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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9 22:14:04

알프 아르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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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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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셀주크 제국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
آلپ ارسلان
파일:Alp_Arslan_on_throne_Majma_al-Tawarikh_by_Hafiz_Abru_(cropped).png
본명 아즈달루딘 아부 슈자 알프 아르슬란 마흐무드
عضدالدین ابوشجاع آلپ ارسلان محمد
출생 1029년 1월 20일
사망 1072년 11월 24일 (향년 43세)
투르키스탄 아무다리야
재위 셀주크 제국 술탄
1063년 9월 4일 ~ 1072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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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부모 아버지 차으르 베이
배우자 사파리야 카툰
아카 카툰
샤 카툰
자녀 말리크샤 1세, 투투쉬 1세 등 }}}}}}}}}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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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주크 제국 2대 술탄. 초대 술탄인 토그릴 1세의 동생 차으르의 아들이며 셀주크 왕조의 창시자 셀주크의 증손자이다.

2. 생애

1029년 1월 20일 셀주크 제국 초대 술탄 토그릴 1세의 동생으로 호라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차으르 베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아버지가 호라산에 남아있는 동안 토그릴 1세의 이라크 원정에 동행했다. 호라산으로 귀환한 뒤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 행정을 맡았다. 이때 차으르는 그에게 셀주크 제국 최고의 재상으로 손꼽히는 니잠 알 물크를 소개했다.

1059년 차으르가 사망한 뒤 호라산 총독으로 부임했다. 1063년 토그릴 1세가 자신의 남동생 쉴레이만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레이의 총독 알쿤두리를 섭정으로 삼자, 그는 자신이야말로 술탄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레이로 진군했다. 양군이 담한에 대치했을 때, 튀르크 장병 대다수가 그에게 귀순했다. 이에 쉴레이만과 알쿤두리는 그를 이길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술탁 직위를 양도했다. 그의 삼촌이자 토그릴 1세의 숙부 아르슬란의 아들인 쿠탈미쉬가 반발했지만, 알프 아르슬란은 1064년 4월 27일 쿠탈미쉬를 물리치고 아무다리야 강에서 티그리스 강까지 이르는 셀주크 제국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이후 니잠 알 물크의 권고에 따라 각지의 대표자들을 불러모아서 자신의 아들 말리크샤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해 차후에 분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했다. 뒤이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카파도키아의 주도인 카이사리야 마자카를 공략했다. 1068년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뒤 조지아 왕국으로 쳐들어가 요새화된 도시인 아할칼라키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조지아 왕 바그라트 4세가 도시를 구하고자 출진했지만 패배했고, 셀주크 제국에게 공물을 바치고 술탄을 주군으로 받들겠다는 조건의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조지아를 떠나기 전에 트빌리시와 루스타비 요새를 조지아의 오랜 적수인 아란의 샤다디드 왕조에게 넘겼다.

1068년, 알프 아르슬란은 시리아 지역으로 진군했다. 그런데 그의 부하가 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아나톨리아로 진군했다. 마침 그곳에서 군대를 이끌고 경계중이던 로마군과 접전을 벌였다. 총 3번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국 로마군이 승리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4세는 아르메니아로 대군을 파견했다. 아프 아르슬란은 분쟁을 평화적으로 종결시키려 했지만, 이 참에 튀르크인들을 꺾어놓고 싶었던 로마누스는 거부했다. 그리하여 양자는 1071년 8월 26일 아르메니아 반 호수 북쪽 무라트 강변의 만치케르트에서 격돌했다.

만치케르트 전투는 동로마 제국 최악의 패배 중 하나였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전투 도중 휘하 부대를 이끌고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사기가 급락한 동로마군은 전사자 8,000명, 포로 4,000명, 탈주 20,000명에 이르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로마노스 4세는 생포되었다. 아르슬란은 밧줄에 양손이 묶인 로마노스 4세를 땅바닥에 눕힌 뒤 그의 목을 밟는 의식을 벌였다. 이후 황제를 일으켜 세우고 정중하게 대하면서, 평화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이때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만일 우리의 처지가 반대라면 그대는 어찌하겠소, 가령 내가 포로로 잡혔다면?"
"죽였거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거리에서 그대를 조리돌림 했겠지."
"그렇소? 난 그대에게 더 큰 벌을 내릴 생각이오. 용서할 테니, 풀어주겠소."
여기까지 보면 자비로운 처사라 생각하겠지만, 로마의 황제 자리는 고대 로마 시대든 동로마 시대든 능력과 인기를 동반한다면 누구든 찬탈할 수 있는 자리였다.[1] 그리고 보통 폐위된 황제들은 거세당하거나 눈알이 뽑힌 채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거지꼴로 평생을 유폐당한 채 살아야 했다…그걸 생각하면 아르슬란은 의도적이었을지는 모르지만,[2] 결과적으로 로마누스에게 무척이나 가혹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그가 석방된 후 이듬해인 1072년, 로마누스 4세는 권력을 찬탈당하고 눈을 뽑힌 채 동로마에서 쫒겨나 실의 속에서 사망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만치케르트 이후 소아시아의 서쪽 대부분을 정복했다. 1072년 11월 20일, 조상들의 땅인 투르키스탄[3]을 정복하던 도중 아무다리야 강 길목에 자리 잡은 성채를 공략했다. 이때 투항한 성주 유수프 알화레즈미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유수프가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단검을 뽑아들어 달려들었다. 이때 아르슬란은 큰 실책을 저질렀다. 당대 최고의 궁수로서 명성을 떨치던 그가 스스로를 과신한 나머지 달려드는 유수프를 직접 활로 쏴죽이겠다며 근위병들을 저지한 것이다.

그는 활을 당겼으나 발을 헛디딛는 바람에 화살이 유수프를 빗나가버렸고, 급히 검을 빼서 반격하려 했지만 유수프가 재빨리 달려들어 그의 가슴에 단검을 꽂았다. 그 후 의사의 극진한 치료를 받았지만 상처가 악화되면서 결국 사망했다. 아르슬란은 죽기 전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곁에 있던 아들 말리크샤 1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아! 나의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위대한 전사들에 둘러싸여 밤낮으로 그들의 경호를 받았어야 했다. 나는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허락했어야 했다. 나는 스스로 지키려 하지 말고 내 용기가 분별력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받았다. 나는 그 경고를 잊어버렸고, 여기 누워서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구나. 네가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배운 교훈을 잘 기억하고, 네 허영심이 네 분별력을 넘어서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그는 피습 사건으로부터 4일 후인 1072년 11월 24일 사망했다. 향년 43세. 그를 살해한 유수프는 근위병들에게 처단되었고, 시신은 갈기갈기 찢겨져서 길바닥에 뿌려졌다. 아르슬란의 유해는 메르프로 옮겨져 아버지 차으르 곁에 안장되었다. 사후 이전부터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말리크샤 1세가 신임 술탄에 즉위했다.

3. 기타



[1] 로마 황제는 어디까지나 '제1시민'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황제와는 그 개념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황제 혈통이 아니더라도 출중한 능력과 많은 지지를 얻으면 시민들 중 누구라도 황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는 얘기. 실제로도 비천한 가문 출신이거나 非라틴, 非그리스 계열의 속주민이 군대와 시민의 지지 속에 로마 황제에 오른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자세한 내용은 황제 문서 참조.[2] 당시 로마누스와 배상금까지 협상하여 곱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아마도 로마누스가 복위하고 약속을 지키면 배상금을 받을 수 있고, 로마누스 혹은 찬탈자가 배상을 거부하면 대의 명분을 얻을 수 있으니, 어느쪽이든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3] 튀르크족의 땅이란 뜻으로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