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2-01 21:58:25

칼리니코스 전투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clearfix]

1. 개요


기원전 171년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격파한 전투,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첫번째 전투이다.

2. 배경

기원전 197년 로마를 상대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던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더이상 로마에 대적할 수 없다고 여기고 템페 회담에서 로마군 사령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요구사항에 따라 150년간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던 테살리아를 비롯한 여러 영토를 포기하고 로마에 종속되었다. 그 후 둘째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로마에 볼모로 보내고 로마에 순종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은 지난날 한니발 바르카와 손잡고 자국을 공격하려 든 전력이 있고 아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싸운 필리포스 5세를 믿지 못해 마케도니아에 여러 차례 막대한 공물 헌납을 요구했으며, 데메트리오스를 로마화시킨 뒤 마케도니아로 돌려보내서 차기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에 맏아들 페르세우스가 반발했고, 마케도니아 궁정은 데메트리오스가 이끄는 친 로마 세력과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반 로마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기원전 180년, 플라미니누스가 데메트리오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데메트리오스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편지는 페르세우스가 조작한 것이었다고 한다. 페르세우스는 이 편지를 도중에 빼돌린 뒤 아버지에게 보여주면서 데메트리오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고, 필리포스는 이에 따라 데메트리오스를 독살했다. 그러나 아들을 처형한 충격과 로마가 이 일을 가지고 어떻게 나올 지 근심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기원전 179년 사망했다. 페르세우스는 왕위에 오른 직후 안티고노스 3세의 아들 안티고노스를 처형해 왕위 경쟁자를 미연에 제거하였다. 그는 즉각 로마에 대표단을 파견해 자신을 인정하고 기원전 196년에 맺었던 조약을 갱신하자고 요청했고, 로마 원로원은 마지못해 승인했다.

필리포스 5세는 과거 북방의 적인 다르다니아인을 견제하기 위해 켈트족게르만족의 혼합 집단인 바스타르네(Bastarnae)족과 동맹을 맺은 바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동맹을 강화하기로 하고 바스타르네 공주와 결혼했다. 이후 바스타르네족이 다르다니아인을 공격하자, 다르다니아인은 원로원에 사절단을 보내 마케도니아가 바스타르네를 부추겨서 자신들을 치게 했다고 주장했다. 페르세우스는 즉시 사절을 보내 바스타르네의 다르다니아 침공은 자신이 조장한 게 아니라고 부인했다. 원로원은 일단 지켜보기로 하면서도 페르세우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편, 트라키아 부족 사페아족이 마케도니아 북부를 침공하여 암피폴리스에 도착했다. 그들은 암피폴리스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으나, 페르세우스의 통치 기간 내내 마케도니아의 골칫거리로 남았다.

페르세우스는 빚을 갚지 못해 각지를 유랑하는 자들과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공표하여 민심을 모으고자 하였고, 델포이 신전에 다수의 대표단을 보냈으며, 아이톨리아 동맹과 화해해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였다. 테살리아와 아이톨리아에서 무거운 빚에 시달리는 이들을 부추겨서 친로마적인 과두정에 대항하게 하였다. 테살리아의 각 도시 국가 정부들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로마에 개입을 요청했지만, 원로원은 관여하지 않았다.

기원전 174년, 그는 돌로프 족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한 뒤 델포이 신전에 들러 신탁을 받았으며, 그리스인들에게 필리포스 5세 때의 갈등을 잊고 새로운 우호관계를 맺자고 요청했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을 제외한 대다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한편 에우메네스 2세가 통치하는 페르가몬 왕국이 갈수록 강력해지자, 그는 기원전 177년 셀레우코스 제국에 접근하여 셀레우코스 4세의 딸 라오디케와 결혼했고, 누이 아파마를 페르가몬 왕국의 경쟁자 비티니아 왕국프루시아스 2세와 결혼시켰다. 여기에 로도스인들에 접근하여 10,000명의 용병을 새로 징집해, 마케도니아군을 강화했다.

원로원은 마케도니아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도스, 그리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친선 및 동맹 관계를 수립하는 걸 우려했다. 이에 따라 사절을 보내 페르세우스에게 다시 경고하려 했지만, 페르세우스가 사절을 만나주지 않아서 실패했다. 기원전 173년 테살리아의 도시 국가 정부들이 다시 한번 페르세우스의 팽창 정책에 우려를 제기하자, 로마는 사절을 파견해 테살리아에서의 빚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이오티아 동맹과 연합을 체결하고 델포이와 델로스에서 동맹 조약을 발표했다.

원로원 내부에서는 반마케도니아파가 궐기해 무력으로 마케도니아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많은 의원들은 마케도니아가 로마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데 굳이 개입할 필요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가 로마에 방문하여 페르세우스를 위험 인물로 묘사하며 개입을 촉구하면서, 원로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들은 로마의 친밀한 동맹인 페르가몬 왕국의 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에우메네스가 귀국하던 중 페르세우스가 보낸 암살단의 습격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지자, 원로원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보고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다.

우선 전쟁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기원전 172년 사절단을 페르세우스에게 파견하여 평화를 논의하게 했다. 페르세우스는 협상에 성실히 임했고 휴전 협약이 맺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기원전 17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2개 군단병과 비슷한 숫자의 동맹군, 에우메네스 2세가 제공한 군인 및 함대를 이끌고 일리리아 해안에 상륙한 뒤 페르세우스에게 선전포고문을 발송했다. 이에 페르세우스는 빠르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40,000명의 보병, 4,000명의 기병을 소집했으며, 오드뤼사이 왕국의 국왕 코티스에게도 지원군을 받아냈다. 그 후 로마에 넘어간 테살리아 북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크라수스는 일리리아 해안에서 산간 지대를 거쳐 테살리아로 행진했다. 양측은 테살리아의 칼리니코스에서 조우했고, 각자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대치했다. 페르세우스는 숙영지를 건설하고 하루 동안 푹 쉰 뒤 테살리아 남부의 페라이를 습격해 농경지를 약탈함으로써 로마군이 숙영지에서 나와서 전투를 벌이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로마군이 나오지 않자 분견대를 로마 진영 인근에 접근시켰다. 로마군은 경무장 부대를 파견해 이들과 교전하면서도 여전히 숙영지에 가만히 있었다.

그 후 페르세우스는 며칠 동안 똑같은 시각에 들판으로 나와서 회전을 요구했고, 크라수스가 받아들이지 않자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로마 기병대가 말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들판에 풀어놓은 아침에 느닥없이 기병과 경보병대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크라수스는 급히 기병대를 소집하여 이들을 저지하게 했다. 이리하여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첫번째 전투가 발발했다.

3. 전투 경과

마케도니아군에 소속된 투석병과 투창병 400명은 페르세우스의 지시에 따라 적을 향해 원거리 무기를 던지며 도발했다. 그 후 코티스가 보내준 트라키아 기병대가 좌익에서 이탈리아 기병대를 향해 돌격했고, 페르세우스는 중앙과 우익의 크레타 경보병대와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와 그리스 기병대 및 경보병대를 공격했다. 트라키아 기병들의 압도적인 전투력과 승마술을 당해내지 못한 이탈리아 기병대는 혼란에 빠진 끝에 얼마 못 버티고 패주했고, 로마 및 그리스 부대 역시 갑작스러운 적 공격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퇴각했다.

이때 예비군으로 남아있던 테살리아 기병대가 에우메네스 2세의 페르가몬 군대와 함께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도주하는 로마 및 이탈리아 기병대를 엄호해 그들이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갈 수 있게 했다. 이후 경보병대까지 구하기 위해 전진하자, 페르세우스는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진영에 대기중이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투입시키려 했다. 이때 크레타인 사령관 에우안다르가 진언했다.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나중의 일을 생각하시어 굳이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마십시오."

페르세우스는 그 말에 따라 군대를 숙영지로 되돌리기로 했다. 이날 로마군은 기병 200명과 경보병 2,000명을 상실했는데, 그중 6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마케도니아군의 손실은 기병 20명, 보병 40명에 불과했다. 크라수스는 수로를 지키기 위해 반대편 강둑으로 숙영지를 옮기자는 에우메네스 2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페르세우스는 전투를 벌이기 위해 평원에 나왔지만 적 진영이 옮겨진 것을 보고 자신이 사전에 적이 이동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해 야습을 가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4. 이후

크라수스는 패배의 원인이 전투 초반에 제대로 싸우지 않고 붕괴된 아이톨리아 부대에 있다고 여기고 가장 먼저 도망친 것으로 간주된 아이톨리아 장교 5명을 체포해 로마로 압송했다. 반면 예비군으로서 전선을 형성해 아군을 지켜준 테살리아인들에게 큰 보상을 해줬다. 페르세우스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크라수스는 로마에 항복하는 게 아닌 한 협상을 논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 후 로마군이 숙영지를 팔라나로 옮기자, 페르세우스가 이를 급습하기로 하면서 팔라나 전투가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