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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30 20:50:31

코펜 원정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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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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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27년 5월 ~ 기원전 326년 3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코펜 강(지금의 카불 강)을 따라 진군하여 카불 계곡의 여러 부족을 평정한 원정.

2. 상세

기원전 329년, 아케메네스 샤한샤 다리우스 3세의 시신을 확보하고 다리우스를 죽인 베소스를 처단한 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인도 원정을 계획했다. 그러나 아리아, 소그디아나, 박트리아에서 일어난 일련의 반란과 샤카족의 침입으로 인해, 2년간 이들을 평정하는 데 공을 들여야 했다. 기원전 327년 초 코리에네스 바위 요새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알렉산드로스는 그해 5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현재 후잔트)에서 그동안 준비한 군수물자를 확보한 뒤 인도 원정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는 먼저 주변 지역의 주민들과 전투가 버거운 병사들을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에 정착시켜 도시 인구를 늘리기로 하고, 헤타이로이 소속인 니카노르에게 정착에 관한 책임을 맡겼다. 또한 티라아스페스를 파라마미사데족의 영토와 코펜 강(지금의 카불 강)에 이르는 나머지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니케아로 이동하여 아테나에게 제사를 올린 후 코펜 강으로 행진했다. 그는 라왈핀디 서북쪽의 번영한 도시 탁실라와 인더스 강과 히다스페스 강 사이 지역의 지배자인 탁실레스[1]에게 전갈을 보내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권하는 서신을 보냈고, 인더스 강 서쪽에 사는 부족들에게도 같은 서신을 보냈다. 탁실레스와 다른 부족장들은 소환에 응하여 자신의 영토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가져왔고, 코끼리 25마리를 바치겠다는 뜻도 전했다.

이즈음 알렉산드로스는 군을 나누었다. 헤파이스티온페르디카스에게 고르기아스, 클레이토스, 멜레아그로스의 부대, 헤타이로이의 절반, 용병대 전체를 내주고 인더스 강 쪽의 페우켈라오티스로 진군하도록 했다. 그리고 타실레스와 다른 인도 부족장들도 함께 보내면서, 진군 도중에 만나는 도시들은 무력이나 외교를 통해 모두 복종시킨 뒤 인더스 강에 도착하면 강을 건널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페우켈라오티스의 총독 아스테스는 침략자에 맞서다 목숨을 잃었고, 페우켈라오티스는 30일 만에 헤파이스티온에게 파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산가이오스에게 페우켈라오티스의 통치를 맡겼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아르기라스피데스, 헤파이스티온이 데려간 인원을 제외한 헤타이로이 전체, 궁수들, 아그리아니아군, 창기병 등 본대를 이끌고 코에스 강을 끼고 남하했다. 그 길은 험한 산길이었고, 물살이 빨라서 강을 건너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마케도니아군은 간신히 건널 수 있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본대에게 평소의 속도로 따라오게 하고, 자신은 기병과 경보병 800명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행군했다. 부근에 사는 주민들이 저항에 유리한 도시 또는 산에서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를 입수해서, 이를 막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 도시에서 바깥으로 나온 적병들을 물리쳐 성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 과정에서 적이 쏜 화살이 알렉산드로스의 갑옷을 뚫고 어깨에 박혔지만, 상처가 깊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레온나토스도 부상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가장 취약해 보이는 성벽 맞은 편에 진을 친 뒤 이튿날 새벽 다시 공격했다. 도시는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였는데, 외벽은 허술하게 지어져 있어서 어렵지 않게 부술 수 있었다. 수비대는 내벽에서 잠시 저항했지만 벽에 사다리가 걸리고 투척 무기가 집중적인 공격을 퍼붓자 도시를 버리고 산으로 달아났다. 마케도니아 장병들은 왕의 부상에 잔뜩 열받아서 포로로 잡힌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도시를 파괴한 뒤 안디카로 이동했고, 안디카는 곧바로 항복했다. 그는 크라테로스와 보병 지휘관들을 그곳에 주둔시키고, 저항하는 인근 도시들을 모두 정벌하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에우아스와 아탈로스의 부대, 정예 기병부대, 나머지 헤타리오리 4개 부대, 궁기병들을 이끌고 진군을 계속했다.

진군 이틀째 되는 날, 아스파시아의 지도자가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주민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시에 불을 지르고 산으로 도망쳤다. 마케도니아군은 그들의 뒤를 집요하게 추격해 많은 주민을 살육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추격전 끝에 그 지역의 부족장을 발견했다. 그러나 부족장은 약간의 호위병들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고, 그들보다 적은 병사를 이끌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부족장을 쫓으려 했으나 산이 가파르고 험해서 더 이상 말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는 병사에게 말을 맡긴 뒤 두 발로 부족장을 뒤쫓았다. 부족장은 그가 홀로 달려오는 걸 보고 반격을 시도했다. 이후 벌어진 격투 도중 부족장이 내지른 창이 프톨레마이오스의 가슴을 찔렀지만 갑옷을 뚫지 못했고, 프톨레마이오스가 휘두른 검이 부족장의 허벅지를 찔러 쓰러뜨렸다. 이후 부족장의 시신을 가져가려는 마케도니아군과 이를 막으려는 부족민들간의 격투 끝에, 마케도니아군이 승리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산맥을 넘은 뒤 아리가이움으로 진군했다. 그곳 주민들은 이미 도시를 불태우고 떠나 있었다. 얼마 후 크라테로스가 임무를 완수하고 알렉산드로스와 합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이 살기 좋은 동네라고 여기고, 크라테로스에게 도시 방비를 강화하도록 한 뒤, 이곳에 살기를 원하는 인근 주민들과 지친 병사들을 정착시키도록 했다. 이 일이 마무리되자, 알렉산드로스는 대부분의 토착병들이 집결하여 방어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진 곳으로 진군했다. 그러던 중 어느 산맥의 작은 산에서 쉬고 있을 때, 식량을 징발하러 나갔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돌아와서 일대를 정찰하던 중 적의 모닥불들을 발견했으며, 모닥불의 수로 판단할 때 병력이 아군보다 많은 것 같다고 보고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적이 모닥불을 일부러 많이 피워서 아군을 겁주려는 수작이라 여기고, 이를 무시하고 진격하기로 했다.

그는 진지에 일부 병력을 남긴 후 병력을 이끌고 모닥불이 보이는 곳까지 이동했다. 이후 군을 세 부대로 나눠서 아탈로스와 발라크루스의 부대로 이뤄진 첫번째 군을 레온나토스에게 맡기고, 근위대, 필리포스와 필로타스의 부대, 궁수 2개 부대, 아그리아니아군, 기병 절반으로 구성된 2번째 군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맡겼다. 그리고 3번째 군은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직접 이끌고 적병이 가장 많이 모여 있을 만한 지점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고지에 주둔하고 있던 토착병들은 다가오고 있는 적군의 수가 많지 않은 걸 보고 고지에서 내려와 격전을 벌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손쉽게 적군의 대열을 돌파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병사들에게 산을 둘러싸게 하되 적병이 도망치려 할 경우 빠져나올 틈을 만든 뒤, 종대 대형을 갖추고 돌격해 적병을 격파했다. 레온나토스가 이끄는 군대 역시 승리를 거두었다. 아리아노스가 인용한 프톨레마이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4만 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고 황소를 23만 마리나 확보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뒤이어 아사케니아족의 영토로 행군했다. 크라테로스가 아리가이움의 정착 작업을 완료하고 곧 합류했는데, 대비용으로 공성 무기를 싣고 왔다. 알렉산드로스는 구라이아족의 땅을 지나 구라이아 강에 도착했다. 강은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빨라서 건너기 어려웠고, 강바닥에는 크고 둥근 돌들이 깔려 있어 발을 딛는 것조차 위험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우선 인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마사가를 치기로 했다. 수비대는 마케도니아군이 근방에 진을 치고 있는 걸 보고 인도 내륙에서 모집한 7,000명의 용병들과 함께 돌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상황을 살핀 후 적병이 패배해 성벽 안으로 퇴각하지 못하도록 가능한 한 멀리 유인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부하들에게 후방으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적병들은 마케도니아군이 달아난다고 생각해 계속 돌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적병이 충분히 멀리 왔다고 여기고 전군에 응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창기병, 아그리아니아군, 궁수들이 전투에 먼저 돌입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중무장 보병대의 선두에 서서 진격했다. 수비대는 갑작스러운 반격에 혼란에 빠져 도시로 퇴각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추격하여 200여 명을 죽였는데, 성벽 가까운 지점에서 보병을 지휘하다가 발목에 화살을 맞았지만 부상은 경미했다. 다음 날, 공성 장비들을 동원하여 성벽에 틈을 냈지만, 병사들이 틈 사이로 진입하려 했다가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공세를 중단했다. 이튿날 나무 탑을 세우고 그 위로 올라간 궁수들이 화살을 퍼붓고, 투석기를 동원해 성벽에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비대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해서 공략에 실패했다.

공성 사흘 째 되던 날,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한 번 보병들을 투입하고 공성 장비로 성벽의 틈에 다리를 걸치게 했다. 그는 근위대를 이끌고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병사들의 무게를 건너지 못하고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병사가 추락했다. 수비대는 환호하며 투척 무기를 퍼부었고, 다른 병사들은 탑들 사이의 작은 문으로 몰려나와 쓰러져 있는 마케도니아 병사들에게 덤벼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알케타스의 부대를 보내 부상병들을 지키게 하고, 아직 전투 중인 병사들을 철수시켰다. 다음날 같은 방법으로 다시 공격했는데, 부족장이 투석 무기에 맞아 전사하자 수비대가 전의를 잃고 휴전을 요청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수비대의 용전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자신의 군대에 복무하는 조건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그들은 이에 응하여 무기를 들고 도시에서 나왔지만, 마케도니아 진영 맞은편 산에 따로 진영을 마련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이 달아나려 한다고 여기고, 그날 밤 군 전체를 동원하여 산을 둘러싼 채 그들을 몰살시킨 뒤 무방비가 된 도시를 점령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이에 대해 "군대에 복무하는 조건으로 그들을 살려주겠다고 해놓고 달아날 기미가 보인다는 핑계로 몰살시킨 건 중대한 배신이다"라고 비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코이노스를 바지라로 보내 마사가의 운명을 전하고 항복을 권유하게 했다. 그리고 기병대 지휘관 알케타스, 아탈루스, 데메트리오스를 오라로 보내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도시 둘레에 방벽을 쌓아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오라 시민들은 알케타스의 군대를 급습했지만 패퇴하여 성 안으로 물러났다.

얼마 후, 알렉산드로스는 바지라가 에상과는 달리 항복을 거부했다는 코이노스의 보고를 접하자 바지라로 출발했다. 하지만 부근의 일부 부족민들이 아비사레스의 지시를 받고 몰래 오라로 들어가려 한다는 보고를 받자 방향을 틀었다. 그는 오라를 첫 목적지로 정하고, 코이노스에게 바지라 바깥에 작은 요새를 지어 그곳 주민들이 주변 지역을 활보하지 못하도록 수비대를 배치한 뒤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합류하게 했다. 코이노스의 병사 대다수가 떠나자, 바지라 수비대는 즉각 요새를 공격했지만 500명이 죽고 70명 이상이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겪고 도시 안으로 달아났다. 이후 요새 수비대는 그들이 주변 지역과 연락을 취할 수 없도록 감시를 더욱 엄하게 했다.

얼마 후 알렉산드로스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오라를 공략하고 그곳에 있던 코끼리들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바지라 주민들은 가망이 없다고 버리고 도시를 버리고 달아났다. 인근의 다른 주민들도 도시를 떠나 아오르노스 바위산으로 피신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헤라클레스가 취하지 못할 정도로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이 곳을 공격해 기어이 함락시켰다.(아오르노스 공방전) 이후 아오르노스 산을 떠나 아사케니아족의 영토로 진군했다. 주민들이 모두 떠난 디르타 시에 입성한 뒤, 네아르코스에게 경보병대와 아그리아니아군을 붙이고, 안티오코스에게는 근위대와 다른 부대 2개를 붙여 정찰하게 했다. 주민들이 보이면 잡아서 심문하되, 코끼리에 대한 정보를 반드시 캐내게 했다. 이후 인더스 강으로 진군하던 알렉산드로스는 사로잡은 원주민으로부터 이 지역의 시민들이 카슈미르의 지도자 아비사레스에게 도망쳤으며, 코끼리들은 본래 살던 강가에서 풀을 뜯어먹도록 남겨두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안내자들을 앞세워 코끼리를 사냥했다. 코끼리 2마리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포획되어 마케도니아군 소속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뒤이어 코펜 강과 인더스 강 사이에 있는 니사 시로 진군했다. 니사 시는 디오니소스가 인도인들을 정복하고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도시로, 그곳 시민들은 부족장 아쿠피스와 가장 명망 있는 인물 30명을 보내 자신들의 도시를 바치겠다고 알렸다. 아쿠피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디오니소스가 이곳을 정복한 뒤 유모 니사를 기리기 위해 도시의 이름을 니사로 하고, 이 땅의 이름을 니사이아로 지었다고 설명했으며, 도시 근처의 산 이름을 메루스(허벅지)라고 지었다고 설명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말을 믿고 이들이 자유와 자치를 계속 누리도록 했다. 이후 니사의 제도가 어떠한지 물었고, 귀족정 방식이라는 대답에 호의를 표했다. 그리고 원정에 함께할 기병 300명과 지배계층 가운데 가장 뛰어난 100명을 뽑아 보낼 것을 요구했으며, 아쿠피스를 니사이아 총독으로 삼아 귀족들을 선별하도록 했다.

아쿠피스가 이 요구에 미소를 지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웃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전하, 한 도시가 100명의 인재를 잃고 어떻게 잘 통치될 수 있겠습니까? 기병 300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더 보내드리지요. 하지만 전하께서 진심으로 저희를 생각하신다면 저에게 선택하라고 한 유능하고 뛰어난 시민 100명 대신 그보다 못한 사람들을 2배로 데려가시길 간청드립니다.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셨을 때 지금처럼 잘 다스려지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요청에 따르기로 하고, 니사 시민들에게 성지로 여겨지는 메루스 산에 올라갔다. 그곳에는 마케도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인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담쟁이덩굴이 있었는데, 마케도니아인들은 이걸 보고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들은 담쟁이덩굴로 화관을 만들어 머리에 쓰고는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고, 알렉산드로스는 신성한 장소에 제물을 바치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2]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강에 도착하여 탁실레스가 마련해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이후 탁실라 왕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파우라바 왕국의 라자 포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인도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포루스는 전투에서 만나겠다고 말하며 조공을 거절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그와 대결하기로 하고, 기원전 326년 5월 포루스와 히다스페스 전투를 치렀다.


[1] 공식 직함으로, 이름은 옴피스(Omphis)였다.[2] 반면 필로스트라토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산에 올라가고 싶었지만 부하들이 담쟁이덩굴을 보고 향수병을 느끼거나 그동안 물만 마셨는데 포도주를 마시면 타락해질까 걱정하여 산에 올라가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