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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4 06:39:33

이스트랜드호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SS 이스트랜드3. 사고 당시4. 사고 이후

1. 개요

파일:Eastland disaster.png
SS Eastland Disaster

1915년 7월 24일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일어난 참사. 오대호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다.

2. SS 이스트랜드

파일:SS Eastland 1911.jpg
SS 이스트랜드호는 증기선으로, 1902년 미시간주에서 만들어졌다. 이름은 1903년 첫 항해 이후 지어졌다. 항해 이후 회사가 여러 번 바뀌면서 개량이 있었고, 승객들이 편하게 탈 수 있도록 바뀌고, 속도를 더 빠르게 했다. 이스트랜드 호는 그렇게 오대호에서 여객선 겸 화물선으로 이름을 날렸다.

1904년 7월 17일과 1906년 8월 5일, 1912년 7월 1일에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이 때문에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자 배를 고쳐야 했다. 선실을 없애고 굴뚝을 낮추면서 배의 균형을 맞춰 이러한 사고를 방지하려 했다. 이러면서 배의 최대 승선 인원이 3,000명에서 2,570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1914년에 배 윗쪽에 콘크리트 바닥을 만들면서 무게가 더해졌다.

여기에 더해,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이후 구명정이 모자라 승객들이 많이 살아남지 못했다는 얘기가 오고갔고, 가능한한 한 많은 구명정을 설치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특히 이스트랜드가 있던 나라인 미국에서는 최대 탑승 가능 승객의 75%가 구명정을 타고 탈출할 수 있도록 법안이 통과됐다. 배에는 구명보트 11개와 개당 거의 500kg에 육박하는 구명정 37개가 설치됐고, 구명조끼도 승객 2,570명이 모두 입을 수 있는 양이 구비됐다. 구명조끼 개당 약 2.7kg이었으니 배에 53,199kg이 더해졌다. 이들은 전부 탈출할 때 편히 사용할 수 있도록 배의 상단부분에 있었는데, 이게 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였다.

1915년엔 Saint Joseph 회사와 시카고 증기선 회사 소유가 됐다.

3. 사고 당시

1915년 7월 24일, 이스트랜드 호의 선원들이 2,573명의 승객과 함께 항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배는 웨스턴 전기회사가 대절해 회사 직원들과 함께 5주년 야유회를 갈 예정이었다. 배는 시카고 강을 따라 약 61km를 항해해 미시건 시티에 갈 예정이었고, 직원들은 가족들까지 데리고 와 배에 탑승했다. 표는 무려 7,000개도 넘게 팔렸으나, 이스트랜드 호는 다 감당하기 무리였다. 오전 6시 30분부터 승객들이 탑승하기 시작했고, 30분 정도 지나 모두가 탑승했다. 배는 순식간에 승객들로 가득 찼고, 이때 배가 한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배가 기운것을 눈치 챈 엔지니어 조셉 에릭슨(Joseph Erikson)이 배의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빼면서 균형을 다시 잡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배의 위쪽에 설치한 콘트리트 바닥이 균형을 무너뜨렸고, 구명정마저 배를 기울였다. 오전 7시 24분, 배가 항구에서 더 기울기 시작하면서 아예 엔진실 내로 물이 들어오기에 이르렀고, 엔진실의 직원들은 급히 탈출했다.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몇몇 승객이 갑판에서 항구 쪽으로 뛰어내려 탈출하기도 했다. 28분엔 배가 약 45도 기울었다. 배 위 산책 갑판의 피아노가 굴러 떨어지고, 냉장고가 쓰러지면서 승객들을 덮쳤다. 물이 계속해서 들어오며 상황을 더 악화시켰고, 결국 배는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만다. 다행히 물 깊이가 20m 정도로 얕은 편이라 완전히 침몰하진 않았다. 맨 위 갑판의 사람들은 배가 기울면서 물에 빠져버렸고, 겨우 헤엄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선실 내 가구 및 물건들에 깔려버렸다.

배가 좌초하는 것을 본 항구에선 모든 배를 동원해 승객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구경꾼들도 나무 같이 물에 뜨는 것을 던져 승객들이 헤엄쳐 나오기 편하도록 도왔다. 이스트랜드 호 안의 승객들 중 몇몇도 간신히 비상구를 열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뭍으로 간신히 탈출한 승객들은 인근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하지만 승객들에 깔려 탈출하지 못하거나, 강물에 빠져 살아남지 못한 인원 총 848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됐다. 승객 844명, 선원 4명이었다. 가족 전원이 숨진 사례도 22건이나 됐다. 의외로 부상자는 적었는데, 배가 너무 빠르게 좌초해서,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로만 나뉘었기 때문이다.

이스트랜드호 참사 생존자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생존자는 사고 당시 3살이었던 마리온 아이크홀즈로, 2014년 11월 10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4. 사고 이후

사고 관련해 7건의 소송이 있었다. 하지만 소송이 장기화되면서 소송이 휘말린 이스트랜드 호 선원이자 메인 엔지니어 조셉 에릭슨이 자연사 했고, 그에게로 모든 죄가 향했다. 당시엔 그가 거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분위기였으나 당시 일어난 전쟁에 묻혀 흐지부지 됐다. 현재로썬 위에서 말한 배의 균형 문제 때문에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웨스턴 전기 회사 측에선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전달했으나, 턱없이 부족하단 얘기가 나왔다.

파일:USS Wilmette.jpg
배 자체는 의외로 멀쩡하게 남아, 건져낸 후 미 해군에게 팔려가 USS 윌라멧으로 이름이 바뀌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하다 1947년, 참사 32년만에 스크랩 됐다.

시카고 강 근처에 이스트랜드 호 참사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2015년 2월, 시카고 지역의 한 대학원생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시카고 역사에 대한 연구를 위해 네덜란드의 아이 필름 인스티튜드(EYE Film Institude) 온라인 자료실에서 자료를 찾던 도중 사고 당시를 촬영한 55초 영상을 찾아 대중에 공개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검색시 찾을 수 있으나, 사고 희생자의 시신이 그대로 나오니 주의하자.

2015년 7월 24일엔 참사 100주기를 맞아 시카고시와 이스트랜드호 참사 역사학회에선 희생자를 추모하는 자리가 있었다. 24일부터 25일에 추모식이 열렸고, 콘서트와 촛불 집회, 희생자 가족 모임이 있었다. 100주년 기념 추모 티셔츠와 희생자 사진이 새겨진 수제맥주도 팔렸다.

이스트랜드호의 타륜은 시카고 역사박물관에 전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