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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 엘 발리 (구도심)의 알 카라윈 마드라사 일대
구도심의 입구인 밥 부 젤루드 (푸른 문)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페스의 메디나 |
영어 | Medina of Fez | |
아랍어 | مدينة فاس | |
프랑스어 | Médina de Fès | |
국가·위치 | 모로코 페스메크네스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1년 | |
등재기준 | (ii)[1], (v)[2] | |
지정번호 | 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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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فاس, Fès모로코 북부의 도시. 로마자 표기로는 페즈(Fez), 페스[3], 파스[4] 등 다양하게 불리는 도시. 인구는 100만 명이 넘으며, 모로코에서 카사블랑카 다음으로 큰 제2의 도시이자 천년 고도로써 주요 관광 도시이다.
2. 상세
789년에 도시가 세워진 후 이드리스 왕조와 마린 왕조 등 마그레브 지역의 다양한 이슬람 왕국의 수도로 기능했으며, 모로코가 보호령일 무렵 1925년에 라바트로 천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도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아예 튀르키예어에서 모로코를 페스의 튀르키예어식인 파스로 부를 정도.이드리스 왕조에 의해 세워진 구역을 구 페스 (페스 엘발리) 지역, 후에 13세기 베르베르인 왕조였던 마린 왕조에 의해서 강 양쪽에 건설된 것이 신 페스 (페스 엘즈디드) 지역으로 이곳에는 모스크와 왕궁이 건설되었다. 거기에 프랑스 보호령 하였던 1916년에 빌누벨(Ville Nouvelle)이라는 신시가가 세워졌다. 따라서 페스는 크게 엘발리, 엘즈디드, 빌누벨의 세 구역으로 나뉜다.
3. 역사
페스 구도심의 성벽
카스바 성문 일대
789년 모로코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이드리스 왕조의 이드리스 1세에 의해 자우하르 (페스) 강의 남안에 요새로 세워졌다. 지명은 아랍어로 도끼를 뜻하는 파스에서 유래했는데, 공사 도중 금도끼가 나왔다거나 이드리스 1세가 직접 인부들과 도끼로 흙을 팠다는 설화가 있다. 혹은 이드리스 1세가 기존에 있던 고대 도시 세프 (Sef)의 철자를 거꾸로 배열한 것이라고도 한다. 요새 도시로 건설이 시작된 페스는 이드리스 1세 왕이 우마이야 칼리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면서 아들인 이드리스 2세 시기에 완성되었다.
페스는 미로와 같은 좁은 골목과 건물들, 출입문을 통해 한꺼번에 수많은 병사들이 출입하지 못하고 화살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또한 이드리스 1세가 이 도시를 만들 때 '만인이 평등한 도시'를 꿈꾸었기 때문에 외관 상으로 보았을 때는 부유함의 정도를 알 수 없이 똑같은 창문과 출입문, 장식 없는 벽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집의 화려함과 크기가 매우 차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드리스 1세 또한 왕궁이 아닌 백성들과 똑같은 구조의 집에 살았던 것을 보면 나름 깨어있는 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1. 알 알리야
강 서쪽의 알 알리야와 동쪽의 마니나트 파스
3.1.1. 이드리스 왕조
858년 알 알리야에 세워진 알 카라위인 모스크 & 마드라사
860년 마디나트 페스에 세워진 안달루스 모스크
809년, 이드리스 2세는 기존 페스의 강 건너편에 '알리의 도시'란 뚯의 신도시 알 알리야를 세우고 왈릴리 (물라이 이드리스 제르훈)로부터 천도했다. 지명의 유래는 이드리스 왕가가 4대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이자 시아파의 이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은 대부분 베르베르 인이었고, 아랍인은 이드리스 2세 직속인 카이라완 출신의 아랍 병사 수백 정도였다. 그러다 817-18년, 코르도바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축출된 안달루스 아랍인들이 유입되며 아랍 인구가 늘었다. 이들은 대부분 알리야 대신 페스에 정착했다. 알리야와 페스의 아랍인 구역은 각각 아드와트 알 카라위인과 아드와트 알 안달루스로 불렸다. 주민 중에는 유대교도 역시 적지 않았는데, 대부분 이전에 개종한 제나타 베르베르 인이었고 푼두크 알 예후디[5] (유대인 숙소)라 불린 알리야 북서부에 주로 거주했다. 그외에 12세기 전까지는 소수의 현지 기독교도도 있었다.
강을 경계로 페스와 알 알리야로 나눠져 있던 도시는 1070년에 통합된 후, 페스로 통칭되며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다만 그 전까지 이드리스 왕조의 수도는 알 알리야였다. 828년 이드리스 2세의 사후 왕국은 그의 아들들 간에 분열되었고, 장남 무함마드가 페스와 알리야를 통치했다. 무함마드의 아들 알리와 야흐야 대에 재차 통합되어 안정을 회복하던 알리야에는 최초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알 카라윈 대학이 859년에 세워졌고[6]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 유도 장식이 고안되는 등 선진적인 면을 보였다. 하지만 이드리스 왕조는 868년 카와리즈파 베르베르 부족들에게 페스 & 알리야를 상실했다가 880년에야 회복하는 등 크게 쇠퇴했고, 10세기 초엽 들어 일대는 북쪽의 후우마이야 왕조와 동쪽의 파티마 왕조간 각축장이 되었다. 양측은 제나타 베르베르 부족들로 대리전을 벌였다. 우선 921년, 파티마 조에 복속한 미크나사 부족장 마살라 빈 하부스가 도시를 점령했다.
3.1.2. 미크나사 부족 (파티마 vs 우마이야)
마살라는 이드리스 군주 야흐야 4세를 축출하고 자신의 친척 무사 이븐 아빌 아피야를 총독으로 봉하였다. 다만 924년 마살라가 경쟁자인 마그라와 부족장 이븐 카자르에게 살해된 후 일대는 혼란에 빠졌고, 이드리스 왕공 알 하잠이 페스 & 알리야를 수복했다. (925년) 그후 파티마 칼리파 압둘라 알 마흐디의 아들 알 카임이 대군과 함께 원정하여 927년 페스 & 알리야를 재점령, 알 하잠을 축출하고 미크나사 부족에게 일대를 맡겼다. 940년대 파티마 조의 내전을 틈타 후우마이야 조의 지원을 받는 마그라와 부족이 페스 & 알리야를 점령했지만, 958년 파티마 대장군 자우하르와 장군 지리 빈 마나드가 3번째로 점령한 후 미크나사 부족에게 돌려주었다. 다만 973년, 후우마이야 조의 장군 갈립 앗 시클라비가 남하하여 일대를 점령했다. 이에 979년, 파티마 조의 제후국인 지리 왕조의 불루긴 빈 지리가 점령했지만 결국 980년에 마그라와 부족이 페스 & 알리야를 석권한다. 마그레브 서부를 두고 벌어진 반세기 간의 충돌은 988년, 후우마이야-파티마 측이 현상 유지의 휴전을 맺으며 일단락되었다.3.1.3. 마그라와 왕조
그후 한세기 가량 마그라와 부족이 모로코 북부를 통치했고, 명목상 주군인 후우마이야 조가 멸망한 후에도 그대로 통치를 이어갔다. 마그라와 시기 알리야와 파스 모두 성장하며 서로 경쟁을 벌였고,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11세기 초만 해도 불안정하던 마그라와 왕조는 1037년 ~ 1049년간 통치한 두나스 빈 하마마의 치세에 안정을 찾았다. 두나스는 보수를 거쳐 현재까지 사용되는 도시의 급수 체계와 함맘 (목욕탕), 모스크, 우에드 부 카레브의 첫 다리 등 여러 인프라 건설을 통해 페스 & 알리야의 발전을 견인했다. 두나스 사후 두 아들 아지사 (알 기사)와 엘페투흐가 각각 알리야와 페스를 차지하고 에미르를 칭하며 1059-61년간 대립하기도 했다. 양측은 각각 강변을 요새화하여 맞섰고, 둘의 이름은 각각 밥 귀사와 밥 프투흐 성문에 남았다. 이와 같은 내전 외에 계속 평화가 이어지는 동안 두 두시 사이의 빈 공간은 점차 시가지로 채워졌고, 둘을 가르는 강에는 6개의 다리가 놓여 양편을 연결하는 등 페스와 알리야는 점차 통합되었다.3.2. 무라비트 왕조: 단일 도시로 통합
13세기 초엽, 하나로 합쳐진 도시
1069년을 전후로 페스와 알리야를 정복한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빈 타슈핀은 2세기 넘게 나뉘어 있던 두 도시를 하나로 합쳤다. 둘을 나누던 성벽은 허물어졌고, 연결하는 다리는 증축 혹은 신축되었으며 새로 합쳐진 도시를 두리는 성벽이 둘러졌다. 또한 이때 서쪽 끝 (현 밥 부 젤루드 서쪽)에 카스바 (قصبة), 즉 시타델을 세워 총독 관저 및 수비대 병영을 두었다. 무라비트 시기, 비록 제국의 수도는 남쪽의 마라케시였지만 페스는 여전히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중시되었고 말리키 법학파 연구 및 각종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로써 번영했다. 무라비트 조의 페스 지배는 비록 70여년에 걸치긴 했지만 영향은 컸고, 세계사에 있어 레콩키스타를 일시 저지한 이슬람의 영웅으로 알려진 유수프 빈 타슈핀은 현지인들에 있어서는 '페스의 2번째 청건자'로도 추앙받는다.
3.3. 무와히드 왕조: 새 성벽
1190년경 당시 카스바에 세워진 부 젤루드 모스크
1204년경 세워진 마흐루크 성문
1145년, 무와히드 칼리파 아브드 알 무민은 치열한 공성전 끝에 페스를 점령했다. 아직 모로코 중남부는 무라비트 수중에 있었기에 그는 다시 저항할 것을 우려해 페스의 성벽을 허물었다. 다만 반세기 가량 시간이 흐른 후, 페스의 경제적 & 군사적 중요성을 주목한 야쿱 알 만수르는 재차 성벽을 쌓았다. 새로운 성벽은 그의 후임인 무함마드 앗 나시르 시기인 1204년에 완공되었고, 현재까지 페스 엘 발리의 경계를 이룬다. 성벽과 함께 부 젤루드에 있던 카스바 역시 재건되었고, 또한 서쪽 끝에 카스바 앗 누르를 더했다. 한편 이때 세워진 성벽은 향후 도시의 확장 및 자급자족을 고려하여 기존 시가지보다 더 넓게 세워졌다. 따라서 성내에는 빈 땅이 많았고, 주민들은 그곳에 밭을 일구어 곡식을 얻거나 정원을 조성했다. 1200년 무렵 페스의 인구는 약 20만명이었고, 카이로와 함께 이슬람권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다.
3.4. 마린 왕조: 페스 엘즈디드
1276년에 세워져 물라이 이드리스에 의해 보수된 페스 엘 제디드 대사원 |
페스 엘 제디드의 성벽
1210년대부터 또다른 베르베르 세력인 신생 마린 왕조가 흥기하여 모로코 북부를 두고 무와히드 조와 대결했는데, 2명의 군주가 전사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1248년 무와히드 칼리파 알 무타디드가 급사한 후 기세를 잡았다. 그해 가을, 마린 왕조의 아부 야흐야 아부 바크르는 페스를 점령한 후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페스는 180여년 만에 재차 수도가 되었고, 마린 왕조는 1269년 마라케시까지 함락하며 모로코를 통일했다. 1276년 초엽, 술탄 아부 유수프 야쿱이 안달루스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틈에 페스에서는 반마린 봉기가 벌어졌고 왕실 편이라 여겨진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얼마후 수도로 돌아온 아부 유수프는 유대인들을 보호, 반란을 진압했다. 뒤이어 모로코 남부의 무와히드 잔당이 소탕되었다는 소식이 당도하자, 연이은 승전과 평화를 기념하기 위해 그는 페스의 강 건너편에 새로운 도시인 '엘 메디나 엘 베이다' (하얀 도시)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1323-25년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에 의해 건설된 알 아타리네 마드라사 |
1350-55년 아부 이난 파리스가 세운 부 이나니야 마드라사
이는 후일 페스 엘 제디드 (신 페스)로 불리게 되었고, 기존 페스 엘 발리를 대체 및 감독하는 행정 & 군사적 중심지이자 마린 왕조의 새 수도로 기능하였다. 마린 왕조 시기 페스는 황금기를 맞아 번영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주요 건물들 중 상당수가 1271년 ~ 1357년 사이에 세워졌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페스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 중 하나인 7개의 마드라사로, 페스의 학문적 명성을 드높혔고 모로코 전통 건축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한편 14세기 말엽 들어 마린 왕조는 내전을 겪으며 쇠퇴했고, 15세기 들어 치안이 불안해지자 본래 페스 엘 발리에 살던 유대인들은 페스 엘 제디드에 따로 성벽으로 분리된 유대 구역인 멜라를 조성해 거주했다. 마침 1437년에 구도심 한복판에서 이드리스 2세의 유해가 발견되어 일대가 성지인 '하람'으로 지정되어 비무슬림의 거주가 금지된 것도 주된 요인 중 하나였다.
3.5. 혼란기 (와타스 왕조)
1400년경의 페스 시가지 지도
1420년, 아부 사이드 우스만 3세가 암살된 틈을 노려 살레 총독이던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 알 와타시가 페스 왕궁을 장악했다. 그는 어린 압둘 학크 2세를 술탄으로 옹립한 후 스스로 재상이자 섭정으로 선포하였다. 1423년, 아부 이난 파리스의 손자 무함마드의 도움 요청을 받은 자얀 왕조의 아부 말리크가 마린 군대를 격파하고 페스를 점령한 후 그를 옹립했다. 이로써 마린 왕는 일시적으로 자얀 왕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다. 자얀 조의 성장을 염려한 하프스 왕조의 아부 파리스 압델아지즈 2세는 자신에게 망명한 이전 자얀 군주 아부 타슈핀 2세의 아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4세에 군대를 주오 틀렘센으로 보냈고, 이에 아부 말리크는 페스에서 회군했다. (1424년 4월) 한편 야흐야는 탕헤르 살라 빈 살라 및 하프스 조와 동맹했고, 하프스 술탄 아부 파리스는 1425년 말엽에 직접 출정하여 페스의 관문인 타자를 점령했다.
그러자 페스가 그에게 항복하며 많은 조공을 바쳤고, 무함마드는 폐위되었다. 한편 아부 말리크 역시 폐위된 후 아부 파리스에 복속했고, 1426년 압둘 학크 2세는 하프스 조의 봉신으로써 페스에서 즉위했다. 야흐야는 압둘 학크가 성인이 된 후에도 섭정을 이어갔고, 포르투갈의 탕헤르 침공을 격퇴하며 입지를 다졌다. 그 이듬해인 1438년에는 페스의 실질적 창건자인 이드리스 2세의 무덤을 성역화하며 명분을 쌓았다. 1448년 야흐야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 알리 이븐 유수프가 섭정을 이어갔다. 그러던 1458년, 알리도 사망하고 야흐야의 아들 야흐야..가 와타스 가문의 3번째 실권자가 되자 그동안 그간 몰래 친위 세력을 키우던 압둘 학크 2세는 와타스 일족에 대한 학살을 선포했다. 친위 쿠데타는 성공하여 야흐야 빈 야흐야의 어린 아들 아부 압둘라 앗 셰이크 무함마드 등 소수를 제외한 와타스 가문은 38년의 집권 후 거의 멸문을 당했고, 페스는 그들의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압둘 학크 2세가 권력 기반이 약한 유대인들을 재상으로 기용하자 여론이 악화되었고, 주민들은 그가 페스를 비운 틈엪봉기하였다. 무프티를 협박해 유대인 학살 포고령을 얻어낸 군중은 재상을 살해한 후, 시내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개종 혹은 죽음을 택하게 했다. (1465년 봄) 이후 주민들은 명망 높은 이드리스 왕가의 후손인 샤리프 무함마드 이븐 임란을 군주로 추대하였고, 그해 라마단 무렵 압둘 학크에게 복위를 약속하며 페스로 불러들인 후 살해하여 마린 왕조를 폐하였다. 그러자 모로코 각지에서 유대인을 우대한 마린 왕조에 대한 반발심 및 상대적 박탈감으로 반유대 폭동이 일어났고, 페스에서도 반유대 정서가 더욱 고조되어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대인 상인 집단인 무하지린 역시 추방되었다. 그러던 1471년, 살아남은 와타스 가문의 공자 앗 셰이크 무함마드가 기존 마린 조의 지지자들과 함께 무함마드 이븐 이므란을 축출하고 페스를 장악, 와타스 왕조를 창건하였다.
앗 셰이크는 살기 위해 개종한 자들의 배교를 허가하는 등 페스의 유대인 공동체를 재건하였다. 본래 모로코 현지의 토샤빔 유대인이 주를 이루던 페스의 유대 공동체는 1492년 스페인, 1496년 포르투갈에서 추방됭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다수 유입되며 문화적으로 다양해졌다. 와타스 조의 지배 하에 모로코 자체는 해안을 기독교 세력에 뺏기는 등 쇠퇴했지만, 적어도 수도 페스만큼은 안정을 누렸다. 다만 워낙 내우외환의 시기였고 통일 왕조도 아니었기에 와타스 시기에 페스에는 일부 보수 공사 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16세기 들어 모로코 남부를 장악한 샤리프 왕가의 사드 왕조가 점차 북상했고, 밀고 밀리던 와타스 조는 1545년 술탄이 포로가 되는 대패를 당하며 수세에 몰렸다. 1547년, 와타스 술탄의 석방을 대가로 메크네스를 얻어낸 사드 왕조의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곧바로 페스를 포위했다. 그는 1년이 넘는 공방전 끝에 1549년 1월 28일, 페스를 점령하고 술탄이 되었다.
3.6. 사드 왕조: 침체와 요새
1600년경 페스 성벽 구조. 남북의 돈대와 카스바 탐데르트
1551년, 오스만 제국령 알제 총독 하산 파샤가 사드 왕조로부터 틀렘센을 점령하며 양국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듬해 오스만 술탄 쉴레이만 1세가 복속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예니체리가 포함된 살라흐 레이스 휘하 오스만 군대가 진격하여 1554년 1월, 페스 부근에서 사드 군대를 격파하였다. 살라흐 레이스는 스페인으로 망명했던 와타스 왕공 아부 하산 알리를 술탄으로 옹립했다. 이로써 와타스 조가 복원되자 몇몇 지역이 호응하기도 했으나, 남부에서 세력을 회복한 무함마드 앗 셰이크는 탈다 전투에서 아부 하산 알리를 전사시키고 페스를 수복하였다. (1554년 9월)[7] 한세기 만에 모로코를 완전히 통일한 사드 왕조는 수도를 기존의 마라케시로 두며 페스는 약 3세기 만에 수도 자리를 상실했다.
물론 사드 왕조는 페스 역시 제2의 수도 격으로 중시했고, 주로 왕세자가 총독으로써 통치했다. 1556년, 무함마드 앗 셰이크가 암살당한 후 장남 압둘라 알 갈립이 계승하자 세 동생들은 숙청을 피해 오스만령 알제리로 망명했다. 이에 알제 총독 하산 파샤가 모로코로 진격했는데, 압둘라에게 페스 북쪽에서 벌어진 와디 알 라반 전투에서 패해 격퇴되었다. 안정적으로 통치하던 압둘라는 1572년 사망했고, 페스 총독이던 아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알 무타와킬)가 계승했다. 그러자 알제리에 망명한 두 숙부들 중 현지 장교에 오른 압둘말리크가 술탄 무라트 3세에게 지원 약속을 얻어내어 20여년간 참았던 야심을 드러냈다. 1576년 초엽, 6천의 예니체리 부대와 압둘말리크가 이끄는 2천 모로코 기병이 페스를 향해 진군하였다. 다시 페스 부근의 알 루큰 전투에서 무함마드는 휘하 안달루스 병력이 이탈하며 패하였고, 3월 11일 압둘 말리크는 페스를 장악한다. 그는 무라트 3세에 복속했고 군대를 오스만 식으로 재편하였다.
한편 또다시 패배한 후 포르투갈로 망명한 무함마드는 국왕 세바스티앙 1세에게 복속 및 기독교 개종을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얻어냈고, 1578년 7월에 함께 아실라를 거쳐 페스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압둘말리크 역시 동생 아흐마드와 북상하여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를 치렀다. 결과는 무함마드, 세바스티앙, 압둘말리크 3자 모두의 전사 및 사드 왕조의 승리였다. 압둘말리크를 계승한 동생 아흐마드 알 만수르는 1만여 포르투갈 포로와 함께 페스에 개선하여 술탄에 올랐고, 사드 왕조의 전성기를 견인했다. 그는 강한 군대로 중앙 집권 및 중립 외교를 이루었고, 국방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올리자 페스 성직자들이 반발하기도 했으나 선지자 혈통으로 무마시켰다. 사드 왕조 시기 페스 시내에는 카라위인 모스크 내의 화려한 우두 (세정) 건물들 외에는 별 건축물이 세워지지 않았고, 부정적인 여론을 경계하여 도시 주변 언덕들에 여러 감시용 요새들을 더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1620년경 압둘라 알 갈립 2세가 건설한 알 카라위인의 서익랑 | 1582년에 세워진 보르즈 엘샤말 (북쪽 돈대). 현재는 무기 박물관으로 쓰인다. |
치세 말엽에는 말리를 정복하고 칼리파까지 칭한 아흐마드가 1603년에 사망하자 사드 왕조는 그의 두 아들인 지단 앗 나시르와 압둘라 알 와시크 사이에 분열되었고, 각각 페스와 마라케시를 수도로 삼아 대립했다. 지단은 1604년에 형이자 기존 세자였던 무함마드 앗 셰이크 알 마문에게 패해 축출되었고, 무함마드는 다시 1609년 마라케시에서 축출된 압둘라에게 페스를 뺏겼다가 이듬해 스페인의 도움으로 회복했다. 다만 스페인에 라라슈를 할양하여 민심을 잃은 무함마드는 1613년 암살되었고, 아들 압둘라 알 갈립 2세가 계승했다. 한편 페스에서 축출되었던 지단은 역시 같은해 마라케시를 완전히 장악했고, 이후 10년간 모로코는 북부의 알 갈립과 남부의 지단으로 분할되었다. 1623년 페스의 알 갈립 2세가 사망하자 동생 압둘 말리크 알 무타심이 계승했으나, 친스페인 정책을 유지해 인기를 잃었다.
그러던 1627년, 압둘 말리크와 지단이 모두 사망했을 때에 지단의 아들 아부 마르완 압둘 말리크 2세가 북상하여 페스를 장악하고 24년만에 모로코의 단독 술탄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 술탄들이 연이어 요절하며 사드 왕조는 약화되었고, 해안과 산지에서는 군벌 세력들이 나타나 영토를 잠식해나갔다. 그중 아틀라스 산지 중부에서 발흥한 산하자 베르베르계 수피 조직인 딜라이야는 1636년 무함마드 알 핫즈의 지도 하에 현지 베르베르 인들을 규합해 빠르게 세력을 확대했고, 1638년 사드 조의 토벌군을 격파했다. 1641년 딜라이야 군대는 살레-라바트 공화국과 함께 모로코 북부 산지의 군벌 무함마드 알 아야쉬까지 격파한 후, 같은해 페스를 점령했다. 따라서 사드 조의 영토는 마라케시 일대로 축소되었고, 딜라이야 정권이 모로코의 최대 세력으로 떠올랐다. 급진적인 딜라이야 지배기에 페스의 유대인들은 고난을 겪었다.
3.7. 알라위 왕조: 증축과 연결
1667년에 세워진 카스바 셰라르다의 밥 세그마 성문 일대
188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세워진 밥 데카킨 성문
다만 시질마사의 또다른 샤리프 시디 무함마드가 술탄을 칭하며 도전했고, 1650년 6월 페스 엘 발리의 주민들이 그를 초청하여 딜라이야에 대한 반란에 나섰다. 다만 그가 실제로 당도했을 때에 딜라이야 군도 다가오자 주민들은 추대를 철회, 재차 무함마드 알 핫즈에 복속했고 시디 무함마드를 돌려보냈다. 1651년 무함마드 알 핫즈는 네덜란드와 통상 조약까지 맺으며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1659년, 마라케시의 마지막 사드 술탄이 피살되며 사드 조가 멸망하자 자신 역시 술탄을 칭했다. 하지만 1662년, 무함마드 알 핫즈는 암살되었고 그 직후 페스에서는 딜라이야 장군인 카이드 압둘라 알 도라이디가 술탄을 칭하며 도시를 장악했다. 이에 1663년, 무함마드 알 핫즈의 아들 압둘라가 베르베르 군대를 모아 페스 엘 발리 밑에 진을 치고 도시를 포위했지만 10여일의 전투 끝에 강한 저항에 직면하자 철수했다.
이로써 딜라이야는 근거지를 잃어 크게 약화되었고, 아틀라스 산지로 철수했다. 같은해 내전에서 형 시디 무함마드를 전사시키고 집권한 동생 물라이 알 라시드는 아랍 부족 병력인 구이쉬를 중심으로 무주공산인 모로코 정복에 나섰다. 1664년 타자을 점령한 알 라시드는 페스에 복속을 요구했으나 거절되자, 1665년 도시를 포위하나 격퇴되었다. 이에 그는 북부 리프 산지를 평정한 후 재차 포위하여 1666년 6월, 페스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페스를 수도로 정한 알 라시드는 구이쉬 병사들의 주둔을 위해 페스 엘제디드 북쪽에 새 성채인 카스바 셰라르다 (혹은 카스바 엘케미스)를 세웠고, 카스바 앗누르 역시 재건하여 시질마사 출신 주민들을 정착시켰다. 1668년까지 모로코를 통일한 알 라시드는 1670년 셰라티네 마드라사를 건립하며 페스의 민간 인프라에도 기여했다. 다만 이러한 중흥기는 오래 가지 못하여 1672년 알 라시드가 사망하자 그를 계승한 동생 물라이 이스마일은 페스 대신 더 국토 중앙부에 있는 메크네스로 천도했다.
1717-20년에 걸쳐 중수된 물라이 이드리스 2세 자위야
즉위 직후 마라케시 벌어진 조카 아흐마드 벤 마레즈의 반란을 진압한 이스마일은 페스에서 형의 장례를 치른 후 메크네스로 돌어갔는데, 그 직후 페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알라위 주둔군이 축출되었다. (1672년 8월) 페스 반군은 산중으로 도피했던 아흐마드를 초청했고, 그는 타자에서 술탄을 칭했다. 그러자 이스마일은 페스를 봉쇄한 후 먼저 타자의 아흐마드와 북부 군벌 카디르 갈리안을 격파했고, 다시 페스로 향했다. 무려 14개월의 포위 끝에 페스가 항복하자, 이스마일은 약속대로 주민들을 사면하고 그 지배 구조를 개편하는 관용을 보였다. 그는 카스바 셰라르다에 구이쉬의 일원인 우다야 부족을 배치하고 물라이 2세 성지 등 여러 기념물을 보수, 재건했다. 하지만 이스마일은 반란을 일으킨 페스를 결코 좋아하지는 않아 자주 무거운 세금을 매겼고 주민들을 타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한편 이스마일은 종종 오스만령 알제리외 우지다 ~ 틀렘센 일대를 두고 충돌했고, 이에 1692년 봄 알제 총독 핫즈 샤바니가 침공해 오자 이스마일은 직접 반격에 나섰으나 물라야 강 전투에서 대패했다.
알제리 군은 페스 성벽까지 패잔병을 추격하였는데, 성내에는 4만이 넘는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었기에 진격을 멈추었다. 그후 이스마일은 친히 적진을 방문, 오스만 술탄에게 복속을 표한 후 화친했다. 1727년 이스마일의 사후 그의 많은 아들들이 계승 분쟁을 벌였다. 골육상쟁 중, 흑인 노예 군부인 아비드의 지지를 받은 물라이 압둘라는 집권한 후 내분으로 얼룩진 메크네스 대신 페스로 재천도했다. 다만 압둘라가 점차 아이트 이드라신 베르베르 부족, 우다야 아랍 부족, 페스 주민들과 가까워지자 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된 아비드 세력이 다른 왕자들을 지원하며 내전이 재발하였다. 한편 총독 선임을 두고 페스 주민들과 대립하던 압둘라는 페스 서남쪽 근교에 다르 드비베그를 건설해 머물렀다.[8] 압둘라는 도합 8년 가량 6번 찬탈당한 끝에 1748년에 최종적으로 집권했고, 내전기에 탕헤르 등 북부에서 자립하여 1741년 페스를 침공하는 등 위협이 되던 아흐마드 알 리피를 전사시키며 내부 안정을 도모했다. 1757년, 압둘라를 계승한 아들 무함마드 3세는 군대 규모를 최소화하여 군부를 약화시켰다.
1800년 전후로 페스 엘 발리에 세워진 라시프 모스크
이에 선왕을 도우며 영향력을 키운 우다야 베두인들이 페스에서 소동을 일으키자, 1760년 무함마드 3세는 군대를 이끌고 페스에 진입해 우다야 지도부를 체포하고 병사들 다수를 살해하며 조직을 해체시켰다. 이로써 페스는 1세기 넘게 안정을 얻었고, 다시 알라위 왕조의 수도가 되어 번영했다.[9] 1800년을 전후로 하여 기존 기념물들의 보수 및 재건과 왕궁의 확장이 이루어졌고, 술탄과 집권층은 점차 울라마 등 페스의 엘리트 층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60년이 넘는 무함마드 3세와 슬리마네 부자의 안정적인 통치 후, 1822년 압둘라흐만의 치세부터 경제난과 외세의 간섭으로 모로코는 재차 위기를 겪었다. 한편 1789년 알제리에서 페스로 이주한 아흐마드 앗 티자니 (? ~ 1815년)에 의해 시작된 티자니 수피 종단은 울라마 등 엘리트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한편 19세기 초까지 페스는 페즈 모자의 유래인 타르부쉬의 단독 생산지였다.
1840년대 들어 압둘 라흐만은 후계자인 아들 모하메드 4세세에게 군대의 근대화를 맡겼다. 후자는 튀니지 장교들을 초청하여 신식 군대인 아스카리를 창설, 기존의 아비드나 구유쉬를 대체하였고 알제리 주둔 프랑스 장교를 로비 끝에 개종시켜 그의 지도 하에 페스에 무기 학교인 마드라사 알 무한디신을 설립하였다. 그럼에도 서구 열강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알라위 왕조는 약해졌고, 모하메드 4세의 아들 하산 1세는 1874년에 과도한 새금에 반발하여 벌어진 두 차례의 페스 봉기를 진압하고 개혁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중흥을 시도한 그는 페스 엘발리와 엘제디드를 잇는 성벽을 세워 6세기만에 하나의 도시로 통합했고, 이렇게 형성된 회랑에는 왕실 및 귀족들의 여름 별궁과 정원들이 세워졌다. 또한 그는 기존의 왕궁도 정문을 현 위치로 옮기며 확장했고, 그 앞의 6조거리 느낌의 메슈아르도 새로 조성했으며 1886년에는 북쪽에 무기 공장인 다르 알 마키나를 세웠다. 이로써 물라이 압둘라 구역과 나머지 페스 엘제디드가 분리되었다.
1900년 기준, 완전히 연결된 두 페스
하산 1세를 계승한 사촌 압델아지즈는 친서구 정책을 펴며 여러 이권을 넘겼다. 이에 그의 형 압델하피트가 반란을 일으켜 1908년 페스를 점령했고, 라바트에서 버티던 압델아지즈는 이듬해 양위했다. 이러한 하피디야 내전에서 수피 모더니스트 무함마드 이븐 압둘카비르 알 카타니가 이끄는 페스의 울라마는 압델하피트를 제한적으로 지지하며 그의 승리를 도왔다. 하지만 압델하피트 역시 대세가 기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고, 1911년 초엽 페스는 중부 아틀라스 부족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자 압델하피트는 압델하피트는 프랑스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샤를 에밀 뮈니에 대령의 부대가 5월 21일, 페스의 다르 드비베그에 사령부를 차리고 부족들을 격파했다. 같은해의 모로코 위기를 계기로 프랑스는 그를 협박하여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된다는 페스 조약을 체결했다. (1912년 3월) 이에 대한 반발로 4월 17일 페스 주민들과 군인들이 봉기, 약 백여명의 유럽인과 멜라의 유대인들을 죽이자 프랑스 군이 포격으로 6백명을 살상하여 진압했다. 뒤이어 모로코 북부 산지와 남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역시 프랑스 군에게 모두 진압되었고, 프랑스령 모로코는 치소를 해안의 라바트로 정했다. 알라위 왕가 역시 1925년 라바트로 천도, 페스는 약 2세기 만에 다시 수도 지위를 잃었다.
3.8. 프랑스령 모로코: 빌 누벨
빌 누벨 이전의 다르 드비베그
빌 누벨의 거리
프랑스 지배기에 페스는 여러 사회적, 건축적 변화를 겪었다. 초대 총독 위베르 리요테는 기존 도시의 개발 대신 주둔군 사령부이던 서남쪽의 다르 드비베그 일대에 신도시를 세워 빌 누벨 (Villes Nouvelles)이라 명명했다. 이는 동화를 택했던 알제리 식민 경영의 경우와 달리 '연대'로써 기존 체제를 존속시키는 리요테의 구상에서 비롯된 발상으로, 이로써 구도시는 메디나로써 보존될 수 있었다. 현지인들이 여전히 다르 드비베그라 부른 빌 누벨에는 유럽계 주민들이 정착해 점차 유럽풍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다만 신도시와 구도시의 '공존'은 당국의 투자와 개발이 전자에 집중되며, 결과적으로 후자의 소외로 이어졌다. 이러한 '도시적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구도시의 부유층은 인프라가 발달한 신도시로 이주하고, 부유해진 신도시의 유럽인들이 본래 현지인들의 소유이던 교외 지역의 토지를 차지하며 터전을 잃은 농촌 빈민들이 구도시로 이주되면서 두 도시 간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따라서 구도시의 반제국주의 정서가 강했고, 그 중심에 있는 알 카라위인 대학이 양성한 민족주의자들은 모로코 독립 운동의 핵을 이루었다. 1930년 7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지역을 분리해 통치하며 후자에 큰 자치권을 부여하는 베르베르 다히르 법이 제정되자 이를 갈라치기라 여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벌였다. 1937년에는 메크네스의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알 카라위인, 라시프 모스크릏 중심으로 열렸다. 이에 당국은 프랑스 군을 모스크들 자체를 비롯한 페스 엘 발리의 각지에 배치하는 것으로 맞섰다. 2차 대전 후반기 들어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은 페스에 모여 독맂 요구안을 작성, 1944년 1월에 연합군 측에 제출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민족주의자 지도부를 체포하고 페스 등 모로코 각지에서 열린 시위들을 강경 진압했다.
3.9. 현대
1956년 독립 후 페스는 모로코 제3의 도시였지만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다. 부유층은 더 개발된 해안의 카사블랑카 및 라바트로 이주했고, 유대인들 역시 카사블랑카 혹은 이스라엘 등 해외로 대거 떠났다. 60년대 중반까지 매우 천천히 늘던 인구는 1971년의 32만 5천에서 2000년 94만으로 크게 늘었고, 페스는 제2의 더시가 되었다. 특히 빌 누벨의 시가지가 더욱 확장되었고, 1975년에는 시디 모하메드 벤 압델라 대학이 설립되었다.1981년에는 구도시 일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한편 하산 2세와 '납의 시대'에 페스의 경제적 불평등, 실업나, 주택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1990년 12월, 페스에서는 대학생 및 청년들의 주도로 전면 파업과 함께 폭동이 벌어져 여러 호화로운 건물들이 약탈 혹은 방화를 당했다. 이때 5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체포되었다. 정부는 진상 규명 및 임금 인상을 약속했지만, 일부만 지켜졌다.
현재 페스는 모로코 제2의 도시이자 북부의 중심지이며, 굴지의 관광 도시이다. 페스의 유력 가문들은 지금도 모로코 정치에 큰 영향을 행사한다. 최근 시 당국은 약 백년간 방치되었던 메디나 일대의 건물들을 복원, 수리하고 오염된 페스 강의 정화에 나서고 있다.
4. 교통
페스 사이스 공항이 있다. 모로코 국철 횡단간선의 주요 기점으로 페스 이동 구간은 단선 비전철로 바뀐다.페스 기차역에서는 카사블랑카, 탕헤르, 우지다 등과의 열차가 다닌다.
5. 관광
1276년에 세워져 1885-86년에 증축된 밥 알 데카킨 성문의 내외부 모습 |
알라위 왕조 황궁인 페스 왕궁
구시장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유대인 지역(Mellah)[10]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시나고그 또한 소재하고 있다. 그밖에 LG TV광고에도 나왔던 유서깊은 천연가죽염색공장과 전통의상 상점, 상업지구와 주거지구가 혼합되어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근처에 있는 도시인 메크네스와 외곽에 있는 로마 시대 유적을 보기 위해 많이 세트(?)로 방문하는 도시이다.
다만 가죽염색공장은 정말로 천연가죽 염색인지라 고약한 냄새를 각오해야 한다. 화학처리가 아닌 순수 천연가죽염색이기에 재료가 새똥이라든지 온갖 자연재료를 쓰고 값도 꽤 비싸다. 물론 이걸 수공업으로 사람이 해야하기에 일이 고되긴 하니 무조건 비싸다고 욕할 게 아니긴 하다. 갓 도착한 가죽 원단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새똥과 섞어서 사람이 손과 발을 한참을 비비며 작업해야 하니 그 작업자야말로 지독한 냄새를 견디며 일해야 한다. 더불어 석회질 제거, 세척하고 가죽 잔털 제거, 염색, 말리기까지 모조리 수공업을 해야 한다. 현장에 가면 관광객들이 이 모든 걸 구경할 수 있는데 보면 이거 비쌀만하다고 느낌이 온다.
5.1. 알 카라위인 모스크 & 대학
9세기에 마드라사로 세워져 현재까지 대학으로 운영되는, 세계 최고 (最古) 대학교로 유명하다. 이슬람권 유수의 대학의 창립자가 여성인 것도 흥미롭다. 1963년 알 카라위인은 국립 대학으로 지정되었다.
6. 여담
- 수원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인구수만 보면 두 도시의 규모가 비슷하다.
- 아틀라스 산맥 끝자락, 해발 400m의 고원 지대에 위치하여 겨울에는 영하권까지 떨어지기도 하는 등 기후가 선선하다.
- 과거 모로코를 상징하던 도시였기에 튀르키예어로는 여전히 모로코를 파스라 부른다. 모로코 자체는 마라케시에서 유래된 것과 비교된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의 상징이던 페스 모자 역시 일대의 전통 모자인 타르부쉬를 차용한 것이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2]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3] 모로코 아랍어 방언.[4] 표준 아랍어, 베르베르어. 튀르키예어에서 모로코를 가리키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다만 도시는 페스라고 구분한다.[5] 현 밥 엘귀사 (알 아지사) 일대[6] 그래서 '아프리카의 아테네'라 불렸다.[7] 이후 사드 왕조는 스페인과 동맹한다[8] 또한 본래 우다야와 대립하던 압둘라가 결국 그들과 친해진 것도 대립의 원인이 되었다[9] 다만 마라케시 역시 공동 수도였다[10] 이스라엘이 수립되면서 대부분의 페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