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주크 술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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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셀주크 제국 술탄 토그릴 3세 طغرل سوم | |||||
본명 | 루큰 알 둔야 왈딘 토그릴 رکن الدنیا والدین طغرل الثالث | ||||
출생 | 1169년 | ||||
사망 | 1194년 | ||||
재위 | 셀주크 제국 술탄 | ||||
1176년 ~ 119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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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주크 제국 마지막 술탄.2. 생애
셀주크 술탄 아르슬란샤의 아들로, 117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제르바이잔과 아란의 아미르인 무함마드 자한 팔라반에 의해 하마단에서 새 술탄에 옹립되었다. 당시 7살이었던 그는 별다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팔라반이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정적이 될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아르슬란샤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잔혹했지만, 능력만큼은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란의 경영권을 아들 누스라트 알딘 아부 바크르에게 맡기고 자신은 하마단으로 이동한 뒤 셀주크 제국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우선 허수아비인 술탄을 인정하지 않는 아미르들을 모조리 진압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맘루크들을 요직에 임명하고 여러 지역이나 마을을 분배했으며, 조지아 왕국과 호라즘 샤 테키쉬와 평화 협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을 종식했다. 또한 흐트러졌던 정부 체게를 재편하고 치안을 개선했으며, 안정적인 세금 수입 확보에 진력했다. 이렇듯 팔라딘이 12년간 집권하는 동안 내치와 외정에서 성과를 거두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셀주크 제국은 안정을 찾아갔고, 칼리파 알 무스타디와 알 나시르는 셀주크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러던 1186년, 팔라반이 사망했다. 그는 네 아들들을 아제르바이잔과 아란, 하마단 등지의 통치자로 삼았고, 이스파한과 티브리스 등 서부 이란 일대는 동생 키질 아르슬란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키질 아르슬란이 팔라반의 지위를 물려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팔라반의 아내 이나츠 카툰은 아들 쿠틀루 이난츠 무함마드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받게 하기 위해 아르슬란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 언제까지나 허수아비 노릇할 수는 없다고 여긴 토그릴 3세가 가세하면서, 양자간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 무렵 이란 동부의 케르만 부 셀주크 제국이 오우즈의 침공으로 붕괴되고 무함마드 이븐 바흐람샤가 도주하면서 셀주크 제국의 영역은 이란 서부로 한정되었지만, 그들은 이에 신경쓰지 않고 최고 권력을 향한 경쟁에 몰두했다.
1186년 10월, 토그릴은 바반드 왕조의 후삼 앗 다울라 등 왕공들의 지원에 힘입어 맘루크와 마라가, 젠잔 에미르들의 지원을 받은 키질 아르슬란을 수도 하마단에서 몰아냈다. 키질 아르슬란은 북부 산악지대로 도주한 뒤, 11월 7일 아잠을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한 후 바그다드에 사절을 보내 셀주크 술탄의 커져가는 힘을 경고하며 칼리파에 복속하는 대가로 원군을 청했다. 아잠 일대를 장악한 토그릴 역시 사절을 보내와 자신을 술탄으로 책봉하고 자신이 거주할 바그다드의 다르 알 술탄(술탄 궁전)을 보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알 나시르는 키질 아르슬란과 토그릴 3세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지를 고심한 끝에 술탄 궁전을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며 노선을 확실히 했다. 이후 60만 디나르를 들여 군대를 대대적으로 편성해, 1188년 1만 5천 명의 기병대를 확보했다.
1188년 4월, 알 나시르는 와지르 잘랄 앗 딘 우바이둘라 이븐 유누스를 사령관으로 세우고 토그릴 토벌 임무를 맡겼다. 유누스는 키질 아르슬란과의 합류도 기다리지 않은채 곧바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하마단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던 1188년 5월 5일, 토그릴의 군대와 다이마르그에서에서 마주치자 곧바로 공격했다. 그러나 족장 마흐무드 바르잠 알 이바이 휘하의 튀르크멘 병력이 술탄 진영으로 배신하는 바람에 칼리파 군은 패배했고, 유누스는 사로잡혔다. 하지만 알 나시르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이라크 전역에서 긁어모은 세금으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고 1188년 7월 재차 출진했다. 이때 토그릴 3세는 휘하의 주요 아미르들 중 아이바와 오자다 등을 처형했다. 이 행위에 부하들은 동요했고, 앞서 전향했던 쿠틀루그 이난즈가 재차 토그릴 진영을 떠나 키질 아르슬란 편에 가담했다. 키질 아르슬란은 1년만에 아잠으로 귀환하였고, 이번에는 칼리파 군대도 약속한 장소에서 합류했다. 연합군은 어렵지 않게 하마단을 점령했고, 토그릴의 5촌 당숙인 산자르 이븐 쉴레이만샤를 술탄으로 추대했다.
토그릴 3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잠을 포기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했다. 그는 튀르크멘 영주 이즈 앗 딘 하산 이븐 킵차크의 성채에 피신한 뒤 살라흐 앗 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살라흐 앗 딘은 안티오크 공국 원정 도중 군대가 지쳐 후퇴하던 터라 여유가 없어서 응하지 않았다. 알 나시르는 여세를 몰아 티크리트에 대한 지배권을 수복했다. 토그릴 3세는 마지막 시도로 키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에게 사절을 보냈다. 특히 알 나시르에겐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사절단을 바그다드로 파견해 자신을 대신해 사과하게 하고, 이븐 유누스를 죽인 것에 용서를 구했으며, 칼리파의 명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카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 둘 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 1190년 10월 토그릴 3세는 킵차크 성채에서 2년간 포위 공격을 견딘 끝에 키질 아르슬란에게 항복했고,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타브리즈 인근의 카흐란 성채에 구금되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키질 아르슬란은 알 나시르의 동의하에 술탄 산자르를 폐위하고 형수 이나츠 카툰과 결혼한 후 하마단에서 자신을 술탄으로 선포했다.
그 후 감옥에 갇혀 있던 토그릴 3세는 1191년 9월 키질 아르슬란이 이나츠 카툰에게 독살당한 뒤 마흐무드 이나츠 오글루에 의해 1192년 5월 석방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행동하지 않고 아부 바크르, 오즈베그, 쿠틀루그 이난즈, 아미르 아미란 등 팔라반의 자식들이 내전을 벌이는 것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아부 바크르가 그를 경계해 암살자를 보내자 이를 따돌리고 재차 튀르크멘들을 포섭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이후 동쪽으로 진군하여 1192년 아잠에서 쿠틀루그와 아미란 형제를 축출했다. 두 형제는아부 바크르에게 도전했으나 이 역시 패배하자 각자 라이와 시르반으로 도주했다. 그 중 라이로 도주한 쿠틀루그는 호라즘 왕조의 테키쉬에게 도움을 청했다.
테키쉬는 세력을 확장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군대를 이끌고 라이로 진군했다. 그리고는 쿠틀루그를 쫓아내고 라이를 장악했다. 토그릴 3세가 호라즘 왕조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자, 테키쉬는 협상을 제안했다. 토그릴 3세 역시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호라즘 왕조와 전쟁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딸을 호라즘 왕자 유누스 칸과 약혼시켰다. 하지만 테키쉬가 동생 술탄 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잠의 세금을 거둔 후 회군하자, 토그릴은 준비한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1193년 3월 호라즘의 라이 총독 탐가치를 죽이고 라이를 공략했다. 테키쉬는 결혼동맹을 맺기로 해놓고 뒤통수를 날린 토그릴 3세에게 분노해 복수를 꾀했다.
토그릴 3세는 테크쉬의 임박한 반격에 대비해 쿠틀루그와 화해하고 그의 모친 이나츠 카툰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나츠 카툰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자 그녀를 살해했다. 쿠틀루그는 잔잔으로 도주한 뒤 테키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시기에 알 나시르 역시 테키쉬에게 사절을 보내 토그릴을 응징해달라고 청했다. 테키쉬는 일단 7천의 호라즘 병력을 파견해 쿠틀루그를 지원하게 했다. 1194년, 토그릴은 쿠틀루그를 공격해 단숨에 물리쳤다. 쿠틀루그는 셈닌으로 도주해 호라즘 본대와 합류했다. 한편 호라즘 측의 하집 (관료) 시하브 앗 딘 마수드가 테키쉬의 아들을 술탄 휘하의 라이 총독으로 임명한 뒤 토그릴 3세에게 휴전 협상을 제안하며 우선 사베흐로 철수하라고 권고했다.
토그릴은 아미르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화의를 수용하거나 최소한 잔잔과 이스파한의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다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전투를 결심했다. 이는 쿠틀루그 이난즈로부터 전투 때 호라즘 왕조군을 배신하고 그 편에 들겠다는 서신을 받았기 때문이다. 토그릴은 라이로 향한 뒤 전투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며 궁전에서 유희를 즐겼다. 1194년 3월 19일, 테키쉬의 대군이 모습을 보이자 토그릴은 농성 대신 군대를 이끌고 회전에 나섰다. 술탄 토그릴은 별다른 작전도 없이 적진의 선발대 중앙부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를 직감한 아미르들은 요지부동이었고, 오직 60명의 근위대만이 술탄의 무모한 돌격에 함께했다. 짧은 전투 끝에 토그릴은 눈에 부상을 입고 낙마하였고, 그와 악연을 이어가던 쿠틀루그 이나즈가 나서 목숨을 애걸하는 술탄을 참수했다. 이리하여 셀주크 제국은 멸망했고, 토그릴 3세의 수급은 바그다드에 보내졌다. 알 나시르는 이를 궁전 앞의 누비 성문에 메달아 과거 셀주크 술탄들에게 핍박받았던 칼리파들의 넋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