의 공격은 구별하기 어렵다.[10] 따라서 이 병력은 중앙군보다는 향병의 비중이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11] 이슬람측 기록에 따르면 알프 아르슬란이 요세프 타르하니오티스의 분견대를 공격해 승리했다고 하나, 로마의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미하일 아탈리아티스의 기록에 따르면 요세프 타르하니오티스는 알프 아르슬란의 군대가 접근해 오자 별다른 교전 없이 철수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12] 대신 궁수는 불화살을 쏠 수 있고 어나저 투석기와 트레뷰셋 투석기는 불덩어리를 발사할 수 있다.[13] 갈라티아 정복 후 수도사로 전향하면 되는데 비잔틴 육군은 이단이 연구되어 있어 전향이 되면 바로 죽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