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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2:51:21

베르베르 대항거


1. 개요2. 배경
2.1. 제국의 서부2.2. 차별과 과세2.3. 하와리즘의 도래
3. 전개
3.1. 마그레브 봉기3.2. 바그도우라 전투3.3. 안달루스로의 확산3.4. 한달라의 반격
4. 진압...?
4.1. 743년 이후4.2. 아브드 알 라흐만
5. 후일담

1. 개요

740 ~ 743년에 걸쳐, 부당한 과세와 차별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이 마그레브를 중심으로 이프리키야안달루시아에 걸쳐 일으킨 반아랍(우마이야) 봉기이다. 누미디아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가 결국 멸망당해 합병된 이후 역사의 주역이었다기보다는 보조적 역할에 그쳤던 베르베르인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성장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대항거는 베르베르인의 정체성과 마그레브 지역의 역사에 있어 매우 큰 전환점이 된 전쟁이었다. 대항거 이후 세워진 베르베르 왕국들은 이후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과 아바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2. 배경

파일:Kairouan (1).jpg

아랍 - 이슬람 세력의 북아프리카 진출은 정통 칼리파 시대에 장군 아므르가 이집트를 점령하며 시작되었다. (642년) 베르베르 인이 이슬람 세계에 편입된 것도 이와 일맥상통하다.

2.1. 제국의 서부

우마이야 왕조의 마그레브 (이프리키야) 정복

1차 피트나를 겪으며 중단되었던 서부 진출은 야심만만한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파 무아위야 1세의 의지로 재개되었다. 그의 명을 받은 사령관 우크바 이븐 나피는 670년에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고 병영 도시인 카이로완을 세웠다. 그는 681년에 대서양 연안까지 진출하였지만 해안 도시들과 내륙의 베르베르인들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였다. 결국 코사일라가 지휘한 베르베르인은 해안 요새에서 농성하던 로마군과 연합하여 아랍 인들의 베후를 공격, 대파하였다. 이븐 나피는 전사하였고 아랍 군대는 마그레브 전체를 포기하며 도주하였다.

683년, 로마 - 베르베르 연합군은 카이로우안까지 함락하며 이슬람 군대를 키레나이카의 바르카로 추방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1차 원정은 기존의 영토까지 상실하는 대실패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아랍 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2차 피트나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우마이야 조의 신임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688년과 689년에 걸쳐 마그레브에 2차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카이로우안을 탈환하였으나 동로마 군대에게 후방을 습격당하여 다시 후퇴하였다.

혈기가 넘쳤던 칼리파 알 말리크는 새로운 사령관 핫산 이븐 누만에게 4만 대군을 주어 3차 원정을 지시하였다. (692년) 누만은 현명하게도 로마 측과 베르베르 간의 이간책을 써서 둘을 갈라 놓았고 뇌물을 통해 베르베르 족을 회유하는데 성공하였다. (693년) 이로써 알 누만은 후방의 베르베르인들에 대한 걱정 없이 눈 앞의 로마군만 상대하면 되었다. 게다가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막장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실정으로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하였다. 695년, 소아시아 함대의 반란으로 레온티오스가 새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이미 아랍 군대는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카르타고 등 몇몇 해안 도시를 제외한 로마 령 아프리카를 제패한 뒤였다.

698년, 3년여간 지속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카르타고가 함락되며 동로마 제국은 또하나의 주교구이자 대도시를 이슬람 측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후 일부 베르베르인들은 여왕 카히나의 지도 하에 우마이야 조에 반기를 들었지만 누만에게 진압되었다. 누만이 705년에 사망하자 칼리파 알 말리크는 무사 이븐 누사이르를 이프리키야의 총독으로 파견, 수군 기지와 함선 건조를 명령하였다. 따라서 시리아, 이집트에 이어 아프리키 함대까지 손에 넣은 우마이야 조는 지중해의 해상 패권을 쥐게 된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누사이르는 베르베르인 노예 출신 부장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게 7천 군대를 주어 스페인으로 파견하였다. (711년 4월 말) 그가 서고트 국왕 로데리고를 격파하고 712년까지 세비아와 코르도바 일대를 석권하자, 누사이르도 무어인 부대를 이끌고 참전, 719년까지 반도를 통일하였다. 이슬람 군대는 717년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아키텐, 셉티마니아 일대까지 진격하게 된다.[1]

2.2. 차별과 과세

마왈리, 즉 개종자는 우마이야 왕조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특히 8세기 초엽, 왈리드 1세와 술레이만 시기부터 차별이 보편화 되었다. 이후 우마르 2세 (717 ~ 720년)가 개종자들에게 부당하게 (샤리아에 맞지 않게) 부과되던 세금들 (인두세, 토지세, 노예세)을 폐지해 주었다.

718년에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부임한 이스마일은 해당 칙령을 제대로 실행하여 베르베르 민심을 달래었다. 하지만 720년에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총독 야지드 이븐 무슬림은 베르베르 개종자들에게 인두세 (지즈야)를 부과하며 원성을 샀고 그러다 이듬해에 암살되었다.

이후 칼리파 히샴 (724 ~ 743년)은 하자르 칸국, 동로마 제국, 소그드 인들과 싸우기 위해 개종자들에 대한 토지세 부과를 부활시켰다. 그러한 번복 조치는 동쪽으론 이란인 개종자들, 서쪽으론 베르베르인 개종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2.3. 하와리즘의 도래

729년에 문누스가 케르다니야에서 봉기했다가 732년에 진압된 것이 첫번째 저항이었다.

3. 전개

3.1. 마그레브 봉기

3.2. 바그도우라 전투

3.3. 안달루스로의 확산

3.4. 한달라의 반격

4. 진압...?

4.1. 743년 이후

4.2. 아브드 알 라흐만

5. 후일담

771년 카이로완에서 일어난 이바디 반란 등 불안정한 상태 지속, 야지드가 평정 후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재임 (772 ~ 787년) 무할랍 가문 번영
[1] 누사이르 본인은 714년에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다. 한편, 알안달루스의 수도는 716년에 세비야에서 코르도바로 옮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