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이논 전투 | ||
시기 | 740년 | |
장소 | 동로마 제국, 아나톨리콘 테마, 아크로이논(Ακροϊνόν) (현 터키 아피온카라히사르(Afyonkarahisar) | |
원인 | 우마이야 왕조의 아나톨리아 침입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 우마이야 왕조 |
지휘관 | 레온 3세 콘스탄티노스 5세 | 압달라 알 바탈† 압 말리크 이븐 슈에비브† |
병력 | 불명 | 약 2만명 |
피해 | 불명 | 약 1만명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결정적인 승리 | |
영향 |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압박 약화 동로마 제국의 이슬람 제국에 대한 반격시작 |
1. 개요
740년 아나톨리아 반도의 아크로이논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온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압달라 알 바탈이 이끄는 아랍군을 격파한 전투로, 10여년 후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과 아바스 왕조의 등장에도 큰 영향을 준 전투이다. 히샴 칼리프 때에는 왕조의 여러 왕자, 왕족들이 앞장서서 참전했는데,[1] 이 전투의 패배로 720년대 이래의 성과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어 왕조의 권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프린스턴 대학 비잔티움·그리스학 교수 존 홀든(John Haldon)이 쓴 'The Empire That Would Not Die: The Paradox of Eastern Roman Survival, 640-740 (죽지 않는 제국: 동로마 생존의 역설)'의 740년은 이 전투의 동로마측의 승리에 '동로마의 생존투쟁은 이로써 끝났고 생존은 한동안 보장되었다'라는 의미를 두어 잡은 연도일 정도로 이 전투는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2. 배경
지난 1세기 동안 아랍인들은 지속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를 침략하여 흑해변의 북부 일부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침략을 최소한 한 번 이상은 받았으며, 718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켜내는데 성공한 후에도 불과 10년도 안 된 720년대부터 다시 공세를 재개하였고(그만큼 국력의 격차가 컸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히샴이 즉위한 이후로 침략이 더욱 더 격화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전투 패배 이후로 동로마를 완전히 병탄할 수는 없음을 체감한 이슬람 측은 대전략 방향을 국경지대 약탈로 인한 국력 소모 강요로 틀었고, 아나톨리아 반도, 특히 동부의 카파도키아는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하자르와의 전쟁으로 우마이야 왕조의 국력이 소모되고, 투르-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우마이야 왕조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점차 아나톨리아에서의 아랍인들의 성공은 줄어들었고, 이 시기의 침략은 아나톨리아의 핵심 지역인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에 도달하지 못했다.하지만 737년 우마이야 왕조가 하자르인들을 크게 격파하면서 우마이야 왕조는 다시 동로마 제국을 향해 전력을 투사할 수 있게되었고, 칼리파 히샴은 아나톨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740년, 히샴은 자신의 아들 술레이만을 대동한 자신의 치세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원정대를 편성하였다.
3. 전투
원정이 시작되고 알 가미르가 이끄는 경무장한 1만명의 병력은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를 공격하러 향했고, 압달라 알 바탈과 압 말리크 이븐 슈에비브가 이끄는 군대가 뒤를 따랐으며, 히샴의 아들 술레이만이 이끄는 군대가 카파도키아를 급습했다. 레온 3세의 군대는 압달라 알 바탈의 군세와 맞서 싸웠는데, 구체적인 전투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레온 3세의 동로마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만여명의 아랍군이 전사했으며, 아랍군의 두 지휘관 모두 전사했다. 나머지 원정군들도 아나톨리아의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요새화된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극심한 굶주림을 겪은 뒤 철수했다. 이때 동로마 제국군은 2만명에 달하는 포로를 사로잡았다고 한다.4. 영향
아크로이논에서의 승리는 2차례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제외한 아랍인들과의 주요 전투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첫 승리라는 의미를 가지며, 세바스토폴리스 전투 이후부터 매우 수세적인 입장이였던 동로마 제국이 아랍인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전환하게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콘스탄티노스 5세 치세 초기의 내란으로 아랍인들의 아나톨리아 침략은 재개되었으나, 침략의 위력은 크게 감소하였고 이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압박이 약화되는 결과를 불러왔고, 이후 콘스탄티노스 5세는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틈타 이슬람 제국에 공세를 가하기도 했다.한편 레온 3세는 아크로이논에서의 대승을 기념하여 아크로이논의 도시명을 '승리의 도시'라는 뜻의 니코폴리스(Νικόπολις)로 개명하였다. 이후 11세기 말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와 니코폴리스를 정복한 튀르크인들은 니코폴리스를 '검은 요새'라는 뜻의 카라히사르(Karahisar)로 명명하였다. 튀르크인들이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 카라히사르는 아편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때문에 이 도시에 튀르키예어로 아편이라는 뜻의 '아피온(Afyon)'이라는 별칭이 붙었고[2] 2004년에 와서 도시의 정식명이 '아피온카라히사르'로 확정되었다.
[1] 영어 위키백과 Arab–Byzantine wars 중, 'Under the more aggressive Caliph Hisham ibn Abd al-Malik (r. 723–743), the Arab expeditions intensified for a time, and were led by some of the Caliphate's most capable generals, including princes of the Umayyad dynasty like Maslama ibn Abd al-Malik and al-Abbas ibn al-Walid or Hisham's own sons Mu'awiyah, Maslama and Sulayman.'[2] 아편이라는 이름답게 아피온은 수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아편 생산지 중 하나였으나 1960년대 이후 마약 생산을 중단하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대부분의 양귀비꽃밭을 갈아엎고 현재는 터키 당국의 엄격한 통제 하에 의료용 목적으로 재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피온은 여전히 세계 수위권의 아편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