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f0000><colcolor=#fff>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Дража Михаиловић | |
본명 | 드라골류브 미하일로비치 Драгољуб Михаиловић |
출생 | 1893년 4월 26일 |
세르비아 왕국 이바니차 | |
사망 | 1946년 7월 17일 (향년 53세) |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 |
군사 경력 | |
복무 | 세르비아 왕국군 |
1910년 ~ 1918년 | |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 |
1918년 ~ 1941년 | |
체트니크 | |
1941년 ~ 1946년 | |
참전 | 제1차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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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동했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군인. 세르비아계로 조직된 왕당파 군대인 체트니크의 수장이었다.2. 생애
1893년 세르비아 왕국의 이바니차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베오그라드의 숙부들에게 길러졌고 숙부의 영향을 받아 1910년 세르비아 군사학교에 입학했다.1912년부터 1913년까지 벌어진 제1차 발칸 전쟁에 사관생도 자격으로 종군하여 제1차 발칸 전쟁이 끝난 뒤 훈장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도 참전하였다.
1921년 베오그라드 고등군사학교에 입학하고 1923년 졸업했으며 1930년 프랑스 생시르 특별군사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체코슬로바키아나 불가리아 왕국에서 여러 경험을 쌓았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공중분해되자 그는 체트니크를 결성하여 독일 국방군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이고 우스타샤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한편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자 드라자는 티토와 제휴하려고 시도했으나 양측의 협상은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 흐지부지되었다. 양측의 협상이 결렬되자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몰아내는 데 더 힘을 쏟았는데 전쟁이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이는 치명적인 선택으로 남았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체트니크의 입지는 위축되었고 그는 공산정권의 수색을 피해 도피행을 벌였으나 1946년 3월 13일 체포되었다. 그에 대한 재판은 1946년 6월 10일에 열렸으며 7월 17일 총살되었다. 공산정권은 그에게 전쟁범죄 혐의를 씌워 처형했지만 정작 그가 전쟁범죄를 주도하거나 명령했는지가 의문이었던 데다 그게 맞다고 할지라도 사형을 선고받을 일인지에 대해 1940년대부터 논란이 있었다.
그의 사후 미국과 소련 사이의 치열한 냉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냉전이 종식된 뒤인 2005년 세르비아 고등법원에 의해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