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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유산 | 1997년 피레네 산맥 : 몽 페르뒤 산 Pyrénées - Mont Perd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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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샤르트르 전경 | 밤의 샤르트르 대성당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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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국어 | 샤르트르 대성당 |
영어 | Chartres Cathedral | |
프랑스어 | Cathédrale de Chartres | |
국가·위치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상트르발드루아르 샤르트르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79년[1] | |
등재기준 | (i)[2], (ii)[3], (iv)[4] | |
지정번호 |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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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르트르의 심장에 위치한 랜드마크이자, 샤르트르 교구의 주교좌성당이며, 고딕 양식을 집대성하여 전성기 고딕 양식을 시작했다고 평가받는 중요한 대성당. 이후 지어진 많은 고딕 양식의 성당들이 샤르트르 대성당을 참고했을 정도로 고딕 양식 건축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통적으로도 고딕 양식의 성당 중 그 조각들, 바닥의 포석들,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면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성당 중 하나로 여겨진다.성당은 13세기 초에 그 전에 있었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의 잔해 위에 세워졌다. 1194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230년에 완공되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 있었던 이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은 1194년의 화재에 의해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증축이 이루어졌는데, 16세기에 건설된 방돔 성당(Chapelle de Vendôme)[5]이나 북쪽 첨탑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대표적인 성유물로 성모 마리아의 베일[6]이 있는데, 이 덕분에 성당은 성모신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순례지로 여겨졌고, 보스(Beauce) 평원[7] 근방과 샤르트르에서는 성모신심이 주된 신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대칭의 서로 다른 두 첨탑과 크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특징으로, 특히 '샤르트르 블루'(Chartres Blue)라고 불리는 파란색이 인상적이다. 1862년에는 보호되어야 할 문화재(사적) 목록에 이름을 올렸으며, 1979년에는 건축적, 예술적, 역사적 탁월함을 인정받아 프랑스의 첫 유네스코 세계유산들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2. 역사
성당의 성모신심에 대한 전설은 14세기 즈음에 성당의 수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1420년에는 성당의 한 설교자가 기원전 1세기의 카르누테스(Carnutes)족[8] 켈트족 사제(드루이드)들이 살았던 고대의 동굴과 연관시켜 설명한다. 전설에 따르면, 드루이드들은 그 동굴에서 성모상[9]을 모셨고, 성모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에 이 사제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염원하여 기도했다고 하는데,어쨌든 전설에 따르면 그 동굴은 로마 제국 시대 초기 기독교인들의 성소로 기능했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역사적 근거가 없는 후대의 전설이지만, 이 내용은 프랑스 전역으로 널리 퍼져 루이 14세가 성당으로 순례를 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1857년에는 드루이드들이 모셨다는 그 성모상을 모시기 위해 지하 성당(crypt)을 만들기도 했다고.[11] 비록 신빙성이 떨어지는 창작된 전설이지만, 이 이야기는 샤르트르의 성모신심이 그만큼 중요하고 널리 퍼져 있었던 신심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스(Sens) 주교좌와 비교했을 때, 샤르트르의 주교좌가 더 오래됐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함으로 보이는(…) 후대의 전통과 전설에 따르면, 샤르트르의 성당 자체는 350년 경[12]에 처음 설립되었다고 한다. 성당의 이름은 도시의 첫 주교 이름을 따서 "아방탱(Aventin) 대성당"으로 불렸다고. 그러나 성모 마리아를 성당의 수호성인[13]으로 했던 샤르트르의 첫 성당은 743년[14] 아키텐 공작이었던 위날드 1세(Hunald I)의 병사들에 의해 전소되었다. 이후에도 성당을 재건했는데, 재건된 2번째 성당은 858년 덴마크 바이킹들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성당은 다시금 재건되었고, 876년 대머리왕 샤를이 성당에 '성모의 베일'을 봉헌한 이후 샤르트르 대성당은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이후에도 성당의 수모는 계속되었는데, 962년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와 이에 대항한 샤르트르 백작과 블루아 백작 티보 1세(Thibauld I) 사이의 충돌로 한 번 더 불탔고, 이후 1020년에도 벼락을 맞는 일이 있기도 했다.
당시 주교였던 샤르트르의 풀베르(Fulbert)[15]는 곧 성당의 재건축에 착수했고, 중간에도 골조가 불타는 등의 일이 있기는 했지만, 다음 주교 대인 1037년, 성당은 다시금 설립되었다. 이 성당은 2층으로 만들어졌는데, 지하 성당(crypt)에는 성유물을 보관했고, 지상에는 주교가 주관하는 의식들이 행해졌다. 건물의 서쪽 면에는 2개의 탑들이 세워졌다.[16] 이 풀베르의 성당은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성당은 아니다. 후술할 1194년의 화재 이후 대규모의 공사가 이루어진 뒤에야 우리가 보는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
1134년에는 샤르트르 대부분을 전소시킨 화재가 있었는데, 이 때 성당은 피해를 받지 않았으나, 그래도
다행히도, 성당의 주요 성유물이었던 '성모의 베일'은 손상 없이 보존되었고, 몇몇 스테인드글라스들 또한 보존되었는데, 그 몇몇 중에는 현재까지도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스테인드글라스 중 하나인 Notre-Dame de la Belle Verrière[19]도 있다. 어쨌든, 이 1194년 화재 직후에 성당은 재건축에 들어갔는데, 이는 성당의 보수공사가 화재 이전에도 계획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2가지 가설이 있는데, 첫번째로는, 사실 화재가 보수공사가 계획되어 있었던 성당 작업장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설, 2번째로는 수도자들과 주교 사이의 갈등을 타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발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러나저러나 원래 예정되어 있던 공사에 화재까지 겹쳐서 보수공사 자체가 꼭 필요해진 상황이 되자 공사는 차질 없이 매끈하게 진행되어 갔다. 이 공사에 참여한 몇몇 건축가들은 지금도 이름이 전해지기도 한다.[20] 재원 조달도 원활하게 되어 1210년에는 성당의 중앙 홀이 세워졌다. 1215년과 1221년 사이에는 성가대석 뒤에 설치된 채광창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고, 1221년에는 수도자들이 성당으로 다시 돌아왔다. 익랑의 채광창들은 12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에 세워졌다고 하는 걸로 보아, 대략 1215년부터 1230년대 초까지 채광창들이 점차적으로 설치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듯.
특히나 재건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은 당시 기준으로, 최대 규모 및 최고 비용을 자랑했다.[21] 샤르트르 대성당의 이러한 채광창들은 당시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이 얼마나 발달되었는지 보여주는 증거로도 활용된다. 성당 안의 기둥들 사이 각각의 아치 밑에는 2개의 채광창과 그 위 하나의 장미창이 있는데, 그 전까지 지어졌던 다른 곳들에서는 장미창의 크기가 그 밑의 2개의 아치 모양 채광창들의 크기보다 훨씬 작았지만, 샤르트르 대성당에서는 장미창의 면적을 대폭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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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대성당의 천장을 찍은 모습 사진상 왼쪽이 후진(Apse)이 있는 동쪽이며, 양 옆의 아치에 채광창들이 위치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
건축 과정 상, 서쪽 정문의 장미창들과, 익랑(transept)[22]의 창문들이 먼저 설치되었다.[23][24] 1221년부터 수도자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하니, 이로써 이 시기 즈음에 성당의 후진(Apse)[25]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궁륭(Vault)[26]이나 익랑의 박공과 같이, 현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큰 구조물들은 1194-1225년의 거진 30년의 시간 동안 완공되었으며, 1240년에는 모든 채광창들의 설치가 끝났고, 1260년에는 축성식이 거행됨으로써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고딕 건축 양식의 극치인 샤르트르 대성당이 만들어졌다. 다만 완공 년도 자체는 1230년으로 본다.
르네상스 시기에도 성당은 많은 개조를 거쳤는데, 1506년에는 북쪽 탑 위에 서 있던 첨탑이 벼락을 맞고 타서 없어져서 "새 종탑(clocher Neuf)"을 돌로 만들어 1513년에 다시 세워놓았다.[27] 이 건축가는 1514년에는 성가대석 울타리 건축을 시작했고[28], 1520년에는 본당 북쪽 방면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시계가 있는 조그만 부속 건축물[29]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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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대성당 성가대 울타리 성모의 탄생부터 승천까지 성모의 일대기를 40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정교한 석상들과 석제 장식들로 표현하였다. |
18세기에도 대성당은 조금씩 개조되었는데, 1723년에는 새로 종 5개를 설치했다. 여기서 끝나면 좋았겠지만, 1757년에는 성당의 수도자들이 빛이 잘 안 든다는 이유[30]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을 좀 더 빛을 잘 들이는 불투명한 회색빛 창으로 바꾼답시고 12개 정도를 파괴했다.[31] 정말 다행히도 이미 1700년 정도에 한 골동품상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려놓은 수채화들이 있어서 추후에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793년, 프랑스 대혁명기에 대성당은 '이성의 전당[32]'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공포 정치기에는 성당 건물 자체도 손상을 입었는데, 채광창들과 남쪽 정문의 석상들이 파괴되었고, 성당 안의 모든 집기들이 사라졌으며, 성당 안팎의 모든 납으로 도금된 물건들에서 납을 공출하여 전장의 총탄으로 사용되기 위해[33] 녹여졌다.
1836년에는 2명의 납 장인[35]들이 부주의하게 화로를 그대로 켜 두고 퇴근하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불길은 두 종탑을 삼키며 15m 높이로 치솟았으며, 강한 바람과 마른 목재 구조 때문에 더더욱 심해졌다고. 심지어는 강한 남서풍 때문에 불타는 잔해들이 주위로 튀는 바람에 많은 시민들 또한 대피해야 했다. 납으로 된 지붕이 녹으면서 성당 안에는 납이 개울이 되어 흘렀으며, 성가대석으로 나무와 철제 잔해가 가득 찼고, 종탑이 화염에 휩싸이면서 종들은 떨어져 녹아버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성당의 전소를 피하고 그 아름다운 채광창들을 보존하기 위해 성당의 아랫부분을 필사적으로 지켜냈다. 불길은 납으로 된 지붕과 밤나무 목재로 된 골조들[36]을 삼키며 밤 내내 지속되다가 아침 10시 정도가 되어서야 연기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성당이 전소되지는 않았으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37]가 연상되듯이 지붕이 불타 벌거벗어진 채로 하늘을 마주보게 되었다. 성당을 다시금 보수하기 위해 샤르트르의 주교는 기부를 독려했고, 성당의 아름다움에 큰 감명을 받았던 빅토르 위고 또한 앞장 서서 기부를 독려했다. 성당을 재건하기 위한 작업은 1839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2년 정도의 시간 끝에 우리가 현재 보는 구리로 된 지붕이 만들어져 아직까지 수백 년 동안 서 있는 성모의 성소를 덮고 있다. 19세기 당시는 산업 혁명이 한창이었기에, 성당도 그 수혜를 입어, 타지 않는 11,000개의 구리판으로 지붕을 덮고, 600톤의 철제 골조를 사용하여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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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샤르트르 대성당 프랑수아 페르노(François Pernot)의 그림으로 샤르트르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Chartres)에 소장되어 있다. |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는 미군 대령 웰본 그리피스(Welborn Griffith) 덕분이다. 1944년 8월 16일, 당시 상부에서는 성당에 독일군이 들어와 있고, 성당의 종탑들이 독일군의 감시탑으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하여 대령에게 이를 파괴하라는 지령을 내렸는데, 대령은 다른 1명의 자원자와 함께 자원하여 성당 내부를 확인하러 들어갔다. 대령은 안에 독일군이 없음을 확인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종탑의 종을 울렸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같은 날 샤르트르 근처의 레브(Lèves)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사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 수훈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979년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목록에 샤르트르 대성당을 등재시켰는데, 크게 3가지의 이유를 들었다: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 샤르트르 대성당은 상당히 빠른 기간에 거의 단숨에 지어졌다. 건축물과 장식물의 통일성 덕분에 중세 기독교의 일관된 모습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볼 수 있다.
* 샤르트르 대성당은 상당히 빠른 기간에 거의 단숨에 지어졌다. 건축물과 장식물의 통일성 덕분에 중세 기독교의 일관된 모습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볼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 샤르트르 대성당은 프랑스 안팎으로 고딕 예술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 보베 대성당 등의 성당 건축가들은 샤르트르 대성당의 설계를 토대로 더욱 풍부하게 했을 뿐이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스파냐의 레온 대성당 역시 샤르트르 대성당을 본뜬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 부문에서 샤르트르 공방은 부르주부터 상스, 르망, 투르, 푸아티에, 루앙, 캔터베리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다. 그 방식은 샤르트르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공들이 지역 공방을 설립하거나 또는 샤르트르에서 색칠한 유리를 외부 지역인 르망, 루앙에 수출하는 식이었다.
* 샤르트르 대성당은 프랑스 안팎으로 고딕 예술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 보베 대성당 등의 성당 건축가들은 샤르트르 대성당의 설계를 토대로 더욱 풍부하게 했을 뿐이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스파냐의 레온 대성당 역시 샤르트르 대성당을 본뜬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 부문에서 샤르트르 공방은 부르주부터 상스, 르망, 투르, 푸아티에, 루앙, 캔터베리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다. 그 방식은 샤르트르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공들이 지역 공방을 설립하거나 또는 샤르트르에서 색칠한 유리를 외부 지역인 르망, 루앙에 수출하는 식이었다.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샤르트르 대성당은 하나의 상징인 동시에 기본적인 건물 유형이다. 고딕 대성당의 문화적, 사회적, 미학적 실체를 정의할 때 가장 분명한 사례로 손꼽힌다.
* 샤르트르 대성당은 하나의 상징인 동시에 기본적인 건물 유형이다. 고딕 대성당의 문화적, 사회적, 미학적 실체를 정의할 때 가장 분명한 사례로 손꼽힌다.
3. 보물과 예술품
성유물 말고도 성당에는 봉헌품들과 같은 보물들도 있다. 이 보물들이 소장된 곳은 성당 동쪽 후진 뒤에 있는 생 피아 성당(La Chapelle Saint-Piat)인데, 2000년부터 연구 및 복원/보수 공사가 진행되어 2024년 9월 21일에야 다시금 관람이 허용되었다. 이곳에 소장된 보물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생 테녕(Saint-Aignan)의 것으로 일컬어지는 감실[38]
- 샤를 6세의 도팽[39]이 봉헌했다 하는 15세기 초의 갑옷들
- 자개와 은으로 만들어진 배 모양을 한 향로
- 사도 요한과 세례자 요한 사이에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조각한 제단화(retable)[40]
- 휴론족과 아베나키족의 허리띠[41]
- 알렉상드르 티에리(Alexandre Thierry)[42]의 성체현시대[43]
- 알렉상드르 티에리[44]의, 성모와 아기 예수의 왕관
3.1. 성모의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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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의 성모의 베일(Voile de la Vierge de Chartres) 성당의 가장 중요한 성유물로, 수태고지 때에 성모가 썼던 베일이라고 한다. |
관습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옷[45]'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성유물함에 보관된 베일을 옷으로 착각하여 생긴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샤를마뉴에게 보낸 성유물이며, 수태고지 때에 성모가 쓰고 있던 베일이라고 한다.
11세기의 연대기에 따르면, 대머리왕 샤를이 샤르트르 공방전[46] 때에 이 베일을 깃발처럼 흔들며 싸웠다는 믿거나말거나 식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샤를마뉴의 손자였던 그는 876년, 이 성유물을 대성당에 봉헌했다. 이것은 서방의 가장 귀중한 성유물 중 하나인지라, 성당은 바로 성모의 성소로서 여러 순례자들을 끌어들이는 순례지가 되었다. 나중이지만, 루이 14세도 여길 순례했다고.
현재 성당이 지어지기 전 있었던 성당을 파괴했던 1194년의 화재 때 사람들은 이 베일도 소실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느님의 섭리인지 화재 이후 2~3일 후에 잔해 밑에서 유물을 지키고 있던 사제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이 화재를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의 베일을 더 널찍한 성당에 놓고 싶으셨나 보다!"라고 해석되어 더 널찍한 성당을 만들기 위한 기부가 이어졌다고.[47]
18세기에야 성유물함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을 꺼내 보게 되었는데, 유물의 보존 상태가 상당히 나빴다고 한다. 몇세기 만에 꺼내서 보다 보니까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유물이 '옷'이 아니라 '베일'이었다는 것. 그동안 상자 속에 있어서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하던 터에 성당의 인장에는 '옷'처럼 묘사되어 와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성당의 가장 중요한 성유물을 '성모의 옷'으로 알아 왔었다. 어쨌거나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베일은 굉장히 정성스레 싸여 있었는데, 비단 자수와 금으로 장식된, '이리니[48]의 베일'이라고 명명된 8세기 비잔티움산 천에 싸여 있었다고. 이렇게 유물을 확인하고 나서는 다시 새 상자에 옮겨 담았었는데, 프랑스 대혁명 때 안에 있던 보석들은 다 팔렸고, 1793년에는 성모의 베일도 여러 조각으로 잘려서 팔렸다고 한다.
남아 있는 조각은 1927년에 리옹의 비단 박물관에 의해 감정받은 바 있는데, 시기상으로는 고대의 기원후 초기 세기로 밝혀졌지만, 문제는 비단의 질이 너무 좋았다는 데에 있었다. 성모 마리아가 살아있을 적 당시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봤을 때 비단의 질이 너무나도 좋았다는 것.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성유물이 조작되었거나 거짓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아니므로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하면 될 듯 싶다.
1876년, 베일은 성유물 봉헌 1000주년을 맞이하여 금으로 된 성체현시대에 보관되었고, 이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성당의 북쪽 면에 있는 '순교자들의 제실'에 전시되어 있다.
3.2. 스테인드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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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re-Dame de la Belle Verrière 성당의 176개 채광창 중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이며 동시에 가장 유명한 것이다.[49] |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은 중세 시대의 모든 유물들을 통틀어 가장 완전하고 또 가장 잘 보존된 경우 중 하나이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들은 그 선명하고 화려한 색깔들로 유명한데, 특히나 이 문서 전체에서 언급되었듯이 파란색이 유명하다. 총 면적은 2,600㎡에 달하며, 176개의 작품들은 각각 성경의 이야기, 성인들의 생애 혹은 당시의 길드를 표현하고 있다.
천상의 예루살렘 안에 들어온 듯한 인상을 주는 성당의 내부에서 스테인드글라스들은,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50] 새 예루살렘의 성벽을 꾸미는 사파이어, 루비나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들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색깔들의 향연은 보는 사람에게 황홀함을 불러 일으키면서 하루의 어떤 때에 보느냐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진다. 여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봄의 뽀얀 하늘 아래의 오후가 이 향연을 보기에 최적의 시간이라 말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겨울의 여명이 최적의 시간대라 말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중세 당시에 '빛'은 하느님의 영역이었음을 잊지 말자. 창세기 1장 3절에 언급된 천지창조 과정에서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이 바로 '빛'이다. 그리하여 빛은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여겨져 하느님과 연관지어졌는데, 반대로 형형색색의 색깔들은 인간들의 행위와 감정을 나타내는 걸로 보았다. 중세인들은 빛이 색색의 유리를 통해 보여주는 장엄하고 화려한 광경에 자연스레 성당을 인간과 하느님이 만나는 곳으로 여겼을 것이다.
샤르트르의 파랑
스테인드글라스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유명한 파란색부터 보도록 하자. 사실 이 선명한 파란색 자체는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처음 쓰인 색깔은 아니었다. 기원 자체는 로마네스크 양식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140년대에 들어서 생드니(Saint-Denis) 대성당[51]에서 약간의 조정을 거쳐 샤르트르 대성당에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52] 이런 파란색 유리를 만들기 위해, 유리 장인들은 나트륨 용제(溶劑)[53]에 코발트, 안티모니[54], 구리와 철을 혼합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는 이 항목 맨 위에 있는 Notre-Dame de la Belle Verrière와 같은 몇 안되는 아직까지 보존된 12세기에 만들어진 경우에만 해당된다. 13세기부터는 유리의 구성 물질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같은 파란색 유리를 만들더라도 코발트 대신 너도밤나무 재를 써서 더 깊은 파란색을 냈다고 한다.
12세기 당시 '파란색'이라는 색깔은 예술의 영역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상징성을 내포하기도 하였다. 이전에도 파란색은 상징적인 색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무덤에 파란색을 사용했으며, 로마인들이 보았을 때 야만인들만이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파란색은 야만을 뜻했다. 12세기부터 파란색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바로 동정녀 마리아와 천상의 세계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카페 왕조 초기에는 프랑스 왕국 전체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결정적으로 보여준 것은 루이 7세[55] 때다. 그의 치세 때 '동정녀의 꽃'이었던 백합[56]과 성모를 뜻하는 푸른색을 왕실의 상징으로 도입한 것. 이렇듯, 파란색은 성모의 색이자 천상 세계의 색이었으며, 나중에는 왕실의 색이 되었다.
샤르트르 대성당이 성모신심의 심장이자 중심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스테인드글라스의 선명하고 강렬한 파란색이야말로 성모를 생각하는 당시 사람들의 신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역사
대부분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은 1194년에 있었던 화재 이후 성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는데, 대개 1205년에서 124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다만, 화재로 불탄 예전 성당 때부터 있었던 작품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1180년에 만들어진 이 항목 맨 위의 "Notre-Dame de la Belle Verrière"가 있다. 이거 말고도 이 설명 바로 밑에 제시된, 1145년부터 1155년 사이에 만들어진 서쪽 면(성당 정문 쪽) 장미창 밑의 아치형 채광창 3개도 있는데 성당 전체의 역사 항목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들은 당시 화마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12세기 중반에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들이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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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rail de la Passion 성당 서쪽 면의 세 채광창 중 왼쪽 것[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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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rail de l'Enfance 성당 서쪽 면의 세 채광창 중 가운데 것[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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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bre de Jessé 성당 서쪽 면의 세 채광창 중 오른쪽 것[60] |
몇몇 경우에는 이보다 훨씬 뒤에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방돔 성당(Chapelle de Vendôme)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은 15세기 초반에 만들어졌고, 익랑의 몇몇 채광창들은 20세기에야 만들어지기도 했다. 성당이 만들어진지 수 세기가 흐르면서 자연히 스테인드글라스들도 손상되어 지속적으로 보수되어야 했는데, 첫 보수공사는 15세기에 행해졌다고 한다. 1972년부터는 환경오염에 의한 변화에 대항하여 오염물을 제거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1914년 랭스 대성당의 파괴[61]는 프랑스 전역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샤르트르 대성당의 모든 스테인드글라스들은 두 세계대전 중에는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0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들을 2차례에 걸쳐 지금도 샤르트르에서 차로 5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의 리베락(Ribérac) 근교의 지하 채석장으로 옮겼다고.[62] 어쨌든 간에, 결국에는 랭스의 사례와는 다르게, 아직도 우리가 이 예술품들을 문제 없이 감상할 수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샤르트르의 푸른색은 전란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아 그 빛깔을 아직까지 전하고 있다.
도상
중세 시대 신학에 대한 지식 없이 스테인드글라스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고 해석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샤르트르는 12세기 풀베르(Fulbert)로 대표되는 '샤르트르 학파'의 본산이었기에 이들의 사상을 따라가다 보면 각각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의 정확한 의미를 추정해볼 수 있다. 쉬제(Suger)에 의해 제시된 렉시오 디비나[63]를 위한, 성경을 읽는데 적용할 수 있는 4가지 층위의 독서는 다음과 같다:
- 글자 그대로 읽기(Littéral): 서술된 언어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
- 우의적이거나, 알레고리적 해석(Allégorique): 어느 것 하나에 대해 서술하고 있지만, 다른 것 또한 의미할 수 있는 것.
- 비유적이거나, 교훈적인 해석(Tropologique, Moral): 하느님에게 가까워지기 위해[64] 인간이 심성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들(현재와 관련됨).
- 신비적[65] 해석(Anagogique): 나중에 죽고 나서, 혹은 모든 것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사실들에 대한 것들(미래와 관련됨).
상대적으로 아래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들은 대개 예수와 성모 마리아, 여러 성인들과 예언자들의 생애와 같은 이야기들이 표현되어 있다. 위에서 보았던 예수의 수난과 생애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들을 생각하면 된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위에 있는 것들은 여러 성인들과 같은 교회[66] 의 위인들을 표현하여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동서남북과 같은 방위에 따라서도 유리가 표현하는 도상들이 달라지는데, 해가 뜨면서 빛을 비추는 동쪽의 채광창들은 창세기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으며, 해가 지면서 빛이 사그라드는 서쪽의 채광창들은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67] 북쪽 면의 채광창들은 예수의 육화(Incarnation)을 표현하고 있으며, 남쪽 면의 채광창들은 예수의 재림과 인간의 구원 이후의 '하느님 나라'를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 구조로 된 성당 전체에 성경적 내러티브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후진(apse)이 있는 동쪽을 제외하고 서쪽, 북쪽, 남쪽 파사드(façade)에는 각각 장미창이 하나씩 있다. 서쪽 면의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고, 북쪽 면의 장미창에는 성모자[68]가 묘사되어 예수의 육화와 그에 따른 인간의 구원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남쪽 면의 장미창은 요한묵시록에 언급되는 24 장로에 둘러싸인 채로, 자신의 재림과 하느님 왕국의 성립을 선포하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장미창 자체의 둥근 형상도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데, 에제키엘서[69]에 언급된 에제키엘이 본 계시 속의 '바퀴'[70] 를 나타내는 것이다. 건축 양식에서 이러한 '바퀴' 모양을 처음 도입했던 것은 보베(Beauvais)의 생 에티엔 성당[71]의 북쪽 익랑으로, 다만 이 때의 바퀴는 정말로 바퀴, 즉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후 이 원형창 구조는 쉬제(Suger)가 주도했던 생드니 대성당에도 다시금 도입되었으며, 점진적으로 샤르트르 대성당의 경우처럼 성모를 상징하는 장미 모양으로 바뀌어 '장미창'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앞에서 수태고지 때 백합을 들고 성모를 찾아온 가브리엘에 의해 백합이 성모를 상징하는 꽃이라고 언급했었는데, 장미 또한 성모를 상징하는 꽃이다. 장미꽃 자체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상징하며, 특히나 하얀 장미는 성모의 순결함을 나타낸다고 한다. 가톨릭의 묵주기도(Rosario)의 라틴어 명칭도 '장미 꽃다발'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세를 벗어난 후대의 일이지만,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을 때도 한겨울에 장미꽃들이 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며, 프랑스의 라 살레트와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을 때에도 그녀의 곁에는 장미꽃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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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북쪽 익랑의 장미창 북쪽 익랑의 장미창으로 중앙에 성모자가 보이고, 마태오 복음서에 언급된 유다의 왕들[72]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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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남쪽 익랑의 스테인드글라스 성당 남쪽 익랑의 스테인드글라스들로 위쪽의 장미창은 사도 요한이 본, 세상의 종말에 대한 첫번째 계시 내용을 담고 있으며[73], 밑의 5개에 대한 설명은 주석 참조.[74] |
성당 본당, 익랑 그리고 성가대석 이 3곳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들은 계시(revelation/divine revelation)[75]를 다루는 것들로 가장 해석하기 까다롭다. 그러나 이것들은 성모의 베일을 비롯하여 성당에 있었던, 베드로, 토마스, 성녀 카타리나[76], 성녀 마르가리타[77] 등의 성인들의 성유물과 함께 연관지어 봐야 하는데, 사정상 대중에게 성유물들을 공개할 수 없을 때, 교구의 신자들과 순례자들에게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실제로 보지 못하는 유물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된 유명한 성인들의 유물들은 현재 성당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화재와 부침으로 인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스테인드글라스 읽는 법
이야기를 묘사하는 스테인드글라스들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표현하는 도상을 읽어나가면 된다. 그러나 이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본당 북쪽 면에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표현한 채광창은 이례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 한다. 다른 예외들을 보면, 어떤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마주보는 것과 함께 해석해야 그 의미가 완성되는 것도 있고, 또 몇 가지 종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모여 정사각형을 만들거나, 꽃잎 4개가 있는 꽃의 모양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묘사된 형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충분한 배경지식만 있다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표현된 이야기를 읽어 나가는 데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한편, 성당의 모든 스테인드글라스들은 이곳[78]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하자.
4.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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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대성당 평면도 |
성당은 북동쪽을 향해 있으며, 바실리카 양식의 본당이 라틴 십자가[79] 모양 평면 위에 서 있는 구조이다. 즉, 위의 평면도에서처럼 성당 자체가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본당은 위의 평면도에서 봤을 때 익랑 밑의 공간을 이르는 것으로, 5개의 늑재 궁륭(rib vault)[80] 정확히는 그 중에서도 성기 고딕 양식(High Gothic)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4분할 궁륭(Quadripartite vault)이다. 이 4분할 궁륭은 늑재 궁륭에서 발달한 것인데, 늑재 궁륭이라는 것은, 그저 볼트와 볼트가 만나 만들어지는 움푹 파인 능선을 안에서 부재로 보강한 것인데, 이게 갈비뼈처럼 보여서 붙은 이름이다. 이렇게 보강을 하면 일반적인 교차 볼트[81]에서보다 지붕과 천장의 하중을 더 효율적으로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쓰여진 것. 그리고 4분할 궁륭은 밑에서 이 구조를 봤을 때 4개의 마주 보는 기둥들이 만드는, 밑에서 봤을 때 직사각형으로 보이는 지붕면이 교차되는 리브(rib)에 의해 4개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사실 밑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리브 볼트라 보면 될 것이다.[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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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본당 천장의 모습 성당의 천장에 리브(rib)가 교차되면서 4분할되는 양상이 뚜렷하게 보인다. |
본당 최외곽에 있는 2개의 측랑[84]이 후진으로 가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고, 익랑은 위의 평면도에서 X자가 3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3개의 궁륭만큼의 너비를 가지고 있다. 익랑과 본당이 만나는 중앙 공간의 육중하고 튼실한 4개의 기둥을 보아, 초기 계획에서는 여기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볼 수 있듯이 첨탑을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익랑을 지나 성당 동쪽 끝으로 가다 보면, 성가대석 바로 뒤의 반원형 공간[85]을 중심으로 두 겹의 반원형으로 도는 회랑[86]이 있는데 특히나 바깥쪽 회랑의 천장 구조는 평면도 상에서만 봐도 구현 상의 어려움이 여실히 느껴질 정도이다. 이 회랑들은 후진의 제실[87][88]과 성기실(聖器室)[89]로 통하게 된다. 성기실은 1260-1270년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며, 평면도 상에서 성당 전체의 축과 미세하게 어긋나 있어 우리를 내심 불편하게 만드는 바로 그 부분이다.[90]
사실 후진의 제실들은 총합 6개가 있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보다 더 중요하고 5면으로 구성된 방사상 모양의 제실 3개와 함께 그 사이에 보다 덜 중요하고, 2-3면으로 구성된 벽면의 3개의 제실들도 있기 때문이다.[91] 위의 평면도 상에서도 눈에 띄는 3개의 방사상 모양 제실들 사이사이에 미세하게 돌출된 구조들이 있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까지 반시계 방향으로[92] 제실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chapelle de tous les Saints[93]
- chapelle des Confesseurs ou de Saint-Nicolas[94]
- 앞의 주석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원래 이곳에 있어야 할 벽면 제실은 생 피아 성당(La Chapelle Saint-Piat)으로 향하는 길을 뚫기 위해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이를 둘러쌌던 스테인드글라스들은 남아 있다.[95]
- chapelle des Apôtres[96]
- 이 위치의 제실은 이름이 없는 것으로 추정.[97]
- chapelle des Martyrs[98]
- 이 위치의 제실은 이름이 없는 것으로 추정.[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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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elle des Martyrs[100] 창살 뒤로 성모의 베일이 어렴풋이 보인다. |
개요에 나와 있듯이, 주변이 온통 평원이기에 반경 30km 안의 어디에서나 성당을 볼 수 있다고 하며, 이는 곧 성당 주변 100개 이상의 코뮌[101]에서 고개를 들어 성당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성당은 지역 풍경에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지고 있고, 이런 이유로 성당 보존 계획에서는 성당 자체의 보존뿐만 아니라 지역의 풍광 또한 중요하게 고려할 점으로 강조되고 있다.
4.1. 생포르(Saints Forts)의 우물
직역하면 '강한 성인들'의 우물이 되겠다. 지하 성당(crypt)의 제실들을 따라 있는 굽은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한 벽감(壁龕)[102]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여기에 바로 생포르의 우물이 있다. "우물이 뭐가 중요하길래 여기 써놨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우물은 자그마치 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장소로 알려져 있는 곳이 되시겠다. 심지어 이 우물은 최초의 성당 건립보다 더 오래된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게 언제냐면... 카르누테스(Carnutes)족의 오피둠(oppidum)[103]이 있던 갈로-로만(Gallo-roman)시기[104]이다!우물의 깊이는 약 33.5m이고, 성당 밑에서, 외르(Eure) 강과 연결되어 있는 지하수에 의해 물이 공급되고 있다. 우물은 이곳에 있던 오피둠의 수원으로서 기능하였으며, 1020년까지는 성당 외부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기적이 발현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전승에 따르면, 858년 바이킹들이 샤르트르를 침략하여 함락시켰을 때 당시 주교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참수되었다고 한다. 침략자들이 물러간 후, 남은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시신들을 우물 안에 던져 넣었는데, 신기하게도 시신들에 의해 우물 물이 오염되고 더럽혀지지 않고, 오히려 치유의 효능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물은 치유의 장소가 되었고, 우물 옆의 지하 성당(crypt)에는 병원이 설치되기도 하였다.[105]
그러다가 17세기에는 우물과 우물 주위의 지하 성당(crypt)이 드루이드들의 동굴로 알려지자, 이에 화가 난 한 사제가 우물을 메우고, 우물과 지하 성당을 돌벽으로 가려놨었다. 이 우물과 지하 성당을 다시금 볼 수 있게 된 건 1900-1901년 지역 역사학자였던 르네 메를레(René Merlet)가 장애물을 치우고 우물을 복원하고나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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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포르(Saints Forts)의 우물 우물 입구와 우물 테두리의 석재 구조물들은 모두 1903년에 우물을 복원하면서 제작된 것이다. |
메를레는 또한 성당과 엮여 있는 드루이드들의 전설을 되살려냈는데, 이는 지역에 전해지는 전통과 민담들이 이 우물이 신[106]에게 봉헌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널리 퍼져 있는, 성당의 건립과 관련된 전설들도 켈트족 사제들의 동굴과 성당 건립을 연관짓고 있는데다, 많은 기독교 성소들이 본래 이교도들의 성소 자리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갈로-로만 시기부터 이 자리를 지켜왔던 우물은 성당 역사의 증인이자 나름의 확고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4.2. 미로
대성당의 미로에 대해 보기 전에, 다소 일반적인 측면에서 성당에 왜 미로가 있는지부터 알고 가도록 하자. 물론 이 미로라는 것이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미로나 크레타의 미궁처럼 벽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진짜로 '탈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성당 바닥에 두 가지 색의 돌을 이용해, 말하자면 미로의 평면도를 그려놓고 그 위로 사람들이 걸어서 미로를 따라 입구에서 미로 중심이나 출구에 이르도록 조성해 놓은 것이나, 여기에는 나름의 종교적,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기독교가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그 전에 있던 소위 '이교도'들의 표시나 의례 장소들은 완전히 없어지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에서 기독교로 흡수되는 양상을 보인다.[107] 이 과정에서 그들이 믿던 신들, 신전, 의례 장소나 나름의 '성유물'들 및 농경적 '축일'들도 흡수되었는데, 특히 이 문단의 주제였던 '미로' 또한 기독교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교도들에게 미로는 무덤이나 종교적으로 성스러운 장소로 인식되었으며, 망자의 영혼을 가두는 곳이었다. 여담으로, 성경에서는 직접적으로 미로를 언급하는 대목은 없지만, 제리코[108]의 성벽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언급을 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시설의 미로는 알제리의 엘-아스남(El-Asnam)[109]의 4세기에 건립된[110] 바실리카 성당인 산 레파라투스(San Reparatus) 성당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로 구조가 유럽의 성당에 들어온 것은 6세기에 이르러서인데, 그 가장 오래된 예시는 6세기에 지어진 라벤나의 산 비탈레 바실리카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의 예시로 비잔티움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답게 모자이크로 되어 있다.[111] 곧 이 구조는 유럽의 대성당들의 건축에 도입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것들이 크기가 가장 크다고 한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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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아미앵 대성당의 미로 | 랭스 대성당의 미로 |
가톨릭 성당들에 도입된 미로 구조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미로는 단일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로 내 막다른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 미로는 항상 성당의 서쪽 면에 존재하는데, 바로 서쪽이 악마들이 오는 방향이기 때문이다.[113] 악마는 직선 상으로밖에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미로들을 만나면 성가대석까지 오지 못하고 그 안에서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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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대성당의 미로 |
다시 샤르트르 대성당으로 돌아가서 거기 있는 미로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이 미로는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직경은 12.89m로 본당을 가로로 긴 직사각형으로 보았을 때 그 위아래를 꽉 채우고 있는 원형의 미로이다. 꼬여 있는 길들을 풀어 직선으로 펴면 261.55m에 이르며, 입구로 들어가서 미로 중심에서 길이 끝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미로의 모티프는 그리스 신화의 다이달로스에 의해 만들어진 크레타의 미궁으로 보이는데, 현존하지 않긴 하지만, 미로의 중심에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를 표현한 구리 판이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115]
13세기 수도사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미로는 인간이 신을 만나고자 걷는 여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이 미로 위를 걷는 것은 '순례' 체험, 혹은 모의 '순례'와 가깝게 간주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순례자'들은 걷고 난 후 경건한 몸과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죄를 고해하거나 묵상을 통해 더욱 더 의미있고 충만한 종교적 경험을 했을 것이다. 미로 자체는 또한, 최종적으로 신에 의해 이끌어지는 길고 복잡한 인간의 생애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런 기본적인 상징적 의미 말고도 최근에는 성당의 높으신 분들이 12세기와 14세기의 문헌들을 근거로 미로를 특히 부활절 축제와 관련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성당의 수석 사제[116]가 미로[117]를 통과하여, 미로 중심[118]에서 노란 공 하나[119]를 참가자들에게 던진다고 한다. 미로를 걷는 것은 이로써 예수의 부활을 상기시키고, 그에 따라 올 인간의 구원까지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미로 중심은 저 위에 있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흥미로운 점으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서쪽 장미창 도상을 미로에 겹쳐 보면 두 개가 딱 들어맞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장미창 중앙의 예수가 미로 중심에 정확히 포개어진다고.평소에는 미로 위에 신자들이 앉는 의자들이 있어 '순례'를 할 수는 없지만, 사순절부터 만성절까지의 기간 동안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4시 45분까지 위의 사진처럼 의자들을 치워 신자들이 '순례'할 수 있게 하고 있다.[120]
4.3.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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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서쪽 정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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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서쪽 정면을 묘사한 판화 |
서쪽 외벽의 아래쪽 절반은 12세기의 것으로, 1194년 화재 이전에 건축된 것이다. 위쪽 절반 부분은 13세기에 건축되었는데, 그 중 북쪽 탑 윗부분만큼은 16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이는 앞의 역사 항목에서도 언급했듯이, 1506년의 벼락에 의해 야기된 화재로 말미암아 북쪽 탑이 전소되어 16세기에 다시금 세운 것으로, 이는 두 종탑들이 서로 다른 양식을 가지고 비대칭적으로 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남쪽 탑[121]은 1142년부터 1170년까지 지어졌으며, 103m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 북쪽 탑[122]은 남쪽 탑과 비교해보았을 때 더 뾰족하게 보이고, 상대적으로 더 화려하게 장식되었다는 점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115m의 높이를 가지고 있으며, 1516년에 공사가 완료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당 자체를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물로 생각했을 때[123] 사실 북쪽 탑의 밑 부분 자체는 남쪽 탑보다 더 오래되었는데, 1층 자체는 1134년 같은 년도의 화재 이후에 세워진 것이고, 2층은 1145년부터 1152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 3층부터는 1194년의 화재 이후에 세워진 것인데, 당시에 북쪽 탑은 단순한 나무 종탑이었다고 한다. 이후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 종탑은 1506년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타 1516년에 플랑부아양(flamboyant) 양식[124]으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교회의 종탑으로 기능하고 있다.
남쪽 탑같은 경우 3층까지는 사각형 구조의 바닥으로 되어 있지만, 4층과 첨탑 부분에서부터는 팔각형 구조의 바닥을 가지며, 첨탑 자체의 표면은 비늘과도 같이 조각되어 있다. 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북쪽 탑과는 다른 남쪽 탑 특유의 보다 순수한 기하학적 조형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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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첨탑을 찍은 모습 남쪽 첨탑을 찍은 사진으로 첨탑 표면을 비늘처럼 조각한 모습과 팔각형 구조의 바닥을 볼 수 있다. |
남쪽 첨탑 꼭대기에는 달이 있는 데에 반해, 북쪽 첨탑 꼭대기에는 태양이 있다.
북쪽 탑에는 종이 6개가 있었는데, 그 중 3개가 큰 종[125]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마리'와 '가브리엘'이라는 종들이 가장 크고 오래된 종들이었다고. 마리는 무게가 15톤에 육박했고, 가브리엘도 만만치 않아서, 마리보단 가볍긴 했어도 10톤의 무게가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종들은 성당 전체가 어려움을 겪었던 프랑스 대혁명 시기인 1793년에 대포와 동전을 만들기 위한 용도로 녹여져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성당에는 7개의 종이 있는데, 모두가 북쪽 탑에 있다. 7개 중 6개는 들보같은 곳에 매달려서 일정한 방향으로 흔들면 종 안의 망치가 소리를 내는 구조의 종들[126]이고, 나머지 하나는 종 외부에서 망치와 같은 도구로 쳐서 소리를 내는 구조의 종[127]이다. 참고로 앞에서 말했듯이 성당의 거의 모든 종들이 혁명기 때 녹여져 현재 쓰이고 있는 종들은 대개 1840년대에 다시 주조된 것이나, 마지막으로 언급된 망치로 쳐서 소리를 내는 구조의 종 하나만은 1520년에 주조된 옛날의 것이다.
현재 성당에서는 삼종기도 시간[128]과 조종(弔鐘)[129]을 제외한 종을 쳐야 할 다른 경우에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몇 번' 종을 쳐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다[130]:
2016년 기준으로
- 오전 11시 45분에 매일 드리는 미사 때는 '5번 종'을 울린다.
-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아침에 드리는 의전사제들의 미사 때는 '2번 종'과 '5번 종'을 울린다.
- 일요일 미사 때에는 '2번 종', '5번 종'과 '6번 종'을 울린다.
- 부활절, 성탄절, 오순절과 같은 대축일 때에는 4개(1번, 2번, 5번, 6번)를 울리거나, 6개 모두를 울린다.
여담으로, 요즘은 파리의 노트르담의 콰지모도와 같은 종지기 대신 기술의 발달로 종마다 모터 1-2개가 설치되어 쳐야 될 때마다 원격으로 종을 울린다고 한다. 다만, 2016년 기준 3번 종과 4번 종의 경우에는 모터를 설치하려면 주변 골조와 종들이 달려 있는 들보가 손상될 위험이 있어 종탑 보수 공사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4.4. 지하 성당(crypt)
4.5. 건축 자재
성당에 사용된 주된 건축 자재는 성당이 위치한 곳인 보스(Beauce) 평원의 석회암인데, 2,000만년 전인 신생대 제3기 마이오세 당시 평원이 큰 호수였을 때 침전되어 형성된 것이라 한다. 이 석회암은 조각들에 쓰이는 석회암과 다르게 질감이 거칠고,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물이 잘 통하지 않으며, 단단하고 무거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루기는 힘들지만 일단 이걸로 무얼 만들어놓기만 하면 시간이 지나도 잘 변하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루기 힘들다는 단점을 써놓긴 했지만 중세의 장인들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장미창을 포함한 스테인드글라스들이 들어갈 창틀, 하나의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조그만 기둥과 주두, 돌 난간 등의 세련되고 정교한 고딕 양식의 석조 구조들을 성당에 구현해놓았다.원래 이러한 특징을 가진 돌은 대개 이 지방의 다른 곳에서는 주춧돌이나 기단부에 많이 쓰고 건물을 지으면서부터는 더 부드럽고 알갱이가 고운 돌들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당시 샤르트르에서는 후자에 언급된 바와 같은 돌들을 구하기 어려워서 건물을 지어 올리는 과정에서도 그 단단한 석회암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오늘날에도 이 석회암은 채굴되고 있는데, 성당의 보존 공사 이외에도 분쇄하여 콘크리트를 만들 때 쓰는 골재로 이용하고 있다.
성당 바닥의 포석도 이 석회암 재질인데, 이들은 잘 보존되었을 뿐더러, 방문객들의 발길 덕분에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고 있다. 성당 안의 미로의 일부 또한 이 재질인데, 일부라 함은 좀 더 밝은 빛깔의 부분을 말한다. 미로의 검은 부분은 아르덴 지방의 검은 대리석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궁륭을 보수할 때는 원 재료인 석회암보다 더 가볍고 더 많이 쓰이는 백악(白堊)[131]을 사용해서 작업하고 있다.
성당 건물과는 다르게, 성당 현관 조각에는 파리 분지[132]의 석회암을 썼는데, 우아즈 계곡(vallée de l'Oise)에 있는 고대의 채석장들에서 들여왔다고 한다.[133] 이렇게 들여온 석회암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알갱이가 고와 조각들을 만드는 데에는 최적의 재료였는데, 특유의 은은히 감도는 황색으로 회색빛이 감도는 보스(Beauce) 평원의 석회암과 뚜렷이 구별할 수 있다. 우아즈 계곡의 석회암은 30-40cm의 두께를 가진 지층에서만 채취되었는데, 이는 성당의 석상들이 위 아래로 길고, 상대적으로 평평해 보이는 양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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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서쪽 면과 남쪽 면 사이 해시계 잘 보면 조각에 사용된 석재와 건물 외벽의 석재 사이의 색과 질감이 현저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성당 내의 성가대석 울타리는 베르농(Vernon) 지역의 백악으로 만들었는데, 이 돌은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기에, 그 부드러움과 굉장히 고운 알갱이로 유명하여 이러한 부류의 조각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라 한다.
4.6. 건축적 여담
샤르트르 대성당은 몇 가지 눈여겨 볼 만한 건축적 특징들이 있다:- 성가대석의 넓이는 650㎡로 이는 프랑스 내에서 가장 넓은 성가대석이다.
- 익랑의 길이는 63.4m로 이는 역시 프랑스 내에서 가장 긴 익랑이다.
- 프랑스 내에서 가장 큰 로마네스크 양식의 지하 성당을 가지고 있다.
- 성당은 3,500여 개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200개는 성가대석 울타리에 조각된 것들이다.
- 전 유럽에서 유일하게, 조각들로 장식된 현관 9개를 가지고 있는 성당이다.
- 성당 차원에서도 가장 큰 서쪽 면의 장미창은 직경 13.36m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장미창 중 하나이다.[134]
- 스테인드글라스의 인물들까지 합치면 성당 전체를 통틀어 약 9,000여 명이 표현되어 있다. 그 중 성모 마리아는 181회 표현되었다.
- 성당 전체에는 176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고, 전체 면적은 2,600㎡에 이른다. 성당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12-13세기에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를 가진 곳이다.
- 현재 성당 서쪽 현관은 1194년 화재 전에 있었던 성당의 서쪽 현관을 그대로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 양차 대전과 혁명들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은 성당 건물은 프랑스의 고딕 양식 성당들 중에서도 가장 완전하고 잘 보존된 예시로 손꼽힌다: 건물 외벽의 약 90%, 조각들의 약 80%, 스테인드글라스와 바닥에 깔린 포석들의 약 60%가 지어졌을 당시의 것들이다.
- 샤르트르 대성당은 비록 로마네스크 양식에 사용되었던 기법들로 건설되었지만, 그럼으로써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 사이의 단절이 아니라, 둘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로서 우뚝 서 있다.
5. 참조 링크
- 샤르트르 대성당 프랑스 위키백과
- 샤르트르 대성당 공식 홈페이지 순례 안내
- 샤르트르 대성당이 불타 없어질 뻔 했던 날
- 1836년, 샤르트르 대성당의 화재
- 샤르트르 대성당 유네스코 공식 홈페이지
- 성모의 베일 프랑스 위키백과
- Notre-Dame de la Belle Verrière 프랑스 위키백과
- '샤르트르의 파랑' 프랑스 국립도서관
- 1995년 7월 15일자 화학저널 'Solvent'
- 1914년 랭스 대성당의 화재 프랑스 위키백과
-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프랑스 위키백과
- 성당 공식 홈페이지 스테인드글라스 소개란
- 성당 공식 홈페이지 미로 소개란
- 성당의 미로들: 중세 미스터리의 해독
- 성당 안의 우물! 근데 왜 있는 거지?
- 성당 공식 홈페이지의 성당 종 소개란
[1] 2009년 부분수정[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참고로, 가톨릭에서는 공식적으로 물리적인 크기를 불문한 모든, 종교 전례가 행해질 수 있는 공간을 성당으로 정의한다.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는 church(église), chapel(chapelle), crypt(crypte)가 건축적, 역사적으로 구분되어서 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셋 다 성당으로 쓰이기에, 혼동을 피하고자, 주교좌성당(cathédrale)이나 (일반적으로 쓰이는 개념의)성당(église)이 아닌 'chapelle'이나 'crypte'의 경우에는 되도록 원어나 영어를 병기해 놓고자 하였다.[6] 이 베일은 sancta Camisia, 즉 성모의 옷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성유물함에 보관된 베일을 보고 옷으로 생각했기 때문.[7] 프랑스 중부의 비옥한 평원. 외르에루아르, 루아르에셰르, 루아레, 에손, 이블린 데파르트망에 걸쳐 있다. 이렇듯 주변이 평원인지라, 성당 반경 30km 거리까지 성당을 볼 수 있다고 한다.[8] 고대 샤르트르 지방에 살았던 골족의 일파, 지역의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보려면 샤르트르 문서 참조.[9] 정확히는 Vierge devant enfanter, 즉 아이(예수)를 낳기 전 성모를 의미한다.[10] 7세기 프랑크 왕국 시기부터는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프랑크족의 트로이 기원 전설에서 찾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경향성은 후대에 그 정체성을 골족에서 찾는 것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전설 또한 골족 드루이드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 경향성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겠다.[11] 다만 성모상은 기원전의 원조 성상이 아닌 7세기 때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12] 다만, 대개는 첫 성당 설립을 6세기 초로 본다.[13] 주보성인이라고도 함.[14] 혹은 753년[15] 중세 철학사의 한 분파였던 '샤르트르 학파'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16] 처음에 하나를 세우고 다음에 하나를 더 세우는 식으로 세워졌다고 한다.[17] 샤르트르 대성당의 서쪽 정문은 특별히 Portail Royal이라 하는데, 여기서 Royal은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계신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이다.[18] 지하 성당(crypt), 두 탑들과 서쪽 정문같은 경우들만 상대적으로 경미한 피해를 입고 보전되었다고.[19]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함께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대성당의 상징인 '샤르트르 블루'가 아낌없이 들어가 있다. 사진이나 도상에 대한 설명은 후술.[20] 다만, 이들이 하나의 공방에 소속되었거나, 동시대에 다같이 공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존재하던 여러 다른 공방에서, 다른 시대에 서로의 작업을 이어 받으면서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21] 그야 이런 거 만드는 데 쓰는 비용이, 돌을 쓰는 것보단 훨씬 비쌌으니까.[22] 성당 건축상 정문에서 보았을 때 양옆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부분.[23] 그렇다고 해서 다 일괄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채운 것이 아니라 각각 하나하나 다 다른 내용이나 장식으로 채워넣었다![24] 남쪽 익랑 채광창들은 1225년과 1230년 사이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이어 북쪽 익랑 채광창들이 설치되었다고 한다.[25] 성당 정문의 반대쪽 끝 부분으로 대개 의식을 위한 제단이나 성유물을 모셔놓는 곳이다.[26] 바로 위 사진에서 2개의 아치가 서로 교차하면서 생긴 천장을 의미한다.[27] 성당 입구가 서쪽에 있으므로, 성당 입구 기준 왼쪽 탑이다. 이 탑은 후기 고딕 양식인 "플랑부아양(Flamboyant, 불꽃처럼 타오르는) 양식"을 사용하여 건축되었다.[28] 성가대석 울타리는 교회 본당과 성가대석을 구별해 놓는 울타리로 프랑스어로는 "Chancel" 혹은 "tour de chœur"이라 한다. 말하자면, 성스러운 성가대석에 세속인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돌로 만들어진 '울타리'는 6m의 높이를 자랑하고, 후기 고딕 양식과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장식들과 구조물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엄청난 작품이다. 참고로 완공은 2세기가 지나서인 1716년에야 이루어졌다.[29] 시기를 고려해보았을 때, 기계식 시계가 아니라 해시계가 달려있는, 성당에 붙어 있는 조그만 건축물이다.[30] 특히나 성가대석이 잘 보이지 않아서 더 잘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고.[31] 재밌는 점은 같은 시기 파리의 성당이나 교회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32] 대혁명기 때의 무신론자들의 신전(…)으로 말그대로 이성을 신봉하는 곳이다. 대개 남아 있는 기독교 시설들을 이용압류하여 설립되었다.[33]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영국, 프로이센 등 주변 여러 유럽 국가들에 맞서서 1대 다수로 적들을 상대하는 전쟁 중이었다.[34] 프랑스어로는 'Concordat de 1801'이라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반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혁명기 중에는 교회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고, 성직자들은 공무원 취급을 받으며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일해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처벌을 받아 자신의 교구에서 추방되거나 심하면 죽임을 당했는데, 몇몇 지역에서는 이에 반감을 품고 정부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펴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기에,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1년에 교회와의 화해를 통해 교회의 자율성과 종전의 지위를 회복시켜줬다.[35] 'plombier'로 적혀있기에 '배관공'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성당 지붕이 납으로 되어 있기에 지붕을 보수하기 위해선 납 장인들이 동원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워서 '납 장인'으로 적는다.[36] 이 지붕 골조들은 그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숲(forêt)'으로 불렸다고 한다.[37] 공교롭게도 샤르트르 대성당의 정식 명칭에도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Notre-Dame'이 들어간다.[38] 성체성사 때 쓰이는 성체를 놓아두는 곳.[39] 프랑스에서는 왕위 계승자를 '도팽'이라고 불렀다.[40] 단, 이 작품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위탁하여 그곳에서 전시되고 있다.[41] 이 두 부족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로, 여기에 봉헌된 것은 왐품(wampum)이라 불리는 조개껍데기나 도자기로 만들어진 띠를 말한다.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42] 19세기 인물이다.[43] '성광'으로도 불리는데, 성체를 넣는 곳이라는 점에서 감실과 비슷하지만, 성시간, 성체강복, 성체거동과 같은 특별한 기간에 장시간 성체를 넣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전례 용구이다. 대개 굉장히 정교하고 화려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44] 앞의 인물과 동일 인물[45] 프랑스어로는 'chemise', 라틴어로는 'sancta Camisia(성스러운 셔츠)'[46] 9세기의 전투로 나무위키에 개별 문서로 존재하는 동명의 전투와는 다른 전투다! 시기를 보면 아마 샤르트르를 침공한 노르만족에 맞서 싸웠던 전투인 듯.[47] 이 일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이유에도 언급되었듯이, 화재 이후 세워진 성당이 당시 기준으로 굉장히 빠르게 건축된 이유를 설명해 줄 지도 모르겠다. 다만, 화재가 성당 입장에서는 일종의 호재(?)였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성당에서는 확장 보수공사를 하고자 하였지만, 여기 살던 수도자들은 확장 공사가 돈이 들고 또 성당을 확장하면 자기네들이 직접 거주하는 수도원 건물들이 부서지니까 이 공사에 회의적이었는데, 불이 나면서 어찌 됐든 다 파괴되어 버려 반대할 명분이 없어져 버린 것.[48] 로마 제국 최초의 여제로, 아테네 출신이다.[49] 다만 1194년의 화재에서 살아남은 부분은 여기 보이는 성모자상을 표현한 3개의 창뿐이고, 나머지는 13세기에 성당을 재건하면서 제작된 것이다. 잘 보면, 성모자상 부분의 파란색과 그 이외 부분의 파란색이 다른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성모자상 부분을 제작했던 12세기 후반 당시에는 '샤르트르의 파랑'이 아직 쓰이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작품을 확대한 것으로, 원래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보다 훨씬 길다.[50] 요한묵시록 21장 19-20절 참조. '새 예루살렘'의 성곽의 기초석은 12개의 보석들로 꾸며져 있다고 나온다.[51] 프랑스 국왕은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랭스가 왕이 탄생하는 곳이었다면, 생드니는 왕이 죽어 묻히는 곳이다. 생드니 대성당에는 많은 프랑스 국왕들의 유해가 있으며,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무덤, 앙리 4세의 심장,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덤도 있다.[52] 첨언하자면, '샤르트르의 파랑'은 샤르트르의 공방에서 만든 것이 맞고, 이 색깔이 처음으로 스테인드글라스에 이용된 것은 쉬제(Suger)가 수도원장이었을 때 샤르트르에서 만들어서 생드니 대성당 공사에 사용된 것. 여담으로, 여기서 굳이 수도원장의 이름까지 언급한 것은 쉬제 자체가 신학적으로도 유명한 사람이고, 또 생드니 대성당을 재건함으로써 고딕 양식의 시대를 연 사람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53] 용매와 같은 뜻으로, 용액의 매체가 되어 용질을 녹이는 물질이다. 다만 '용제'쪽은 공업 쪽에서 많이 사용되고, '용매'쪽은 화학 쪽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어라고.[54] 유리를 불투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넣었다고 한다.[55] 12세기 초반이었던 1137년 즉위[56] 수태고지(성모영보) 때 가브리엘 대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백합을 주었다고 한다.[57] 참고로, 밑의 사진들을 보는 데에 있어 예를 들어, 왼쪽이라 하면 성당에 들어와서 안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았을 때 왼쪽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서쪽으로 들어왔을 때,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다른 것들보다 더 남쪽에 있을 것이다. 애초에 스테인드글라스는 밖에서는 뿌연 회색 유리처럼 보이고, 안에서 보아야 그 진가가 보이기 때문에 안에서 보았을 때 왼쪽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도 있다.[58] 'passion'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중간의 8개의 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했고, 위 4개의 창에는 예수의 부활부터 승천까지의 과정을, 밑 2개의 창에는 예수의 현성용(顯聖容), 즉 마태오 복음서 17장 1-2절에 묘사된 거룩한 변모를 묘사하였다. 첨언하자면, 어느 날 예수가 베드로, 야고보와 사도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랐는데, 그 때 예수의 용모가 변하여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하얘졌다는 '거룩한 변모'를 묘사한 것이다.[59] 예수의 어린 시절, 즉 성경에 묘사되어 있지 않은 'Vie cachée de Jésus(예수의 숨겨진 삶)'과 우리에게 알려진 생애의 일부를 묘사하고 있다.[60] 예수의 혈통을 설명한 '이새의 나무'라는 작품이다. 마태오 복음서 1장의 그 족보를 표현한 것이 맞다.[61] 1914년 9월 4일, 독일 육군은 위협 포격으로 랭스 대성당에 총 5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그 중 4발은 성당 주변에 떨어져 성당 정문의 여러 조각들과 성당 북쪽 면 스테인드글라스를 파괴했고, 1발은 북쪽 익랑에 직격하였다. 성당은 불꽃에 휩싸였고 지붕과 골조는 물론, 내부 집기들 또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이 사건의 유일한 희생자들은 성당 내부에서 치료를 받던 독일군 병사 14명이었다는 것이다.[62]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워낙에 커서 지하 채석장 정도의 크기가 아니면 보관이 불가했다고 한다.[63] 'Lectio divina', 번역하면 '거룩한 독서' 혹은 '성독' 정도의 의미. 많은 가톨릭 기관에서는 렉시오 디비나를 그리스도교적 독서이자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 성경 읽기라고 설명하고 있다.[64] 당연한 말이지만, 게임이나 소설 등에서 종종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하느님이 '되기' 위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단일하고 유일한 제일(一)원인인 선(善) 그 자체인 하느님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의미가 강하다. 참고로 중세 철학에서의 선(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인성이 착하다."와는 거리가 먼 총체적인 개념이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중세 철학(특히 스콜라 철학)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스스로 공부하면서 알아보자.[65] 신학적으로는 '신비적인'이라는 뜻을, 철학적으로는 '제일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이라는 뜻을 가진다. 여기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므로 신학적 해석이 알맞다.[66] 여기서의 '교회'는 본 성당을 비롯한 하나하나의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뜻하는 광의의 교회이다.[67] 8세기 이래로 많은 성당들은 동쪽을 향해 지어져 서쪽에 정문을 두고 있다. 아침 미사를 드릴 때 떠오르는 태양이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상징하기 때문이긴 한데, 이게 막 꼭 지켜야 할 규칙도 아니고 지형상의 어려움과 같은 사정이 있어서 지을 때마다 정확히 방위를 지켜서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이 규칙이 적용되는 성당들도 많고, 그렇지 않은 성당들도 많다. 참고로, 샤르트르 대성당은 북동쪽을 향해 지어졌고, 남서쪽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다.[68] 성모와 아기 예수를 이르는 말[69] 개신교식으로는 '에스겔서'라고 한다.[70] 에제키엘서 1장 15-21절 사이에 언급되는 바퀴를 말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전지전능함과 편재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우주와 생명의 길, 혹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71] 현재 존재하는 성당은 12세기 초에 공사가 시작되어 16세기에야 공사가 끝났다. 공사가 시작된 연도 자체는 1100년 언저리로 잡고 있으며, 이는 현재의 샤르트르 대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한 1194년보다 거의 100년 정도 빠른 시기이다.[72] 마태오 복음서 1장에 나와 있는 예수의 계보에서 언급되는 유다 왕국의 왕들로, 마름모꼴 창 안에 묘사된 이들이다.[73]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앉아 있고, 예수 기준 북동쪽에는 요한을 나타내는 독수리가, 남동쪽에는 루카를 나타내는 소가, 남서쪽에는 마르코를 나타내는 사자가, 북서쪽에는 마태오를 나타내는 사람이 있다. 4명의 사도를 상징하는 표상들 외의 나머지 창들은 모두 향로를 든 천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원 바깥의 두 층위의 동심원은 요한묵시록의 24장로를 표현한다. 두 동심원 사이에는 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후원자였던 드뢰(Dreux) 가문의 문장이 4개의 잎을 가진 장식무늬로 표현되어 있다.[74] 5개 중 가운데에 있는 성모자를 중심으로, 나머지 4개의 창문에서는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어깨 위에 무등을 타는 도상들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연속성, 계속성을 상징한다. 왼쪽에서부터 예레미야의 어깨에 탄 루카, 이사야의 어깨에 탄 마태오, 에제키엘의 어깨에 탄 사도 요한, 다니엘의 어깨에 탄 마르코가 표현되어 있다. 이들 밑에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된 이들은 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드는 데에 후원했던 드뢰(Dreux) 가문 사람들이다.[75] 성경의 요한묵시록도 Revelation이라 하지만, 여기서는 그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이 스스로 인간에게 종교적 진리를 전달한다는 뜻의 '계시'이다.[76] 맥락상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인 듯하다.[77] 역시 맥락상 안티오키아의 마르가리타인 듯.[78] 성당 공식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자료로, 각각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성당 안에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79]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십자가 모양으로, 정식 명칭이 라틴 십자가이다.[80] 그냥 리브 볼트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81] 볼트 두 개가 교차하여 만들어지는, 늑재 궁륭보다 한 단계 더 단순한 구조[82] 참고로 리브 볼트 분야의 끝판왕은 기행의 나라답게 영국인데, 얘네들은 부채꼴 모양의 리브가 있는 궁륭(Fan vault)을 발달시켰다. 구조를 직접 찾아보면 알겠지만, 장식적인 효과가 크다고. 대표적으로는 바스 수도원 천장과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의 예배당 천장이 있으므로 궁금하면 찾아보시길.[83] 참고로, 샤르트르 대성당 자체는 여러 면에서 초기 고딕(early gothic)으로 분류되지만, 후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높은 천장이 등장하여 그 높이가 전의 경우들에 비해 '혁신적'으로 상승된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프랑스 고딕 양식의 2번째 시기(Classical gothic)를 열어젖힌 성당으로 꼽힌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전성기 고딕 양식(High gothic)은 대개 1200-1280 사이에 건립된 성당들을 이르는 말로, 대표적으로 랭스 대성당과 아미앵 대성당, 보베 대성당을 꼽을 수 있는데, 샤르트르 대성당은 이 두 시기를 잇는 가교와 같은 역할로 보면 될 듯싶다.[84] 본당의 기둥 바깥쪽으로 나 있는 복도. 성당 들어가서 한 바퀴 돌고 나올 때 걷는 샛길이라 생각하면 된다.[85] 평면도 상에서 같은 중심을 가진 3개의 반원이 보일 텐데, 그 중 가장 조그만 반원형 공간이다.[86] 우리말로는 '주보랑'이라 한다.[87] 평면도 상에서 맨 위에 반원형 구조 3개가 예쁘게 나 있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이를 말하는 것이다.[88] 명칭은 chapelle로 어느 한 건물에 부속된 성당을 뜻하기도 하지만, 성당 안에 있는 제실을 뜻하기도 하기에, 여기서는 '제실'로 썼다. 사실 제실 자체가 후진이나 주보랑에 부속된 반원형의 작은 성당이긴 하다.[89] 'sacristy'라고 하는데, 'vestry'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vestry'는 사제들이 옷을 갈아 입는 곳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sacristy'는 사제들의 의복뿐만 아니라 전례에 필요한 제의 용구들까지 보관하는 곳이라는 좀 더 포괄적인 인상을 준다. 그리하여 우리말로는 성구실(聖具室)이라고도 부른다.[90] 객관적으로 설명하자면 성당 북쪽 익랑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방이다.[91] 왼쪽에서 2번째와 3번째 방사상 제실들 사이에는 벽면에 위치한 제실이 없고, 대신 14세기에 지어진 생 피아 성당(La Chapelle Saint-Piat)이 있다.[92] 성당이 동쪽(정확히는 북동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93] 24, 22, 20번 창문으로 둘러싸여 있다. 프랑스어로는 각각의 채광창들을 지칭할 때 'baie'를 쓰는데, 이는 '(문 혹은 창문 따위의)뚫린 공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모든 스테인드글라스들은 'baie (숫자)'의 형식으로 분류가 되어 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숫자)번 창문'으로 해석하였다.[94] 18, 16, 14, 12, 10번 창문으로 둘러싸여 있다.[95] 8, 6번 창문으로 둘러싸여 있다.[96] 성당 정문의 대척점에 위치한 제실로, 4, 3, 2, 1, 0번 창문들로 둘러싸여 있다.[97] 5, 7번 창문으로 둘러싸여 있다.[98] 'chapelle de Saint-Étienne' 혹은 'chapelle du Saint-Cœur de Marie'으로 불리는 제실로, 성모의 베일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9, 11, 13, 15, 17번 창문으로 둘러싸여 있다.[99] 19, 21, 23번 창문으로 둘러싸여 있다.[100] 해석하면, '순교자들의 제실'이다.[101] 프랑스 행정구역의 최소 단위[102] alcove, 벽면을 우묵하게 해서 만든 공간.[103] 라틴어로는 단순히 '방비된/요새화된'의 뜻이지만, 켈트족 특유의 요새화된 대규모 정착지라고 보면 된다. 오피둠 자체는 브리튼 섬부터 이베리아 반도, 심지어는 헝가리에서까지 발견되는데, 로마 제국의 정복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서서히 해체되고 로마의 도시들로 발전하거나 쇠락하여 버려졌다. 지역의 자세한 역사는 샤르트르 문서 참조.[104] 로마화된 골족들의 시대로,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으로 골족들이 로마 제국 통치 하에 있게 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로마 치하에서 로마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골족 문화에 로마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결국 갈로-로만 시기는 3-5세기를 거치면서 로마가 쇠락하고, 갈리아로 서고트족 등을 비롯한 게르만족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중에 급기야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면서 종언을 고한다.[105] 이 당시 병원이라 하면, 현대의 병원처럼 적극적으로 병이나 상처에 대처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나을 사람은 낫게 하고, 죽을 사람은 좀 덜 비참하게 죽게 하는 곳에 가깝긴 했다. '죽을 사람'의 범주가 현대보다 좀 더 넓긴 했지만 말이다.[106]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켈트족의 신에게 바쳐졌을 것이다.[107] 우리가 잘 아는 성탄절도 엄밀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지정한 것이 아니라 로마 시대 태양신 축일을 '재'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가톨릭의 많은 성인 축일들은 대개 이교의 축일을 재활용한 것인데, 이는 기독교 포교 초기 만연하고 있던 이교의 축일을 성인들의 예화들로 덧씌워서 이교적 영향력을 일소시키기 위한 교회의 전략이었다.[108] 가톨릭식으로는 '예리코', 개신교식으로는 '여리고'라고 한다.[109] 현재의 슐레프(Chlef)이다.[110] 324년에 건립되었다.[111]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로 또한 성당이 개수되었던 15-16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고.[112] 샤르트르 대성당뿐만 아니라 아미앵 대성당, 푸아티에 대성당, 생토메르(Saint-Omer) 대성당, 바이외(Bayeux) 대성당 등에서도 이러한 미로 구조를 관찰할 수 있다. 미로를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파괴된 경우도 있는데, 상스(Sens) 대성당은 1768년, 랭스 대성당은 1778년에 파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13]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죽음'의 방향을 의미한다.[114] 기독교 전래 이전 이교도들이 미로를 통해 망자의 영혼을 가두고자 했던 것이 연상되는 대목이다.[115] 1792년에 제거되었다고 한다.[116] 예수를 상징[117] 지옥을 상징[118] 미노타우로스의 죽음이 표현된 구리 판이 있던 곳으로, 테세우스가 괴물을 죽이는 장면은 예수가 죽음을 극복한 장면과 겹쳐진다.[119]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곧 생명의 실을 의미한다.[120] 2025년같은 경우 3월 7일 금요일부터 10월 31일 금요일까지의 기간이다.[121] 'clocher vieux' 즉 '옛 종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22] 'clocher neuf' 즉 '새 종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23] 각 층마다 창문 혹은 창문같이 뚫려 있는 부분('개구부(開口部)'라고 한다.)이 있는데, 성당을 정면에서 봤을 때 위아래로 세 겹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124] 15세기 프랑스에서 주로 유행했던 후기 고딕 양식. 'flamboyant'은 '타오르는' 혹은 '불꽃같은'이라는 뜻으로 개구부를 S자 모양 혹은 불꽃 모양으로 장식한 데서 유래하였는데, 위 사진의 북쪽 탑 개구부를 보면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125] 몇 톤씩 나가는 무겁고 큰 종이다. 프랑스어로는 'bourdon'이라 하는데 한국어에 이와 상응하는 단어가 없어 '큰 종'이라 해석했다.[126] 서양 종의 대표적인 형태로 영어로는 'tower bell', 프랑스어로는 'cloche volée'라고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곳에서 직접 보자.[127] 7개의 종들 중 유일하게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치는 종이다.[128] 8시, 12시, 19시[129] 장례 때 치는 종[130] 참고로 '몇 번'이라는 것은 종을 치는 횟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데에만 쓰는 '7번 종'을 제외한 1-6번 중 어느 종을 치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종마다 음이 달라서 많이 들어본 사람은 무슨 종을 치는 지도 알 수 있을 듯.[131] 분필로 사용되는 석회암의 일종으로, 백악기와 백악관 명칭의 유래가 되는 암석이다.[132] 파리 분지라 해서 파리 및 그 근교만 있는 게 아니라 프랑스 북부 대부분과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독일 서부의 일부분에 이르는 엄청나게 거대한 분지이다.[133] 이들 채석장에서 나오는 석회암들은 특정한 종류의 희귀한 유공충(有孔蟲)과 뿔고둥 화석들이 있는 게 특징이라고.[134] 참고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가장 큰 장미창의 직경이 13.1m이다. 하지만 샤르트르 대성당의 장미창은 프랑스 내에서조차 가장 큰 것은 아니다. 프랑스 내에서 공식적으로 어느 곳의 장미창이 가장 큰 지는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서쪽 면 장미창의 직경이 13.6m라는 것을 보아 최소한 '가장 큰'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