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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디완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아랍어: صفاقس[1]
영어, 프랑스어: Sfax
1. 개요
스팍스 메디나의 수크 (전통시장) |
2. 역사
스팍스의 카스바
스팍스 성벽
현재 시가지 남쪽 교외에 남아있는 테나이 유적은 페니키아 인들의 식민 도시로 지어졌다. 로마 지배기에 아일리아 아우구스타 메르쿠리알리스 (Aelia Augusta Mercurialis)로 명명된 테나이는 자체 동전을 주조하고 신전과 성벽, 목욕탕이 세워지는 등 번영하였다. 한편 현재 시가지에는 그리스어로 '요새화된'이란 의미인 타파루라가 세워졌고, 이는 현지 베르베르어로 같은 의미인 크사르 사파케즈로 전환되었다. 그러다 9세기 들어 튀니지 해안을 따라 방어 성채를 세우던 아글라브 왕조에 의해 일대의 옛 타파루라 유적 위에 성채가 세워졌고, 크사르 사파케즈의 아랍식 지명인 부르즈 스팍스로 명명되었다. (후일의 카스바) 그 배후지에 주거지가 형성되자 849년 아글라브 왕조의 5대 아미르 무함마드 1세와 카디 알리 빈 살렘은 일대에 성벽을 둘러 아랍식 도시를 세웠다. 851년까지 성벽과 대사원이 세워지며 현 메디나의 대략적인 모습이 갖추어졌다.
2.1. 중세
10세기 들어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고 한동안 이프리키야는 혼란에 휩쌓였다. 912년 압바스 왕조를 지지하며 파티마 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시칠리아의 아흐메드 빈 가르브는 튀니지 해안을 습격하며 스팍스에 이르렀다. 주민들은 저항했지만 시칠리아 군에 점령되었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이후 스팍스는 파티마 조에게 수복되어 반세기 이상 그 지배를 받았는데, 국교인 쉬아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지 않고 학자 아부 이샤크 알 즈비냐니의 주도 하에 순니 말리키파 교리를 유지하였다. 한편 972년 파티마 조가 중심을 이집트로 옮기자 일대는 지리 왕조에게 위탁되었고, 스팍스는 남부의 주요 항구로써 중시되었다. 977년 일대를 지난 여행가 이븐 하우칼은 스팍스가 아름다운 올리브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기름은 이집트, 시칠리아, 마그레브, 유럽 (룸)으로 수출된다고 기록하였다. 주민들은 비옥한 비옥한 케르켄나 섬[2]에 가축을 풀어 목축을 했다고 한다.2.1.1. 스팍스 후국
9-10세기 마그레브 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인 스팍스 대사원의 내부
지리 조의 2대 아미르인 아불 파스 알 만수르는 988년 대사원을 확장하는 등 여러 건축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1045년 지리 조의 4대 아미르 알 무이즈는 이스마일파를 버리고 현지의 주류인 순니 말리키파를 국교화하며 압바스 칼리파에 복속하였다. 이에 파티마 조의 알 무스탄시르는 베두인 부족인 바누 힐랄과 술라임을 보내 지리령 이프리키야를 초토화시는 것으로 응징하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1067년 지리 왕족 출신의 이븐 멜릴이 힐랄, 술라임 부족들과 동맹하여 스팍스에서 자립하였다. 1099년 이븐 멜릴이 사망한 후에도 스팍스는 마디야 일대로 국한된 지리 조에 명목상으로만 복속한 채 사실상의 도시 국가로 남았다. 그러던 1148년, 마디야와 수스를 점령한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함대가 남하하여 7월 12일 스팍스 역시 짧은 전투 끝에 점령하였다. 노르만 인들은 현지 유력자 셰이크 아불 하산 알 페리아니를 처형했기에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2.1.2. vs 노르만
1154년 시칠리아 국왕 로제르 2세가 사망하고 마그레브에서 무와히드 왕조가 동진해오자 가베스 등 튀니지 해안의 도시들에는 이교도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스팍스에서는 알 페리야니의 아들 오마르 페리야니의 주도로 주민들은 봉기를 준비하였다. 몰래 무기를 제조하는 한편 일단의 주모자들은 거지로 위장하여 구걸하는 척 집집마다 방문하여 전투원을 모집하였고, 각 가정은 콩의 갯수로 전투 가능 인원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1156년 새해, 기독교도들이 폭죽을 터뜨리고 보석으로 치장한 소를 앞세운 행진으로 신년 카니발을 벌이자 모의자들은 함께 어우러져 즐기는 척을 하다가 분위기가 분위기가 무르익자 봉기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노르만 인들은 살해되거나 도주하였고, 스팍스에는 현지 주민들의 자치가 회복되었다. 다만 3년 후 무와히드 칼리파 아브드 알 무민이 동진해오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에 복속하였다.2.1.3. 내전과 안정
밥 엘 디완 일대
1159년에 시작된 무와히드 조의 지배 역시 오래가지 못하였다. 1185년부터 무라비트 왕조의 잔당인 바누 가니야가 튀니지 남부를 습격하였고, 가프사와 토주르가 그에 가담하였다. 다만 스팍스는 최소한 중립을 유지하여 1187년 무와히드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반란에 가담한 도시들의 성벽을 허물었을 때에도 무사하였다. 1195년 스팍스를 포함한 튀니지 전역은 바누 가니야의 야흐야 빈 이샤크에게 점령되었다. 1204년 야흐야를 축출하고 튀니지를 수복한 무와히드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스팍스 주변에 366개의 우물을 뚫었고, 이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앗-나시리야로 명명되었다. 다만 그의 사후 무와히드 조는 분열되었고, 1229년 스팍스는 약간의 저항 끝에 하프스 왕조령이 되었다. 그 4대 군주인 이브라힘은 전임 군주인 조카 야흐야 2세와 그 자녀들을 살해했는데, 스스로 후자의 숨겨진 아들이라 주장한 아흐마드 이븐 아비 아므라가 반란을 일으켰다. (1282년)
아흐마드는 가프사에 이어 스팍스를 장악하고 결국 튀니지까지 점령, 이브라힘 1세를 살해하였다. 1284년에 이브라힘의 동생 우마르 1세가 아흐마드를 처형하며 하프스 조의 지배는 회복되었지만, 이브라힘의 아들 야흐야가 베자이아에서 자립하여 내전이 이어졌다. 혼란을 틈타 1287년 메노르카 섬을 점령한 아라곤 왕국 해군이 스팍스 앞의 케르켄나 섬을 점령하였다. 1318년 내전을 마무리하고 하프스 조를 통합한 야흐야의 아들 아부 바크르 2세 (알 무타와킬 1세)는 1335년 케르켄나 섬을 수복하였다. 다만 1346년 그가 사망한 후 하프스 조는 내분과 마린 왕조의 침공으로 혼란에 빠졌고, 스팍스를 비롯한 튀니지 남부는 가베스에 기반한 바누 막키의 수중에 들어갔다. 1370년, 아부 바크르의 손자인 베자이아의 아흐마드 2세가 재차 하프스 조를 통합하였다. 그는 스팍스를 두고 대립하던 막키 가문의 아흐메드와 압델 말레크를 축출하고 튀니지 남부를 수복하였다.
2.1.4. vs 스페인
15세기 들어 전성기를 맞은 하프스 왕조 하에서 스팍스는 번영하였다. 특히 해상 무역이 활성화되어 일대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다마스쿠스, 마르세유, 제노바 등지로 수출되었다. 또한 당시 세워진 건축물의 명문들을 통해 레콘키스타를 피해 안달루스를 떠난 무어인 가문들 중 과학자 집안인 샤르피와 무함마드 13세의 후손인 앗 자갈 가문 등이 스팍스에 정착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한세기 이상 안정을 누리던 일대는 16세기 하프스 조의 쇠퇴와 함께 다시 혼란에 휩쌓인다. 1535년 오스만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물라이 하산의 요청에 스페인 군이 튀니스를 점령, 하프스 조를 속국화하자 튀니지 각지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스페인-제노바 해군이 파견되어 진압했으나, 1540년 주둔군이 철수한 후 스팍스는 사실상 자립하였다. 그리고 1550년 마디야를 점령한 해군 제독 투르굿에 의해 일대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2.2. 근대
메디나의 구시가지와 해안 퇴적지에 세워진 신시가지
17세기 중반 튀니지에는 자치적인 무라드 왕조가 세워졌다. 스팍스는 바르바리 해적 거점임과 함께 학문의 거점이 되었다. 아불 하산 엘 카라이과 알리 엔누리 등이 대표적인 학자로 각각 마드라사를 세웠고, 후자는 성 요한 기사단으로부터 몰타를 해방하려는 지하드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역사가 마흐무드 메그디체는 스팍스의 역사를 다룬 '누즈하드 알 안타르 피 아즐라비 타와리크 와 알 아크바르'를 저술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일대 지역사 연구의 핵심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18세기 들어 튀니지를 지배하게 된 후사인 왕조는 기존 도시와 성밖 모두에 건설 사업을 벌였다. 쇠락했던 대사원은 1783년까지 하프스 왕조 시절 규모로 증축되었고, 1758년에는 새 미흐랍이 더해졌다. 높은 성벽 역시 재건되었고, 많은 인구를 감당하기 벅차진 나스리야 저수조의 보완을 위해 2개의 큰 저수조 건설 메디나라 불리게 된 성벽도시 주변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띠를 이루게 되었다.
도시 확장에 있어 특히 수세기 간의 간척으로 육지가 된 카스바 방면 해안이 개발되었다. 한편 18세기 중반 들어 베네치아 공화국과 후사인 왕조 간의 무역 분쟁이 일었고, 1747년에는 베네치아 함대가 스팍스 인근에 나타나 라스 알 마크베즈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위기를 느낀 주민들은 신도시로 개발되던 해안 지대를 프랑크 (유럽인) 구역으로 설정, 유대인과 기독교도의 정착을 장려하였다. 이로써 프랑크 구역은 일대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동시에 베네치아발 공격으로부터 완충 지대 역할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1785-86년 베네치아는 2년간 4차례나 스팍스를 포격하였고, 동쪽 엔나르 성탑 옆에 큰 성채를 세워 도시를 포위하기도 하였다. 다만 결국 베네치아는 본국에 대한 프랑스의 침공으로 후퇴하였고, 성채는 철거되었다.
2.2.1. vs 프랑스
1900년경 스팍스 신시가지의 전경
19세기 들어 마그레브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를 침공하였고, 같은해 프랑스 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스팍스의 프랑크 구역에 성벽을 둘러 현지인들과 분리시켰다. 프랑스를 통한 근대화가 진행되어 1860년 우체국과 전신국이 세워졌고[3], 1864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명목상 지배권이 거두어졌다. 마침내 1881년 바르도 조약으로 튀니지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자 스팍스는 반외세 봉기를 일으킨 세 도시들 중 하나였다. 봉기는 두 달간 이어졌고, 알리 벤 칼리파 엘 나파티와 모함마드 캄문이 각각 메디나 외부와 내부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툴룽에서 파견된 6척의 철갑선[4]을 포함한 13척의 프랑스 함대[5]가 도시를 포격하였다. 뒤이은 격렬한 전투 끝에 프랑스 군은 7명의 전사자와 32명의 부상자를 내고 스팍스를 점령하였다. (1881년 7월 16일) 이후 프랑스 군은 75년간 카스바에 주둔하였고, 대사원의 회랑을 마굿간으로 활용하며 현지인들에게 수모를 주었다. 이어진 도시 계획에서 메디나는 유럽식 신도시에 밀려 소외되었고, 대부분의 교역과 경제 활동을 빼앗겨 낙후되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나치 독일의 주요 기지였으나 1943년 4월 10일 영국군에게 해방되었다. 종전 후 프랑스에 반환되었다가 1956년 독립한 튀니지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른다. 2012년 2월 17일, 튀니지 정부는 스파스의 메디나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