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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3 11:57:28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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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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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0.742em; letter-spacing: -0.35px"
{{{#!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황제 겸 집정관 }}}
기원전 100년 기원전 99년 기원전 98년 기원전 97년 기원전 96년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티투스 디디우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기원전 95년 기원전 94년 기원전 93년 기원전 92년 기원전 91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90년 기원전 89년 기원전 88년 기원전 87년 기원전 87년 보결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기원전 86년 기원전 86년 보결 기원전 85년 기원전 84년 기원전 83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기원전 82년 기원전 81년 기원전 80년 기원전 79년 기원전 7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데쿨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기원전 77년 기원전 76년 기원전 75년 기원전 74년 기원전 73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루키우스 옥타비우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기원전 72년 기원전 71년 기원전 70년 기원전 69년 기원전 68년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기원전 68년 보결 기원전 67년 기원전 66년 기원전 65년 기원전 65년 보결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푸블리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기원전 64년 기원전 63년 기원전 62년 기원전 61년 기원전 60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기원전 59년 기원전 58년 기원전 57년 기원전 56년 기원전 55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기원전 54년 기원전 53년 기원전 52년 기원전 51년 기원전 50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기원전 49년 기원전 48년 기원전 47년 기원전 46년 기원전 45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sine collega
기원전 45년 보결 기원전 45년 보결 기원전 44년 기원전 44년 보결 기원전 43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기원전 43년 보결 기원전 43년 보결 기원전 42년 기원전 41년 기원전 40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퀸투스 페디우스 가이우스 카리나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기원전 40년 보결 기원전 39년 기원전 39년 보결 기원전 39년 보결 기원전 3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가이우스 코케이우스 발부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기원전 38년 보결 기원전 38년 보결 기원전 37년 기원전 37년 보결 기원전 36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기원전 36년 보결 기원전 36년 보결 기원전 35년 기원전 35년 보결 기원전 35년 보결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퀸투스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페두카이우스
기원전 34년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가이우스 멤미우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루키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루키우스 아우트로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루키우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퀸투스 라로니우스
기원전 32년 기원전 32년 보결 기원전 31년 기원전 31년 보결 기원전 31년 보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티티우스
가이우스 소시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기원전 31년 보결 기원전 30년 기원전 30년 보결 기원전 30년 보결 기원전 30년 보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루키우스 사이니우스
기원전 29년 기원전 29년 보결 기원전 28년 기원전 27년 기원전 26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포티투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기원전 25년 기원전 24년 기원전 23년 기원전 23년 보결 기원전 22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스티우스 알바니아누스 퀴리날리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이세르니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기원전 21년 기원전 20년 기원전 19년 기원전 19년 보결 기원전 18년
마르쿠스 롤리우스 마르쿠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sine collega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기원전 17년 기원전 16년 기원전 16년 보결 기원전 15년 기원전 14년
가이우스 푸르니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우구르
기원전 13년 기원전 12년 기원전 12년 보결 기원전 12년 보결 기원전 11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아피아누스 가이우스 발기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기원전 10년 기원전 9년 기원전 8년 기원전 7년 기원전 6년
아프리카누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율루스 안토니우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술피키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기원전 5년 기원전 5년 보결 기원전 5년 보결 기원전 4년 기원전 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파시에누스 루푸스 갈루스 술피키우스
기원전 3년 기원전 2년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퀸투스 파브리키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기원전 1년 기원전 1년 보결 연도 불명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1 {{{#!wiki style=""<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선출 사유(causa) <colbgcolor=#FFEFA5,#1E1B00>
  • rei gerundae causa: 공무 수행을 위해
  • clavi figendi causa: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의 벽에서 행해지는 못질 의식을 위해
  • seditionis sedandae causa: 폭동 진압을 위해
  • comitiorum habendorum causa: 정무관 선거를 위한 민회 개최를 위해
  • ferarium constituendarum causa: 축제 개최를 위해
  • ludorum faciendorum causa: 루디 로마니(Ludi Romani) 개최를 위해
  • Latinarum feriarum causa: 페리아이 라티나이(Feriae Latinae) 개최를 위해
  • senatus legendi causa: 칸나이 전투 이후 원로원 의원 선출을 위해
  • legibus faciendis: 법률 제정
  • rei publicae constituendae causa: 공화정 재건을 위해
  • dictator perpetuo: 종신 독재관
기타
  • mortuus est: 집권 중 사망
  • sine magistro equitum: 기병장관을 임명하지 않음
  • non iniit: 취임하지 않음
  • occisus est: 집권 중 암살
}}}}}}
서력기원: 기원전 501년 기원전 496년 기원전 494년 기원전 463년
로마 건국 기원: 253년 255년 260년 291년
독재관: 티투스 라르키우스 플라부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부스 레길렌시스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볼루수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쿠스)
기병장관: 스푸리우스 카시우스 베켈리누스 티투스 아이부티우스 헬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쿠스 스트룩투스 (불명)
선출 사유(causa): rei gerundae causa clavi figendi causa
기원전 458년 기원전 439년 기원전 437년 기원전 435년 기원전 434년
296년 315년 317년 319년 320년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쿠스 피데나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루키우스 타르퀴티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포스투무스 아이부티우스 헬바 코르니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투베르투스
기원전 431년 기원전 426년 기원전 418 년 기원전 408년 기원전 396년
323년 328년 336년 346년 358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투베르투스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쿠스 피데나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틸루스 코수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율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악실라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말루기넨시스
기원전 390년 기원전 389년 기원전 385년 기원전 380년 기원전 368년
364년 365년 369년 374년 386년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카피톨리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티투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카피톨리누스 아울루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rei gerundae causa
기원전 368년 기원전 367년 기원전 363년 기원전 362년 기원전 361년
386년 387년 391년 392년 393년
푸블리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임페리오수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레길렌시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펜누스 카피톨리누스 크리스피누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킨킨나투스 카피톨리누스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나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카풀라 또는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말루기넨시스
seditionis sedandae et rei gerundae causa rei gerundae causa clavi figendi causa rei gerundae causa
기원전 360년 기원전 358년 기원전 356년 기원전 353년 기원전 352년
394년 396년 398년 401년 402년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페티쿠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율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펜누스 카피톨리누스 크리스피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가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프로쿨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rei gerundae causa
기원전 351년 기원전 350년 기원전 349년 기원전 348년 기원전 345년
403년 404년 405년 406년 409년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시누스 레길렌시스)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가이우스 리비우스 덴테르)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임페리오수스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344년 기원전 342년 기원전 340년 기원전 339년 기원전 337년
410년 412년 414년 415년 417년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인레길렌시스
퀸투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호르타토르
ferarium constituendarum causa
기원전 335년 기원전 334년~기원전 333년 기원전 332년 기원전 331년 기원전 327년
419년 420년~421년 422년 423년 427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또는 그나이우스 퀸크티우스 카피톨리누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lavi figendi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325년~기원전 324년 기원전 322년 기원전 321년 기원전 321년 기원전 320년
429년~430년 432년 433년 433년 434년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퀸투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가이우스 마이니우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
rei gerundae causa rei gerundae 또는 ludorum faci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320년 기원전 320년 기원전 316년 기원전 315년 기원전 314년
434년 434년 438년 439년 440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가이우스 마이니우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루키우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
가이우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rei gerundae causa rei gerundae causa rei gerundae causa
기원전 313년 기원전 312년 기원전 310년~기원전 309년 기원전 306년 기원전 302년
441년 442년 444년~445년 448년 452년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솔루스 또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 Ⅲ 또는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마르쿠스 티티니우스
rei gerundae (et clavi figendi) causa rei gerundae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301년 기원전 287년 기원전 287년 기원전 285년 기원전 280년
453년 467년 467년 469년 474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부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mortuus est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막시무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또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기록 미상) (기록 미상) (기록 미상) (기록 미상)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276년 기원전 263년 기원전 257년 기원전 249년 기원전 249년
478년 491년 497년 505년 505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퀸투스 오굴니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글리키아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기록 미상)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마르쿠스 라이토리우스 플란키아누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clavi figendi causa Latinarum feriarum causa
기원전 246년 기원전 231년 기원전 224년 기원전 221년 기원전 217년
508년 523년 530년 533년 537년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부테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217년 기원전 216년 기원전 216년 기원전 213년 기원전 210년
537년 538년 538년 541년 544년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 sine magistro equitum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comitiorum habendorum causa senatus legendi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기원전 208년 기원전 207년 기원전 205년 기원전 203년 기원전 202년
546년 547년 549년 551년 552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comitiorum habendorum et ludorum faci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comitiorum habendorum ca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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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occisus est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sine magistro equitum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non iniit)
legibus faciendis et rei publicae constituendae causa rei gerundae causa dictator perpetuo rei publicae constituendae ca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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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삼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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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삼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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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Marcus Aemilius Lepidus
파일:attachment/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Marcus_Aemilius_Lepidus.jpg
<colbgcolor=#800080><colcolor=#ffffff> 출생 생년 미상
사망 기원전 13년
로마 공화국 키르케이(Circeii)
배우자 유니아 세쿤다
자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마이너[1]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아이밀리아 레피다[2]
아버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3]
형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형)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대중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고대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다.

2. 생애

자신의 이름과 같은 정치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아내는 세르빌리아의 둘째 딸 유니아 세쿤다이며,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는 처남-매제지간이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는 동서지간[4]이다.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적으나 기원전 62~58년에 조폐 관련 관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은 가장 유서깊고 영향력 있는 귀족가문 중 하나였다. 그러니 레피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역시 원로원의 권위를 옹호하는 옵티마테스의 일원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원로원파에 가담해 술라 밑에서 싸웠고 술라의 독재관 시절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대표적인 포풀라레스 호민관이었던 사투르니누스의 딸과 결혼하는 등 반(反) 술라파 성향을 숨겨오고 있었고, 결국 술라가 죽자마자 술라 정권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지역을 제압하라는 원로원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시도는 실패하고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패해서 사르디니아로 유배를 가서 죽었다. 레피두스의 아들들은 가혹한 처분을 받지는 않고 재산과 지위를 지키며 원로원에 남을 수 있었지만 가세는 기울었다. 그리고 원로원에 반기를 들었던 가문이라는 낙인이 찍혀 당시 지배적 파벌이었던 옵티마테스의 지지를 받기도 어려웠다.

이런 탓에 레피두스는 야심이 큰 인물이었지만 그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제국이 된 로마에서는 이제 가문의 이름만으로는 성공을 담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임기를 마친 집정관과 법무관은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는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는 엄청난 이권이 걸려있었다. 그러니 고위 정무관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원로원내 대규모 파벌들과 연대해야 했고, 거기에 더해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뿌리고, 공공사업에 대한 투자를 해 이름을 알려야 했다. 당연히 이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고 카이사르의 돈으로 그의 형이 집정관에 올랐던 것을 보면 레피두스 가문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결국 레피두스는 출세를 위해 형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게 되었다. 레피두스는 사투르니누스의 손자이자 원로원에 반기를 든 인물의 아들이었고,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였으니 선대의 협력관계가 다시 재현된 셈이었다. 또한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은 첫손에 꼽히는 명문대가였고 이런 명문대가의 지지는 카이사르에게 큰 힘이 되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이들을 중용했다. 갈리아 전쟁에서 군사적 성공과 함께 전리품과 노예를 팔아 부자가 된 카이사르는 레피두스 형제가 출세할 수 있도록 큰 돈을 내주었다. 그 돈으로 형 파울루스는 조상이 지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회당을 재건하고, 유권자들을 매수해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5] 또한 레피두스 자신은 내전을 치르는 동안 카이사르의 측근이 되어 카이사르 파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원래 레피두스 가문은 카이사르 가문에 비해 훨씬 영향력이 크고 강력한 연줄을 갖춘 가문이었다. 아버지 레피두스가 원로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가문이 군단을 편성할 수 있을 만큼의 피호민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 가문이 마리우스와의 연대를 통해 공화정 말기의 유력 가문으로 발돋움하기는 했지만, 그 전에 카이사르 가문은 겨우 원로원 의석만을 유지해왔던 반면 레피두스 가문은 집정관을 줄줄이 배출하던 공화정의 핵심 가문이었다. 그러니 카이사르 편을 든 레피두스의 선택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로마의 명문대가들은 어떤 가문이나 개인이든간에 동료 정무관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보았고, 명문대가의 인사들이 돌아가면서 고위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속주 총독직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역임자들이 1년 아니면 부득이한 경우 2년씩만 돌아가면서 맡는 자리였고, 임기를 채운 총독은 당연히 물러나 원로원의 일원으로 남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3개의 속주와 6만명의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10년씩이나 보유했다. 단순히 계산해 봐도 전직 정무관 30명이 1년씩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던 자리를 카이사르 혼자 차지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역시 마찬가지로 공화정 정무관에게 허락될 수 없는 거대한 지휘권을 보유했다. 당연히 그만큼 기존 명문귀족들의 자리는 줄어들었고, 북이탈리아나 히스파니아 같은 수익성 좋은 속주에서 재산을 모을 기회도 사라졌으니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전통적 귀족들에게는 최악의 적이었다.

카이사르 이전에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등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는 지휘권을 오랫동안 보유하면서 역사에 남을 군사적 업적을 세운 인물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이 수행한 것은 위기에 처한 로마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갈리아 전쟁처럼 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위한 대규모의 침략전쟁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경제적, 정치적 원조를 통해 자신의 피호민들을 공직에 진출시켰다. 처음에는 호민관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같은 폼페이우스의 피호민들이 집정관 자리까지 진출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종속된 인물이 공화정 정치경력의 정점인 집정관까지 오르는 일을 옵티마테스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정무관들은 동등해야 한다는 로마 공화정의 오랜 전통에 반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포르키우스 카토,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 대다수의 명문대가들은 카이사르를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의 두번째 집정관 당선을 지켜보느니 내전이 낫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러니 레피두스의 선택은 상당히 이례적이고 사실은 굴욕적인 것이었다. 첫손에 꼽히는 명문대가 아이밀리우스 가문 사람들이 카이사르와 동맹도 아닌 종속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시 공화정 명문대가의 통념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피두스 형제는 카이사르의 도움을 받고서야 고위 정무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으며, 이는 레피두스 형제가 고대 로마의 피호민 관계[6]로 카이사르에게 종속되었다는 뜻과 같았다. 다만 출신 가문 때문에 레피두스는 카이사르파에 늦게 합류했지만 갈리아 전쟁 초기부터 활약했던 트레보니우스나 데키무스 브루투스에 비해 더 중요한 인물로 대접받았으며, 카이사르 사후에 출신가문이 뒤쳐지는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등의 인사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레피두스와 견줄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한 것은 카이사르의 혈족이고 마찬가지로 명문대가 출신인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유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뿐이었다.

두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 다수가 카이사르에 대항해 로마를 비운 상태에서, 로마에 남은 최상위 공직자였던 법무관 레피두스는 민회를 소집해 카이사르를 독재관으로 추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동부로 폼페이우스 세력과 전쟁을 하러 떠날 때 폼페이우스 세력의 주요 거점이었던 가까운 스페인(Nearer spain) 총독으로 임명되어 스페인을 안정화시켰다. 이 전공으로 로마에서 개선식을 열었고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와 함께 콘술직에 선출되고 기병대장을 역임했다. 카이사르가 로마를 비울 때 키케로를 위시한 반대 세력의 공세를 약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던 기원전 44년 3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가까운 스페인 총독으로 선임되었으나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 레피두스는 수완을 발휘하여 포룸을 장악해 시민들의 소요를 막고 안토니우스와 제휴하여 공화정 지지자들과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후임으로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었다. 이후 로마를 안토니우스에게 맡기고 스페인으로 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협상해 내전으로의 확대를 막았다. 이때 폼페이우스와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겼는데 이는 훗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레피두스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흔히 2차 삼두정치의 들러리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의외로 카이사르 암살 직후에는 가장 세력이 강했다. 레피두스의 임지인 갈리아와 스페인에 속한 현역/퇴역병 군단이 7개 군단에 달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력은 캄파니아에서 사재를 털어 긁어모은 퇴역병 2개 군단[7]에 역시 돈으로 안토니우스에게서 낚아온 2개 군단[8]이었고 안토니우스의 경우 친위부대 종달새 군단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빼앗길 뻔 했다가 겨우 지켜낸 2개 군단이었던데다 그나마 무티나 내전 참패로 세가 줄었으니 차이가 꽤 많이 났다. 하지만 레피두스가 임지에 머물러 있는 동안 옥타비아누스가 무티나 내전을 거쳐 북 이탈리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병력까지 흡수해 힘을 키워 원로원을 압박하고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복수와 막대한 보상을 미끼로 레피두스 휘하 군단의 지지를 얻어[9] 무티나 전투 이후의 열세를 뒤집은데 반해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와의 제휴 이전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후세인들에게 수동적이고 끌려다닌다는 인상을 주었다.[10]

기원전 43년 레피두스의 주선 아래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까지 3명이 모였고 이들은 보노니아 협정을 통해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회'를 출범시키고 키케로를 위시한 공화정 지지자들을 대거 숙청했다. 삼두정치 결성 직후의 세력권 배분에서 레피두스는 갈리아와 스페인을 차지하여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사르데냐가 고작이었던 옥타비아누스를 크게 앞섰고 안토니우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필리피 전투를 기점으로 상황이 변했다. 기원전 42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마르쿠스 브루투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공격하러 떠난 사이 레피두스는 집정관으로서 로마에 남아 내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레피두스의 몰락을 불렀다.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전리품과 토지를 미끼로 레피두스 휘하의 군단들을 포섭해버리고 레피두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군단과 영역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기원전 41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에 의해 페루시아 내전이 발생하자 옥타비아누스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로 있던 레피두스를 포섭해 로마를 맡기고 자신은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투항해온 안토니우스계 6개 군단을 레피두스에게 넘겨주고 북아프리카로 보냈다. 이는 충성심을 담보할 수 없는 안토니우스의 군단 관리를 떠넘기는 한편, 레피두스가 안토니우스의 힘을 빼앗은 모양새를 만들어 둘의 제휴를 막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삼두와의 합의로 분배받은 영역임에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장악하고 있던 시칠리아 정벌에 이용하려는 포석이었다.

기원전 40년에 브룬디시움 협정으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상호우호를 재다짐할 때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양해하에 북아프리카를 인도받는 것에 그쳤다. 기원전 37년 타렌툼에서의 협정으로 3인 위원의 지위는 5년 연장되었으나, 레피두스는 여기에 끼지도 못했다.

기원전 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점령한 시칠리아에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출진한 레피두스는 이를 세력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의욕적으로 참여하여[11] 옥타비아누스가 고전하는 사이 공을 세우고 폼페이우스의 최후 거점인 메사나에서 항복을 받고 8개 군단을 접수했다. 이때 아그리파가 레피두스가 아닌 옥타비아누스가 항복을 받아야 한다며 대립했다. 레피두스는 삼두의 일원이고 아그리파는 삼두중 한명의 부하장군이니 정상적이라면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그만큼 이때 레피두스가 약해져 있었음을 뜻했다.

공을 세운 레피두스는 자신의 몫이라고 여긴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의 통치권을 주장하며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안토니우스에게서 투항해온 6개 군단에 방금 투항한 폼페이우스의 8개 군단이 주력인 레피두스군은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포섭되었고 레피두스는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채 팽당했다. 3인 위원의 지위를 비롯한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지위만을 겨우 보전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키르케이(Circeii)로 유배보냈으나, 그래도 원로원 의원 자격으로 로마를 방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레피두스는 기원전 13년 (혹은 12년)에 사망했고 사후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위는 아우구스투스가 가져갔다.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배려에 의해 그의 형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의 후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자손들과 혼맥관계를 맺게 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편입되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조카인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34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12]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소 율리아[13]와 결혼하고, 또한 같은 일족이었던 아이밀리아 레피다[14]게르마니쿠스대(大) 아그리피나의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레피두스의 친아들인 소(小) 레피두스는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에게 반역하려는 모의를 꾸몄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며,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그녀가 세야누스와 불륜 후 남편 드루수스에게 누명을 씌워 옥사시키는데 공모한 사실이 드러나 대역죄로 스스로 손목 혈관을 자르고 고통스럽게 자살하는 방식으로 처형되고 그 시체는 버려진다.

3. 평가

국내에서는《먼나라 이웃나라》의 영향인지 삼두정치에서 머릿수만 채워놓기 위해 나온 인물이라느니, 카이사르 꼬붕이 얼떨결에 감투 하나 차지하고 있다가 상황 정리되어 3인 중 대빵이 나가라고 하니까 데꿀멍하고 나갔다느니 하는 별 희한한 악평이 돌아다니는데 절대로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명문가들이 다 쓸려나가는 와중에 카이사르 편을 선택해서, 세력 내 2인자격 위치까지 오른 것은 보통 안목으로는 이뤄내기 어려운 성과였다. 또한 카이사르 생전 측근으로 중임을 맡아 잘 수행했고 카이사르 사후 정국을 일시 수습하고 히스파니아를 안정화시킨 역량은 원로원도 인정했다. 삼두 사이를 주선해 삼두정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레피두스였다. 레피두스가 삼두의 일원이 된 것은 그만큼 실력과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전투에서의 모습을 보면 장군으로서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였던 반면, 레피두스는 유서깊은 귀족이자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서 카이사르의 충실한 지지자이기는 했어도 혈연이 아니었다. 이는 카이사르파 내의 지지를 포섭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갈리아와 그리스에서 카이사르와 함께 싸웠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카이사르 휘하 군단병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병력을 이끈 적이 없고 외부 속주를 통치하거나 로마에 머물러 카이사르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역할을 맡았으니 군단병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레피두스가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레피두스의 역량이 모자라거나 레피두스가 비겁했다기보다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에게 이미 세력과 명분에서 밀린 상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레피두스의 불운은 그 상대가 로마 역사는 물론 서구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정치 감각의 귀재 옥타비아누스였다는 데 있었다. 키케로, 안토니우스 같은 로마 공화정 말기 거물들이나 정치 고단수들까지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부처님 손바닥 안 손오공 꼴이었고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레피두스만 유독 낮춰볼 이유는 없다. 오히려 레피두스는 그 와중에도 천수를 누렸으니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15]

4. 여담

5. 대중 매체에서

대부분의 매체에서 그야말로 운 좋게 한자리 꿰어찬 병풍+무능의 화신으로 나온다.

ROME》에서는 배우가 겉보기에는 시즌 1에서 카이사르를 연기한 키어런 하인즈와도 약간 흡사해 보이는 냉철하고 멋진 정치가 상을 연기하고 목소리도 날카로운데, 재밌게도 그런 주제에 처음부터 끝까지 개무시당한다. 카리스마있게 무게를 잡으며 한참 정치인다운 대사를 하고 있는데 옥타비아누스나 안토니우스가 말을 자르면서 끼어들어 시종일관 바보로 다룬다. 어째서 삼두정치에 끼워줬는지 신기할 정도. 옥타비아누스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안토니우스를 토벌하기 위한 토벌군 사령관으로 첫 등장하는데 키케로가 그를 파견하겠다고 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콧방귀를 뀌며 "그게 최선의 선택이겠군"하고 조롱한다. 아니나 다를까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병사들이 죄다 탈영하고, 안토니우스는 그를 죽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군단에 2인자로 합류하라고 강요한다(...). 할 수 없이 항복하고 안토니우스에게 합류.[16] 그 이후로는 삼두정의 일원이 되지만 필리피 전투때는 '남아서 로마나 지키고 있으라'는 말을 들으며 2군 내지는 전력외 취급을 받고, 삼두정의 일원들이 각자 다스릴 지역을 정할 때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동쪽,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를 포함한 그 외의 알짜 지역을 나눠먹고 있는데 레피두스가 "내 몫은?"하고 물어보자 둘이 기가 막히다는듯이 쳐다보다가 대충 아프리카[17]를 지도에서 북 찢어주는(...) 등 동네 바보형으로 대우받는다.

토탈 워: 로마 2》<아우구스투스 캠페인>에서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한다.
[1] 이쪽도 똑같은 동명이인이다. "소(小) 레피두스"라고도 불린다.[2]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딸 혹은 조카뻘 친척으로 추정되고 있다.[3]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름이다.[4] 카시우스의 부인은 세르빌리아의 셋째 딸 유니아 테르티아이다[5] 파울루스에게는 내전을 막고 카이사르가 두번째 집정관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대단히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정치적으로 유능하지 못해 카이사르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고, 결국 내전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6]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후원을 받아 정무관직에 올랐고, 이는 정치적 이득을 주고받는 동맹관계와는 다른 것이었다. 로마 관습에서 보호자-피호민 관계는 매우 강력하고 신성시되는 것이었다. 레피두스처럼 한번 보호자에게 은혜를 입어 피호민이 되면, 피호민은 사실상 평생토록 보호자를 위해 봉사해야 할 의무를 졌으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강제되었기 때문에 이 의무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카이사르의 참모로서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던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데키무스 브루투스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매우 나빴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이사르의 후원에 의해 출세한 피호민이 카이사르에게 칼을 겨눴으니 이는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7] 제7, 8군단[8] 제3 마르스 군단, 제4 양 군단[9] 특히 퇴역병들로 이뤄진 6, 10군단의 호응이 컸다. 6군단은 자신들의 토지가 속해있고, 내전때 폼페이우스 편을 든 죄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마실리아에 원로원이 권한을 돌려줬기 때문에, 10군단은 6군단 다음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을 제지하려 했다가는 병사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지휘관으로 낙인 찍혀 다른 군단들의 지지까지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고 결국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와 제휴했다.[10] 이런 평가를 받게 된 원인제공자 중 한명은 키케로다. 왜냐하면 레피두스는 자신들의 편을 안들어주고 공화정을 무너뜨리는데 한몫했기 때문이다.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다.[11] 폼페이우스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협약을 통해 삼두와 폼페이우스 간에 일시적인 화친이 이뤄졌을 때 폼페이우스는 레피두스를 제외하고 자신을 삼두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요구했던 적이 있었다.[12] 훗날 아우구스투스 암살 모의 혐의로 처형당했다.[13] 빕사니아 율리아[14]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딸 혹은 조카뻘 친척으로 추정되고 있다.[15] 압도적인 술수와 정치력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권력을 꿰찬 옥타비아누스의 집권과정에서 걸림돌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명분을 다 내주고 자멸의 길을 걸은 안토니우스나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공화정 지지자들보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더 큰 걸림돌이었다. 옥타비아누스조차 그 폼페이우스를 잡겠다고 정략혼도 실시했고, 선공을 택했다 패배하기도 했으며 결국 안토니우스를 꾀어 그 손에 있는 함대를 빌려오는 등 갖은 수고를 들였다.[16] 이때 '자네같이 미천한 신분의 사람에게 왜 그리 병사들이 열광하는지 모르겠네'라며 푸념하자 '병사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사령관은 침 좀 뱉을 줄 알고 적당히 더러운 면도 있어야 친근하게 느껴지는 법인데 자네는 너무...고귀하지.'라고 능글맞게 대답한다.[17] 당시의 아프리카는 포에니 전쟁 이후 철저하게 파괴되고 100년 넘게 관리가 되지 않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라티푼디움 위주로 재건을 시작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