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0:22:04

이로쿼이 극장 화재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로쿼이 극장 화재 사고
Iroquois Theatre fire
파일:이로쿼이 극장 화재 사건.jpg
<colbgcolor=#bc002d> 발생일 1903년 12월 30일
발생 위치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유형 화재
원인 모슬린 커튼 점화
인명피해 <colbgcolor=#bc002d> 사망 602명
부상 250명

1. 개요2. 이로쿼이 극장3. 화재4. 화재 이후

[clearfix]

1. 개요

1903년시카고의 이로쿼이 극장에서 일어난 화재이자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화재.

2. 이로쿼이 극장

파일:20230325_112852.jpg

화재로부터 약 50일 전에 개관한 이로쿼이 극장은 객석이 1,744개나 있는 대형 극장이었다. 계단은 전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높은 천장과 곳곳의 유화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런 크고 아름다운 구조 덕에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런 곳인 만큼 화재 안전도 중요해서 비상구 27곳과 석면으로 된 방화막 등의 방화시설도 갖추었고 오픈할 때도 이러한 방화시설이 있다며 신문으로 대놓고 "Absolutely Fireproof"라며 크게 홍보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상구의 대부분은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들어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이유로 잠가 뒀다. 거기다 출입문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였고 작은 손잡이를 작동해야 여는 도개식이었는데 당시 이런 구조는 유럽에서 막 미국으로 퍼지기 시작한 구조라서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상당수의 층으로 나뉜 극장이 그러하듯이 높이 올라갈수록 가격이 낮아지고 보기 불편했고 혹여나 윗층을 고른 관객이 몰래 다른 층으로 내려갈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극 상영 때는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철제문으로 막았다.

거기다 안에는 스프링클러와 화재경보기, 긴급전화도 없었는데 건설 중 근로자들이 파업을 벌여서 정해진 기간 내에 다 짓기 힘들어지자 이러한 화재 방지 시스템을 빼고 지었다. 당연히 불법이었으나 감시하러 온 사람들에게 눈 감고 넘어간다면 나중에 공짜로 연극을 보게 해 주겠다고 해서 넘어갔다. 그런데 이러한 안전 장치들을 다 빼고도 제한 기간 내에 완공을 못 해서 다 짓지도 않은 채로 오픈을 했고 오픈한 뒤에야 완공했는데 그 상태에도 비상구에 계단이 없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큰 화를 불렀다.

3. 화재

1903년 12월 30일 당시 극장에선 연휴를 맞이해 학생과 부모들이 뮤지컬 푸른 수염을 관람 중이었다. 인원은 객석 1,744개를 넘어선 1,900여 명 정도였고 방학을 맞이해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학부모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공연 중에 극장 지붕의 전기 배선에서 발생한 불이 무대 옆 커튼에 옮겨 붙었다. 당시 밤 장면 연출을 위해 불을 다 끈 상태에서 불길이 일어나 관객들은 공연 연출로 착각하기도 했다. 불을 본 스태프가 방화 커튼을 바로 내렸으나 절반 정도만 내려오다가 조명 반사막에 걸려 멈추는 바람에 불이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이 상황에서 배우 에디 포이(Eddie Foy)는 직원에게 객석에 있는 자기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라고 하고 관객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하고 오케스트라에게 관객을 진정시킬 음악을 연주하라고 했다. 이 와중에 다른 배우들은 킬파이어(Kilfyre)라는 소화도구[1]로 불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안 되자 막대로 쳐서 불을 끄려고 시도했으나 오히려 불똥만 뒤집어썼다.

배우들은 불 붙은 무대 의상을 입은 채 뒷문으로 도망쳤고 공기가 유입되면서 커진 불길이 유화가 그려진 캠버스들을 잡아먹으며 더 커졌다. 객석까지 번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모두 출구를 향해 도망쳤지만 비상구의 대부분이 잠겨 있었고 그나마 멀쩡한 비상구도 사람이 너무 몰리는 바람에 넘어져 밟혀 압사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간신히 열린 2층 비상구로 탈출했으나 비상구 밖에 계단이 없어서 추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앞서 말한 도개식 구조의 문 때문에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나마 부잣집 어린이 한 명이 집에서 쓰던 문 구조와 비슷해 열고 탈출할 수 있었다. 한 노면전차 운전자는 마침 운좋게 공구를 갖고 있어서 문의 경첩을 해체해 사람들의 대피를 도왔고 옆 건물에서도 긴 사다리로 임시 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파일:1674376072673.jpg

극장에 전화기가 없어 화재 신고가 늦어 소방대도 화재가 일어난 지 15분만에야 도착했고 불을 끄려고 소방대가 문을 열려고 시도했으나 문이 시체들로 막혀서 열 수가 없었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불은 이미 산소 부족으로 줄어든 뒤였다. 불이 진압되기까지는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30분 사이에 화재로 575명이 사망하고 병원에 옮겨진 중상자 중 27명이 사망하면서 602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 원인은 연기에 의한 질식이 많았고 사람들에 깔려 압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화재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건축물 화재 사고로 기록됐다.

4. 화재 이후

당시 시카고 시장 해리슨은 170여개의 극장과 홀, 교회당을 폐쇄 후 한 달 동안 소방시설 점검에 들어갔으며 그와 동시에 소방법도 개정했다. 비상구는 안에서 바깥으로 밀어서 여는 구조로 바꾸었고 극장 안의 불을 꺼도 비상구 표시등은 반드시 켜지도록 했고 방화커튼은 철제로 교체했으며 비상구에 반드시 가로로 된 긴 손잡이(=패닉바)를 만들어 쉽게 열 수 있도록 지정됐다. 여러모로 화재 안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시 해리슨은 시카고의 트램 노선을 공영화하려던 탓에 노선을 독점한 철도 사업가 찰스 예크스와 크게 다투고 있었고, 예크스는 '이게 다 시장 때문이다'라고 해리슨을 공격했다.[2] 결국 정치적 공격을 이겨내지 못한 채 1905년 시장 선거 재선에 나가지도 못한다. 반면, 극장주와 공사 담당자들을 비롯한 진짜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이로쿼이 극장은 화재 이후 리모델링 해서 콜로니얼 극장으로 재 오픈했으나 1920년에 철거됐으며 다시 지어져서 제임스 M 네덜란더(James M Nederlander) 극장으로 재오픈해 현재까지 운영중이다.

비상구에 계단이 없어서 사람들이 추락한 자리에는 귀신이 보인다는 소문이 있다.
[1] 소화 가루를 뿌려 불을 끄는 일종의 소화기다.[2] 당연하지만 해리슨 입장에선 굉장히 억울했던 일이다. 상기했듯 모든 책임은 결국 극장주와 공사 담당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