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디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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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간다의 제3대 대통령, 독재자 이디 아민의 일생을 정리한 문서.2. 유년기
어렸을 적 시절(맨 왼쪽) |
1931년에 부모가 이혼하여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어머니의 가족 슬하에서 자랐는데 지극히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일을 해야 했다. 1941년에 4년간 학교 생활을 했는데 이때 코란 등의 이슬람적 요소들을 배워 영어와 스와힐리어 이상으로 아랍어에 능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암송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졌는지 그는 거의 문맹에 가까웠다고 전해진다.
3. 집권 이전
1961년의 이디 아민 원본 |
1946년, 영국 육군의 식민지군 부대인 '킹스 아프리칸 라이플스'(왕립 아프리카 소총연대)의 제4부대에 보조 요리사 신분으로 입대하였는데 큰 체구에 체력이 뛰어나 스포츠와 사격에 능한 데다가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강제로 영국군에 끌려간 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버마 전역에 참가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디 아민 본인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실제 참전 기록은 전혀 없다. 애초에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하면서 입대 년도가 종전 1년 후인 1946년이라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2]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케냐에서 영국 육군 소속으로 현지 독립운동 단체인 마우마우단[3]과 싸웠는데 이때도 그는 무자비한 군인으로 평가받았다.[4] 1961년에는 육군 중위로 승진했다. 1962년 우간다 독립 이후 1964년 육군 대령이 된 그는 1966년에 총리 밀턴 오보테를 도와 대통령 무테사 2세를 축출하는 데 동참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우간다에는 좌파 정권이 들어섰고 이에 따라 1967년 그는 대령과 육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콩고 반란군 원조 문제에 연루되어 좌천당했다.
그는 우간다가 독립하기 전에도 잔혹성을 어김 없이 보여줬다. 1962년 3월에 케냐의 투르카나호에서 온 한 무리의 소도둑떼를 발견한 후 부하들을 동원해 투르카나족 1천여 명을 연행하고 나서[5] 이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거나 처형하게 했고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혀 죽은 사람까지 있었으며 그가 잡혀온 사람을 손수 고문하고 칼을 찔러 죽을 때까지 방치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부하이던 새뮤얼 아다카가 이를 알고 그를 연대 원사에게 고발했으나 그의 적절한 처신과 우간다의 유이한 흑인 장교였던 그가 우간다의 독립 직전에 재판을 받게 되면 '정치적 재앙'이 될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1962년 9월 12일에 재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당시 우간다의 총독이던 월터 쿠츠(Walter Coutts, 1912~1998)는 우간다의 총리 밀턴 오보테에게 "아민은 최소한 군대에서 해고되어야 한다."는 충고를 했으나 오보테는 "엄중한 질책이면 충분하다."고 이를 거절했고 이에 쿠츠는 "이 장교는 미래에 당신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응수했다. 참고로 아다카는 이후 군사훈련 중에 그에게 손수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어찌 보면 쿠츠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4. 쿠데타로 집권하다
1971년 1월 25일 (자신의 은인이나 다를 바 없는) 밀턴 오보테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 참여하던 동안 그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한참 냉전 시절이라 서구 국가들은 우간다의 좌파 정권을 무너뜨린 이 쿠데타를 환영했는데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당시 미국은 좌파 성향 정권을 접수하고 우파 정권을 세우면 독재자일지라도 인정해 줬는데 그도 그랬다.[6]쿠데타 후 우간다의 수도인 캄팔라에서는 의회 건물은 물론이고 공항의 활주로에까지 가시 철조망이 둘러쳐졌고 공항 중앙 대기실에서 의문의 폭발로 이곳에 있던 가톨릭 사제 4명 중 2명이 사망하면서 후에 일어날 억압적인 통치를 암시했다. 게다가 우간다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도 사실상 호텔에 감금되었다.
그는 쿠데타 직후에 처음으로 한 연설에서 "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에 불과하며, 상황이 정상화될 때까지 군사 정권은 임시 정부로만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이며 '국가를 민주주의로 되돌리기 위해' 1973년 3월에 민선을 치르고 5년 뒤에 물러날 것을 약속했다.
그는 쿠데타 후에는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고, 서민들과 함께 전통 춤을 추기도 하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감췄고 우간다의 전 식민 통치자들을 조롱했으며 우간다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오보테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영국에서 쓸쓸히 죽은 에드워드 무테사 2세(Edward Mutesa II, 1924~1969)의 시신을 우간다로 봉환하기도 했다.[7] 그가 몰아낸 오보테는 야당 활동을 금지하고 비상 사태를 명분으로 정적들을 재판 없이 감금하고 고문한 독재자였으나 그는 '자비롭게' 오보테가 감금한 정치범들을 석방했기 때문에 집권 직후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쿠데타 직후에는 우간다의 국민들이 쿠데타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밖으로 뛰쳐나와 춤을 췄고 오보테의 포스터를 갈기갈기 찢거나 발로 짓밟았으며 영국의 관찰자는 "나는 아민 장군보다 더 인정이 많고 인기가 있는 지도자는 보지 못했다."라고까지 평할 정도였지만 오보테가 그에 비교하면 매우 선량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5. 집권 이후
1975년 10월 1일, 뉴욕 유엔 본부에서의 이디 아민.[8] |
There is freedom of speech, but I cannot guarantee freedom after speech.
표현의 자유는 보장한다. 그러나 표현 이후의 자유는 보장해줄 수 없다.
집권 이후 연설에서의 발언 출처
표현의 자유는 보장한다. 그러나 표현 이후의 자유는 보장해줄 수 없다.
집권 이후 연설에서의 발언 출처
물론 그는 전술한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쿠데타로부터 약 1주일 후인 1971년 2월 2일에 스스로를 우간다 대통령, 우간다군 총사령관, 육군참모총장, 공군참모총장에 등극시켰으며 집권한 지 5개월 안에 헌법의 일부를 중지시키고 의회를 없앤 뒤 종교 집회를 제외한 모든 집회와 시위, 정당은 물론 노동조합, 학생 단체까지 포함한 단체 활동을 금지시킨 채 일반 법원보다 군법회의에게 압도적인 권한을 주고 정부와 국영 기업의 최고위직에 군인들을 임명했다. 반문맹이던 그는 장관들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꼈기 때문에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해서 1972년부터는 내각 회의를 단 한 차례도 열지 않았으며 그가 집권할 동안 우간다에는 선거라는 것이 전혀 치러지지 않았다.[9]
게다가 군사 재판을 거친다고 해도 거의 모든 재판은 제대로 된 절차조차 거치지 않는 약식재판에 불과했으며 군대가 재판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던 판이었으니 사법부의 독립도 사실상 전무했다.[10] 특히 군법회의 의장으로서 군사재판을 총괄하던 육군 중령 겸 육군 총사령관 주마 부타비카[11]는 워낙 악랄해서 친구들에게도 미치광이 취급받던 인물이었는데 이 인물의 별명 '부타비카'가 '부타비카 정신병원의 환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붙은 것에서도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12]
그는 '국민을 위협하거나 경종을 울리거나 군부를 모욕하거나 불명예스럽게 만들기 위해 계산된 행위'에 대한 군법회의의 재판을 명령할 권리가 있었는데 이는 지나치게 모호하게 정의된 혐의에 대해 자의적인 재판을 하도록 허락하는 권한과도 같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정적들을 변호한 변호사들이 구금, 고문, 살해되거나 심지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거리에서 보안군에게 총살되기까지 했다.
그는 오보테 시절에 악명이 높았던 헌병대를 확대한 후 군인들에게 사법적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초법적인 무제한의 체포 및 수색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들은 '정치 활동'과 무장 강도 행위 등의 범죄를 행할 거라고 의심되는 사람들도 영장 없이 체포한 후 재판 없이 강제로 무기한 구금시켰다.[13] 심지어 그는 야간 순찰대에게 눈에 보이는 대로 총을 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고는 이들이 무장 강도로 판단한 민간인들을 거리에서 즉결처분할 수 있도록 하여 밤에 거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도 이 군인들은 후에 '법과 질서와 공공 안전을 유지할 목적으로 한 일'에 대한 기소를 면제 받으면 그 기소 면제가 소급적용되어 이전에 저지른 악행들에 대해서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아도 되었다.[14]
뿐만 아니라 라디오는 게릴라를 숨기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잃고 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협박을 해댔고 그의 정적들은 낮에 공개적으로 납치당했다. 때문에 그에 반대하는 지하 조직도, 조직적인 반대도, 심지어 정권을 비난하는 익명의 팸플릿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후술할 것처럼 그가 집권하는 동안 반정부 시위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으로도 극도의 통제가 가해졌다. 모든 송수신 우편물들은 당국에 의해 검열되어 당시에 우간다에서 오고가는 모든 편지에는 대통령 관저의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고 하며 전화는 공개적으로 도청되어 전화로 전달되는 내용이 '논란이 되면' 그 즉시 끊겼고 언론도 극소수 빼고는 모두 폐쇄되었으며 해외 신문을 읽는 것도 허가를 요구하는 사람까지 살해될 정도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그에게 반대 의견을 표명하거나 그에게 반대하는 보고서를 작성한 언론인들이 체포, 망명을 넘어 살해되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심각하기 이를 데 없어 1977년에는 그를 '모욕한' 연극의 대본을 쓴 작가와 그 연출을 연출한 연출가가 비밀리에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그는 여성들의 도덕적 해이를 야기한다며 여성이 미니스커트와 가발, 심지어 바지를 착용하는 것조차 금지시켰으며 향수, 크림, 탈취제 사용까지 금지시켰고 여성의 독신까지 금지시켜 군대로 하여금 독신 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하게 했다. 국민들의 자유로운 출국도 금지되었고 외국에서 돌아온 우간다인들도 핍박을 당해야 했으며 심지어 북한과 비슷하게 우간다 국내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위해서도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15][16]
그는 무슬림과 특정 부족을 노골적으로 편애했는데 카크와(Kakwa)족과 루그바라(Lugbara)족이 1977년까지 우간다 군대의 22명의 장군 중 60%, 내각의 75%를 구성했고 인구의 5%에 불과했던 무슬림이 장군과 내각의 80%를 차지했다고 한다.
6. 잔혹한 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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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팔라의 강제수용소 내부. 저 붉은 것들이 전부 피다.[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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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 아민 시기 공개적으로 총살형에 처해진 희생자. 희생자가 흰색 앞치마를 입고 있는데 이는 앞치마 위에 검은 십자가로 총을 쏠 신체 부위를 표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희생자의 앞치마 밑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못하게 했다. |
그(아민)에게는 도덕적 기준이나 정치적 기준도 없다. 그는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자신만의 '규칙'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가 움직일 때면 그 기준이나 규칙도 바뀐다.
에드워드 루구마요 (Edward Rugumayo, 1934~)[18]
에드워드 루구마요 (Edward Rugumayo, 1934~)[18]
군대를 제외하고 우간다에는 아무도 더 이상 살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남을 뿐이다.(No one in Uganda, except for the army, lives any more. They only survive.)
마케레레 대학교의 한 익명의 교수.[19] #
마케레레 대학교의 한 익명의 교수.[19] #
'검은 히틀러' 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그가 집권 중에 저지른 엽기적이고 추악한 행각은 역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하기 힘들다.
쿠데타 며칠 후부터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마구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대상은 주로 오보테를 지지했던 세력들이었는데 약 3,000여 명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살해 당했으며 특히 쿠데타 1년 만에 이전까지 있던 우간다의 군인들 중 단 1/3만 살아남았다. 오보테를 지지하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1971년 4월 우간다 북부에서 수단으로 건너가려던 민간인 600명이 우간다 군대에 의해 학살당했고 오보테 시절의 육군참모총장 후세인 슐레이만과 우간다 최고의 명문대이던 마케레레 대학교의 부총장, 영국 성공회 대주교 자나니 루움, 심지어 그의 학살을 취재하던 미국인 2명도 살해되었으며[20] 당시 내각 장관 19명 중 7명이 살해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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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의 여지가 있음. | }}}}}}}}} |
이렇게 쿠데타 3개월 만에 무려 1만 명, 1년 반 만에 15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오보테를 지지하던 부족들이던 아콜리(Acholi)족과 오보테가 속한 소수민족이던 랑고(Lango)족이었다. 그는 우간다 북부에 살던 아콜리족과 랑고족이 모든 타 종족 출신의 군인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군권을 이들이 독점하려고 했다고 발표하며 이 부족들을 모함했다. 심지어 1977년 3월 5일자 워싱턴 포스트 지의 기사에 따르면 그는 우간다에서 모든 아콜리족과 랑고족을 제거할 '마스터 플랜'을 짜기도 했다고 하며 한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아민의 부하들은 잡으려고 한 랑고족 남성이 살기 위해 도망친 것에 분노한 나머지 크메르 루주마냥 아내가 집에 있었음에도 애꿎은 그들의 아기의 발을 잡고 나무에 내리쳐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민은 1972년 1월 우간다 군대에 모든 아콜리 또는 랑고 병사들을 모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런 다음 모든 아콜리와 랑고 병사들을 모아 군대 막사에 가둔 후 우간다 공군으로 하여금 막사를 폭격하게 해 죽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민 정권은라는 황당한 기준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으며 군인들은 하도 여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나머지 아민 본인이 때때로 군인들에게 "여자들을 추행하지 말라"는 경고를 할 정도였다. 당시 우간다에는 조작된 증거 때문에 총살형이 처해진 사람들도 많았는데 여자친구의 집에 산탄총과 권총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다는 누명을 쓰고 공개처형된 학생까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1975년 11월 23일에 4,000명의 장애인과 거리의 거지들을 위해 진자에서 일자리, 무료 숙박 및 무료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라디오로 선언하고 바로 다음 날에 손수 명령을 내려 이들을 군용 트럭에 실어 진자로 보낸 후 모조리 나일강에 던져 악어 밥으로 주기도 했다.[21] #
심지어 우간다의 초대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던 베네딕토 키와누카(Benedicto Kiwanuka, 1922~1972)의 최후는 매우 참혹하다 못해 엽기적인 수준이었다. 당시 현직 대법원장이었던 키와누카는 '완전한 체포 권한이 없는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지적하며 캄팔라 호텔에서 전화번호부를 훔친 혐의로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영국인 사업가 도널드 스튜어트(Donald Stewart)[22]를 석방하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이에 불복한 그의 지시에 따라 1972년 9월 21일 오후 3시경에 고등법원의 회기를 주재하던 중 군인들에 의해 총을 맞은 후 신발 한 켤레가 벗겨질 정도로 무자비하게 거리로 끌려가 군용 차량에 실려 캄팔라 교외의 마킨디예(Makindye)에 있는 군용 교도소에 끌려간 후 바로 다음날에 군용 교도소에서 살해되고 시체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훼손되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우간다의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오보테의 최측근 바질 키이자 바타링가야(Basil Kiiza Bataringaya, 1927~1972)는 쿠데타 직후 투옥된 후 고문을 당하고 오보테의 정권 재탈환 시도가 실패로 끝날 무렵인 1972년 9월 18일 군용 지프에 태워진 채 음바라라(Mbarara)[23] 외곽으로 끌려간 후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되고 그 머리는 효수되어 군인들이 머리가 꽂힌 기둥을 들고 음바라라 외곽 주변을 행진한 후 음바라라 막사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 그의 처형 직후 그의 측근들도 최소 11명이나 처형되었고 아내마저 1977년 처형되고는 시신이 불태워진 채 남편의 가족이 소유했던 음바라라의 땅에 버려졌고 재산이 몰수당했다.[24] 바타링가야와 함께 오보테의 쿠데타 진압 전후로 무려 최소 85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이렇게 그는 아프리카의 잔인한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며 국제 사회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그가 권좌에 있던 8년 동안 무려 30~50만 명에 이르는 우간다 국민들이 희생당했다고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우간다인 2~4%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비무슬림이거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고 하는데 그 결과 마케레레 대학교는 말 그대로 텅 빈 상태까지 가게 되었다. 실제로 그가 축출될 무렵에는 거의 모든 우간다 국민들이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고 느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수도인 캄팔라 교외에 있는 부간다 왕국의 루비리(Lubiri) 궁궐 터[25]의 지하에 강제수용소를 지었는데[26] 위의 사진 속의 감옥이 바로 이 수용소다. 거기에 수감자들은 다음과 같은 꼴을 당했는데 증언들을 조합하면 이 강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뚜올쓸라엥,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마저 능가하고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전혀 없는, 한마디로 지옥보다 더 끔찍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과장 한 마디도 안 보태고 동족을 대상으로 한 절멸수용소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27] 매우 끔찍한 묘사들이 많으니 읽을 때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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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용소의 복도는 전류가 흐르는 물 웅덩이로 가득 차 있었고 감방의 입구에는 문 대신 전류가 흐르는 물이 흘렀기 때문에 탈옥을 시도했다가는 바로 감전사했다. 감옥에는 방마다 창문, 환기 장치 하나 없는 5개의 구역이 있었는데 이러한 구역 한 곳에만 100명 이상이 수감되었기 때문에 수감된 이들은 감방에서 굶어 죽거나 질식사했으며 화장실도 없었기에 위생 상태도 형편없었다.
이 수용소에서는 10*12피트(3.05*3.66m) 정도의 감방에 34명이 갇혀 있었다. 즉, 4평도 안되는 방 하나에 34명이 감금된 셈이다. 식량 공급도 형편없어 일주일에 식사가 단 2번만 주어져도 운이 좋다고 여겨졌으며 심지어 13일 동안 감방에서 물도 마시지 못한 채 굶어야 했던 수용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에게 드물게 주어진 식사도 매우 조악하여 겨우 흙으로 덮인 회색의 빵 덩어리와 우유와 설탕이 전혀 첨가되지 않은 탁한 차 정도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일부 수감자들은 문자 그대로 수감자들의 시체까지 먹어 가면서 목숨을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그는 직접 정적들에게 가할 고문을 고안하기도 했을 정도로 잔혹한 인물이었으니 감금된 죄수들에 대한 대우가 좋을 리는 전무했고 오히려 죄수들에게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행위가 자행되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에게 빽빽이 못이 박힌 마루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거나 날카로운 돌들을 맨몸으로 기어가게 한 후 밤이 되면 독방에 가두기도 했으며 구타하면서 이와 동시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개구리처럼 뛰어다니도록 했고 수감자들에게는 민감한 부위일수록 더욱 집중적으로 전기고문을 가했으며 죄수들에게 다른 죄수들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쳐 죽이게 하거나[28][29] 죄수들을 일렬로 세운 뒤 한 죄수를 묶어놓고 다른 죄수로 하여금 '이걸 하면 형 집행을 유예해주겠다'고 속이며 겁에 질린 그 죄수에게 다른 죄수의 머리를 큰 쇠망치로 때려 죽이게 하고 그 다음 사람에게도 똑같은 조건을 걸며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죄수에게도 총을 쏴 죽였다. 심지어 교도관들은 사람의 눈을 뽑거나 죄수의 신체 일부를 절단한 뒤 굶주린 죄수들에게 이 인육을 강제로 먹으라고 주기도 했으며 신체가 절단된 수감자에게 자신의 살을 강제로 먹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남자에게는 거세라는 죽음보다 끔찍한 형벌을 가하기도 했으며[30] 여자들도 강간은 물론이고 가슴이 도려내지거나 지독한 성고문을 당하는 등 참혹한 꼴을 당했다.
거기에 이미 굶주린 상태에 있던 죄수들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못한 채 술과 마약에 취한 간수들에게 무자비하게 대검으로 찔리거나 마른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 개머리판, 몽둥이, 쇠창살 등으로 구타당했고 머리가 타이어의 림에 끼워진 상태로 채찍질을 당하거나 쇠창살로 타이어를 반복적으로 가격당하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이곳의 교도관들은 총상을 입은 사람들을 앞에 나온 물 웅덩이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이렇게 이 곳에서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게다가 1972년 3월에 장교들 36명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싱가포르'라는 이름을 붙인 감방은 얼마나 참혹한 고문이 이루어졌는지 피가 바닥에 1cm 두께로 고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기분에 따라 똑같은 죄라도 누구는 재판도 없이 무죄를 선고한 후 석방시키고 누구는 지독한 고통 속에 총살시키거나 쇠망치로 때려 죽이게 하는 처벌을 내렸는데 이들 외의 처형 방법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정적들을 처형할 때는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곤봉과 쇠지렛대로 머리를 가격해 죽이는 것이 그나마 매우 양호해 보일 정도로 온갖 참혹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는데 팔다리를 절단하거나 총을 쏜 후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거나 강제로 눕힌 뒤 차를 희생자의 가슴 위로 지나가게 해 치어 죽이기도 했고 살아 있는 사람을 한 줄로 정렬한 뒤 탱크로 뭉개거나 죽을 때까지 강제로 소금과 모래를 먹이기도 했으며 칼과 총검으로 사람을 베고 팔다리를 자르거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기도 했다. 이를 넘어 죄수들이 가득 찬 감방에 다이너마이트를 투척(!)하기도 한 데다가 심지어 죄수들을 영하의 냉장실에 가둬 얼어붙게 했다가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채워진 매우 깊고 어두운 구멍에 던져넣고 그대로 저체온증으로 얼어죽게 내버려두거나 아예 그 물을 서서히 전기로 가열해 삶아 죽이기도 했다. 거기에 간수들은 수감자들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모습을 다른 수감자들에게 지켜보게 했으며 그는 이렇게 처형된 정적들의 참수된 머리들을 냉장고에 보관하고 이를 보면서 희희낙락했던 것으로 유명하고[31] 시체가 은행에서 공개적으로 전시되거나 비료로 처리되는 일도 있었다.
그는 보좌관들과 같이 방독면을 쓴 채 감옥에 방문한 후 죄수들을 직접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거구의 몸으로 희생자의 가슴팍 위에 뛰어올라 짓밟는 방식으로 죽이기도 했는데 그가 집권 기간인 8년 동안 손수 죽인 죄수들은 무려 200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며 자기 손으로 2천 명의 죄수들을 죽였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비밀경찰은 이렇게 사람을 죽이고 우간다의 '거의 모든 협곡과 관목 숲에' 시체들을 유기해 놓고 뻔뻔하게도 사람을 보내 유족들을 위로하는 척을 한 뒤 가족들이 시신을 찾아달라는 목적으로 1978년 가치로 300~1000달러 정도의 거액을[32] 바치면 가족들을 데리고 숲과 폭포 인근에 훼손된 상태로 유기된 가족들의 시신을 발견하는 '시신 발견자' 행세를 하는 뻔뻔함까지 보여주었다. 거기에 수감자의 가족이 석방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면 그 가족이 대신 총살당해야 했다. 그리고 아민은 수감자 중 두어 명을 일부러 탈출시켜 수용소의 참상을 전하게 했고, 이에 국민들은 아민의 잔혹성을 두려워하며 아민에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정적들의 시체를 트럭에 실은 뒤 나일강의 악어들에게 던져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우간다의 악어들은 사냥을 자발적으로 할 필요가 없어서 동물학자들이 경악할 정도로 게을러지고 몸집도 비대해졌다고 한다.[33] 게다가 이 시기에는 악어가 먹고도 썩어 남아돌 정도로 시체가 많아서 상류에서 떠내려와 댐 수로를 막고 있는 시체 치우기가 우간다 - 케냐 지방의 주요 댐인 날루발레 댐 관리요원들의 주 업무였다고 한다. 수력 발전소에도 시신을 하루에 40~50구나 버려서 시신들이 발전기의 활동을 막은 나머지 수력 발전소에서 만드는 전기의 양이 감소하여
캄팔라 거리의 밤의 조명의 선명도로 그의 기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고 한다. 그의 정적들의 시체는 강에 버려지지 않으면 집단 무덤에 버려지거나 집과 자동차에 넣어진 채 불태워졌다.그는 읽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을 모르는 반문맹이었는데 실제로 아민 시기에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다가 영국으로 망명하여 아민에 대한 책을 쓴 헨리 키엠바(Henry Kyemba, 1937?~)의 말에 따르면 "아민은 정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읽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입법권을 가졌던 그는 구두로 발표한 법률을 라디오로 전국에 내보내는 식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부하들에게 명령과 정책을 전달할 때 전화, 라디오, 연설 등으로 전달했는데 이때 정부 관리들이 아민을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하거나 화나게 했으면 즉시 체포되어 투옥되거나 즉결처형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그는 본인의 무식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교육, 교육을 받아온 지식인, 교육 기관을 증오했기 때문에 학력과 경험이 풍부한 관료들을 모욕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이혼한 아내들 중 하나였던 케이 아도라(Kay Adroa, ?~1974)는 1974년 3월 26일에 이혼할 때 주치의이던 피터 음발루 무카사(Peter Mbalu Mukasa)와 내연 관계를 맺어 무카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그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1974년 8월 13일에 그 몰래 낙태를 하다가 심한 출혈로 사망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의사에게 명령해 케이의 시체의 얼굴과 팔다리를 절단해 얼굴을 거꾸로 붙이고 팔다리도 위치를 서로 바꾸어 붙인 뒤 남은 이혼한 아내들 2명과 그들의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34] 그는 자신의 친척들에게도 이런 악행을 행했으며 자신의 숙모가 식탁 위에서 이런 상태가 되어 있는 참상을 목격한 그의 가까운 친척은 공포를 느끼고는 그 날로 우간다를 탈출했다. 케이 아도라의 죽음에 대해 정리한 글
1976년 8월 3일에 마케레레 대학교의 학생들은 그의 장남인 타반이 이 대학교의 공과대학에 등록한 뒤 거만한 행동을 보인 것에 항의하는 진정서를 대학 당국에 제출했다. 그러자 바로 이 날에 군인들이 마케레레 대학교를 습격해 무자비한 진압에 들어갔다. 당시 대학교를 습격한 군인들은 정문 앞 광장에 있던 학생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거나 학생들을 1~2시간 동안 맨무릎으로 기어다니게 하는 등의 기합을 가하고 교정에 드러눕힌 뒤 무자비하게 구타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다음날인 8월 4일까지도 타반이 인솔하는 군인들이 학교에 습격하며 살육극이 계속 이어졌다고 하며 군인들에게 끌려간 후 구금된 학생들에게도 폭행과 강간 등의 가혹행위는 지속되었다. 이틀 동안 언론에서는 총 100명 이상이 죽고 1천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500~700여명이 연행되어 구금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고 보도되었으나 앰네스티는 공개적인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언론이 보도한 수치는 상당히 와전된 것이며 실제로는 10명 미만이 죽고 200명 정도가 연행되어 구금되었으며 연행된 사람들 중 20명 정도가 행방불명되었다고 보고했다. 참고로 이는 전술한 것처럼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에 있던 유일한 반정부 시위였다.
그의 집권은 우간다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간다의 동물들에게도 끔찍한 참사였다. 이 시기에는 그의 비호 하에 밀렵꾼과 군대들이 국립공원과 사냥터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밀렵과 벌목을 해댔기 때문에 우간다의 코끼리들은 75%, 악어와 사자, 표범들은 80%가 죽었고 심지어 우간다의 코뿔소들은 무려 98%가 죽었다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악행들 때문에 집권 중반인 1975년 3월에는 미국 전문가들이 꼽은 세계 최악의 지도자 1위에 올랐다고 한다. 참고자료
1977년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에게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유엔 결의안을 냈는데도 그는 1978년 1월에 있던 집권 7주년 기념식에서 "올해는 '평화와 화해'의 해가 될 것이다. 우간다에는 인권 침해가 없으며 그러한 주장은 망명자들에 의한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물론 국내외를 통틀어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도리어 국제앰네스티의 평가처럼 그의 학정은 변치 않고 지속되었다.
6.1. 대외 관계
그는 권력의 위임 없이 표면적으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맞춰서 국가를 통치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 이스라엘 관계였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우간다는 사이가 좋았다. 이스라엘을 우간다에 건국하려던 계획까지 있었던 만큼 실제로 우간다에서 영국 식민지 시절 유대인들도 제법 살던 적도 있었고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외교전을 치렀는데 그 과정에서 우간다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그는 반이스라엘화한 후에도 자신이 골다 메이어, 모세 다얀과 각별한 사이라고 주장했고 모세 다얀이 자신을 아들처럼 대했다고 떠벌렸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의 주장이다. 그가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골다 메이어와 사진을 찍으며 희희낙락하는 그를 볼 수 있다.그러나 집권 후의 그는 이스라엘 정부 측에서 탄자니아 침공에 필요한 지원을 거부했던 점에 대해 배신감을 가지고는 무슬림에 입문함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우간다의 대 이스라엘 관계는 하루아침에 뒤집어졌고 그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적(敵)임을 자처했으며 히틀러를 찬양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1972년 3월 27일자로 우간다의 모든 유대인들은 우간다를 떠나야 한다는 명령까지 내리는 등 극단적인 행각들을 벌였다. 그는 '이스라엘인들이 나일강에 독을 타서 수단과 이집트에 있는 모든 아랍인들을 죽이려 한다'는 반이스라엘 선동을 했으며 아랍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정복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뮌헨 올림픽 참사 당시 그는 쿠르트 발트하임 UN 사무총장에게 "나치 지도자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600만 유대인을 불태울 권리가 있었다"며 "독일은 이런 일이 일어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 "이스라엘을 유엔에서 추방하고 모든 이스라엘인을 유대 국가를 만든 죄를 지은 영국으로 보낼 것이다"라는 전보를 보낸 적도 했다고 한다.[35]
잔혹한 행적들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은 보츠와나[36]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우간다처럼 독재 정권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37] 그는 별다른 비판 없이 다른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결국 이 덕분에 1975년에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76년 6월 25일에는 자신이 우간다의 종신 대통령임을 선언했다. 이렇게 확고한 기반을 다진 그는 극단적인 종족주의를 내세워 상술한 것처럼 아콜리, 랑고 등 다른 부족들을 박해했다. 때문에 무슬림이라고 해도 이들 부족들은 그를 매우 증오하게 되었으며 그가 축출되자 부족간에 내전, 학살이 벌어질 지경이 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당시는 냉전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라 이념이 곁들여진 분쟁도 여기저기 전세계에 많았으므로 자기 편이기만 하면 독재를 하든, 학살을 저지르든 딱히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소련은 1972년 이후로 우간다 최대의 무기 지원국이 되었고 그의 비밀경찰인 국가 연구국(SRB)의 창설을 도왔다. KGB는 아예 SRB 요원들이 소련에서 훈련받으면서 자신들의 방식을 전수 받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다만 당시 SRB 요원 중에서는 미국과 영국에서 훈련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르완다인 이민자들을 대원으로 많이 써서 한동안 우간다에서는 반 르완다 감정이 들끓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독도 SRB을 지원하고 1979년에 탄자니아를 침공할 때 아민의 개입 증거를 인멸하려고 시도하려고 했으며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1978년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60세 생일을 기념해 출판된 차우셰스쿠 찬양 문집에서 차우셰스쿠를 찬양의 의미로 이디 아민과 동렬에 놓기도 했다.[38]
게다가 북한도 그가 전복될 때까지 우간다의 군대에 무기를 지원하고 훈련을 도왔다는 것을 보면 그는 제1세계보다는 제2세계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6.2. 경제 파탄
1972년 8월 5일부터는 아프리카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인구의 1% 정도만 구성하면서도 우간다 경제의 1/5를 차지하던 우간다의 아시아인, 특히 인도인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이 일이 발생한 이유는 유대인과 함께 영국 식민지 시절에 노동자로 와서 우간다 경제를 좌우해서 당시 우간다 국민들의 원한을 샀던 것도 컸지만 그의 말로는 꿈 속에서 알라께서 본인에게 아시아인을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우간다의 인도인들은 기술직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39]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우간다인들은 자국민이 아닌 인도인들이 상권을 차지하던 현실에 분노하였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였다.이에 그는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업고 인도인들에게 거취 정리, 자산 정리까지 3개월의 기간을 주고 사실상 모든 인도인을 본국인 인도나 영국, 캐나다, 미국 등으로 추방시켰는데 당시 우간다에서는 '아시아인들은 너무 오랫동안 우간다인들을 착취했으니 떠나야 한다'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거나 아민이 아시아인 추방을 '경제 전쟁'이라며 '부유한 아시아인들이 가치 있는 우간다의 경지를 조종하고 착취했다', '그들은 소의 젖을 짰지만 (소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는 등 공공연하게 반아시아인 선동이 이루어졌다. 물론 제때 떠나지 않는 아시아인들은 폭행 당하거나 집과 사업장이 약탈 당했다. 이 때문에 당시까지 8만 명이나 있던 우간다의 아시아인은 단 2년 만에 100명 정도만 남게 되었고 심지어 그의 몰락 시점에는 50명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는 아시아인 추방 전에도 군대를 동원해 아시아인들의 집, 사업장을 약탈하고 아시아인들을 향해 폭력을 저지르도록 했고 이에 견디지 못한 아시아인들이 사업장을 버리고 탈출하자 영국은 이를 '소수 민족에 대한 박해'로 판단해 우간다에 1900만 달러를 원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취소하기도 했다.
그의 아시아인 탄압 때문에 아시아인이 소유하던 5,600개가 넘던 가게나 공장, 토지들은 하루 아침에 원주인을 잃고 아민의 지지자들에게 귀속되었지만 기술과 운영 능력이 부족했던 우간다인들이 제대로 운영하긴 힘들었다. 당시 약국과 외과는 국가정보국 소속의 자동차 정비사에게 넘겨지고 섬유 도매점은 국가정보국 소속 전화교환수와 군대 상등병에게 넘겨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던 판이었으니 외국 셔츠를 팔던 우간다 사람들은 칼라의 크기를 가격표라고 여기고 칼라 크기에 따라 가격에 결정했다고 하는 등 운영도 엉망진창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때문에 인도인 밑에서 일하던 우간다인 5만여 명이 실직했다고 한다.[40]
당연히 가게나 공장들은 곧 폐업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물건이 안 나오니 자연스럽게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거기다가 그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을 국영화하기까지 했으며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며 지폐 생산량을 늘리기까지 했다.
결국 이로 인해 우간다의 경제는 완전히 파탄났다. 그의 집권 이전에 우간다는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 '동화 속 나라'라고까지 극찬한 데다 동아프리카에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였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였지만[41] 그의 집권 당시 우간다는 아프리카 최악의 최빈국으로 꼽히고 말았다.
그의 집권 당시 우간다 국민들의 봉급은 이전의 1/10 수준으로 급락했으며 국가 재정은 이전의 60%, 물가 상승률은 200%, 부채는 3억 2천만 달러에 도달하게 되었다. 외환보유고는 그가 집권한 1971년 한 해 동안 2천만 파운드에서 3백만 파운드로 급락하여 그가 집권한 지 1년 만에 우간다는 사실상 파산 상태가 되었다.[42] 우간다의 군사비는 1977년 기준으로 GDP의 65%에 달하게 되었다.[43]
물론 우간다 사회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우간다의 달러 보유고는 사실상 그의 개인적 재산이나 다를 바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대통령이 외환을 사유재산으로 여기던 상황 속에서 산업도 제대로 될 리가 없어 우간다의 공업은 물론 농업까지 처참하게 망하게 되어 수도인 캄팔라에서조차 설탕과 소금, 성냥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 그가 집권한 8년 동안 우간다에서 군사 쿠데타 시도가 무려 8번이나 있었던[44][45] 데다 결국 1977년 말에는 장관직과 군사직의 50% 이상이 공석이나 임시직이 될 정도로 국가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다만 의외로 1인당 GDP 자체는 그의 학정 속에서도 1971년의 134$에서 1977년에 237.4$(2023년 가치로 1,188$)로 성장하며 나름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으나[46] 그의 학정과 내실의 파탄, 후술할 탄자니아 침략의 여파 때문에 이 성장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1978년에는 약 190.5$(2023년 환율로 약 886.6$), 1979년에는 164.4$(2023년 환율로 약 687$)로 추락했고 1980년에는 93.7$(2023년 환율로 345$)로 추락해 단 3년 만에 1인당 GDP가 이전의 40% 미만으로 추락하면서 이러한 나름의 성과도 다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6.3. 엔테베 작전
자세한 내용은 엔테베 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7. 몰락
그의 학정이 끝을 보이지 않자 우간다 국민들은 '아민은 불멸의 존재이고, 우리는 살아 생전에 다른 지도자를 볼 수 없을 것이다'며 모든 희망의 끈을 놓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그러나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우간다 내부에서도 존경 받던 자나니 루움(Janani Luwum, 1922?~1977) 대주교를 죽인 아민 정권에 대한 분노와 불만이 고조되었다. 참고로 자나니 루움은 영국 성공회 대주교로서 동아프리카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큰 종교인 중 한 명이었고 당시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콩고를 관할하고 있었다. 루움은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인물이었는데 1977년 2월 16일에 총살된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사인이 조작되었으며 그가 직접 총을 쏴 죽였다는 소문도 돌았는데[47] 루움 주교의 암살 7개월 후인 1977년 9월 20일에 우간다에서는 당시까지 허용되던 32개의 기독교 종파 중 무려 27개가 금지되고 단 5개만이 활동을 허락받게 되었다.
1978년 군 내부의 반역 음모를 무마할 겸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그는 탄자니아 침공을 개시했다. 참고로 탄자니아에 대한 첫 공격을 직접적으로 명령한 사람은 바로 주마 부타비카였다. 부타비카는 우간다군이 탄자니아군을 이길 수 있으리라 오판하고 있었고, 그에게 보고를 받은 아민 역시도 이렇게 생각했다. 또한 당시 탄자니아에 망명 중이던 밀턴 오보테 전 대통령만 잡으면 국내의 분노를 외부로 돌리고 정적도 없애는 일석이조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긴다면.
그러나 탄자니아군은 우간다군보다 체계적인 지휘 계통에다가 훈련도가 높았다. 우간다의 주력이던 미국과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쓰고 나서 전 세계에 뿌린 낡아빠진 셔먼 전차와 T-34 전차[48]보다 우수한 중국제 59식 전차와 62식 전차가 있었으며 공군의 숙련도 역시 훨씬 높아 우간다의 중요 시설들을 정확히 타격하는 바람에 그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갈 지경이었다.[49] 애초에 탄자니아의 국력이 우간다를 훨씬 상회했고 총 병력도 15만 명으로 2만에 불과한 우간다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즉, 그는 자신의 독재 권력 유지 하나를 위해 맨땅에 헤딩하는 무리수를 범한 것이었다.
그나마 그가 믿었던 뒷배인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군이 우간다를 지원했지만 오히려 C-130 수송기와 다수의 전투기 및 병력들까지 손실하면서 역으로 탄자니아군에게 패퇴해 버렸다. 오보테가 지휘하는 해방전선군이 우간다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하였다. 결국 우간다군은 이들의 협공에 패퇴하기 시작했고 그는 당황하여 국민들에게 탄자니아군에게 저항하라는 메시지를 내놓았지만 국민들은 되려 이들을 환영하였다.
탄자니아군 병력들이 캄팔라에 접근하고 있을 때도 SRB 분대는 대통령 집무실이 작성한 암살 목록을 가지고 북부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고 한다.
7.1. 권력에서 쫓겨나다
결국 1979년 4월 11일 되려 탄자니아군과 우간다 국민해방전선의 반격에 수도인 캄팔라가 점령당했다.[50] 이에 그는 4월 12일에 라디오 방송에서 "캄팔라는 탄자니아의 군대에게 점령 당하지 않았다. 우간다의 군대가 여전히 캄팔라를 장악하고 있다."라는 거짓 연설을 한 후 곧바로 아내 4명과 30명이 넘는 자녀들을 데리고 리무진 5대의 호위를 받으며 헬리콥터를 타고 리비아로 도망쳤다. 그는 도주하기 전에 수감된 죄수들 중 일부를 병사들에게 처형하게 했다고 했으며 이날에는 그의 비밀경찰이던 SRB 요원들이 캄팔라를 탈출하기 전에 수용소에 수류탄을 던져 약 100명의 수감자를 살해하고는 대부분 탈출에 성공했다.1979년 5월, 우간다 영내 리라에서 교전을 벌이는 탄자니아군. 리라는 이디 아민 충성파들이 장악한 마지막 지역이었다.
탄자니아 병사들을 환영하는 우간다 주민들
우간다 사람들은 탄자니아군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거리에서 축제를 벌이기까지 했으며[51] 8년간의 학정에 대한 원한을 푸는 듯이 정부 건물을 점령하고 유리창을 모두 깨부순 후 아민 정권 시절의 인사들 중 일부를 조리돌림하였을 정도였다. 참고로 우간다-탄자니아 전쟁을 실질적으로 일으키고 아민 치하에서 많은 권세를 누리며 스스로를 '반신'으로 일컬었을 정도였던 주마 부타비카는 캄팔라가 함락되기 직전에 전사했다.
하지만 반이스라엘적으로 뜻이 맞던 무아마르 카다피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리비아를 떠나야 했다. 카다피 같은 독재자도 그 같은 미치광이 학살자의 망명을 받아주기 싫어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이라크로 향했지만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에게도 홀대를 받아 결국 이라크를 떠나 1979년 12월 이라크의 아랫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했다. 여담으로 그가 사우디 정부에게 망명을 신청할 때 사우디아라비아의 보수적 이슬람 성직자들은 그가 충실한 무슬림이 아니라며 국왕에게 그의 사우디 망명을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칼리드 사우디 국왕은 그가 우간다의 대통령이었던 시절 이스라엘에게 맞섰다는 점 하나 때문에 망명을 수용해 줬다고 한다.
처음 그는 제다의 한 호텔의 꼭대기의 2개 층을 통째로 빌려 썼는데 망명 후에도 자신의 학정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인터뷰에서 "우간다는 나를 필요로 한다."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7.2. 우간다 재장악 시도 미수 사건
그가 쫓겨난 후에도 그의 추종자들은 우간다에서 반군으로 활동하며 그의 사면과 대통령직 복귀를 외쳤는데 그는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은 물론 1989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허가 없이 아들 1명을 데리고 위조한 여권을 가지고 자이르로 가 뻔뻔하게도 반군들을 동원해 우간다의 정권 재장악을 시도하려고 했다.물론 그는 자이르에 도착하자마자 자이르 보안군에게 체포되었고 이 사건이 발각되자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정권을 잃고 몰락했으면 조용히 망명객으로 지낼 것이지, 무슨 짓을 하는거냐?'라며 그의 사우디 입국을 금지해 버렸다. 한편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은 그를 우간다로 인도하는 대신 세네갈로 추방했지만 당시 세네갈의 압둘 디우프 대통령도 그를 거부하여 다시 자이르로 송환시키면서 그의 우간다 재장악 미수 사건으로 인해 당시 세네갈과 자이르,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 외교 갈등이 고조됐다.
그러다가 하산 2세 모로코 국왕이 그에 대한 사우디 입국 금지령을 내렸던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당시 사우디 국왕을 설득시켰고 이에 파흐드 사우디 국왕이 하산 2세 모로코 국왕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에 대한 입국 금지령을 철회하면서 그의 사우디 입국이 허용되었고 그는 앞으로는 어떠한 정치와 군사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우디 정부가 내준 저택에서 살았다.
그는 결국 사우디 정부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후에는 방이 15개나 있는 넓은 집에서[52] 한 달에 3만 달러의 연금을 받고 운전사와 하인을 고용한 채 아랍어를 공부하고 가라데와 복싱을 배우거나 피자 등 패스트푸드와 낚시를 즐기면서 조용히 생활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자연의 비아그라라며 하루에 40개의 오렌지를 먹었기 때문에 당시 사우디인들로부터 붙은 별명이 'Dr.Jaffa'였다.[53]
1999년에 우간다의 '선데이 비전(Sunday Vision)'이라는 잡지가 망명한 그와 겨우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슬람교와 알라 신에게 전념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나는 어떤 사람들과도 아무런 문제 없이 생활하고 있다. (중략)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우간다에서 고아가 된 여러 친척들에게 학비를 대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것 또한 만족한다.
8. 최후
사망 40여 일 전인 2003년 7월 6일에 촬영된 78세 무렵의 이디 아민. |
말년의 그는 몇 년 동안 고혈압과 심각한 피로감을 앓았는데도 치료를 거부하다가 2003년 4월부터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가 효과가 있었는지 2003년 7월 초에는 잠깐 퇴원하여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든 가까운 고령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54] 그러나 퇴원으로부터 얼마 안 지난 2003년 7월 18일부터 고혈압과 신부전으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져 제다에서 투석 치료를 받게 되었다.
치료 과정에서 그는 잠깐 의식을 찾았다고 전해지며 이때 그를 간호한 바산티 막와나(Vasanti Makwana, 1958~)[55]라는 간호사는 그가 자신의 팔을 잡고 "제발 도와주세요... 전 정말 아픕니다."라고 희미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바산티 막와나의 회상
2003년 8월 14일에는 살기 위한 발버둥으로 신장 기증자를 찾는 중이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에게 신장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이 2명 있었지만 그들의 신장이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아 이식 수술을 하지 못했고 그의 가족들은 그의 생명 유지 장치의 연결을 끊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는 중독성 표피 괴사증에 걸려 대부분의 피부가 벗겨진 채 이틀 뒤인 2003년 8월 16일 사망했다. 간호하던 바산티 막와나는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내 최악의 적에게도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56]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우간다로 귀국하는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었지만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이 "이디 아민은 범죄자다. 돌아오면 우간다에서 가장 큰 감옥이 있는 곳인 루지라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못을 박았고 결국 그는 축출된 이래로 죽을 때까지 살아 생전에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57] 여담이지만 그는 이렇게 타향에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집권 하의 범죄 행각에 대한 재판에, 심지어 궐석재판에도 회부된 적이 없었으며 사반세기 가까이 망명지에서 편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간다인들은 독재자의 사망에 대한 안도감과 외국인보다 아프리카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지도자에 대한 향수가 뒤섞인 반응을 보였으나 전반적으로는 냉소적인 반응이 대다수였고 그렇게 큰 반응은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캄팔라의 한 43세의 의류 상인은 그의 죽음에 대해 "아민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는 죽어야 합니다. 그가 왜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을 때 내가 왜 울어야 합니까? 그는 그가 죽인 다른 사람들처럼 죽어야 합니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58] 한편 우간다의 여러 모스크에서는 "그는 많은 죽음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나쁜 사람이었지만 우간다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다"라는 등의 말을 남기며 그에 대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민이 묻힌 루와이스 묘지(Ruwais Cemetery) |
무세베니는 그가 해외에서 사망하면 그의 시신을 집으로 가져와 매장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우간다의 관리들은 우간다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그는 사망한 지 몇 시간 후에 이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소박한 장례식을 치렀는데 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 있는 관도 묘비석도 없는 황량하다시피 한 묘지인 루와이스 묘지에 묻혔다. 그가 이런 곳에 묻힌 이유가 그의 불명예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원리주의 장법 특성 때문이다.[59] 이러한 그의 장지 역시 그의 유족들이 정한 것이었다.
[1] 원래 가톨릭 신자였으나 1910년에 이슬람교로 개종하며 성을 '아민 다다'로 바꿨다.[2] 그와 비슷하게 비교되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독재자 장 베델 보카사는 실제로도 프랑스군 소속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아프리카 및 유럽 전선에도 참전한 바 있다.[3] 키쿠유족이 주축이 된 케냐 독립운동 단체. 마우마우단은 1959년에 진압됐으나 이미 식민지를 유지할 여력이 없어진 영국은 1960년에 케냐를 독립시켰다.[4] 실제로 케냐인들은 이디 아민이 '민족주의 용의자', 즉 케냐의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는 데 대부분의 흑인 군인보다 더 '성실했다'고 증언했으며 아민도 이를 의식했는지 자기는 마우마우단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고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5] 이들 중 절반 가량이 어린이들이었고 젊은이들 대부분이 도망쳤기 때문에 잡혀온 남자들도 대부분 노인들이었다.[6] 그러나 이디 아민은 인종 역차별을 제외하면 딱히 우파적이라고 부를 만한 정책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역으로 오보테 시기처럼 반서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다.[7] 참고로 아민은 오보테와 무테사가 권력 투쟁을 했을 때에 오보테의 지시를 받고 무테사의 궁전을 포위 공격하여 불태운 전적이 있다.[8]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의 의장 자격으로 유엔 총회에 참여했을 때의 모습이다. 이때 글을 잘 읽지 못했던 아민은 유엔 주재 대사한테 연설문을 대독하게 했는데 이를 본 서방권 대표들은 야유를 퍼붓거나 회의장을 나갔다.[9] 다만 아민 집권 이전인 오보테 시기, 정확히는 1964년 이래로 우간다에는 선거가 없었으며 우간다의 선거는 무려 16년 뒤인 1980년에야 다시 치러지게 된다. 참고로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치하의 에티오피아(1973~1987. 다만 멩기스투의 집권은 1974년이다)는 14년 동안 선거를 치르지 않았으며 장 베델 보카사 치하의 중앙아프리카공화국(1964~1981, 다만 보카사의 집권 기간은 1966~1979년이다)은 17년 동안 선거를 치르지 않았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치하의 에리트레아(2003~현재)는 무려 [age(2003-01-01)]년 동안 선거를 치르지 않고 있다.[10] 특히 후술하듯 베네딕토 키와누카 대법원장의 비극적인 최후 뒤에는.[11] Juma Butabika, ?~1979. 본명은 주마 알리 오카 로코니(Juma Ali Oka Rokoni). 이디 아민 아버지의 사촌이었으며 초등 교육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고 한다.[12] 부타비카는 수도 캄팔라 근교에 위치한 곳으로, 우간다 전체에서 가장 큰 정신병원이 있는 곳이었다.[13] 다만 흉악 범죄를 저지를 것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을 미리 재판 없이 구금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예방적 구금'이라는 이름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디 아민을 위시한 대다수의 독재자들은 그냥 단순히 반정부 인사들에게까지 이런 짓을 벌여서 문제가 된 것이다.[14] 이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국가가 자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군인들이 묻지마 살인을 벌이는 것을 합법화한 것을 넘어 이를 오히려 장려했다는 뜻이다![15] 1974년 우간다의 인권 실태를 다룬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에서는 "우간다에서는 양심, 집회, 결사, 이동의 자유는 사문화되었다."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1978년에 동일 단체가 동일 주제로 작성한 보고서에도 "우간다 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위해서도 특별 허가가 요구 사항이다."라고 언급된다.[16] 여담으로 북한과 이디 아민을 제외하면 전국민에 대한 국내 여행 통제 제도를 실시한 지도자는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폴 포트처럼 이디 아민도 능가하는 악질 독재자들과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처럼 극단적으로 억압적인 체제를 구축한 독재지들밖에 없다. 그나마 응게마와 니야조프는 일부 지역에 한해 이를 적용하는 정도에 그쳤다.[17] 심지어 이조차 아민이 쫓겨난 후에 찍은 사진이다. 2019년 사진. 과거에 비해 피가 완전히 닦여나간 수준인데도 여전히 피의 흔적이 보인다. 왜 문이 없냐면 후술하겠지만 입구에 고압전류를 흘린 물을 흐르게 해서 절대 나올수가 없으니 애초에 문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18] 우간다의 정치인, 외교관, 교수, 환경운동가. 아민 시기인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교육부 장관을, 요웨리 무세베니 시기인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우간다의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19] 그 교수는 서구권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한 다른 우간다의 난민들처럼 우간다에 있는 그의 가족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한다.[20] 아민 시기에 대놓고 민간인을 학살한 행위들에 대한 자료, 증언이 규모와 비교하면 신기할 정도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유도 이렇게 최소한의 목격자도 남지 못하도록 무자비하게 학살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도 무방하다.[21] 이 학살의 동기도 어처구니없는데 겨우 이 라디오 선언 3일 전에 완데라 막시니(Wandera Maksini)라는 이름의 목발을 짚은 장애인이 자신의 면전에서 "우리는 상점에 상품이 없는데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개자식아! 원한다면 날 죽여줘!"라고 말한 것에 기분이 상해서였다고 한다. 참고로 막시니는 이 라디오 선언이 있던 날에 군용 트럭에 실려가 '실종'되었다.[22] 체포 전에 아민을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23] 우간다 남서부에 위치한 인구 20만 명 가량의 도시로, 우간다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24] 다행히도 바타링가야 부부의 8명의 자식들은 처형당하지는 않았고 가톨릭 수녀원에 보내져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한다.[25] 궁궐은 1966년 오보테가 무테사 2세와의 정치적 분쟁이 있었을 때 이디 아민이 오보테의 명령에 따라 파괴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은 후에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26] 구글 지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 심지어 근처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해당 학교는 1966년에 무테사 2세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무너져 1998년에야 재건된 곳이기 때문에 초등학생들이 고문 장소 바로 옆에서 교육을 받을 일은 없었다. #[27] 저런 일은 악질 독재국가 중에서도 민주 캄푸치아나 북한 정도만이 하던 일이다.[28] 원치 않게 살인자가 된 이들은 미칠 수밖에 없었다.[29] 실제로 아민 시기에는 두개골이 부서진 채 발견된 수감자들의 시신에 대한 보고가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30] 참고로 아민이 직접 거세한 사람만 무려 8명에 달한다고 한다.[31] 아민은 이를 위해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특별 주문하기도 했다.[32] 참고로 당시 우간다의 1인당 GDP는 207달러(2023년 환율로는 약 918달러)도 되지 않았다.[33] 안타깝게도 이후에도 우간다에는 혼란이 계속되면서 악어들은 계속 게으름을 피울 수 있었다.[34] 다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증언도 존재한다. 마케레레 대학교의 연구원이던 프레드릭 구웨데코(Fredrick Guweddeko)는 이 일이 수술 중에 사망한 케이를 보고 당황한 무카사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전형적인 아민의 작품'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고자료[35] 절묘하게도 발트하임은 후에 '성공적인 작전 수행'으로 독일 육군에서 포상도 받은 적도 있던 나치 전범이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36] 게다가 이쪽도 동시대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처럼 사실상 보츠와나 민주당의 일당제(물론 실제로는 실질적인 야당이 3개 있었다)에 가까운 정치로 장기집권을 하는 등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37] 아프리카 외부 섬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꼽히는 나라들도 살펴보면, 1975년 독립한 카보베르데도 민주화가 된 게 1992년이고, 세이셸은 1976년에야 독립했다. 그나마 1968년 독립한 모리셔스가 독립했을 때부터 쭉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했다.[38] 물론 루마니아의 주민들은 차우셰스쿠를 워낙 증오한 나머지 차우셰스쿠를 이디 아민에 빗대어 '이디 아미네스쿠(Idi Aminescu)'라고 불렀다고 한다.[39] 그 예시로 파키스탄의 군사독재자 무함마드 지아울하크의 장인이 우간다 캄팔라에 거주하는 인도계 의사였다.[40] 이와 비슷한 일이 후대의 짐바브웨에서도 있었다. 독립 후에도 짐바브웨의 농업을 독점하던 백인 농장주들의 토지를 로버트 무가베가 폭력적으로 몰수해 흑인들에게 분배했는데 선진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던 백인들과 정반대로 토지를 분배받은 흑인들은 기술이 없어 기껏 분배받은 땅도 제대로 써먹지 못해 짐바브웨의 경제파탄의 단초가 되었다.[41] 다만 아민 직권 직후인 1971년 기준으로도 아이티는 세계은행 통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134$(2023년 가치로 1,004$)도 되지 않아 UN이 선정한 세계 최악의 최빈국 25개국 중 한 나라로 선정될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사실 1인당 GDP가 낮긴 해도 국가를 안정적으로 경영하며 경제적 성공 사례로 꼽힌 경우는 헤이스팅스 반다와 폴 카가메처럼 그렇게까지 드물지는 않다.[42] 그나마 1972년 2월 13일에 아민이 리비아와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들어온 리비아의 지원금으로 우간다는 간신히 파산을 면했다고 한다.[43] 이게 어느 정도냐면 2022년 기준으로 GDP당 군사비 비율이 1위인 북한의 GDP당 군사비 비율은 당시 우간다의 그것의 4할 정도인 겨우(?) 26.4% 정도다.[44] 그 중 하나는 1972년 9월에 오보테가 탄자니아의 지원을 받는 우간다 반군을 이끌고 우간다를 침공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밀턴 오보테' 문서 참조.[45] 사족이지만 아프리카에서 이전 독재자보다 이후 독재자 시기가 더욱 어려워지면 이전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일은 흔한 일인데 우간다 국민들은 아프리카의 독재자들 중 압도적인 최악으로 꼽히는 아민의 학정을 겪으면서도 오보테를 그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민을 싫어하는 사람들마저 오보테의 복권을 원치 않을 정도로 오보테에 대한 인식이 극악으로 나빴다.[46] 실제로 아민 시기 진짜 의외로 1인당 GDP 성장률은 세계 평균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47]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폭군이 되는 법에서는 이 설을 택했다.[48] 셔먼 전차는 이스라엘로부터, T-34는 리비아로부터 원조 받았다. M4A1/운용국, T-34-85/운용국 참조[49] 리비아 공군의 Tu-22 블라인더 폭격기가 우간다군을 지원하기 위해 탄자니아를 폭격했지만 중요 시설 파괴에는 실패할 정도로 명중률이 뒤떨어졌으며 심지어 인접국인 부룬디에 폭탄을 투하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50] 이 사건은 2차대전 이후 한 아프리카 국가가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수도를 점령하고 그 국가의 국가 원수를 몰아낸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한다.[51] 여담으로 장 베델 보카사와 모부투 세세 세코, 시아드 바레,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도 정권을 잃고 축출된 후 국민들이 아민의 축출 시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52] 다만 아민의 자식 수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방 수가 많지는 않다.[53] 야파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위치한 도시로, 이곳에서 나는 오렌지가 명물로 유명하다.[54] 사실 아민의 비만 체형+식습관을 고려하면 여든 가까이 되도록 저 정도의 건강을 유지한 것 자체가 기적 수준이다.[55] 아이러니하게도 14살 때 아민의 인도인 추방 정책으로 영국, 후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간 인도계 여성이었다. 죽기 전에 과거에 자신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운명의 아이러니가 연출된 셈. 그나마 아민이 막와나의 과거를 알았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56]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은 작열통보다도 심하다고 한다. 여든 가까운 노인이 이런 고통을 느끼면서 죽어갔으니 그의 피해자조차 동정할 만했다. 물론 아민의 악행을 감안하면 그렇게 죽어도 싸긴 하다.[57] 우간다에 있던 아민의 친척들은 아민이 가족 묘지에 묻히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출처[58] 이와 비슷하게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후에 한 여성은 "도대체 왜 차우셰스쿠를 그렇게나 쉽게 죽인 거냐?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들을 천천히... 그리고 영원히 겪게 했어야지!"라는 말을 남겼다.[59] 원체 사우디 장법이 관도 묘표도 없이 그냥 보자기나 천으로 싼 시신을 구덩이에 넣고 흙을 부어 묻은 다음 머리와 다리 부분에만 벽돌이나 작은 돌을 묘표 대신으로 놓는 방법이다. 심지어 국왕도 이렇게 처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