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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1 05:52:49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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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운항할 때의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 호의 위풍당당한 모습. 고속 훼리라는 컨셉으로 제작되었던지라 속력도 빨랐다.사진1, 사진2

1. 개요2.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 호3. 어처구니 없는 사고4. 사고 이후5. 참고할 해상 사건사고

1. 개요

부주의와 안전불감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제대로 알려준 해양 사고이자 페리선의 허점을 안전하게 예방하지 못할 때 얼마나 큰 사태를 초래하는지 보여준 사고. 승무원들의 부주의로 선수(뱃머리)램프도어를 연 채로 항해했다가 좌초한 인재(人災)이다.

원체 사고가 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사고가 난 일인 데다 승객 구조 중 밀물로 인해 459명 중 193명이 저체온증익사로 명을 달리한 사고다. MS 에스토니아호 참사와 더불어 현재도 많이 거론되는 페리선 사고 중 하나이며 이로 인해 페리선에 대한 안전 규정이 더욱 강화되었다.

2.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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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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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모습. 뱃머리가 구분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위 그림 기준으로 오른쪽이 뱃머리이다.[1]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Herald of free Enterprise) 호는 1970년대 영국의 타운센드 소레슨해운(Townsend Thoreson)사에서 북해항로를 위해 건조한 M/S프라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Pride of free Enterprise) [2], M/S 스피릿 오브 엔터프라이즈 호(Spirit of free Enterprise) [3]와 함께 만들어진 1만 3,000톤급 도버해협 횡단 페리선으로 스피릿급이었다. 도버~칼레 항로[4]를 운항했으며 독일의 살리우 제베크 조선소(Schichau Seebeck-Werft)에서 제작되었는데 빠른 항로에서 신속 운항을 하기 위해 승객을 빠르게 싣고 내릴 수 있도록 가속력을 향상했다.

폭은 23m, 길이는 132m, 총톤수는 13,601톤이었고 상단 갑판과 주차량갑판(E갑판, G갑판)동시에 차를 싣고 내릴수 있도록 설계했으며 1980년에 취항했다. 최대 속도는 22노트였고[5] A갑판에는 선원 숙박시설과 라디오시설, B갑판에는 선원 숙박시설과 갤러리, C갑판에는 승객구역과 갤러리, D, E갑판은 차량칸이었고 F갑판은 중2층, G갑판은 주차량칸, H갑판에는 엔진실과 면세점, 승객 숙박시설이 있었다.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는 1987년에 사고가 났지만 나머지 두 선박인 스피릿 오브 엔터프라이즈호와 프라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 호는 쭉 운항하다가 2012년, 2015년에 폐기했다. 1980~1987년에는 P&O 해운에서, 이후 컴버니아 나비에라S.A 해운으로 소속을 바꾸면서도 계속 안전 운항을 하다가 인도에서 스크랩했다. 그리고 후술할 사고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는 아무런 사고 없이 안전히 운행했으며 신속한 운항으로 이용객들에게 좋은 평을 받기도 했다.

3. 어처구니 없는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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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촬영된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 호의 선미부분(뒷부분). [6]

1987년 3월 6일 벨기에 지브뤼게에서 출항하다가 일이 터졌다. 오후 5시 57분에서야 459명의 탑승객과 3대의 버스, 81대의 차량, 47대의 트럭을 싣고 출항했다. 문제는 차를 다 실은 뒤에는 램프도어를 닫아야 했는데 당시 보조수부장이었던 마크 스탠리가 차량들을 들여보낸 뒤 4시간 전에 마신 술 때문에 졸려서 자러 가느라 문을 닫지 않았다는 것. 1등 항해사였던 레슬리 세이블은 갑판에서 문이 닫힌 걸 확인해야 했으나 담당도 아니었고 '스탠리가 했겠지 뭐...' 란 생각에 확인을 안 했다.
파일:external/cdn.natgeotv.com.au/Zeebrugge%20Ferry%20Disaster%20%7B2744%7D.jpg 파일:external/cdn.natgeotv.com.au/zeebrugge-ferry-disaster.jpg
도어가 열린 채로 운항하다가 물이 들어오고 있다.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배가 옆으로 기우뚱하기 시작한다.
사진 : 내셔널지오그래픽 CG
침몰 재현 애니메이션
영상 : Disaster at Sea
당시 생각보다 일정이 늦은 상태여서 선장은 차량갑판에 차를 대기에 너무 경사가 지는 바람에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넣어서 배를 1m 가량 낮춘 상태였으나, 밸러스트 탱크의 물을 빼지도 않고 출항[7]했고 바로 속도를 냈다. 문제는 아까 말했듯이 램프도어가 활짝 열려 있는 상태로 버젓이 배를 출항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1983년에 자매선이었던 프라이드 오브 엔터프라이즈호도 램프도어를 연 채로 출항한 적이 있었으나 침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넣어서 배가 그 당시보다 더 잠긴 상태였고 배가 이동 중에 배 바닥 부분의 유속이 빨라지고 압력이 낮아지면서 평상시보다 배가 더 깊게 잠기는 천수효과가 발생했다. 이는 얕은 곳일수록 잘 발생하는데 하필이면 그 날 출항한 지브뤼게 항구가 밀물과 썰물이 잦은 얕은 바다였다. 거기다가 느리게 갔다면 물이 파도치더라도 낮게 치면서 문까지 안 들어왔겠지만 선장이 하필 운항 스케줄이 늦는다고 서두르면서 속도를 무리하게 내는 바람에 엄청난 양의 물이 유입되고 배가 균형을 잃었다. 결국 배는 6시 24분 출항한 뒤 18노트의 속력을 내는 순간 열린 램프도어로 물이 엄청나게 들이닥치면서 30도 가량 기울었다. 이 상태에서 90도 가량 기울면서 아예 배가 옆으로 누워 버렸고 물이 전력시스템을 건드리면서 정전이 발생했다.
파일:attachment/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참사/ship.jpg
파일:external/www.surprise.or.kr/1402667992.jpg
옆으로 뒤집어진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결국 배는 해안에서 1km 떨어진 해상에 좌초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좌초된 곳이 수심이 깊지 않은 곳인 데다 모래바닥(뻘밭)이어서 우현이 물밖에 나왔고 준웨이 준설선이 헤럴드호의 불빛이 사라진 걸 보고는 항만당국에 곧바로 신고[8] 6시 26분 해역에 있던 벨기에 해군함이 헬기를 보내서 배 상황을 확인한 뒤 구조대를 보냈다. 그러나 하필이면 구조대가 부랴부랴 도착한 때가 밀물이 들어오는 만조시간대였고 266명을 구조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구조 차례를 기다리던 193명은 3도에 가까운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동사하거나 익사했다.

4. 사고 이후

모든 페리선에는 선박 앞쪽 문이 닫힌 것을 알리는 신호등을 설치하는 게 의무사항이 됐다. 1990년부터는 항해 전 페리선의 문을 반드시 닫는 규정이 만들어지고 국제안전관리규약(International Safety Management Code)이 생겼다. 또 이 사고로 인해 국제해상인명안전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 SOLAS)이 개정되었다.

1988년 소년중앙에서 이 사건을 자세하게 몇 면에 걸쳐 만화와 같이 글로 소개한 바 있는데 당시 생존자들의 엄청난 생존 노력이 묘사되었다. 어느 사내가 물에 허우적거리는 갓난아기를 이로 아기 기저귀를 물어서 들어올리고 헤엄쳐서 둘 다 살아남은 생존자[9]를 비롯하여 살기 위하여 엄청나게 혈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사고 이후 선박을 다시 세우는 데 1달이 걸렸고 인양하기까지 20일이 소요되었다. 이후 배는 인도로 보내진 뒤 스크랩 처리됐다. 회사 이름도 P&O 해운의 계열사인 P&O European Ferries로 바뀌었다.

사고와 관련해서 7명이 중과실치사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스탠리를 비롯한 5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본 사건을 다루었다.

5. 참고할 해상 사건사고



[1] 잘 보면 뱃머리에도 스크류가 달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박 시 전진/후진을 빠르게 하여 신속히 정박하고 출발하기 위해서이며 주엔진 중 하나가 고장났을 때 보조엔진으로써의 역할이라고 한다.[2] 'MS 안티마리나' 라는 이름으로 유럽에서 운항하다가 2015년에 폐기되었다.[3] 'MS 올리앤더'라는 이름으로 유럽에서 운항하다가 2012년 폐기되었다.[4] 도버해협에서 가장 짧고 빠른 항로로 거리는 약 33.3km다.[5] 당시 연안 여객선이나 페리선치고는 꽤 빠른 속도였다고 한다. 현재 기준으로도 카 페리가 22노트면 상당히 빠른 편이다. 보통 작은 섬마을을 오가는 소형 카페리가 15노트 내외, 승객 수백 명과 차량 수백 대를 수송할 수 있는 중대형 카페리 여객선이 속도를 좀 낸다면 20노트 내외이다.[6] 평상시 항만에 정박하는 모습이다. 잘 보면 항만에 정박하기 위해 뒷부분 램프도어가 열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7] 빼는 데 약 1시간 가량 소요된다.[8] 신고한 독일인 선장 볼프강 슈뢰더(Wolfgang Schröder)는 이후 벨기에 국왕에게서 감사메달을 받았다.[9] 통설과 달리 아이 엄마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9개월이었던 최연소 생존자 칼리주틱은 2021년 5월 19일 영국 덤프리스 자택에서 34세를 일기로 약물 남용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서울신문이 2021년 6월 29일 보도했다.