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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9-29 23:05:28

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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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원3. 수감자의 종류4. 수감자의 숫자5. 노동과 생활6. 석방?7. 변화8. 세간에 알려지기까지9. 소비에트 연방의 손실 보상10. 러시아 연방의 손실 보상11. 현실의 굴라크12. 매체에서의 굴라크
12.1. 게임에서의 굴라크12.2. 소설 및 만화 매체에서의 굴라크12.3. 영화에서의 굴라크

1. 개요

Гулаг, Gulag, 소련의 노동교화수용소 혹은 정치범수용소.

외래어 표기법상 굴라크가 정확하다(러시아어 Г는 어말에 있으면 /k/로 발음한다).

2. 기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Gulag_Location_Map.svg.png
1918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에서 운영되었던 굴라크들.[1]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대의 개척을 위해 제정 러시아에서 정치범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도시 기반을 닦는다거나 운하를 파는 일을 맡겼었는데 이것이 소련의 굴라크 제도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적백내전 때부터 체제가 운영되었고 조직적이고 정교한 탄압은 스탈린 정권시기로 보면 된다.

여담으로 북한, 중국의 노동교화소, 관리소의 원조는 바로 이 소련의 굴라크다.[2]

3. 수감자의 종류

이 양반 빼고 나머지 전부가 예비 수감자 신세였다. 스탈린 시대에 "그 후 아무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한다면 십중팔구 즉결처형을 당했거나 이곳에 끌려왔다.

4. 수감자의 숫자

1929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총 1,400만명이 굴라크를 거쳐갔다고 하며,[18] 추가로 600-700만 정도가 국외나 소련의 오지로 추방당하고,여기에 400-500만명이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 되었고, 350만명이 강제이주를 당했다고 한다.[19] 이중 사망한 사람은 대략 최소 160만[20]에서 최대 1,000만[21]이 사망했다고 한다.양반인간백정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아래는 대략 연대순으로 굴라크 감금 인원을 추정한 값이다.[22]
굴라크 수감자수 그 해의 수감자 추정인원 출처 검증방법
1,500만명 1940-42년 모라와 즈위워네그(1945)[23] 미상
230만 1937년 12월 티마셰프(1948)[24] 권리를 빼앗긴 인구를 계산함
최대 350만 1941년 야스니(1951)[25] 소련 NKVD사료 분석
5,000만 스탈린 치하에서 굴라크를 거쳐간 인원의 종합수 솔제니친(1975)[26] 수많은 증인의 간증과 솔제니친 본인의 경험,그리고 다양한 간접적 자료를 분석
1,760만 1942 안톤 안토노프-옵세옌코(1999)[27] NKVD문서
4-500만[28] 1939 휘트크로프트(1981)[29] 인구 통계학적 자료 분석
1,060만[30] 1941 로즈필드(1981)[31] 모라와 즈위워네그의 자료와 연간 사망률을 기반으로 함
550-950만[32] 1938년 후반 콘퀘스트(1991)[33] 1937년 인구조사 수치,체포와 사망자 인원 추정, 다양한 개인 및 문학들을 기반
4-500만 매년 볼코고노프(약 1990)[34] 미상

5. 노동과 생활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백해 운하가 다 굴라크에서 나온 성과이며, TSR노선의 건설, 2차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생산 중 상당부분이 여기에서 나온 성과였다...

노동 수용소에 수용된 죄수들에게서 뭐 뽑아낼 게 있나 싶겠지만, 의외로 소비에트 러시아가 굴러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역할을 했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라크가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라크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식민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보너스로 그 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다.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다. 1차 5개년 계획으로 이동 된 죄수 집단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중 90%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이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일에 투입되었다.

굴라크는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책임졌으며, 단순노동에만 투입됐을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엘리트 두뇌들도 상당수 굴라크에 투옥돼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의 인센티브는 주로 형량 감경. 어찌 보면 가장 확실한 인센티브라고 할 수 있을지도. 스탈린 시절 소비에트 러시아는 문자 그대로 '수용소에서 공돌이가 갈려들어가는' 나라였다.
솔제니친도 학창 시절에 수학을 대단히 잘했다는 전력 때문에 잠시 이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얼마 뒤 벽돌을 날랐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책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따르면, 시베리아답게 영하 30도 정도는 따뜻한 날씨이며, 작업장의 난로는 수감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품이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음식은 1끼 200g 정도의 빵과 너무 오래 끓여서 뭐가 들었는지도 모를 국[35]이다. 강도 높은 처벌을 위해 '중영창'이라는 곳이 있는데 15일도 살아남기 힘들고 살아남더라도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 회복하기 힘들다고 한다. 수용소에 따라서는 외부로부터의 소포도 허용된 모양. 뇌물로 쓰인다.

과학자들이 주로 수용된 노동 수용소를 '샤라쉬카'라고 부르며, 유명한 과학자들도 상당수가 저 곳에 투옥되어 갈려들어갔다. 예를 들면 러시아 우주개발의 아버지 격인 세르게이 코롤료프, 로켓엔진 설계자인 발렌틴 글루슈코, 항공기 설계자인 안드레이 투폴레프와[36] 페틀랴코프, 미야시시체프, 폴리카르포프 등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소련의 핵개발에도 이 굴라크의 인력을 동원했다. 단, 이 부분이 와전되어서 어차피 죽을 죄수들이니 방사능에 오염되는 위험한 일을 일부러 맡겼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냉전식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굴라크 죄수들이 동원된 건 주로 천연 우라늄을 채굴하는 작업이었는데, 자연 상태의 천연 우라늄은 방사능 수치가 매우 낮아서 큰 위험이 없다. 실제 방사선 피폭의 위험이 있는 본격적인 핵연료 가공 등의 작업은 해당 기술이 있는 전문 노동자들이 따로 담당했다. 미국에서도 이런 천연 우라늄 채굴은 평범한 민간 광부들이 맡았다.

굴라크에서의 생활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에서 잘 표현돼 있다. 솔제니친이 훌륭한 작가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러한 곳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 솔제니친 자신이 그러한 수용소에서 오래 살아봤기 때문이다. 국가 반역죄인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스탈린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노땅, 꼰대류로 비하한 것이 발견되어서이다. 굴라크의 벽돌노동자부터 지식 수용소 인원, 유형지 생활까지 죽는거 제외하고는 상당한 코스를 밟았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가한 뒤 소련 당국으로부터 귀국이 불허되어 이후 1994년까지 소련에 돌아오지 못했으며 2008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예수회 신부 월터 치세크(Walter Ciszek)의 자서전인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에서도 굴라크의 생활과 출소 후의 소련 생활에 대해서 잘 묘사되어 있다.[37]

소련의 굴라크는 정말 최악의 장소라고 생각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고 굳이 비유하자면 북한 정치범수용소나치 독일아우슈비츠보다 조금 덜한 정도였다. 그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원조도 굴라크이고, 논픽션 굴락의 저자 애플바움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가 구 소련의 그 곳과 가장 근접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에 따르면 간수가 똥을 먹인다던가 하는 일도 있다.

한편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930년대부터 노동자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누구나 경쟁하는 스타하노프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관련한 포상들 가운데 기묘한 것이 있었다. 우수한 실적을 올린 노동자는 여자 죄수 수용소에 위로휴가를 갈 수 있었다. 임신을 하면 3년을 감형시키는 소련 법률 때문에 여자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검열삭제를 원했고 강간도 횡행했다고 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간수에게 뇌물을 주면 원하는 여자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포상도 해결할 수가 있고, 임신을 원하는 여자들을 대체 누가 임신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쓸데없는 고민도 해결할 수가 있고. 궁극적인 목표인 인구의 증가도 해결할 수가 있다.

6. 석방?

스탈린 시대에는 최고 유기징역형인 25년 징역형을[38] 마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그런거 없다. 대신 미개척지이거나 소외지인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에서 평생 유형생활을 한다. 이곳은 비록 강제노동이나 수감, 고문 이런건 없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감시받는[39] 시민으로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40] 그나마 유형생활 도중에 체포되거나 집에 다시 갔다가 체포돼서 20년형을 받는 일도 많아졌는데... 스탈린 사후에는 이런 악습은 사라졌고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이후에는 유형을 받은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41]

7. 변화

1953년 4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의사들의 음모' 사건과 '민그렐리야' 사건에 대하여 심리를 취소했으며, 사건에 연루한 사람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 1953년 9월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트로이카[42] 제도를 폐지했다.

1954년 4월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연방 대법원이 '레닌그라드' 사건에 대하여 심리를 취소했으며, 사건에 연루한 사람들의 석방과 복권을 실행했다. 1954년 4월부터 1956년 1월까지 소련 공산당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당에서 제명한 당원들을 복당했다. 1954년 5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회의가 입법한 특별법은 반혁명 범죄로 기소한 사람들의 석방을 허용하면서 정치범들과 경제범들에 대하여 대규모로 사면을 베풀 수가 있는 길을 닦았다. 동시에 소련 공산당은 정치범들과 경제범들 가운데 '근거가 없는 정치적인 죄상을 이유로' 출당한 당원들을 복당했다.

때마침 노릴스크, 보르쿠타, 켄기르, 콜리마에서 죄수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광공업의 기계화와 자동화는 수용소의 유지비가 강제노동에 의한 경제적인 이익을 초과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장관회의가 결단을 내려 사면을 베풀었다. 1956년 2월에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스탈린의 악행을 규탄하면서 희생자들의 복권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가능했다.

덕택에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신나게 까던 시절쯤에는 굴라크에서 강제노동의 비중도 줄었고, 석방한 다음에 재투옥하는 법제를 차례로 폐지했으며, 유형 생활자도 석방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이후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부터 안드로포프 정권 시기까지 다시 강화되었지만 이 때는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굴라크의 실태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굴라크에 주요 정치범이 수용되었다는 소식이 서방에 알려지면 서방에서 지속적인 석방요구와 생존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43]

스탈린 사후의 소비에트 연방은 굴라크보다도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으니, 그것이 바로 '제명'인데, 정신병원에 수감하거나 가택연금으로 아예 대외적인 활동을 물샐틈없이 차단하는 술책이다. 브레즈네프 정권과 안드로포프 정권의 관점에서 고려해도 굴라크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술책을 편리하게 잘 쓰는 마당에 굴라크 체계를 크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크게 만들어 본들 이미지만 나빠지고... 그래도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을 오지에 구금하는 수단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콜리마와 노릴스크페름에서 정치범과 경제범을 대규모로 구금하는 수용소를 운영했다.

1990년대에 소비에트 연방동산부동산을 모두 인수한 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연방정부는 굴라크의 구금 시설을 현대화하여 연쇄살인범과 같은 흉악범을 가두는 교도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NGC의 최악의 러시아 교도소라는 프로그램에서 교도소 내부를 제한적으로 공개했으며. 최근에 석유 재벌로 널리 알려진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를 구금한 교도소는 실제로 그렇게 개조한 곳이다. 그래도 그는 안락하게 살았다.

8. 세간에 알려지기까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소련의 굴라크 체제는 그야말로 도시전설이었다. 그런데 폴란드 공화국 정부는 굴라크의 존재를 탐지하고 있었다.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전역에서 폴란드 공화국의 교민들이 내무인민위원회가 지휘하는 인민경찰(밀리치야)에 무더기로 잡혀갔는데,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 주재 폴란드 대사관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공화국의 외무부에 보고한 덕택이다. 게다가 1940년에 폴란드 망명 정부자유 폴란드군을 결성하면서 폴란드군 포로들이 이란터키인도 제국영국령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귀환하고 영국프랑스서독스위스에 정착하면서 그들을 구금한 굴라크의 실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의 경우는 그것을 운영한 체제가 완전히 사라졌고 심판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상이 공개된 것이지만 소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었고, 2차 대전 당시 까지만 해도 서방과의 동맹체제 때문에 오히려 굴라크에 대한 이야기를 서방에서는 모른체한 면이 있다. 심지어 카틴 학살조차도 정황이나 여러 증거로 봐서 소련의 소행임이 분명함에도 미국측에서 동맹을 의식해 그 사실을 독일의 소행으로 발표했다.

1940년대 말 들어 냉전 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고 동유럽에 공산주의 국가들이 대거 들어서자 이에 발 맞춰 굴라크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이슈화 되기시작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에서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실체가 드러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소련이 해빙기를 맞게되면서 굴라크의 실상이 상당부분 드러났고 흐루쇼프가 쫓겨나고 보수화 된 브레즈네프 체제하에서부터는 서방도 고위 반체제 인사나 유명한 운동권 대학생의 굴라크 수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국가적인 항의를 하게 되었다. 80년대 유형생활을 한 핵물리학자 사하로프 박사가 대표적인 케이스.

굴라크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 체계적인 연구는 솔제니친의 르포 '수용소 군도'가 최초였고[44] 소련 붕괴후 여러 자료들을 모아 집필한 애플바움의 역작 굴락이 출간되었는데, 번역본은 불쏘시개다.[45]

9. 소비에트 연방의 손실 보상

10. 러시아 연방의 손실 보상

11. 현실의 굴라크

12. 매체에서의 굴라크

12.1. 게임에서의 굴라크

12.2. 소설 및 만화 매체에서의 굴라크

12.3. 영화에서의 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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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어로 씌어진 도시들은 왼쪽 위부터 무르만스크(Мурманск), 아르한겔스크(Архангельск), 탈린(Таллинн),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 리가(Рига),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 빌뉴스(Вильнюс), 민스크(Минск), 키예프(Киев), 키시너우(Кишинев), 로스토프나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 트빌리시(Тбилиси), 모스크바(Москва), 카잔(Казань), 페름(Пермь), 볼고그라드(Волгоград), 아스트라한(Астрахань), 바쿠(Баку), 아시가바트(Ашхабад), 보르쿠타(Воркута), 살레하르트(Салехард), 스베르들롭스크(Свердловск), 옴스크(Омск), 카라간다(Караганда), 비슈케크(Бишкек), 타슈켄트(Ташкент), 두샨베(Душанбе), 알마티(Алма-Ата), 노릴스크(Норильск), 노보시비르스크(Новосибирск), 크라스노야르스크(Красноярск), 이르쿠츠크(Иркутск), 야쿠츠크(Якутск), 스보보드니(Сбоводный), 마가단(Магадан),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2]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오히려 나치의 아우슈비츠처럼 변질된다. 여담으로 삼청교육대는 스탈린시대의 굴라크의 판박이였다.[3] NKVD 같은 기관의 고위급 간부가 아닌 중하위 간부나 말단 대원의 경우는 얼마 후 석방되어 수용소 간수나 경비병으로 살 수 있었다. 물론 수용소 간수나 경비병도 식량 부족 같은 걸로 고생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도 초반부에 간수실을 청소하는 주인공 옆에서 간수들이 식량배급문제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4]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 의하면 소련 선박이 기상 악화로 스웨덴에 표착했고 어느 정도 억류생활을 한 후에 승조원 전원이 굴라크로 직행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5] 작중에서는 나오는 부이놉스키 중령. 매우 꼿꼿한 인물로 나오는데, 실존인물이고 놀랍게도 굴라크에서 생존해서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다고 한다.[6]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주인공이 바로 이 혐의였다. 다만 형량은 10년이었고 작중에선 약 8년을 보내고 2년 정도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작중언급으론 형량이 개개인마다 다른 게 아니라 시기별로 일괄적으로 10년을 선고하거나 25년을 선고했다고 나온다. 즉, 주인공은 일괄적으로 10년 때릴 때 형을 선고받은 것이다.[7] 물론 포로 기간 중에 자유 러시아 군단 같은 곳에 자원했다면 굴라크고 뭐고 없다.[8] 이 경우는 당연히 의혹 수준이고 아직도 작전 중 실종으로 기록된다.[9] 이들 중 상당수는 경제 공황 전후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이민 간 미국계 공산당원과 그 가족들이다.[10]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인도 국민군의 영웅 찬드라 보세 역시 시베리아 사망설이 심도있게 제기되고 있다.[11] 다만 이들의 운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MBC에서 방영된 고려인 드라마에서 조명희는 굴라크 폭동에 연루돼서 사망한 것으로 그렸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재판 후 처형이었다.[12] 6.25 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활약한 황학소의 경우도 이런 식으로 귀환한 케이스. 처음에는 북한으로 보내졌지만 북한 당국도 고향이 이남이고 본인이 고향으로 가기를 원하면 그냥 38선 월경을 허가해주었다고 한다. 이들의 귀환은 6.25 전쟁 직전인 48~9년도경에 이루어졌는데, 그나마 이 때 송환결정이 이루어졌기에 망정이지,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사할린 한인들처럼 소련에 발이 묶이거나 북한에 남아야 했을 수도 있다. 송환 후에 삼팔선까지 왔지만 넘어오는 과정에서 한국군으로부터 오인사격을 당하는 등, 고향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고생했다고 한다. 소련 억류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사해문집)을 참조하면 좋다.[13] 자유시 참변과 소련 지원금 횡령 사건 때문에, 소련과 친소련계를 싫어하는 독립운동가가 많았다.[14] 당대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지각시 20분당 징역 1년. 아래 할당량 항목에 해당하는 얘기인데, 각 지역의 인민경찰(밀리치야)이 할당량을 못 채운다면 근처 출근버스를 덮친 다음 적당한 누명을 씌우고 또 버스를 덮치고 연행한 시간들도 지각죄로 징역을 때렸다.[15] 횡령 같은 게 아니라 기술 개발 실패 등의 문제다. 안드레이 투폴레프가 바로 이 혐의로 굴라크에 갔다. 그는 1937년에 투옥되어 1944년에 석방되었다.[16] 애플바움의 굴락에 의하면 50년대 2명의 미국 조종사가 굴라크에 이송된 정황이 있었는데, 1명은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런 일반 죄수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17] 대한민국에서도 1980년대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삼청교육대 참고.[18] 이것도 1929년부터 1953년까지 따진거고 그 이전인 1918년부터 1929년 사이에는 정확히 몇명 끌려갔다 나왔는지 측정이 어렵다고 한다.[19] 출처:Robert Conquest, Victims of Stalinism: A Comment[20] 출처:Steven Rosefielde, Red Holocaust[21] 출처:Robert Conquest, The Great Terror: A Reassessment[22] 영문 위키피디아 자료 차용[23] David Dallin and Boris Nicolaevsky, Forced Labor in Soviet Russi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47), p. 59-62.[24] Timasheff. The Postwar Population of the Soviet Union.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 54, No. 2 (Sep. 1948), pp. 148-155[25] Naum Jasny. Labor and Output in Soviet Concentration Camps.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Vol. 59, No. 5 (Oct. 1951), pp. 405-419[26]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제2부, Harper and Row, 1975. Estimate was through 1953.[27] Beria Moscow, ACT, 1999, page 203.[28] 후에 하향조절함.[29] Wheatcroft. On Assessing the Size of Forced Concentration Camp Labour in the Soviet Union, 1929–56. Soviet Studies, Vol. 33, No. 2 (Apr. 1981), pp. 265-295[30] 후에 하향조절함.[31] Steven Rosefielde. An Assessment of the Sources and Uses of Gulag Forced Labour 1929–56. Soviet Studies, Vol. 33, No. 1 (Jan. 1981), pp. 51-87[32] 후에 하향조절함.[33] Robert Conquest. Excess Deaths and Camp Numbers: Some Comments. Soviet Studies, Vol. 43, No. 5 (1991), pp. 949-952[34] Rappaport, H. Joseph Stalin: A Biographical Companion. ABC-CLIO Greenwood. 1999.[35] 보통 생선이나 오래된 야채가 들어가는데 때때로 식량이 부족할 때는 사료용 귀리, 심지어 들풀로도 국을 끓인다. 다른 작품에서는 '무만 넣고 끓인 맹탕같은 수프' 가 나오기도 했다. 그냥 아무거나 넣고 끓이는건가보다.[36] 폭격기로 유명한 투폴레프 설계국의 수석설계자.[37] 이 사람은 폴란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부로,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 있다가 바티칸 스파이로 지목되어 붙잡혀 15년간의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여러 굴라크를 돌아다니며 15년간 강제노동을 했고, 풀려난 뒤에도 감시와 거주 제한이 딸린 제한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63년 미국에 침입했다 잡힌 소련 첩보원 2명과의 교환조건으로 소련에 억류된 2명의 미국인을 풀어주는 일이 있었는데, 월터 치세크는 이 기회를 통해 23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84년에 선종.[38] 소비에트 연방러시아 소비에트형법전에 따르면, 사형, 25년 후 가석방이 가능한 무기징역, 25년 징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러시아 연방형법전도 그대로 계승했는데 사형이 사문화되면서 현재는 최대 25년 형과 무기징역으로 이원화되어 있다.[39] 박헌영의 전처는 딸을 모스크바에 두고서도 유형생활 때문에 가끔 방문만 허가 받았다.[40]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8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1953년 석방되었는데, 3월 2일 유형지인 카자흐스탄 남부 비를리크에 유배되어 나흘 뒤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종양이 도져 이듬해 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로 유형지를 옮겨 치료를 받고 (이때의 경험이 바로 암병동이라는 소설에 나온다), 그 후 교사 노릇을 하는 유형 생활을 했다. 동물원에 주말에 놀러가거나 아플 때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갈 정도의 자유를 누리긴 했다. 군대에서는 외진이란 형태로 경험할 수 있다[41] 이런 케이스 중에 기구한 것은 북한 정권에 반대한 혐의로 투옥된 반공 인사들이다. 이들은 소련 군정에 의해서 체포돼서 굴라크에 수감되었는데 스탈린 사후 북한으로 송환되는 일을 겪는다. 물론 상당수는 중앙아시아 잔류를 택하지만...[42] 소련 공산당지구당 서기, 지방검찰청의 검사장, 내무인민위원회의 지부장이 움직이는 3인조.[43] 스탈린 시절에는 그런 거 없이 서방에서도 "설마 그런 게 있겠냐"는 도시전설 수준...이었으나 굴라크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자유 폴란드군 장교들을 통해서 서방도 공식적으로 굴라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44] 한국에서는 1부만 70년대 발췌번역되었고 소련 체제를 설명한 완역본은 80년대 후반에야 나올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시중에서는 1부(정확히는 1부의 1~7장 부분)만 번역한 발췌본만 구할 수 있다. 열린책들에서 발행한 완역본은 현재 절판 상태. 다만 이전판에서 '지극히 반공적인 부분인 1부'라고 한 서술은 서술자가 아마 완역본을 읽어보지는 않은 것 같다.[45] 가히 최악의 번역이라 할만하다. 애초에 번역 작업을 제대로된 번역가가 맡아서 하지 않고 GAGA통번역센터라는 번역 업체에서 했다. 각 챕터마다 고유명사의 한글표기가 오락가락하는 것은 당연하고 비문과 오역이 난무한다. 읽다보면 탄식이 절로 나오는 수준. 심지어 책 첫 페이지의 '감사의 말'조차 번역이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46] 안병직, 세계의 과거사 청산 ; 김남섭, 스탈린 체제와 러시아의 과거청산, 342쪽~354쪽[47] 1960년에 옛돈으로 지급을 완료한 퇴직금연금의 금액 = 1961년에 새돈으로 지급을 고려한 퇴직금과 연금의 금액으로 규정.[48] 안병직, 세계의 과거사 청산 ; 김남섭, 스탈린 체제와 러시아의 과거청산, 355쪽~362쪽[49] 서브퀘가 하나 존재한다.[50] 진짜 스파이와 동명이인이었는데 KGB가 잘못을 알고도 그냥 시베리아로 보냈다.[51] 실제로 환영회 장면에서 수용소 친구들이 환상속에서 갑툭튀하고 남아있던 친구들이 굴라크 이송중 쓰러지는 장면이 나오고 석방되어도 아직도 마음만은 굴라크에 살고 있다는 주인공의 나레이션과 함께 크레딧이 올라간다.[52] 다만 이 수기 부분은 이전부터 가짜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소련의 기록에 의하면 주인공은 석방돼서 자유 폴란드군에 인계되었다고 한다. 2007년 또 다른 폴란드 조종사 출신 장교가 그 경험은 자신의 경험이었고 주인공은 자신의 경험을 도용했다고 주장한바 있다. 인도 주둔 영국군 기록에 의하면 실지로 굴라크를 탈출해서 인도로 망명한 사람들이 존재하긴 한다고 한다.[53] 소름 끼치게도 알래스카와 마주보고 있다.[54] 전쟁영웅으로 진급이 보장된 전방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수용소에 전임왔다. 자신의 감독하의 수용소를 탈주한 주인공을 잡아들이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기며 상부에서 수색을 중단하라고 하자 근무지 이탈까지 하며 주인공을 여러번 위험에 쳐하게 한다.[55] 정확히는 예비군으로 전쟁말기에 급하게 징집됐다.[56] 미국 대사관에서 구하려 했지만 소련 당국이 제공한 성노예를 받고 입을 씻는다.[57] 놀랍게도 흑인이며 미국의 높으신 분들의 치부를 알고 있고 책으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의 고위 스파이라는 암시가 있다.[58] 제독은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행방을 감추고 은거했다고 자막에 나온다.[59] 막상 소련에 대한 비판때문에 핀란드에서는 상영금지를 먹었다. 하지만 감독인 레니 할린은 이 영화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60] 엄청난 크기의 곰이나 이마에서 무슨 불 같은 레이저가 나오는 사람과 강제 결투를 한다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