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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0:04:52

미하일 불가코프

<colbgcolor=#77746a,#77746a><colcolor=#30251e,#30251e> 미하일 불가코프
Михаи́л Булга́ков
Mikhail Bulgakov
파일:미하일불가코프.jpg
본명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
Михаи́л Афана́сьевич Булга́ков[러]
Михаилъ Аѳанасьевичъ Булгаковъ[옛]
Mikhail Afanasyevich Bulgakov
출생 1891년 5월 15일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러시아 제국 키예프 현 키예프
사망 1940년 3월 10일 (향년 48세)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직업 소설가, 극작가, 의사
학력 파일:키이우 대학교 로고.png 키이우 대학교 (의학 전공)
가족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불가코프[3] (아버지)
바르바라 미하일로브나 불가코바[4] (어머니)
베라 불가코바[5] (둘째, 여동생)
나디야 불가코바[6] (셋째, 여동생)
바르바라 불가코바[7] (넷째, 여동생)
니콜라이 불가코프[8] (다섯째, 남동생)
이반 불가코프[9] (여섯째, 남동생)
옐레나 불가코바[10] (막내, 여동생)
배우자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라파 (1913~1924)
류보프 예브게니예브나 벨로제르스카야 (1925~1931)
옐레나 세르게예브나 뉘른베르크[11] (1932~1940)
서명 파일:1920px-Mikhail_Bulgakov_signature.svg.png
묘지 러시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

1. 개요2. 생애3. 작품
3.1. 장편소설3.2. 중단편소설3.3. 희곡
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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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 의사. 니콜라이 고골, 이삭 바벨과 함께 대표적인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문학 작가이며[12] 그의 대표작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20세기에 탄생한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2. 생애

1890년 신학과 교수인 아버지가 사제를 맡고 있던 키이우에서 태어나 일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후 키이우 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키이우 군사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적십자사에 지원하여 직접 전선에 투입되었다. 여기서 입은 부상과 만성 복통으로 모르핀을 복용하기도 했었으나 1918년에 와서 끊었다. 단편 소설 <모르핀>이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이후 체르니우치를 거쳐 스몰렌스크 지방의 의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다시 뱌지마를 거쳐 키이우로 돌아와 개인 개업을 했다.

1919년 러시아 내전 도중 우크라이나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북캅카스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다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했지만 다행히 살아났다.

병이 회복된 후 불가코프는 의사 일을 그만두고 문학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생계를 위해 신문과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지만 소비에트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써 몇몇 희곡 작품들이 상연이 금지되는 일도 있었다. 결국 그는 1930년 3월, 이오시프 스탈린소련 정부에게 자신이 소련을 떠나게 해달라고, 만약 불가능하다면 극장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쓴다.

불가코프의 편지를 받고 한 달 후에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극장 일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다. 그 후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작품들을 출간할 수는 없었다.

내전 때 백군 복무 경력에 일생의 대부분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냈고,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반체제 인사이기까지 하니 숙청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고, 불가코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정치색이 약했던 작가들도 사형에 처해지거나 굴라크로 끌려가는 등의 수모를 당했지만, 불가코프는 다름아닌 스탈린이 그의 작품을 좋아했기에 살아남은 것은 물론이고, 일자리도 얻으며 타 작가에 비하면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38년, 희곡 <바툼>이 스탈린이 중심인물이라는 이유로 상연이 금지되자 그는 1929년에 집필을 시작했다가 중단했던 장편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불가코프는 1940년 2월에 작품을 탈고하고 한 달 후인 3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숨을 거둔다. 후반부를 쓸 때는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아내에게 구술을 하여 작품을 완성시켰다. 다만 직접 탈고는 하지 못해 이야기가 일부 상충하는 대목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당대에는 출간되지 못하고 27년이 지난 1967년이 되어서야 출간될 수 있었다. 사실 본인도 이 소설이 출판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의 지인인 편집자가 완성된 원고를 보았는데, 혹시 출판이 가능하겠느냐고 묻자 편집자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출신 작가이고, 공산당에 반대하여 우크라이나 인민군에 입대한 전적이 있지만, 자신을 러시아계로 여겼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독립이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성향을 보였으며,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내에서는 고깝게 보는 경우가 많다. 이 점에 있어서 니콜라이 고골과 비슷한 점이 있으며, 이를 반영해서 2022년 러우전쟁으로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면서 기념패가 철거되기도 했다.

3. 작품

3.1. 장편소설

3.2. 중단편소설

3.3. 희곡

4. 대중매체


[러] 러시아어식 표기.[옛] 옛 정서법 표기.[3] 1859년 4월 29일~1907년 3월 27일[4] 1869년~1922년, 혼전 성명은 '바르바라 미하일로브나 포크롭스카야'.[5] 1892년~1972년[6] 1893년~1971년[7] 1895년 11월 4일~1956년 9월 11일[8] 1898년 9월 1일~1966년 6월 13일[9] 1900년~1969년[10] 1902년~1954년[11] 첫 번째 결혼 때의 성명은 '옐레나 세르게예브나 네욜로바', 두 번째 결혼 때의 성명은 '옐레나 세르게예브나 실롭스카야'. 미하일 불가코프는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이다.[12] 이 가운데 바벨은 자신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이라기보다는 유대인 혈통 작가로서 정체성이 두드러지는 인물이고 고골과 불가코프는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스스로를 러시아인이라 여겼다.[13]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작품을 각색.[14] 몰리에르의 작품을 각색.[15] 소설 <백위군>을 희곡으로 각색한 작품. 스탈린이 최소 15번은 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