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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샤르트르 전경 | 밤의 샤르트르 대성당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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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국어 | 샤르트르 대성당 |
영어 | Chartres Cathedral | |
프랑스어 | Cathédrale de Chartres | |
국가·위치 | 프랑스 상트르발드루아르 샤르트르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79년[1] | |
등재기준 | (i)[2], (ii)[3], (iv)[4] | |
지정번호 |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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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르트르의 심장에 위치한 랜드마크이자, 샤르트르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며, 고딕 양식을 집대성하여 전성기 고딕 양식을 시작했다고 평가받는 중요한 대성당. 이후 지어진 많은 고딕 양식의 성당들이 샤르트르 대성당을 참고했을 정도로 고딕 양식 건축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통적으로도 고딕 양식의 성당 중 그 조각상들, 바닥의 포석들,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면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성당 중 하나로 여겨진다.성당은 13세기 초에 그 전에 있었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의 잔해 위에 세워졌다.[5][6] 이렇게 지어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증축이 이루어졌는데, 16세기에 건설된 방돔 예배당이나 북쪽 첨탑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대표적인 성유물로 성모의 베일[7]이 있는데, 이 덕분에 성당은 성모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순례지로 여겨졌고, 보스(Beauce) 평원[8] 근방과 샤르트르에서는 성모 신앙이 주된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대칭의 서로 다른 두 첨탑과 크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특징으로, 특히 '샤르트르 블루'(Chartres Blue)라고 불리는 파란색이 인상적이다. 1862년에는 보호되어야 할 문화재(사적) 목록에 이름을 올렸으며, 1979년에는 건축적, 예술적, 역사적 탁월함을 인정받아 프랑스의 첫 유네스코 세계유산들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2. 역사
성당의 성모 신앙에 대한 전설은 14세기 즈음에 성당의 수도승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1420년에는 성당의 한 설교자가 기원전 1세기의 카르누테스(Carnutes)족[9] 켈트족 사제(드루이드)들이 살았던 고대의 동굴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전설에 따르면, 드루이드들은 그 동굴에서 성모상[10]을 모셨고, 성모가 잉태하기 전에 이 사제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염원하여 기도(...)했다고 하는데...상스(Sens) 주교좌와 비교했을 때, 샤르트르의 주교좌가 더 오래됐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함으로 보이는(...) 후대의 전통과 전설에 따르면, 샤르트르의 성당 자체는 350년 경[13]에 처음 설립되었다고 한다. 성당의 이름은 도시의 첫 주교 이름을 따서 "아방탱(Aventin) 대성당"으로 불렸다고. 그러나, 성모를 성당 수호성인[14]으로 했던 샤르트르의 첫 성당은 743년[15] 아키텐 공작이었던 위날드 1세(Hunald I)의 병사들에 의해 전소되었다. 이후에도 성당을 재건했는데, 재건된 두번째 성당은 858년 덴마크 바이킹들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성당은 다시금 재건되었고, 876년 대머리왕 샤를이 성당에 '성모의 베일'을 봉헌한 이후 샤르트르 대성당은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이후에도 성당의 수모는 계속되었는데, 962년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와 이에 대항한 샤르트르 백작과 블루아 백작 티보 1세(Thibauld I) 사이의 충돌로 한 번 더 불탔고, 이후 1020년에도 벼락을 맞는 일이 있기도 했다.
당시 주교였던 샤르트르의 풀베르(Fulbert)[16]는 곧 성당의 재건축에 착수했고, 중간에도 골조가 불타는 등의 일이 있기는 했지만, 다음 주교 대인 1037년, 성당은 다시금 설립되었다. 이 성당은 두 층으로 만들어졌는데, 지하 예배당에는 성유물을 보관했고, 지상에는 주교가 주관하는 의식들이 행해졌다. 건물의 서쪽 면에는 두 개의 탑들이 세워졌다.[17] 이 풀베르의 성당은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성당은 아니다. 후술할 1194년의 화재 이후 대규모의 공사가 이루어진 뒤에야 우리가 보는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
1134년에는 샤르트르 대부분을 전소시킨 화재가 있었는데, 이 때 성당은 피해를 받지 않았으나, 그래도
특히나 재건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은 당시 기준으로, 최대 규모 및 최고 비용을 자랑했다.[24] 샤르트르 대성당의 이러한 채광창들은 당시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이 얼마나 발달되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로도 활용된다. 성당 안의 기둥들 사이 각각의 아치 밑에는 두 개의 채광창과 그 위 하나의 장미창이 있는데, 그 전까지 지어졌던 다른 곳들에서는 장미창의 크기가 그 밑의 두 개의 아치 모양 채광창들의 크기보다 훨씬 작았지만, 샤르트르 대성당에서는 장미창의 면적을 대폭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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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대성당의 천장을 찍은 모습 사진상 왼쪽이 후진(Apse)이 있는 동쪽이며, 양 옆의 아치에 채광창들이 위치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
건축 과정 상, 서쪽 정문의 장미창들과, 익랑(transept)[25]의 창문들이 먼저 설치되었다.[26][27] 1221년부터 수도승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하니, 이로써 이 시기 즈음에 성당의 후진(Apse)[28]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궁륭(Vault)[29]이나 익랑의 박공과 같이, 현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큰 구조물들은 1194-1225년의 거진 30년의 시간 동안 완공되었으며, 1240년에는 모든 채광창들의 설치가 끝났고, 1260년에는 축성식이 거행됨으로써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고딕 건축 양식의 극치인 샤르트르 대성당이 만들어졌다.[30]
르네상스 시기에도 성당은 많은 개조를 거쳤는데, 1506년에는 북쪽 탑 위에 서 있던 첨탑이 벼락을 맞고 타서 없어져서 "새 종탑(clocher Neuf)"을 돌로 만들어 1513년에 다시 세워놓았다.[31] 이 건축가는 1514년에는 성가대석 울타리 건축을 시작했고[32], 1520년에는 본당 북쪽 방면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시계가 있는 조그만 부속 건축물[33]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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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대성당 성가대 울타리 성모의 탄생부터 승천까지 성모의 일대기를 40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정교한 석상들과 석제 장식들로 표현하였다. |
18세기에도 대성당은 조금씩 개조되었는데, 1723년에는 새로 종 5개를 설치했다. 여기서 끝나면 좋았겠지만, 1757년에는 성당의 수도승들이 빛이 잘 안 든다는 이유[34]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을 좀 더 빛을 잘 들이는 불투명한 회색빛 창으로 바꾼답시고 12개 정도를 파괴했다.[35] 정말 다행히도 이미 1700년 정도에 한 골동품상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려놓은 수채화들이 있어서 추후에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793년, 프랑스 대혁명기에 대성당은 '이성의 전당[36]'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공포 정치기에는 성당 건물 자체도 손상을 입었는데, 채광창들과 남쪽 정문의 석상들이 파괴되었고, 성당 안의 모든 집기들이 사라졌으며, 성당 안팎의 모든 납으로 도금된 물건들에서 납을 공출하여 전장의 총탄으로 사용되기 위해[37] 녹여졌다.
1836년에는 2명의 납 장인[39]들이 부주의하게 화로를 그대로 켜 두고 퇴근하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불길은 두 종탑을 삼키며 15m 높이로 치솟았으며, 강한 바람과 마른 목재 구조 때문에 더더욱 심해졌다고. 심지어는 강한 남서풍 때문에 불타는 잔해들이 주위로 튀는 바람에 많은 시민들 또한 대피해야 했다. 납으로 된 지붕이 녹으면서 성당 안에는 납이 개울이 되어 흘렀으며, 성가대석으로 나무와 철제 잔해가 가득 찼고, 종탑이 화염에 휩싸이면서 종들은 떨어져 녹아버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성당의 전소를 피하고 그 아름다운 채광창들을 보존하기 위해 성당의 아랫부분을 필사적으로 지켜냈다. 불길은 납으로 된 지붕과 밤나무 목재로 된 골조들[40] 을 삼키며 밤 내내 지속되다가 아침 10시 정도가 되어서야 연기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성당이 전소되지는 않았으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41]가 연상되듯이 지붕이 불타 벌거벗어진 채로 하늘을 마주보게 되었다. 성당을 다시금 보수하기 위해 샤르트르의 주교는 기부를 독려했고, 성당의 아름다움에 큰 감명을 받았던 빅토르 위고 또한 앞장 서서 기부를 독려했다. 성당을 재건하기 위한 작업은 1839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2년 정도의 시간 끝에 우리가 현재 보는 구리로 된 지붕이 만들어져 아직까지 수백 년 동안 서 있는 성모의 성소를 덮고 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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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샤르트르 대성당 프랑수아 페르노(François Pernot)의 그림으로 샤르트르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Chartres)에 소장되어 있다. |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는 미군 대령 웰본 그리피스(Welborn Griffith) 덕분이다. 1944년 8월 16일, 당시 상부에서는 성당에 독일군이 들어와 있고, 성당의 종탑들이 독일군의 감시탑으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하여 대령에게 이를 파괴하라는 지령을 내렸는데, 대령은 다른 한 명의 자원자와 함께 자원하여 성당 내부를 확인하러 들어갔다. 대령은 안에 독일군이 없음을 확인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종탑의 종을 울렸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같은 날 샤르트르 근처의 레브(Lèves)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사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 수훈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979년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목록에 샤르트르 대성당을 등재시켰는데, 크게 세 가지의 이유를 들었다: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 샤르트르 대성당은 상당히 빠른 기간에 거의 단숨에 지어졌다. 건축물과 장식물의 통일성 덕분에 중세 기독교의 일관된 모습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볼 수 있다.
* 샤르트르 대성당은 상당히 빠른 기간에 거의 단숨에 지어졌다. 건축물과 장식물의 통일성 덕분에 중세 기독교의 일관된 모습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볼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 샤르트르 대성당은 프랑스 안팎으로 고딕 예술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 보베 대성당 등의 성당 건축가들은 샤르트르 대성당의 설계를 토대로 더욱 풍부하게 했을 뿐이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스파냐의 레온 대성당 역시 샤르트르 대성당을 본뜬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 부문에서 샤르트르 공방은 부르주부터 상스, 르망, 투르, 푸아티에, 루앙, 캔터베리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다. 그 방식은 샤르트르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공들이 지역 공방을 설립하거나 또는 샤르트르에서 색칠한 유리를 외부 지역인 르망, 루앙에 수출하는 식이었다.
* 샤르트르 대성당은 프랑스 안팎으로 고딕 예술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 보베 대성당 등의 성당 건축가들은 샤르트르 대성당의 설계를 토대로 더욱 풍부하게 했을 뿐이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스파냐의 레온 대성당 역시 샤르트르 대성당을 본뜬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 부문에서 샤르트르 공방은 부르주부터 상스, 르망, 투르, 푸아티에, 루앙, 캔터베리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다. 그 방식은 샤르트르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공들이 지역 공방을 설립하거나 또는 샤르트르에서 색칠한 유리를 외부 지역인 르망, 루앙에 수출하는 식이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샤르트르 대성당은 하나의 상징인 동시에 기본적인 건물 유형이다. 고딕 대성당의 문화적, 사회적, 미학적 실체를 정의할 때 가장 분명한 사례로 손꼽힌다.
* 샤르트르 대성당은 하나의 상징인 동시에 기본적인 건물 유형이다. 고딕 대성당의 문화적, 사회적, 미학적 실체를 정의할 때 가장 분명한 사례로 손꼽힌다.
3. 보물과 예술품
성유물 말고도 성당에는 봉헌품들과 같은 보물들도 있다. 이 보물들이 소장된 곳은 성당 동쪽 후진 뒤에 있는 생 피아(Saint-Piat) 예배당인데, 2000년부터 연구 및 복원/보수 공사가 진행되어 2024년 9월 21일에야 다시금 관람이 허용되었다. 이곳에 소장된 보물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생 테녕(Saint-Aignan)의 것으로 일컬어지는 감실[43]
- 샤를 6세의 도팽[44]이 봉헌했다 하는 15세기 초의 갑옷들
- 자개와 은으로 만들어진 배 모양을 한 향로
- 사도 요한과 세례 요한 사이에 성모의 탄생을 조각한 제단화(retable)[45]
- 휴론족과 아베나키족의 허리띠[46]
- 알렉상드르 티에리(Alexandre Thierry)[47]의 성체현시대[48]
- 알렉상드르 티에리[49]의, 성모와 아기 예수의 왕관
3.1. 성모의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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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의 성모의 베일(Voile de la Vierge de Chartres) 성당의 가장 중요한 성유물로, 수태고지 때에 성모가 썼던 베일이라고 한다. |
관습적으로 '성모의 옷[50]'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성유물함에 보관된 베일을 옷으로 착각하여 생긴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샤를마뉴에게 보낸 성유물이며, 수태고지 때에 성모가 쓰고 있던 베일이라고 한다.
11세기의 연대기에 따르면, 대머리왕 샤를이 샤르트르 공방전[51] 때에 이 베일을 깃발처럼 흔들며 싸웠다는 믿거나말거나 식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샤를마뉴의 손자였던 그는 876년, 이 성유물을 대성당에 봉헌했다. 이것은 서방의 가장 귀중한 성유물 중 하나인지라, 성당은 바로 성모의 성소로서 여러 순례자들을 끌어들이는 순례지가 되었다. 나중이지만, 루이 14세도 여길 순례했다고. 현재 성당이 지어지기 전 있었던 성당을 파괴했던 1194년의 화재 때 사람들은 이 베일도 소실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신의 섭리인지 화재 이후 2-3일 후에 잔해 밑에서 유물을 지키고 있던 사제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이 화재를 "성모께서 당신의 베일을 더 널찍한 성당에 놓고 싶으셨나 보다!"라고 해석되어 더 널찍한 성당을 만들기 위한 기부가 이어졌다고.[52]
18세기에야 성유물함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을 꺼내 보게 되었는데, 유물의 보존 상태가 상당히 나빴다고 한다. 몇세기 만에 꺼내서 보다 보니까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유물이 '옷'이 아니라 '베일'이었다는 것. 그동안 상자 속에 있어서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하던 터에 성당의 인장에는 '옷'처럼 묘사되어 와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성당의 가장 중요한 성유물을 '성모의 옷'으로 알아 왔었다. 어쨌거나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베일은 굉장히 정성스레 싸여 있었는데, 비단 자수와 금으로 장식된, '이리니[53]의 베일'이라고 명명된 8세기 비잔티움산 천에 싸여 있었다고. 이렇게 유물을 확인하고 나서는 다시 새 상자에 옮겨 담았었는데, 프랑스 대혁명 때 안에 있던 보석들은 다 팔렸고, 1793년에는 성모의 베일도 여러 조각으로 잘려서 팔렸다고 한다.
남아 있는 조각은 1927년에 리옹의 비단 박물관에 의해 감정받은 바 있는데, 시기상으로는 고대의 기원후 초기 세기로 밝혀졌지만, 문제는 비단의 질이 너무 좋았다는 데에 있었다. 성모가 살아있을 적 당시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봤을 때 비단의 질이 너무나도 좋았다는 것.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성유물이 조작되었거나 거짓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아니므로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하면 될 듯 싶다.
1876년, 베일은 성유물 봉헌 1000주년을 맞이하여 금으로 된 성체현시대에 보관되었고, 이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성당의 북쪽 면에 있는 순교자의 예배당에 전시되어 있다.
3.2. 스테인드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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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re-Dame de la Belle Verrière 성당의 172개 채광창 중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이며 동시에 가장 유명한 것이다. |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은 중세 시대의 모든 유물들을 통틀어 가장 완전하고 또 가장 잘 보존된 경우 중 하나이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들은 그 선명하고 화려한 색깔들로 유명한데, 특히나 이 문서 전체에서 언급되었듯이 파란색이 유명하다. 총 면적은 2,600㎡에 달하며, 172개의 작품들은 각각 성경의 이야기, 성인들의 생애 혹은 당시의 길드를 표현하고 있다.
샤르트르의 파랑
스테인드글라스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유명한 파란색부터 보도록 하자. 사실 이 선명한 파란색 자체는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처음 쓰인 색깔은 아니었다. 기원 자체는 로마네스크 양식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140년대에 들어서 생드니(Saint-Denis) 대성당[54]에서 약간의 조정을 거쳐 샤르트르 대성당에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파란색 유리를 만들기 위해, 유리 장인들은 나트륨 용제(溶劑)[55]에 코발트, 안티모니[56], 구리와 철을 혼합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는 이 항목 맨 위에 있는 Notre-Dame de la Belle Verrière와 같은 몇 안되는 아직까지 보존된 12세기에 만들어진 경우에만 해당된다. 13세기부터는 유리의 구성 물질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같은 파란색 유리를 만들더라도 코발트 대신 너도밤나무 재를 써서 더 깊은 파란색을 냈다고 한다.
12세기 당시 '파란색'이라는 색깔은 예술의 영역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상징성을 내포하기도 하였다. 이전에도 파란색은 상징적인 색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무덤에 파란색을 사용했으며, 로마인들이 보았을 때 야만인들만이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파란색은 야만을 뜻했다. 12세기부터 파란색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바로 동정녀 마리아와 천상의 세계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카페 왕조 초기에는 프랑스 왕국 전체가 성모에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결정적으로 보여준 것은 루이 7세[57] 때다. 그의 치세 때 '동정녀의 꽃'이었던 백합[58]과 성모를 뜻하는 푸른색을 왕실의 상징으로 도입한 것. 이렇듯, 파란색은 성모의 색이자 천상 세계의 색이었으며, 나중에는 왕실의 색이 되었다.
샤르트르 대성당이 성모 신앙의 심장이자 중심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스테인드글라스의 선명하고 강렬한 파란색이야말로 성모를 생각하는 당시 사람들의 신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4.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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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대성당 평면도 |
5. 참조 링크
- 샤르트르 대성당 프랑스 위키백과
- 샤르트르 대성당 공식 홈페이지 순례 안내
- 샤르트르 대성당이 불타 없어질 뻔 했던 날
- 1836년, 샤르트르 대성당의 화재
- 샤르트르 대성당 유네스코 공식 홈페이지
- 성모의 베일 프랑스 위키백과
- Notre-Dame de la Belle Verrière 프랑스 위키백과
- '샤르트르의 파랑' 프랑스 국립도서관
- 1995년 7월 15일자 화학저널 'Solvent'
[1] 2009년 부분수정[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1194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230년에 완공되었다.[6]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 있었던 이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은 1194년의 화재에 의해 소실되었다고 한다.[7] 이 베일은 sancta Camisa, 즉 성모의 옷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성유물함에 보관된 베일을 보고 옷으로 생각했기 때문.[8] 프랑스 중부의 비옥한 평원. 외르에루아르, 루아르에셰르, 루아레, 에손, 이블린 데파르트망에 걸쳐 있다. 이렇듯 주변이 평원인지라, 성당 반경 30km 거리까지 성당을 볼 수 있다고 한다.[9] 고대 샤르트르 지방에 살았던 골족의 일파, 지역의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보려면 샤르트르 문서 참조.[10] 정확히는 'Vierge devant enfanter', 즉 아이(예수)를 낳기 전 성모를 의미한다.[11] 7세기 프랑크 왕국 시기부터는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프랑크족의 트로이 기원 전설(...)에서 찾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경향성은 후대에 그 정체성을 골족에서 찾는 것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전설 또한 골족 드루이드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 경향성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겠다.[12] 다만 성모상은 기원전의 원조 성상이 아닌 7세기 때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13] 다만, 대개는 첫 성당 설립을 6세기 초로 본다.[14] 주보성인이라고도 함.[15] 혹은 753년[16] 중세 철학사의 한 분파였던 '샤르트르 학파'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17] 처음에 하나를 세우고 다음에 하나를 더 세우는 식으로 세워졌다고 한다.[18] 샤르트르 대성당의 서쪽 정문은 특별히 'Portail Royal'이라 하는데, 여기서 'Royal'은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계신 성모를 가리키는 것이다.[19] 지하 예배당, 두 탑들과 서쪽 정문같은 경우들만 상대적으로 경미한 피해를 입고 보전되었다고 하니...[20] 성모가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형상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대성당의 상징인 '샤르트르 블루'가 아낌없이 들어가 있다. 사진이나 도상에 대한 설명은 후술.[21] 여기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는데, 첫번째로는, 사실 화재가 보수 공사가 계획되어 있었던 성당 작업장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설, 두번째로는 수도승들과 주교 사이의 갈등을 타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발되었다는 설이 있다.[22] 다만, 이들이 하나의 공방에 소속되었거나, 동시대에 다같이 공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존재하던 여러 다른 공방에서, 다른 시대에 서로의 작업을 이어 받으면서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23] 익랑의 채광창들은 12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에 세워졌다고 하는 걸로 보아, 대략 1215년부터 1230년대 초까지 채광창들이 점차적으로 설치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듯.[24] 그야 이런 거 만드는 데 쓰는 비용이 돌을 쓰는 것보단 훨씬 비쌌으니...[25] 성당 건축상 정문에서 보았을 때 양옆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부분.[26] 그렇다고 해서 다 일괄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채운 것이 아니라 각각 하나하나 다 다른 내용이나 장식으로 채워넣었다![27] 남쪽 익랑 채광창들은 1225년과 1230년 사이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이어 북쪽 익랑 채광창들이 설치되었다고 한다.[28] 성당 정문의 반대쪽 끝 부분으로 대개 의식을 위한 제단이나 성유물을 모셔놓는 곳이다.[29] 바로 위 사진에서 두 개의 아치가 서로 교차하면서 생긴 천장을 의미한다.[30] 다만 완공 년도 자체는 1230년으로 본다.[31] 성당 입구가 서쪽에 있으므로, 성당 입구 기준 왼쪽 탑이다. 이 탑은 후기 고딕 양식인 "플랑부아양(Flamboyant, 불꽃처럼 타오르는) 양식"을 사용하여 건축되었다.[32] 성가대석 울타리는 교회 본당과 성가대석을 구별해 놓는 울타리로 프랑스어로는 "Chancel" 혹은 "tour de chœur"이라 한다. 말하자면, 성스러운 성가대석에 세속인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돌로 만들어진 '울타리'는 6m의 높이를 자랑하고, 후기 고딕 양식과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장식들과 구조물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엄청난 작품이다. 참고로 완공은 2세기가 지나서인 1716년에야 이루어졌다.[33] 시기를 고려해보았을 때, 기계식 시계가 아니라 해시계가 달려있는, 성당에 붙어 있는 조그만 건축물이다.[34] 특히나 성가대석이 잘 보이지 않아서 더 잘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고.[35] 재밌는 점은 같은 시기 파리의 성당이나 교회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36] 대혁명기 때의 무신론자들의 신전(...)으로 말그대로 이성을 신봉하는 곳이다. 대개 남아 있는 기독교 시설들을 이용압류하여 설립되었다.[37]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영국, 프로이센 등 주변 여러 유럽 국가들에 맞서서 1대 다수로 적들을 상대하는 전쟁 중이었다.[38] 프랑스어로는 'Concordat de 1801'이라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반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혁명기 중에는 교회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고, 성직자들은 공무원 취급을 받으며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일을 해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처벌을 받아 자신의 교구에서 추방되거나 심하면 죽임을 당했는데, 몇몇 지역에서는 이에 반감을 품고 정부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펴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기에,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1801년에 교회와의 화해를 통해 교회의 자율성과 종전의 지위를 회복시켜줬다.[39] 'plombier'로 적혀있기에 '배관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성당 지붕이 납으로 되어 있기에 지붕을 보수하기 위해선 납 장인들이 동원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워서 '납 장인'으로 적는다.[40] 이 지붕 골조들은 그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숲(forêt)'으로 불렸다고 한다.[41] 공교롭게도 샤르트르 대성당의 정식 명칭에도 성모를 뜻하는 'Notre-Dame'이 들어간다.[42] 19세기 당시는 산업 혁명이 한창이었기에, 성당도 그 수혜를 입어, 타지 않는 11,000개의 구리판으로 지붕을 덮고, 600톤의 철제 골조를 사용하여 복원되었다.[43] 성체성사 때 쓰이는 성체를 놓아두는 곳.[44] 프랑스에서는 왕위 계승자를 '도팽'이라고 불렀다.[45] 단, 이 작품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위탁하여 그곳에서 전시되고 있다.[46] 이 두 부족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로, 여기에 봉헌된 것은 왐품(wampum)이라 불리는 조개껍데기나 도자기로 만들어진 띠를 말한다.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47] 19세기 인물이다.[48] '성광'으로도 불리는데, 성체를 넣는 곳이라는 점에서 감실과 비슷하지만, 성시간, 성체 강복, 성체 거동과 같은 특별한 기간에 장시간 성체를 넣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전례 용구이다. 대개 굉장히 정교하고 화려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49] 앞의 인물과 동일 인물[50] 프랑스어로는 'chemise', 라틴어로는 'sancta Camisia(성스러운 셔츠)'[51] 9세기의 전투로 나무위키에 개별 문서로 존재하는 동명의 전투와는 다른 전투다! 시기를 보면 아마 샤르트르를 침공한 노르만족에 맞서 싸웠던 전투인 듯.[52] 이 일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이유에도 언급되었듯이, 화재 이후 세워진 성당이 당시 기준으로 굉장히 빠르게 건축된 이유를 설명해 줄 지도 모르겠다. 다만, 화재가 성당 입장에서는 일종의 호재(?)였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성당에서는 확장 보수공사를 하고자 하였지만, 여기 살던 수도승들은 확장 공사가 돈이 들고 또 성당을 확장하면 자기네들이 직접 거주하는 수도원 건물들이 부서지니까 이 공사에 회의적이었는데, 불이 나면서 어찌 됐든 다 파괴되어 버려 반대할 명분이 없어져 버린 것.[53] 로마 최초의 여제로 아테네 출신이다.[54] 프랑스 국왕은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랭스가 왕이 탄생하는 곳이었다면, 생드니는 왕이 죽어 묻히는 곳이다. 생드니 대성당에는 많은 프랑스 국왕들의 유해가 있으며,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무덤, 앙리 4세의 심장,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덤도 있다.[55] 용매와 같은 뜻으로, 용액의 매체가 되어 용질을 녹이는 물질이다. 다만 '용제'쪽은 공업 쪽에서 많이 사용되고, '용매'쪽은 화학 쪽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어라고.[56] 유리를 불투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넣었다고 한다.[57] 12세기 초반이었던 1137년 즉위[58] 수태고지 때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에게 백합을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