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의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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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تطوان베르베르어 ⵜⵉⵟⵟⴰⵡⵉⵏ
스페인어 Tetuán
모로코 북부의 도시. 인구는 대략 40만명으로, 모로코에서 11번째로 큰 도시이다. 북부의 최대도시 탕헤르에서 동남쪽으로 50km, 스페인령 세우타에서 남쪽으로 30km, 관광지인 셰프샤우엔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져 있다. 마르틸 협곡에 위치해 있으며, 항구 도시는 아니지만 강을 통해 5km 정도만 가면 바다로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스페인의 빌바오와 유사한 입지이다. 지명은 베르베르어로 눈이라는 뜻이며, 반달 왕국 시절 촌장이 외눈박이 여성이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모로코의 역사 도시들 중 하나이다. 특히 15세기 이후 안달루스의 난민들이 정착하여 무어 양식의 옛 건물들이 즐비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2. 역사
로마시대 타무다 유적. 현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져있다. | |
테투안의 고풍스러운 메디나 (구도심) |
기원전 3세기 마우레타니아 왕국 시대에 도시가 세워졌고,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요새 도시로 변모시켰으나 5세기 반달족에게 파괴되었다. 1286년 마린 왕조 대에 카스바와 모스크가 세워진 것이 현 도시의 기원이다. 그러다 1307년 술탄 아부 싸비트 아미르[1]가 세우타를 기반으로 한 우마르의 반란에 맞서기 위해 테투안을 본부로 택하며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해적들의 소굴으로 전락한 테투안은 1431년 카스티야 해군의 보복 원정에 의해 파괴되었다. 1436년에는 세우타의 포르투갈 지휘관 페드루 지 메네제스가 후환을 방지한다는 명목 하에 아들 두아르테 휘하 습격대를 보내어 복구 중이던 테투안을 공격하였다. 15세기 말엽 그라나다 출신 귀족 알리 알 만드리가 안달루스 난민들과 당도하여 도시를 재건하였고 와타스 왕조에 복속하였다. 그는 안달루스 귀족 가문의 딸인 사이다 알 후라와 결혼하였다.[2]
사이다 알 후라는 중세 후반 마그레브의 여성들 중 가장 유명한 세력가였다. 안달루스 출신 유력 가문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을 받은 그녀는 아랍어 외에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에 능통하였고 남편에 이어 2인자 역할을 하다가 1515년 그가 사망하자 테투안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녀는 테투안의 바르바리 해적을 이끌며 서부 지중해에 큰 영향력을 미쳤고, 1541년 와타스 술탄 아흐마드의 청혼을 받아들여 재혼하였다. 이 정략결혼은 수도 페스가 아닌 테투안에서 벌어졌는데, 모로코 역사상 기록된 왕실 결혼 중에서 남자 쪽이 처가로 가서 결혼한 것은 이 사례가 유일하다. 또한 사이다의 동생 물라이 이브라힘은 와타스 조의 재상이 되었다. 한편 자신을 쫓아낸 스페인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던 그녀는 알제의 하이르 앗 딘과 연대하여 지브롤터 해협에서 해적질로 큰 부를 축적하였다. 다만 1542년 10월 사위 무함마드 알 하산 알 만드리의 정변으로 사이다의 30년 집권은 종식되었고, 그녀는 셰프샤우엔으로 은퇴한다. 그후로도 마그레브 해안의 스페인 거점에 대한 해적질은 이어졌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1565년 스페인군이 항구를 파괴하였다.
17세기 스페인에 의해 추방된 무어인들의 유입 후 테투안은 바르바리 해적 기지가 되었다. 잡혀온 포로들은 마즈모라스라 불린 미로형 지하 감옥에 수용되었고, 몸값이 지불되지 않으면 노예로 팔렸다. 도시를 방문한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포로의 수가 3천에 이른다고 기록하였다. 17세기 말엽, 알라위 왕조의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격전 끝에 부유한 앗 나크시스 가문이 가문이 지배하던 테투안을 점령하였다. 그후 알라위 조의 탕헤르 총독 아흐마드 알 리피와 베르베르 군대의 지휘관 자이쉬 알 리피가 테투안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고, 메셰와르 궁전과 파샤 모스크와 같은 건물들을 세웠다. 알 리피의 죽음 후 테투안은 재차 자립하였고 명목상으로만 술탄의 권위에 복종하였다. 1829년 해적질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트리아 해군이 테투안을 포격하였다. 1830년 프랑스의 알제 정복 후 알제리 난민들이 테투안에 정착하였다.
1860년의 테투안 전투
19세기 들어 모로코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패하고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는 등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어진 1859-60년의 스페인-모로코 전쟁 시에는 테투안에서 스페인 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860년 1월 31일) 며칠 후인 2월 4일 스페인 군은 테투안을 점령하였고, 사령관 레오폴도 오도넬은 테투안 공작에 봉해졌다. 두달 후 전쟁은 배상금 납부로 마무리되었으나 스페인 군은 1862년 5월에야 철수하였다. 1913년 스페인은 기어코 북부 모로코를 식민화하였고, 이때 테투안은 그 총독부로 기능하였다. 1956년 지배가 끝날 때까지 테투안은 시가지의 확장과 함께 발전하였다. 비록 독립운동 역시 일어났지만 현재까지도 테투안의 주민들은 아랍어와 함께 스페인어를 주로 사용한다. 안달루스 이주민들의 후손인 유대인들 역시 테투안에 수백년간 공존하였으나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대부분 이주하여 현재 유대 공동체는 백여명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