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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엥 티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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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캄푸치아 사회사업부장
이엥 티릿
អៀង ធីរិទ្ធ | Ieng Thirith
파일:이엥티릿.jpg
출생 1932년 3월 10일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인도차이나 연방 캄보디아 바탐방성
사망 2015년 8월 22일 (향년 83세)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캄보디아 왕국 파일린성
직업 정치인( 민주 캄푸치아 사회사업부장)
가족 언니 키우 폰나리
배우자 이엥 사리
아들 3명, 딸 1명
학력 소르본 대학교

1. 개요2. 일생
2.1. 민주 캄푸치아 이전2.2. 민주 캄푸치아 시기2.3. 민주 캄푸치아 이후2.4. 전범 재판2.5. 최후
3.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이엥 티릿.jpg
민주 캄푸치아 시기의 모습[1]

이엥 티릿 혹은 이엥 티리트민주 캄푸치아의 사회사업부장[2]이자 크메르 루주의 지도부 중 한 명이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간과되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녀는 킬링필드 과정의 악행에 있어서 폴 포트 다음으로 중대한 책임을 진 인물이나 다를 바 없으며, 이를 고려하면 티릿은 라나발로나 1세와 함께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악녀라고 불려도 전혀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3]

덤으로 이엥 티릿은 폴 포트처제인데 실제로 그녀의 언니인 키우 폰나리(Khieu Ponnary, 1920~2003)가 폴 포트의 아내였다. 그리고 그녀는 민주 캄푸치아의 국가주석이던 키우 삼판과 친척 관계였다고 전해진다.[4]

2. 일생

2.1. 민주 캄푸치아 이전

1932년 3월 10일에 바탐방성에서 부유한 판사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키우 티릿(Khieu Thirith)이었다.

1949년프놈펜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인 시소와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티릿은 1951년에 동문인 이엥 사리와 약혼한 후 언니와 같이 파리로 유학을 가 영문학을 배우고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전공했고, 그녀는 영문학 학위를 딴 최초의 캄보디아 여성이 되었다.

1951년 여름에 키우 티릿은 이엥 사리와 결혼하여 이름을 '이엥 티릿'으로 개명했고, 이후 이 부부는 아들 3명과 딸 1명을 낳았다. 이후 티릿은 남편과 함께 파리에서 폴 포트, 키우 삼판 등을 만나 그들의 사상을 확립하기에 이르고 1956년에는 크메르 학생 연합 창설에도 참여했다.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무렵 티릿은 대학교에서 페미니즘을 접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는 페미니즘을 조악하게 이해한 것을 넘어 이를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곡해한 것으로 보인다.[5]

1957년에 캄보디아로 귀국한 티릿은 처음에는 교수로 일하다가 1960년에는 프놈펜에 캄보디아 최초의 영어 교육 학교를 설립하고는 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63년에 남편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같은 해에 잠복하자 1965년에는 티릿도 남편처럼 잠적하고는 베트남 국경 인근의 정글에서 활동하면서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1973년 12월 3일에 그녀는 캄푸치아 왕국 민족 연합 정부(GRUNK)의 교육 및 청소년부 차장이 되었다.

2.2. 민주 캄푸치아 시기

1975년 4월 17일에 크메르 루주가 집권하자 그녀는 민주 캄푸치아 적십자사 회장을 역임하면서 병원 관리와 전국 의약품 유통을 관할하기 시작했으며, 1976년 4월 14일에 민주 캄푸치아 폴 포트 정부 내각의 사회사업부장으로 취임했다. 그녀는 민주 캄푸치아의 부수상이자 외교부장이던 이엥 사리의 부인으로서 외국 사절단의 리셉션에도 참여했다.

이엥 티릿은 크메르 루주 수뇌부로서 킬링필드 과정에서의 악행들에 대한 책임은 피해갈 수가 없지만 사실 과장을 좀 보태면 그녀의 악행들은 오늘날 알려진 킬링필드의 참극은 이엥 티릿이 없이는 불가능했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티릿은 1976년에 지역 보건 실태를 비롯한 '혁명 성과'와 과제를 조사하기 위해 캄보디아 북서지역을 시찰한 뒤 주민들의 비참한 모습에 '충격'을 받긴 했으나 이를 외국 요원의 수작이라고 여기며 '반혁명 세력이 농촌지역 전역에 스며들어 인민의 건전한 사상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 보고서는 킬링필드의 타겟을 도시에 살던 '새 사람'과 '지식인'으로부터 시골에 살던 '옛 사람'과 크메르 루주 조직원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티릿은 내무부에서 반역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숙청을 지시했으며, 크메르 루주 정권이 반역자로 인식된 사람들을 살해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덤으로 그녀는 기근의 참상을 목격했음에도 '폴 포트 수상의 지시가 노인, 임산부, 젖먹이 여성 또는 어린 아이들이 들판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는 것을 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기도 했으며, 물론 크메르 루주의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엥 티릿은 여기서 더 나아가 프랑스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왜곡한 래디컬 페미니즘에 기반하여 여성들을 '봉건적 가부장제, 가사 및 육아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며 캄보디아에 살고 있던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 놓고 여자들을 이름도 모르는 남자들과 강제로 합동 결혼시키게 했는데, 자세한 것은 '킬링필드' 문서의 '가족'이라는 개념의 파괴 문단을 참조할 것을 권한다. 정작 본인은 (킬링필드 전이기는 해도) 자식 4명을 낳을 정도로 남편 이엥 사리와 금슬이 좋았으니 그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다.

게다가 민주 캄푸치아 적십자사 회장으로서의 이엥 티릿은 캄보디아인들이 가장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받지 못하게 하는 것에 '개인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물론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은 아프면 중국까지 가서 '서구식 치료'를 받았다.

2.3. 민주 캄푸치아 이후

1979년 1월 7일에 프놈펜이 베트남군에 함락당하며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그녀는 사회사업부장 직책을 적어도 1982년 5월까지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년 9월에는 태국 국경의 마키에 접힌 크메르 루주 운동의 외교부 총서기로 임명되어 1985년 8월까지 이 직책을 역임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티릿은 NGO국제적십자위원회의 대담자로서 크메르 루주 저항군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담당했고, 이듬해인 1986년에는 망명 민주 캄푸치아 정부의 적십자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녀는 보석 광산들과 삼림을 개발하여 얻은 수익을 축적하여 상당한 부자가 된 남편과 함께 남편의 근거지인 파일린과 프놈펜 남부의 호화 빌라[6]를 오가며 부유하게 살았는데, 그동 안 티릿은 남편과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던 언니를 보살펴주다가[7] 2003년 7월 1일에 언니를 먼저 떠나보내기도 했다.

2.4. 전범 재판

2007년 11월 12일 남편 이엥 사리와 함께 체포되어 캄보디아 특별법정에 회부되고 인도에 반하는 범죄, 대량 학살, 제네바 협약의 중대한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티릿은 재판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왜 (나 같은) 선량한 사람이 이런 범죄에 연루되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고 억울하게 고발을 당해서 참을 수가 없다.고 말했으며, 심지어 2009년에는 법정에서 검찰을 향해 구천 지옥을 떠돌게 될 것이다.라는 저주까지 남겼다.

그러나 2011년 11월 17일 티릿은 알츠하이머병이 악화되어 재판을 받기에 정신적으로 부적절하다는 판정을 받으며 석방 명령을 받았고, 이 때문에 2012년 9월 13일 이엥 티릿은 석방되었다.

2.5. 최후

이후 그녀는 심장병 등 여러 병을 앓다가 2013년 3월 14일에 남편을 떠나보냈고 2015년 8월 22일에 캄보디아 서부의 파일린에서 향년 8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그녀의 시신은 이틀 뒤인 2015년 8월 24일에 화장되었다. #

참고로 티릿의 장례식에 참여한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두둔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들을 남겨댔는데, 파일린 선거구의 여성 국회의원 반 스레맘(Ban Sreymom)[8]은 티릿이 "이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옛 동지였으며 모두 그녀를 좋은 조언자로 꼽았다"고 회고했으며 전직 크메르 루주 병사였던 속 응우온(Sok Nguon)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배웅하러 왔습니다. 그녀가 모든 죄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AFP와의 전화통화에서 말했다. # 심지어 그녀의 딸들은 어머니를 "매우 따뜻하고 자식들을 매우 사랑했던 사람",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평화와 공정을 사랑했고 진정한 애국적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두둔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네 가족이 크메르 루주 시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는 희대의 망언까지 남겼다. #

물론 이들의 자식들은 진짜로 범죄에 대해 몰랐다고 쳐도 티릿은 오히려 킬링필드에 있어 폴 포트에 준하는 최악의 책임자고 크메르 루주 수뇌부 중 상대적으로 죄가 경미한 편인 아버지도 정부 부처에서의 숙청을 주관했다.

3. 기타

크메르 어린이 여러분,
오, 크메르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의 배경을 잊지 마세요. 캄보디아는 훌륭하게 건설되어 황금의 땅이라고 불립니다.
우리 땅은 거대하고 크고 작은 강이 풍부하며 신선한 농산물이 풍부합니다;쌀, 야채, 그리고 과일 나무. 우리는 (식량이) 풍부하지만 구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해외에만 수출합니다.
그리고 산은 거대하고 멀리 뻗어 있습니다. 숲과 가구는 매우 귀중하며 약초도 있습니다.

Khmer children, euy. Oh, Khmer children, euy, please do not forget your background. Cambodia is built up wonderfully, and is called the golden land,”“Our land is huge, rich in rivers both small and large, and fresh produce is abundant; rice, vegetables and fruit trees, we have plenty, and never beg. We only export overseas.”“And the mountains are gigantic, stretching far away; the forests and the furniture are invaluable, and there are also medicinal herbs,

[1] 원본[2] 부장은 우리나라의 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는 마오이즘에 더 영향을 많이 받은 공산 국가에서 사용했다. 공산국가라고 전부 소련식 직책만 썼던 것은 아니었다.[3]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워낙 인간성이 심하게 막장이라 욕을 먹는 거지 악행의 수준으로 따지면 티릿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4] 먼 친척인 것으로 보인다. '키우'라는 성씨가 캄보디아에서는 그리 흔하지는 않은 성씨이기도 하고.[5] 그리고 이는 훗날 인류 최대 비극에 크게 일조하게 된다.[6] 사진[7] 사실 키우 폰나리는 늦어도 1975년, 즉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수립된 해부터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어서 어떠한 정치 활동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으며 1979년에 남편과 이혼했다. 이후 폴 포트는 1985년에 자기보다 37세나 어린 여성이랑 결혼하고는 이듬해에 외동딸을 낳았다.[8] 후술할 망언에도 불구하고 2020년 파일린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9] 티릿은 그녀가 베트남 요원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