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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더글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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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8379242-641F-4E16-9EC4-4DDE7A61F63B.png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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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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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민권 운동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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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프레드릭 더글러스
Frederick Douglass
파일:Frederick_Douglass_portrait.jpg
본명 프레더릭 오거스터스 워싱턴 베일리
Frederick Augustus Washington Bailey
출생 1817년 2월[1] or 1818년 2월 14일[2]
미국 메릴랜드주 탤벗 카운티
사망 1895년 2월 20일 (향년 77/78세)
미국 워싱턴 D.C.
직업 개혁가, 인권운동가, 철학자, 정치인, 작가
정당

종교 기독교
서명 파일:Frederickdouglasssignature.png

1. 개요2. 일생
2.1. 노예로서의 시절2.2. 자유를 찾아 도망치다2.3. 떠오르는 젊은 폐지론자 2.4. 영국에서 자유인이 되다2.5. 미국으로 돌아오다2.6. 해방과 선거권을 위한 싸움
3. 여담

1. 개요

그대가 읽는 법을 배운다면, 그대는 영원히 자유로워지리라
Once you learn to read, you will be forever free.
미국의 개혁가, 인권운동가, 철학자, 정치가, 그리고 작가로, 대표적인 미국의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다.

2. 일생

2.1. 노예로서의 시절

1818년 메릴랜드주의 탤벗 카운티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그는 미국 백인 아버지와 미국 흑인 어머니 해리엇 베일리(Harriet Bailey)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혼혈로, 그의 저서[3]에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로 자신의 첫번째 소유주 애런 앤서니(Aaron Anthony)로 추측했다.

그는 태어나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과 떨어졌다. 당시 노예의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뜨려놓아 가족에 대한 정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떨어진 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지내다가 열살이 되던 해 애런 앤서니가 죽으면서 유산 분배 과정에서 친척 토마스 올드의 소유가 되고, 올드(Auld)일가가 사는 볼티모어로 보내지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열두살이 되던 해 집주인 휴 올드의 아내 소피아 올드는 그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기 시작했다.[4] 그러나 소유주 휴 올드는 "지식은 노예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교육을 반대했다. 결국 남편에게 설득된 소피아는 교육을 그만두었으며, 하루는 더글라스의 신문을 빼앗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웃 백인 아이들에게서 글 읽는 법을 배우는 등 몰래 읽고 쓰는 법을 독학했으며, 이후 The Columbian Oratorr[5]를 비롯한 신문, 팜플렛, 정치자료, 온갖 종류의 서적 등을 읽으면서 생각을 확장시키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노예제에 대한 의문과 비판을 키워나가면서 인간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생각을 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윌리엄 프릴런드(William Freeland)에게 대여된 이후 주일학교에서 농장에 있는 40명이 넘는 노예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노예 소유주들은 그들의 노예가 교육받는 것에 격분해 무력으로 모임을 강제로 해산시켰던 반면, 그의 소유주인 프릴런드는 이러한 교육활동에 크게 개의치 않아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1833년 태어난 농장으로 보내진 그는 "노예 파괴자"라는 악명을 가진 에드워드 커비(Edward Covey)에게 대여되어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커비의 잔인한 노예를 다스리는 법에 큰 불만을 가진 프레드릭은 16살이 되던 해 커비와 몸싸움을 해 커비를 때려눕히기도 했다. 이후 커비는 다시는 프레드릭에게 채찍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2.2. 자유를 찾아 도망치다

이후 프레드릭은 1836년 커비로부터 도망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837년 5살 연상인 흑인 자유인 안나 머레이(Anna Murray)와 사랑에 빠졌으며, 1838년 9월 3일, 필라델피아-윌밍턴-볼티모어 열차에 올라타 성공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후 안나 머레이의 도움으로 세일러복을 얻어 선원으로 위장, 자유인이라는 증명서를 위조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한 끝에 더글라스는 뉴욕에 도착하였다. 위의 탈출 과정은 24시간 내에 진행되었다.

그 뒤 뉴욕으로 안나 머레이를 부른 프레드릭은 9월 15일 흑인 장로교회 목사의 주례 아래 결혼하게된다. 그리고 추적을 피하기 위해 프레드릭은 프레드릭 베일리(Frederick Bailey)에서 프레드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로 개명한다. 이 이름은 프레더릭이 감명깊게 읽은 워터 스코트(Sir Walter Scott)의 시 Lady of the Lake에 나오는 등장인물 Ellen Douglas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2.3. 떠오르는 젊은 폐지론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Frederick_Douglass_by_Samuel_J_Miller,_1847-52.png

이후 프레드릭은 주일학교장 등을 맡고 뉴 베드포드의 여러 조직에 가입해 노예제와 남녀 차별법 폐지자들과 함께 토론에 참여하는 등, 여러 사회활동을 하였다. 그 중 그 시대 가장 활동적인 폐지론자 중 한명인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의 주간잡지 The Liberator(해방자)를 구독하면서 공감대를 형성, 깊은 관계를 형성한다. 이후 1841년 매사추세츠주 낸터킷에서 개최된 노예제폐지대회에서 23세의 나이로 그의 힘든 노예생활과 노예제 폐지론에 대한 즉흥 연설을 하면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노예제 폐지 운동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다.

1845년 프레드릭은 그의 첫 번째 자서전 《미국인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인생 이야기 (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를 출간했다. 당시 회의론자들은 흑인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으나, 출간하자마자 이 책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이 책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어 유럽을 비롯한 각지에 퍼졌으며, 3년동안 9번 복사되었고, 미국 안에서만 11,000권이 팔렸다. 그러나 책이 출판되고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세간의 관심에 의해 그가 자유인이 아닌 올드 가 소유의 노예임이 드러나고 체포될 것을 우려한 그의 친구들은 프레드릭에게 아일랜드로 여행을 핑계로 피신해있길 권유했고, 프레드릭은 그 뜻을 받아들여 아일랜드 대기근 초기였던 아일랜드로 긴 여행을 떠다게 된다.

2.4. 영국에서 자유인이 되다

파일:external/myfrederickdouglass.weebly.com/775922.jpg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해방권

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난 프레드릭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인 도날 오 코날(Daniel O'Connell)과 노예제 폐지론자인 토마스 클락슨(Thomas Clarkson), 안나 리차드슨(Anna Richardson) 등 많은 친구를 사귀면서 서로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사귄 친구들과 지지자들이 뉴캐슬 어폰 타인에서 기금을 모아 그의 소유주 토마스 올드(Thomas Auld)로부터 150[6]에 그의 자유인으로써의 권리를 구매해 1846년 12월 12일,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공식적으로 해방권을 얻고 자유의 신분이 된다.

2.5. 미국으로 돌아오다

자유의 신분으로 미국에 돌아온 그는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과 같은 다른 폐지론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는데, 이는 백인 운동가들의 위선적인 태도[7]와 미온적인 방식에 환멸했기 때문이다. 당시 윌리엄 개리슨은 노예 폐지 운동의 근본적 토대를 도덕적 충고에 그치는 정도로 두고 있었지만[8] 프레더릭은 노예 폐지 운동을 위해 물리적, 정치적인 수단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프레드릭은 노예제 폐지론을 주장하는 신문인 The North Star를 발행한다. 프레드릭은 신문을 통해 권리는 성별에서 오지 않는다. 진리는 인종에 연연하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모두 형제이다.라는 주장을 설파하며 노예 폐지론자이자 뛰어난 연설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노예제 폐지만큼이나 여성 인권 운동에 관심이 있었는데, 1848년 뉴욕주 세네카 폴즈에서 세계 최초로 열린 여성 인권 회의인 Seneca Falls Convention에 참여한 유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지 못한다면 흑인으로써의 투표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연설하며, 이를 계기로 수잔 앤서니(Susan B. Anthony)와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Elizabeth Cady Stanton)과 같은 유명한 여성 참정권론자와 친교를 다지면서 여성 권리 운동을 위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 등 직간접적인 활동을 하게된다.

2.6. 해방과 선거권을 위한 싸움

이 와중에 1861년 노예제 폐지를 두고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중 하나였던 더글라스와 그를 비롯한 많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미국의 흑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참전해야함을 촉구했고, 이에 많은 흑인들이 미국 북부군이 되어 참전하였다.

1862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자 그는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하늘에서 번개가 치길 귀 기울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날의 새벽별에서 비추는 희미한 빛을 통해서 우리는 보고있었습니다. 우리는 수백년간 고통속에서 해온 기도의 답을 백년동안 기다렸습니다."라고 회상하였다. 북부의 흑인들이 비로소 자유를 찾자 그는 남부의 흑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54th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의 신병 모집자로써 일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아들들 또한 군복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남북 전쟁 참전으로 투표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 더글라스는 기대와는 다르게 링컨 대통령이 흑인의 투표권 보장에 미진하고, 실제로 흑인 인권이 별반 달라지는게 없자 실망하고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존 C. 프리몬트를 지지하기까지 한다.

이후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더글라스는 링컨 대통령 이후 연이어 5대 미국 대통령의 자문역으로 활동했고, 1871년 율리시스 그랜트가 상원 의원들에게 도미니카 공화국을 미국 주로 편입하자고 설득하려 도미니카 합병의 유용성 조사를 위해 구성한 산토 도밍고 위원회(Santo Domingo Commission)의 보좌로 일하기도 한다. 1877년부터 1881년까지는 컬럼비아 특별구 경찰서장을, 1881년부터 1886년까지는 컬럼비아 특별구의 기록관으로, 1889년부터 1891년까지는 주 아이티의 공사 등을 역임했다.

1894년, 프레더릭 더글라스는 미국의 사형에 대해 규탄을 하는 내용으로 마지막 연설 "The Lessons of the Hour"를 발표하고 1년 뒤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 그의 관은 뉴욕 로체스터의 Mount Hope Cemetery에 묻혔다.

3. 여담

그는 당시 사람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많은 사진을 찍기로 유명했는데, 사진을 찍는 것이 흑인의 정확한 모습을 담아내어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흑인들이 미국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한 행동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ederickdouglass.jpg

1995년 그의 초상화가 우표로 발행되기도 했다.

워싱턴 D.C.를 주로 승격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들이 제안하는 주의 이름 중 하나가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이름을 딴 Washington, Douglass Commonwealth이다. 워싱턴 D.C.가 주로 승격되면 워싱턴주와의 중복 문제로 워싱턴 이름을 그대로 쓸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D.C.가 의미하는 컬럼비아를 쓰자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원주민 학살 경력이 논란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워싱턴 D.C.의 원래 소속 지역이었던 메릴랜드에서 활동한 흑인 인권 운동가인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이름을 붙여서 오랫동안 써왔던 D.C.라는 약자를 유지하는 동시에 논란거리를 없애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영화 영광의 깃발에서 흑인연대 창설의 아이디어를 낸 걸로 나온다.


[1] 본인의 추측.[2] 많은 자료에선 1818년생으로 언급한다.[3] https://books.google.co.kr/books?id=U69bAAAAQAAJ&pg=PA10&redir_esc=y[4] 그의 저서에서 그녀를 친절하지만 연약한 심성의 소유자로 평했으며, 프레드릭 본인에게 "한 인간으로써 다른 인간을 가르치고 치유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고 기술하였다.[5] 미국의 정치 평론과 시, 대화편 등을 기술한 모음집으로, 19세기 초반 미국의 교정에서 읽기, 쓰기를 가르치는데 널리 사용되었다.[6] 당시 달러로 711달러 16센트.[7] 노예 출신임에도 상당한 교양과 지적수준을 가진 더글러스에게 전직 노예임을 드러내기 위해 덜 세련되게 얘기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8] 이 때문에 몇몇 수정주의 학자들은 이를 매우 비합리적인 급진주의로 평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